희망을 심는 사람들 사52:7-10 (2000/3/19) 절제 운동 며칠 전 여자 절제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부탁을 하면서 회장님이 "우리는 아주 약한 단체예요.", 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절제회라면 3.1운동 이후 일본의 노골화된 문화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서 이화학교 교사인 孫貞圭(孫袂禮)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단체입니다. 3.1만세 운동에 놀란 일제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일본식의 퇴폐문화를 이 땅에 이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의 열망이 무참이 짓밟힌 울분에 겨운 사람들이 술, 담배, 아편에 빠지도록 했고, 매매춘을 은근히 부추기는 공창(公娼)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여성 선각자들은 기독교 절제 운동을 시작했던 겁니다. 이 절제 운동은 신앙 운동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술은 탄환업는 대포와 같은데 도리어 용기를 준다구 믿게 하였다. 여러해 동안 연구한 결과 지금은 그 비밀을 알엇다. 그러니 우리는 금주하고 금주운동을 철저히 하야 조선을 살리자. 조선의 금주운동은 모든 운동 중에 가장 큰 운동이다. 육을 살리고 영을 살리는 운동이며 죽어가는 조선을 살리는 운동이다. 이 절제운동은 이후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공창폐지위원회가 설립되고, 조선기독교절제회가 설립되고 청소년 보호법 제정을 위한 모임이 발족되기도 했습니다. 절제회 운동은 1920년대 기독교 민족운동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 대한 절제회는 너무나 축소된 채 몇몇 할머니 신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회장님은 젊은 여성들이 동참하지 않는 것을 아쉬워 하면서 "오늘 같은 풍요의 시대에 '절제'라는 목표는 매력이 없나봐요", 하면서 한숨을 내쉬시더군요. 저는 절제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이고, 새로운 문명운동이고, 크게는 생명운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연운동 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하시라고 격려해드렸습니다. 앞에 앉으신 머리가 허연 할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설교를 경청해주셨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동자동 좁은 골목을 돌아내려오는데 가슴이 뻐근해지더군요. 욕망을 확대재상산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대한 탄식으로 제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연세가 드셨음에도 절제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문득 '꽃씨 할머니'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꽃씨 할머니 한 소년이 해질녘 일을 끝내고 엄마와 함께 밭이랑을 걸어나오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이 꽃들은 다 누가 피게 해요?" 무더기로 피어있는 꽃을 보며 소년이 물었다. 하루 종일 고된 일로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아빠는 그저 무심히 건성 대답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걸 누가 피게 하긴. 그냥 지네들이 피고 싶어 피는 게지." "그럼 어떤 꽃들은 지네들끼리만 친해서 저렇게 한곳에 모여 피고, 어떤 꽃들은 친한 동무가 없어 저렇게 외톨이로 혼자씩 따로 떨어져 피어요?" 거듭된 질문에도 아빠는 계속 시큰둥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그게 정 궁금하면 그 꽃들한테 물어보려무나." 묵묵히 걸어가던 엄마가 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대신했다. "옛날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한 할머니가 있었단다. 그 할머니는 아이를 못 낳은 데가 남편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아무 의지나 가진 것이 없이 혼자서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구나. 그래 할머니는 늘상 하느님께 푸념 어린 소망을 빌곤 했지 뭐냐.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아이도 못 낳고 혼자서 고단하게 살아야 합니까. 내게도 세상을 좀 보람있게 살아갈 길을 일어주십시오. 그러자 어느 날 하느님이 할머니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마침내 그 소망을 들어주셨구나. ―그래라. 너는 그럼 아이를 낳지 못한 대신 온 세상을 온통 아름답고 즐거운 꽃 낙원으로 꾸미도록 하여라. 그래 그 할머니는 그로부터 하느님이 내려주신 꽃씨주머니를 지니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헐벗은 산이나 들녘,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찾아 골고루 꽃씨들을 뿌려주고 다니셨단다. 지금 저 산이나 들녘도 아마 그 할머니가 꽃씨를 뿌려 저렇게 아름답게 꾸며놓은 것인지 모른단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따금 다리가 아파 한곳에 주저앉아 쉬면서도 잊지 않고 계속 꽃씨를 뿌리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곳엔 저렇게 무더기 꽃이 피고, 자리를 일어나 다른 곳을 찾아가시며 흘린 꽃씨들은 저 혼자 외톨이 꽃이 피게 되고." (이청준, 『인문주의자 무조작 씨의 종생기』중에서) 절제회 할머니들은 이곳저곳에 희망의 꽃씨를 심고 계신 꽃씨 할머니들이 아닌가 생각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을 전파하고, 그 희망으로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사람 말입니다. 호켄다이크라는 선교신학자는 "선교란 희망의 감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참 적절한 비유라 생각합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라 주님 오시기 전 6세기 경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의 오랜 포로생활에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해방에 대한 기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소망이 그들 삶에 활기를 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소망은 소망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자조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일이 없는 삶처럼 비극적인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범죄는 희망을 빼앗아가는 일이라고 합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왜 사는지 존재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왜 사는지를 알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만,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나면, 인생은 황무지로 변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 그들에게 구체적인 희망의 청사진을 가지고 와서 시들어버린 희망의 나무에 물을 붓는 이가 나타났습니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서 소년이 시들어버린 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장면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카메라는 나무 밑에 누워있는 소년의 시각에서 나무가 소생해 푸른 잎을 피워내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평화없는 세상에서 샬롬을 선포합니다. 오랜 억압의 세월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구원, 즉 해방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근원적인 사실을 선포합니다. 지금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벨론의 지배자들이지만, 그들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예언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편에 나오는 탄식시를 잘 아시지요? 그 탄식시는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진 경건한 사람이 자기의 삶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 탄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최초에 그 탄원자는 자기의 사정이 하나님께 가리워져 있다고, 그래서 자기는 죽을 지경에 처해있다고 말합니다. 사방이 막혀있어 자기가 탄원할 곳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춰달라는 것이지요. 원수들을 물리쳐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탄식 시는 탄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 자기의 사정을 아뢰다가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 냅니다. 지금까지 자기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오자, 그렇게도 괴롭던 문제가 슬그머니 별 게 아님을 알게 됩니다. 물론 문제가 解決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그 고난의 문제는 사라져버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의 문제를 가져가 진실하게 기도하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문제가 解消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아침 안개가 걷히듯 문제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고 몸부림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밤새 씨름하던 도깨비가 새벽 닭 울음소리에 달아나듯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비쳐들면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가 실은 큰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절망은 그래서 믿음의 반대말입니다. 시62편 시인의 노래는 바로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시62:1-2) 복된 삶이란? 우리는 누구나 복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복된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가면서, 각자가 자기 몫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아니겠어요? 세상 일에 짓눌려 마음이 좁아진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그들이 마음을 넓혀 이웃들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 이런 것이 복된 삶이 아닌가 싶어요. 각자의 속에 있는 장점을 발견해주고, 그것을 아름답게 구현하도록 돕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겠지요. 앤토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어요. "예수께서 겁 많고 충동적인 베드로를 처음 바라보셨을 때,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베드로에게서 발견하시고 그를 '바위'라고 부르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완전히 변해 별명 그대로의 사람이 되었다." When Jesus first set eyes on Peter, the Fearful, the Impulsive, he saw in him what no one would have thought was there and nicknamed him the Rock -so Peter changed eventually, becoming what the nickname said he was. (Anthony de Mello, 「creator」in『Wellsprings』)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좋은 점을 발견해주고, 격려해주는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입니다. 여러분, 내일이면 벌써 춘분입니다. 꽃 소식이 곧 들려올 겁니다. 꽃씨 할머니가 어디쯤 머무실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이 세상에 희망을 심는 꽃씨 할머니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힘겨우면 쉬었다 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가 뿌린 희망의 씨앗이 꽃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이룰 날을 내다보며 오늘도 희망을 심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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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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