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을 애써 찾으라 잠언 11:24-31 (2000/3/12) 사순절을 뜻있게 잘 보내고 계신지요? 부족하지만 사순절 달력에 따라 기도하고, 실천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키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의 실천사항은 "사순절 저금통"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그날그날 욕망을 절제해 마련한 돈을 모아서 부활절을 기해 의미있는 일에 쓰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상의를 해서 구체적으로 도울 단체 혹은 개인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은 "고난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 성금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이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본적인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매우 좋은 영성 수련의 방법입니다. 김성한 장로님 댁에 갔더니 1000미리 우유팩을 이용해 저금통을 만들어 벽에 걸었더군요. 저는 '거기에 다 채우면 액수가 꽤 되겠는걸', 하고 혼자 좋아했습니다. 가난하게 살 수 있는 능력 이번 주간에 저는 평생을 빈민들을 위해 살다가 작년 초에 돌아가신 제정구 선생의 전기 『가짐 없는 큰 자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라는 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제정구 선생은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기가 기울인 노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꿈입니다. 부자가 되는 꿈이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꿈이라니요? 아무 일도 안 하면 저절로 가난해지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그가 말한 가난은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실히 살았습니다. 가난하지 않기로 작정하면 그는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삶을 물질이 아닌 다른 기초 위에 세우고 싶었던 겁니다. 그는 가난해지기 위해 자기 욕망과 부단히 싸웠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복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자기는 수제비나 라면으로 한두 끼씩만 먹고 버틸 수 있었지만, 배가 불러오는 아내가 굶주림의 위협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던 겁니다. 머지않아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자 그는 가난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번번이 될 듯하다가 안 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매형이 이런 연락을 해왔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취직이 어려울 거란다. 그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주면 즉각 취직도 시켜주고 살림집도 마련해주겠다는데…" 매형은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 쪽에서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판자촌에서 살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정일우 신부님(빈민 운동을 하던 아일랜드 신부)과 함께 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자기 갈 길이 훨씬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합니다. '나의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중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판자촌에 살라는 것이고, 또한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살라는 것이구나!' 그는 중정 요원을 통해 전달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거리를 찾아헤매던 노력을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뒤졌습니다. 전 재산 3000원. 그는 그것으로 성경 한 권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축 취직 기념(하느님께). 1976년 9월 1일'이라고 적었습니다. 사악한 세력이 제공하는 직장과 살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취직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난 후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지도 않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단 한 번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합 임금에게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피신해 있을 때 하나님은 까마귀를 시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왕상17:1-6). 하나님께 취직한 사람을 하나님이 먹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눔: 거룩한 삶의 전제 성경은 온통 나눔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율법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약자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곡식을 거둘 때도 밭 한 모퉁이는 남겨두었고, 땅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들을 위한 몫이었습니다(레19:9-10).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레25:35-38). 50년에 한번씩 시행했던 희년법은 한 사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로 양극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특별법이었습니다. 희년이 되면 땅은 원주인에게 되돌려졌습니다. 남의 종이 되었던 사람도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또 가난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선인과 악인을 가르는 주님의 판단 기준은 안타깝게도 믿음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나 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0, 45) 누가 부자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24)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25)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아파트 한 채가 있고, 승용차도 있고, 저금통장에 돈이 한 일억쯤 있으면 부자인가요? 셋집에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손모아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한 건가요? 그러나 부와 가난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남과 나눌 것이 있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러나 남과 나눌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비록 돈이 없더라도 다른 이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부자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다른 사람을 위한 여백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물을 퍼내야 샘에서 신선한 물이 자꾸 흘러나오듯이, 남과 좋은 것을 나누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집니다. 나눌 것이 많다면 그는 이미 부자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연간 28파운드를 가지고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물가상승이 거의 없던 시기여서 그는 평생을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인세 수입 등으로 1년에 1,400파운드를 벌었지만 그는 여전히 28파운드로만 생활하고 나머지는 남을 위해 썼습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부양해야 할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입이 늘어도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유지했다는 것은 그의 영성의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부이지만,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권능입니다."(죠지 맥도날드) 선을 간절히 구하라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27)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팥 심은 데서 콩이 나는 법 없고, 콩 심은 데서 팥 나는 법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 선을 구합니다. 가급적이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착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잠언 본문은 은총을 받는 자는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懇切"이라는 말은 '지성스럽고 절실함'을 가리킵니다. '가급적이면 선을 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선을 구하는 자를 하나님이 귀히 보십니다. 표준 새번역은 '선을 간절히 구한다'는 말을 '좋은 일을 애써 찾는다'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애쓴다'는 말에서 '애'는 '창자'의 옛말입니다. 우리가 몹시 근심스럽거나 안타까울 때 '애간장을 태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속에서 창자와 간장이 다 탈 정도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애쓴다'는 말은 '창자'로 구한다는 말입니다. 머리로, 혹은 가슴으로 선을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창자로 구하는 겁니다. 창자는 인간 삶의 가장 근원적인 자리입니다. 우리가 선을 구하기 위해 창자가 끊길 듯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의 은총은 필연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저는 죄를 '부메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메랑'은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옵니다. 우리가 뿌린 죄의 씨앗도 언젠가는 돌아와 우리의 뒤통수를 칩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30-31) 오늘 우리 삶에는 어떤 열매가 맺혀 있습니까? 시장하신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었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비극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도 겉으로만 그럴싸하지만 속은 텅 빈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요? 사순절 기간인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다른 이와 더불어 나눌 줄 아는 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애써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애태우시던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에서 여러분 모두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워 참 자유에 이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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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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