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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고전 10:23-33

by 【고동엽】 2022. 7. 3.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고전 10:23-33
(2000/2/20)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색은 무엇일까요? 깊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요10:18)고 하신 예수를 가슴속에 모신 사람은 자유인이 됩니다.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때까지 그의 삶을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율법과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유 혼
'自由'는 스스로 '自'와 말미암을 '由'가 결합된 말입니다. 자유란 그러므로 누구의 강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물론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는 남의 눈치 안보고 욕망을 맘껏 추구할 자유가 아니라, 우리 삶을 세상에 붙들어매는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집착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때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돈, 명예, 권세, 異性, 자식….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 번뇌의 탯자리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기 위해 그것을 다 버리고 출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물 옷을 입고, 머리를 깎거나, 깊은 수도원에 들어가 세속과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이 우리 곁에 오면 고맙게 여기고 잘 사용하되 그것이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나간다 하여 애태우지 마세요. 자식을 위해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하지만 그 자식이 내 뜻대로 커주지 않는다 하여 속상하지 마세요. 어떤 자리가 주어지면 겸허하게 그것을 수용하되 때가 되면 한갓지게 떠날 준비를 하고 사세요.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말라(功成而不居)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박달재 밑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품 활동을 하는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 중에 '땅콩'이 있습니다. 화폭 한복판에는 꼬투리 몇 개가 달린 땅콩 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단에는 줄기에서 떨어진 땅콩 꼬투리 몇 개가 뒹굴고 있습니다. 그 작품의 題詞는 이렇습니다.

땅콩을 거두었다.
덜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 떨어진 놈!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하는 까닭은 아직 익지 않아서입니다. 밤도 충분히 익으면 땅으로 쏟아져 내리지요. 사람도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설 줄 알아야 아름다운데 보통은 그러지 못합니다. 익지 못해서입니다. 아직 자유자재에 이르지 못한 까닭입니다. 뭔가에 매여 있습니다. 거기에 종노릇하는 거지요. 바울은 예수님과 만난 이후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와졌습니다. 학벌에 대한 자부심,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 따위를 그는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진주를 사는 것처럼, 예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아니,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는 찬송가 가사처럼, 예수를 만나고 나니 이전에 좋던 것이 다 빛을 잃고 만 것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태산처럼 든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달콤한 유혹도 그를 뒤흔들 수 없었고, 어떤 위협이나 강제도 그를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았고, 병들었어도 영혼이 약해지지 않았고, 감옥에 갇혀도 원망이 없는 자유혼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자유가 어떻게 좋던지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5:1)

종이 되는 자유(?)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로 발전합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것처럼,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맛본 사람은 그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신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두 가지를 염두에 두라고 말합니다.
첫째, 나의 행동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인가? 나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걸림돌이 된다 면 그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성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이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이다.

예컨대 바울은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이 양심상 자기에게는 거리낌이 없지만('우상'이란 본디 '헛것'이니까) 아직 그런 믿음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그런 행동을 보고 실족할 우려가 있다면 기꺼이 자기의 자유를 유보하겠다고 말합니다(고전8:13). "너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고도 말합니다. 성도는 항상 남을 배려(fursorge)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이 불편하지 않도록 늘 조심스럽게 마음 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남이야 어찌 됐든 내가 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화장실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고, 지하철 의자에 바로 앉을 줄도 몰라요. 개인이 모여 이룬 사회가 건강하려면 '公의 윤리'가 바로 서야 합니다. 인류의 첫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악과라는 게 뭐지요? 어느 신학자는 그것을 '동산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누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 한 것'이구요. 영어로 '개인적인, 사유의'를 뜻하는 'private'는 원래 '남의 것을 빼앗다, 착취하다'를 뜻했답니다. 그 신학자는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하려는 인류의 뿌리깊은 고질병을 원죄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자유로 보았습니다.

사랑: 종이 되는 자유의 뿌리
어느 권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권사님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분입니다.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때의 일이랍니다. 속회 모임이 끝난 후 다과를 위해 포도를 닦는데 유난히 색이 곱고 커 보이는 것이 있더래요. 그런데 속으로 이런 걱정이 일더랍니다. '아휴, 저거 내가 들어가기 전에 맹집사가 먹어치우면 어떡하지?' 부엌일을 조금 더 보고 방에 들어가 얼른 포도송이를 보니까 그때까지 자기가 겨냥하고 있던 그 포도알이 남아있더라는 거예요.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날 자기는 그 포도를 먹으며 기분이 좋았대요. 그런데 다른 집에 가서도 그 맹집사는 늘 '볼품없는 것'부터 집더래요. 자기는 제일 좋은 것부터 손이 가는데 말이예요. 그래서 하루는 물었답니다. "맹집사는 바보같이 왜 맛없어 보이는 것만 먹어?" 그러자 맹집사는 "내가? 나도 몰랐네." 하더니, 어쩌면 어릴 적부터 장로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어디에 가든 항상 남을 위해 좋은 것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대요. 하도 많이 들어서 그 말이 맹집사 속에 내면화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남을 배려하게 된 거지요.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은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씨 의 소리] 권두언에 사모님을 추모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그 제목이 "나야 뭘"입니다. 사모님은 평생을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좋은 것을 양보하며 사신 겁니다. 호강 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살다 가신 생이 요즘 여권 운동을 하는 이들의 눈에는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사모님이 자기의 불행을 탓하며 그러셨다면 그것은 분명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지만 자기 속에 있는 사랑이 그 일을 하게 했다면 그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은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은혜에 대한 감격과, 넘치는 사랑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의 바탕이 사랑임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남의 유익을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둔 자유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3-24)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

여러분은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이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이들은 과연 다르구나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이나 행실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질식시키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32)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지요.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면 적어도 다른 이를 실족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야합니다. 여러분,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바칠 거룩한 산 제물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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