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요21: 15-17

by 【고동엽】 2022. 7. 3.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요21: 15-17
(2000/2/27, 졸업감사)

오늘 우리는 각급 학교를 졸업하는 30명의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축하를 드립니다. 졸업을 나는 인생의 매듭짓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대나무가 하늘로 십여 미터 이상 뻗어오르는 것은 중간중간에 있는 마디 때문이듯이, 우리 삶이 높은 곳을 향해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진부해지기 쉬운 우리 삶을 정리해주는 매듭들이 필요합니다. 졸업은 그래서 매듭짓기의 한 계기가 아닌가 싶어요. 나는 오늘 본문을 정하고 나서 제목을 뭘로 할까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의 졸업식"이라 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작위적인 것 같아서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의문형의 제목을 잡았습니다.

스승의 사랑법
사실 오늘의 본문은 디베랴 바닷가의 졸업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기가 꺾여 디베랴 바다로 돌아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의 길을 벗어난 그들이지만 예수 운동에 동참했었다는 수료증을 건네려는 것이었을까요? 그들의 나약함을 책망하시려는 것이었을까요? 다시 한번 시작해보자고 설득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나약하고 믿음 없는 그들을 여전히 제자로 여기십니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그들을 찾아와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희망을 되살려내고,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회복시키시려고 그들에게 돌아오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신 것이 첫 번째 부름이었다면, 지금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합니다.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이게 스승으로서의 사랑이지요. 사랑은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것"이라지 않습니까.

영어로 졸업은 'commencement'인데 이 말은 'to initiate', 즉 출발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학교에서 이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스승께 배운 바를 실천을 통해 익혀야 합니다. 이제 그들은 스승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여라."

이런 문답이 세 번 계속됩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과정입니다. 세 번 뒤얽혀 있는 매듭을 세 번 풀어내는 것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 그게 베드로의 본마음이었겠어요? 그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단 두려움의 물이 이성적인 판단의 강둑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혼란입니다. 베드로는 오직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야 합니다. 어떤 강박적인 분위기는 없습니다. 거짓말로 그 순간을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슴 속에서 가물거리고 있던 당신에 대한 신뢰를 다시 구축하기 위해 그에게 거듭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물음은 베드로의 나약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책감을 뚫고 들어가 잠들어 있던 사랑을 깨웠습니다. 베드로는 성심을 다해 예수님의 물음에 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똑같은 문답이 세 번 계속되면서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신뢰심이 회복됩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는 사랑하시는 징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 뭔가 할 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할 일을 준다는 것은, 그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의 일이 맡겨지면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바쁘다, 여유가 없다, 믿음이 부족하다, 하여 회피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일을 맡기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종친 겁니다.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담아 맡겨주신 일을 해내면 하나님은 큰 일도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도 주님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하면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면 자기의 일을 맡기게 됩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디베랴 바닷가, 그곳은 잃어버렸던 사랑이 회복되는 성사의 공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서 주님과 만나고 계십니까? 인디언들은 자신을 알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한답니다.
1) 나는 누구인가?(삶의 본질 물음)
2)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현존재에 대한 확인)
3)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실존의 의미 물음)
우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 혹은 자기가 서있는 자리와 자신을 동일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업이나, 직책을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또 인생 길에서 방황하지 않으려면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를 늘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꿈꾸는 내 모습과 현실의 내 모습이 일치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물음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현재 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현재 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섞여 있습니다. 과거는 기억(memory)의 형태로, 미래는 기대(anticipation)의 형태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의 삶이 아름답지 않고는 우리 삶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꽃자리
문득 사람 서리에 섞여 있다가도 '내가 왜 여기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 분위기에 몰입할 수 없어 스스로 버성길 때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남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남들을 살찌우고, 복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있는 겁니다. 복음성가를 통해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구요,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자도 없어요." 하고 고백하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상처입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사랑으로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라고 부름받은 겁니다. 여러분, 어느 곳에 가든 먼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우연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여러분이 그곳에 있는 까닭은 사랑하기 위함이요, 평화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디베랴 바닷가는 베드로가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를 자각하는 자리였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자각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그런 깨달음에 이른 것은 주님이 그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이 서 계신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만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에만 너무 매달리지 마십시오. 자기가 누구인지를 늘 묻고,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정겨운 사랑이 피어나는 꽃자리로 만들며 사십시오. 디베랴 바다에 주님이 오셨을 때 제자들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듯이,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시면 우리는 봄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여러분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늘 명심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