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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과 영광은 둘이 아니다 -마태 17:1-8

by 【고동엽】 2022. 7. 3.
수난과 영광은 둘이 아니다
마태 17:1-8
(2000/3/5, 산상변화주일)

예수: 삶의 근본을 가리키시는 분
얼마 전 끝난 김용옥 박사의 동양고전 강좌가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膾炙(널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림)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강의 내용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할 입장도 못되고, 그걸 판단할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기독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강의 내용에 좀 충격을 받은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기독교 비판은 듣기 민망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 교회가 고맙게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제게 와서 그러더군요.
"김용옥 교수는 예수님보다 바울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글쎄,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김용옥 교수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집사님, 그건 원본(original copy)보다 복사본(reproduction)이 더 낫다는 말이네요." 하고 웃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글을 남겼지만, 예수님은 글 한 줄 남기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당대의 사상과 철학에 두루 능통한 지식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지식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예수님보다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존재로 말하는 분이고, 바울은 그의 존재를 말과 글로써 드러낸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지식으로 사람을 휘어잡은 분이 아니라 삶의 근본을 드러내 보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맛은 없지만 소박한 언어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나무로 만든 각종 가구들은 아름답지만 그 근본은 통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늘 돌아가야 할 근본이십니다.

영광의 길, 수난의 길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가 환하게 변화되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놀라운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난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들로 붐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오롯이 존재하지 못하고, 미래의 영광에만 마음이 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수난은 악이고, 피해야 할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수난을 거치지 않고는 영광에 이를 수 없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지난 시절 '죽음'으로 '거짓'과 '억압'의 실체를 폭로하던 젊은이들의 외침을 기억합니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와, 이후에 민주화를 열망하며 조국의 제단 앞에 자기 목숨을 바친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다소나마 민주화된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광의 길은 수난의 길 끝에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단 열매는 좋아하지만 십자가 지기는 싫어합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성적 얻기를 원하는 학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연습하지 않고 승리의 영광만을 구하는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로 가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영광에 이르는 현관이 수난임을 알지 못합니다.

해처럼 빛나는 얼굴
어느 날 예수님은 높은 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화되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압도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홀연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엉겹결에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다정한 말씀에 이끌려 일어나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태가 전해주는 변화산 사건의 전말입니다. 이제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곰곰히 새겨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측근의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된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서셨습니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자들이 최면에 걸린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빛의 굴절을 적절히 이용해서 당신의 이미지를 바꾸신 것일까요(자신의 가사만 빛나도록 사진을 조작함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던 석용산 스님의 경우)?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C.F처럼 화장발이 잘 받아서일까요(탤런트 고소영의 경우)?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지 않고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라면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 기쁨이 있으면 우리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눈치채게 마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내면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그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거룩한 산에서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흔히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예언을 대표한다고들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의 완성자라는 복음서 기자들의 고백이라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는 모세의 성품을 가지고 오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와서 주님 오실 길을 닦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세와 엘리야는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황홀경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 곁에 오직 예수님만 계셨다는 사실은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베드로는 그 광경에 압도당하여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고 말하지요? 그때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구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Shekinah)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을 것이라 했을 때(마24:30), 여러분은 홍길동이 타고 다닌 근두운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구름으로 상징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수난의 길을 앞두고 있는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가 그를 좋아한다'(I am well pleased).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만족스럽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흡족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할 말을 잊습니다. 자꾸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나의 존재가 하나님이 나를 두고 계획하셨던 본래의 뜻과 일치하는가?' 이 물음 앞에 서면 저는 너무나 작아지는 내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다시 그 일치를 향해 길 떠나야지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황홀한 비전에 끌려 살아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영감에 가득찬, 그리고 변함없으신 말씀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초막 셋을 짓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길은 힘겹고 재미없는 길이고, 좁은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손길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며 땅에 엎드린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손을 대시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손을 대셨다는 말에서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제자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다가와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스승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등을 쓸어주면서 '안심하라'고 속삭이십니다. 외로움에 지친 이들, 세상일에 채여 비틀거리는 사람 곁에 다가와 부축해 주십니다. 우리 눈이 열리기만 하면 우리 곁에서 어깨를 곁고 걷고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에 몸을 일으킨 제자들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수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영광의 주님,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 이번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떠나기 전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 주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십자가가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십시오. 수난과 영광은 둘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수난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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