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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산다 -요한12:20-33

by 【고동엽】 2022. 7. 3.
죽어야 산다
요한12:20-33
(2000/4/9)

보냄을 받은 분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이가 해야 할 일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왔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예수님은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진력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겁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마치 자신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그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이고,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하나님의 영광
보냄을 받은 이가 보내신 분의 뜻을 다 완수하면 보내신 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생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예수님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자기의 편안함과 이익이 아니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보냄을 받은 사람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속상해 하고, 때로는 자기가 한 일을 나팔 불어 사람들의 찬사를 유도하려 하는 때도 있습니다. 자기를 '큰 종'이라고 하면서 마치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하는 게 당연하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역겹습니다. 이게 다 '덜 떨어진' 까닭이겠지요.

보냄을 받은 이의 영광은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일을 다 마치고 돌아갔을 때 '참 수고했다'고 인정받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여러분, 너나할 것 없이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사람들인데,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잘 하고 계신지요?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했어요. '와, 예수님이 드디어 뜨시는구나.' '잘 보여서 나도 한 자리 해야겠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을 받으실 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곧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영광을 얻을 때
오늘 본문에 보면 명절에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왔던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만나려는 장면이 나오지요? 여기서 헬라인은 그리스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이방인 가운데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에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었나봅니다. 그래서 갈릴리 벳새다 사람인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합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그런 사실을 알렸고, 둘은 함께 예수님께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왜 헬라인들이 빌립과 안드레를 찾아왔을까요? 알고 지내던 사이였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2명의 제자 중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들 뿐이었어요. 그래서 접근하기가 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빌립과 안드레의 보고를 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좀 이상하지요. 만나겠다, 혹은 만나지 않겠다, 분명한 의사 표시없이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여러분은 이제 이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아시지요?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사명을 완수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당신의 소명인데, 이제 이방인들까지 당신께 나아왔으니, 거의거의 하실 일이 끝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데 제자들은 아직 이 말의 숨은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4)



죽어야 산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더 큰 생명의 세계를 내다보고 계십니다. 사과 씨 한 알에서 과수원을 보는 게 믿음이라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지요? 예수님은 지금 믿음의 세계를 우리 앞에 보여주고 계십니다. 죽어서 사는 세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밀의 생장에 관한 생물학적 진실을 말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비밀, 생명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깨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은 체' 하는 게 아니예요. 완전히 죽어야 살아요. 우리는 곰을 만난 것도 아닌 데 죽은 체 할 때가 많아요. 가족관계나 친구관계가 소원해지고 어려워지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흔히 '내가 한 알의 밀이 되어야지' 하고 결단하기도 합니다. 장한 결단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를 낮추고 희생하는 데도 상대방이 반응이 없으면 벌떡 일어납니다. 얼른 살아나지요. 그리고 맹렬한 분노를 터뜨립니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난 할만큼은 했다. 사람이 어째 그럴 수가 있냐?" 부활절도 아닌 데 죽은 사람이 그렇게 빨리 살아나면 어떻게 해요? 문제는 '죽은 체' 하는 거예요. '죽은 체' 하는 곳에서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아요. 사랑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아요.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어요. 선거철이 되니까 후보들이 유권자들에게 인사를 잘합니다. 소금에 푹 절은 배추처럼 나긋나긋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상대방을 비난할 때는 독사처럼 머리를 곧추 세우지 않아요. 속지 마세요. '죽은 체' 하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달라요.

예수님은 지금 죽어서 사는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죽지 못하나요? 집착 때문이에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거 말입니다. 질기디질딘 自我, 我相을 깨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데 어떻게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오죽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셨겠어요. 여러분,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에 대해 죽는 겁니다. 죽으면 삽니다. 욕심에 대해 죽고, 집착에 대해 죽고, 내로라 하는 허위의식에 대해 죽으면 삽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6)

'나 있는 곳'이 어디겠어요? 죽음의 자리 아닙니까? 자기에 대해 죽은 사람이 곧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대요.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그러면 예수님께 죽는 것이 신나는 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연상시키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뇌가 나타납니다.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a)

예수님도 죽음보다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의 쓴 잔을 피해가고 싶으셨습니다. '이 때를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본성의 외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심은 자기 본성을 애써 달래면서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그러나', 그렇지요?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이 어긋날 때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신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자각하면서 하나님의 품에 당신 자신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여러분은 어떤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사십니까?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는 것?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 우리는 압니다. 믿는 이들의 영광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속에서 죽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살려고 하면 영혼은 죽습니다. 죽은 체 하면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여러분, 죽임의 도구인 십자가가 생명의 문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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