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부르는 봄 노래 계 14:1-5 (2000/2/6) 입춘소회(立春所懷) 아직 추위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봄이 왔습니다. 절기상으로 어제그제가 입춘이었지요? 겨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봄을 느끼고, 보아내던 옛 사람들의 예지가 놀랍기만 합니다. 아마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땅의 변화를 예민하게 살피고, 하늘을 가까이 하며 살았던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농가월령가 정월령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正月은 孟春(초봄, 이른봄) 이라 立春 雨水 節氣로다 山中 間壑(골짜기에 흘러내리는 시내)에 氷雪은 남았으나, 平郊(교외의 넓직한 들판) 廣野에 雲物(하늘 모양과 경치)이 變하도다 산에는 눈과 얼음이 채 녹지 않았지만 들판에는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짐작으로 그러려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들판의 색깔이 하루하루 변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때부터 부지런한 농부들은 한 해 농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풍년이 될지 흉년이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근원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할 도리를 지극 정성으로 감당하면 하늘도 응하시리라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人力이 極盡하면 天災를 免하나니, 제 各各 勸勉하여 게을리 굴지 마라 옛 선인들에게 하늘은 무심한 비인격이 아닙니다. 울고 웃는 인간사와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우리는 '비가 오네' 하고 말하지만 옛사람들은 '비가 오시네' 하고 말합니다. 비가 오는 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른들의 그런 말투는 낯설기 이를 데 없지만, 그들에게 비 내림은 하늘의 말 건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과학을 얻은 대신 하늘 외경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아무튼 농부들은 입춘 절기인 지금부터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겨울이지만, 게으름 피우며 늑장을 부리고 있는 봄을 깨우는 것이지요. 마치 밤이 너무 길고 힘겨웠지만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시57:8, 108:2). 겨울공화국에서 부른 봄 노래 1970년대 말 유신체제의 폭압 아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던 때,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갇힌 자들". 제목이 상기시키는 도발성 때문에 연극 동아리에 속해 있던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도호국단 임원들, 교수들 모두가 긴장했습니다. 대학에 상주하고 있던 정보과 형사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공연을 무산시키려고 동분서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한 그날 아침,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켜가며 학교에 갔습니다. 연극을 허락하고, 준비를 도운 문예부장으로서 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자못 비장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공연장소인 웰치 기념관은 굳게 잠겨있고, 연극반원들은 한 사람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연행된 것인가? 아니면 도피하고 있는 것인가? 초조했습니다. 하지만 연극반원들의 순발력을 믿었기에 우리는 은밀하게 공연준비를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약속되었던 시간이 되었고, 강당의 문이 열렸습니다. 학생들은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무대는 캄캄했습니다.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준비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별빛조차 비쳐들지 않는 강당에는 적막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일순 흐릿한 조명이 들어왔는가 싶었는데 우리는 다 '억' 하며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대 한복판에는 나무로 얼키설키 엮어놓은 감옥 세트가 있었고, 창살마다 배우들이 마치 정육점에 걸어놓은 고깃덩어리 모양으로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그 광경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러나 배우들은 시간이 지나가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를 찔린 관객들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10분, 20분이 지났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암담한 세월임을 상기시키는 노랫소리가 아스라히 들려오면서 고통은 증폭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무대를 보면서 어느새 우리들 속에 있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30분이 지나면서 객석에서는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배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흐느낌은 조금씩조금씩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지 참 난감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뒷자리에서부터 누군가가 천천히 무대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무대에 오른 그는 광포하게 나무 창살들을 내려치면서 절규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감옥을 깨뜨리고 나와. 왜들 그러고 있어. 나와, 나오란 말이야. 자유의 세상은 누가 거저 가져다주지 않아. 네가 투쟁해서 얻어야 해. 감옥을 깨, 깨란 말이야." 그는 엉엉 울면서 창살을 때려부쉈습니다. 부러진 나무에 맞아 몇몇 배우가 실신하고, 피를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때 객석에서는 조용히 노래 소리가 울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독창은 곧 합창이 되었고, 합창은 물결이 되어 우리 사이를 흘렀습니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 날에 아아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그 날에" 무대에 있던 배우들과 객석에 있던 관객들이 다 한 덩어리가 되어 울었습니다. 울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의 좁은 창살을 깨고 자유의 새 하늘을 새처럼 훨훨 날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비겁의 창살을 깨뜨리고 자유를 향해 눈부시게 도약하는 '우리'를 만났습니다. 아무도 연출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숨어있던 단 한 마디의 대사와 만났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감옥을 깨고 나와." 그로부터 열흘 후(1979년 10월 26일) 우리는 유신체제가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함께 불렀던 '우리 승리하리라'는 겨울 공화국에서 불렀던 봄 노래였습니다. 성경의 봄 노래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불평 없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권력자들은 그들의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까지도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까지 가둘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이라는 겨울 한복판에서 봄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랫소리는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던 시기에 기록된 책입니다. 흔히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박해에 직면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책은 전염병, 기아, 전쟁, 천재지변 등 무시무시한 일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이런 비극적인 일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면에서 솔직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을 어려움에 대해 말씀하셨고,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겪을 고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고생도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옛 세계에 속해있는 이들에게 대격변은 기득권의 상실을 의미하지만, 새로운 질서,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내다보는 이들에게 대격변은 새 세상이 열리기 위한 산고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새 세상을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들이 자행되는 세상 곧 겨울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봄을 내다보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장로 요한은 시온 산에 어린 양이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습니다. 요한은 장엄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은 노랫소리였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속량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그 노래는 그들 이외의 사람은 부를 수 없는 노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완전 숫자의 결합을 의미할 뿐(12×12×10×10×10), 구원받을 사람의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다 구원받을 것이라는 적극적인 메시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는 때에 장로 요한은 하늘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땅의 소요가 그친 완전한 평화의 노래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①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적이 없는 사람들/달콤한 보상을 약속하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들 ②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다니는 사람들/눈물과 한숨이 있는 갈릴리에도, 아골 골짝 빈들에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③마음의 중심에 거짓이 없고, 행실에 흠이 없는 사람들 한마디로 땅에 사는 동안 거룩의 길을 걸은 사람들입니다. 겨울 공화국에 살면서도 봄의 전령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죄와 과도한 욕망의 수렁에서 몸을 일으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루는 꾀꼬리에게 물으셨습니다. "꾀꼬리야, 네 노랫소리는 나를 기쁘게 해주는데 왜 요즘엔 노래를 부르지 않니?" 꾀꼬리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도 커서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걸요." 하나님께서는 딱하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 않니?" 세상이 더럽다고, 세상이 악하다고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겨울 한복판에서 봄 노래를 부르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세상이 어떠하든 나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거리가 더럽다고 침만 뱉지 말고 휴지 한조각이라도 주으십시오. 해변에 유리조각을 버린 이들의 파렴치를 탓하기 전에, 누군가가 발을 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주으십시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상대가 우리에게 해준만큼 되갚으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공급하며 사십시오. 성 프란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지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성도란 겨울 한복판에 살면서 봄을 노래하고, 봄을 준비하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가는 생의 현장에서 은총의 새봄을 전하는 봄의 전령들이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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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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