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품으라 잠4:8-19 (2000/1/23) 이방원의 길, 정몽주의 길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씀드린다면 세상에는 두 가지 삶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흐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지조를 지키며 세태를 역행하는 삶입니다. 이방원의 '何如歌' 아시지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李芳遠 이 시조를 쓴 이방원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을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조는 어찌 보면 달관의 미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실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고, 시절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의 지혜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조는 쓰러져 가는 고려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뜻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자고 포은 선생에게 말건네고 있지만, 사실 이 노래 속에는 추악한 권력욕이 숨겨져 있습니다. 포은 鄭夢周(1337-1392)는 이에 시조로 답합니다. 식자들답게 풍류가 있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이 시조에서 뭔가 비장한 느낌을 줍니다. 아름다움 가운데는 悲壯美도 있는데, 이 시조에는 비장미가 있습니다. 피맺힌 대나무(血竹)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지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방원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죽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눈밝은 그가 모를 리 있었겠어요? 그는 임금을 배신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배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기의 氣槪와 節操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원은 정이 가지는 않지만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고, 포은 정몽주는 융통성이 없을 뿐더러 미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기개와 절조를 생명으로 여기는 선비정신이 물질적 풍요의 뒤안길로 가뭇없이 사라진 오늘의 상황에서 나는 포은의 殺身成仁이 아름답게만 여겨집니다. 무엇을 품고 사나?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잠언 말씀은 우리에게 정말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8-9) 여기서 '그'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귀히 여겨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은 참 삶의 길이 배움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했습니다(고전8:1). 하나님 경외와 연결되지 않은 지식은 때로 독이 되어 사람들을 해칩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식인들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사는 길, 그것은 여호와 경외를 삶의 근본으로 삼고, 지혜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어떤 이는 집문서, 땅문서, 돈지갑을 가슴에 품고 살고, 어떤 이는 자기가 받은 학위를 품고 삽니다. 또 어떤 이는 야망을 품고 살고, 어떤 이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삽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삽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예수님이라구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가슴에 길을 품고 걷는 길이 어찌 갈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겠습니까? 가슴에 진리를 품고 사는 사람이 어찌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에 생명을 품고 사는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참된 지혜의 현현이신 예수님을 품고 살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혜자는 말합니다. 훈계를 굳게 잡으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13) 예언자들을 통해, 또 지혜자들을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 예수님께서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들을 굳게 잡고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던 인도의 민중들 사이에 眞理把持 운동을 일으켰죠. 진리를 굳게 붙잡자는 것입니다. 왜? 진리는 결코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다면 진리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몸으로 구현한 분인 예수를 앞에 두고도 진리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어, 뒷걸음질쳐 진리로부터 달아납니다. 진리는 세상에서 무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궁극적 승리는 진리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작정하고, 그 뜻을 굳게 붙잡은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살아날 길은 호랑이 등을 죽을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이듯이, 진리의 등에 탄 우리들도 죽을 힘을 다해 주님의 가르침에 매달려야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흥타령을 그만두지 않고는 우리 삶에 힘이 안 생깁니다. 훈계를 굳게 붙잡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option'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힘겨운 진리의 길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로운 길을 걷는 사람과 악인의 길을 걷는 사람을 대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 훈계를 굳게 붙잡는 길,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는 길을 걷는 이는 걸음이 곤란하지 않고, 달려가도 실족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때요? 주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 정말 쉽던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 길은 험한 길이고, 좁은 길이지요? 군대에서 병사들이 관물대에 이런 말을 써붙여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군인의 길=비포장도로 산이 많은 강원도 고지의 병사들에게 비포장도로는 눈물의 도로입니다. 비가 오면 나가서 도로 복구해야지요, 눈이 오면 자다 말고라도 일어나서 길을 열어야지요. 오죽하면 군인의 길을 비포장도로라고 했겠어요. 그런데 사실 그리스도인의 길이야말로 비포장도로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힘겨운 일이 많아요. 걸려 넘어질 때는 또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도 주님의 길을 걷는 자들은 걸음이 곤란하지 않고, 달려가도 실족하지 않는답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혹시 산에 가보셨어요? 산길은 울퉁불퉁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발 한 발 일일이 신경 쓰다보면 길을 걸을 수 없을 겁니다. 길에 나 자신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다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모든 험로를 지나가게 됩니다. 그래요, 내가 뭐를 해보려고 힘을 쓰다 보면 금방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까치발을 들고는 오래 걸을 수 없는 법이잖아요? 주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내가 걷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걸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주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오산학교를 세우셔서 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을 길러내셨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닷새 전에 제자들이 세운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게 됐어요.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 채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의 말은 뜻밖에도 아주 간단했어요. 저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시키셨을 뿐입니다. 그것 뿐이예요. '내가 뭐 했다', 그런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면 우리가 실족할 리가 있어요? 죄에게 길을 내주지 말라 그러나 악인의 길은 우리가 보기에 지름길처럼 보여 우리의 구미를 당기게 합니다. 별로 노력도 하지 않는데, 쉽게 돈벌고, 출세하고,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지 않아요?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고, 윗사람에게 때마다 인사 잘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뇌물도 받아먹고, 적당히 뒤를 봐주기도 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에이, 착하게 살면 뭐해. 더러운 세상인데.' 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악인이 어디 있겠어요. 물론 죄에 이끌리는 인간의 성향은 뿌리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원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을 보고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네 집 문에 엎드린다 하시면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창4:7) 하셨어요. 죄는 호시탐탐 우리를 사로잡을 기회를 엿봅니다. 그리고 한번 우리를 사로잡으면 놓아주질 않습니다. 죄에 맛을 들이면 사람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어렵지 않습니다. 죄에게 한번 길을 터주고 나면 죄는 우리의 주인 노릇을 단단히 하게 됩니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다보면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의 길에 선 사람들은 악행을 밥먹듯 하고, 불의의 떡을 먹고, 강포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 한다지 않습니까. 그것이 행복일까요? 아니에요. 나중을 볼 줄 알아야 해요.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아주 중요한 진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마치 돋는 햇볕과 같아서 점점 밝아져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되고, 악인은 어둠 속을 걷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답니다. 인생길 걷다가 우리가 뭔가에 걸려 넘어지면, 내가 무엇에 걸렸구나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늘의 음성에 귀를 닫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삶의 징조를 해석할 줄 몰라요.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죄는 우리를 무지몽매의 어둠 속에 빠뜨립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지금은 약해 보여도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큰 비전을 가지고 오늘도 진리이신 주님을 가슴에 품고 사세요. 우리는 진리를 위해 부름 받은 일꾼들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들이 걷는 길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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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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