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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보는 이의 행복 -누가10:17-24

by 【고동엽】 2022. 7. 3.
보는 이의 행복


누가10:17-24


(2000/1/16)

이리들의 세상으로

예수님은 확대된 제자단인 일흔 명(창10장에 나오는 모든 민족들의 수를 상징함) 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서 이스라엘 여러 도시와 촌락에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앞서가서 병자들을 치유해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에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느닷없이 제자들을 파송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자기를 방어할 무기도, 금전도, 예비식량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낭만적인 무전여행이 아닙니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흔연 대접해 줄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리들의 사회'는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나운 사회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외모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을,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불온시하는 사회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예측하고 계셨습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 문안 인사를 하지 말라: 이 말은 지금은 비상시기라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 매여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 평안을 빌라: 평화야말로 제자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 앞에 차려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제자들은 누가 무엇을 대접하든 불평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감사의 사례를 받거나 잘 차린 밥 한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바가지를 뒤집어 쓸 수도 있고, 소금 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내침을 당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 세상에는 병든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육신의 병만 병이 아닙니다. 제 몫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서 세상을 떠돌고 있는 병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고쳐주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제자의 책임입니다.


동조자를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함께 주십니다.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일을 시켜 낭패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킨 사람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제자들이 첫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수님께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아니, 무사히 돌아왔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큰 기쁨과 소망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도시와 시골 어디에서나 친구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며 기쁨으로 맞아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리의 세상'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보여주신 삶의 모습과 교훈에서 빛을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나뭇잎에 맺힌 이슬들이 모여 작은 물방울로 맺히듯 진리에 목말라하는 참 사람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 혼자'라는 생각은 오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바알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사람들

·사람이 재산보다 훨씬 중요하며 인간성이 이데올로기보다 소중함을 믿는 사람들

·아파하는 사랑으로 세상의 약자들을 돌보려는 사람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인간의 등불'을 밝혀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원망만 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온 세상을 비추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나마 훤하게 밝히려고 등불 하나를 켜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제자들은 허허벌판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추수하는 일꾼으로 부름받았을 뿐입니다. 주님은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당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을 심어두시고 우리를 파송하십니다. 그렇기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아도 부족한 바를 모릅니다.


귀신을 물리침

제자들은 동지를 얻는 기쁨보다 더 근원적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귀신들조차도 그들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귀신이 무엇입니까? 귀신은 한 마디로 '분열의 영'입니다. '나와 너'를 갈라놓고 하나되어 살지 못하게 하는 힘입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은 제정신을 잃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귀신은 우리 마음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과 증오, 질투의 독을 흘려 넣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변신에 능합니다. 어떤 때는 돈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어떤 때는 이데올로기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체면이나 자존심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돈이나 이데올로기, 체면이나 자존심이 다 귀신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이 우리 속에 침투하기 좋은 통로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도 필요해요. 체면이나 자존심 없는 삶은 시체나 다를 바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귀신의 덫입니다.


귀신이 흘려넣은 의심과 증오와 질투의 독이 우리 사회를 속에서부터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 경쟁과 분열이 우리의 마음의 공허를 더욱 깊게 만들고, 이리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담을 더욱 높게 쌓아올리고, 철통같은 방범장치를 해놓고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에 미숙합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를 소중히 여겨 존중하는 마음에서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잃고 살고 있습니다. 현대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뱀과 전갈이 득시글거리는 사막입니다. 잘못 건드리면 물거나 쏘아댑니다. 그리고 그 독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늑대가 되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파견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곳,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어울리는 곳에서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림을 그들은 감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이해관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빛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 겁니다.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가능할 수 있음을 제자들은 몸으로 확인했습니다. 서로 깊이 사귀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은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계신 곳,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곳, 성령의 능력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귀신들이 물러갑니다. 예수의 이름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름이란 어떤 존재를 나타냅니다. 김기석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여러분은 어떤 존재를 떠올릴 겁니다. 이름은 곧바로 어떤 존재를 가리킵니다. 유다 하면 배신자가 떠오릅니다. 히틀러 하면 정신병적인 독재자가 떠오릅니다. 슈바이처 하면 생명사랑의 사도가 떠오릅니다. 이처럼 이름은 곧 존재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름이란 예수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사셨던 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아를 철저히 비우셨던 분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곳, 즉 예수의 삶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귀신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권력의 귀신, 이기주의의 귀신이 발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곳은 자기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리들의 세계가 아니라, 각자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참 평화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의 꿈은 예수의 가슴에서 타올라, 제자들의 가슴으로 옮겨 붙었고, 지금은 우리들의 가슴속에서도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곳, 그곳은 바로 예수의 꿈이 실현되는 곳, 예수의 영이 살아숨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그래서 새로운 삶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보는 이의 행복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런 세상을 마음으로 보고,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닙니까? 이 행복을 그까짓 밍크 코트에 비하겠습니까? 대궐같은 집에 비기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새 세상의 꿈에 눈 뜬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사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새 세상이 '지금 여기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사회, 인간이 살만한 세상을 이루어 보려던 임금들, 예언자들 중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선택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어려울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올바른 사회, 폭력과 이기심의 마귀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할 것인지, 폭력과 탐욕이 초래하는 마귀적인 혼돈 속에서 멸망을 향해 떠밀려 갈 것인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초석은 이미 오래 전에 놓여졌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멸망하였고, 마귀들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주민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 예수님의 시작하신 새로운 세상을 증거하십시오. 말로만 전하지 말고, 몸으로, 삶으로 전하십시오. 그 세계를 목격한 자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하십시오. 우리 청파 교회 공동체가 이미 시작된 새로운 세계의 모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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