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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승리 (롬 5:17~21)

by 【고동엽】 2024.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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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승리 (롬 5:17~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5장에는 너무나 잘 아는 탕자 비유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돌아온 동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좀 냉정하게 비판해 보면 그렇게 좋은 동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라고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어지간히 답답하고 어렵고 배고파서 돌아온 것입니다. 돌아온 동기가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탕자의 처지라면 어찌 하겠습니까? 돌아올 수 있습니까? 체면도, 형편도 말이 아닌데 어디 가서 죽어버리자 라는 생각은 없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체면이 말이 아니니 돌아오는 탕자의 심정은 참 착잡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형편이 없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흔히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면 후회스럽기도 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답지 못했습니다. 현재로 말하면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이 미련한 인생, 그렇다고 쉽게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처지에 이렇게 남루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들어서면서 자기는 아들의 하나가 될 수 없기에 머슴꾼의 하나로 받아주십사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머슴은 아무나 합니까? 지게도 져본 사람이 지는 것이지 마음먹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허리가 아프고 당장 병이 납니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며, 양떼도 지켜본 사람이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잣집 둘째 아들은 전혀 쓸데가 없습니다. 아마 풍류를 갖추고 술 먹는 데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무용지물입니다. 과거를 보나 미래를 보나 꽉 막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한 가닥 희망을 걸었습니다. 머슴이라도 좋으니 아버지의 집으로 갈 곳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 생각하며 돌아오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그를 환대합니다. 소를 잡으라, 반지를 끼워라, 음식을 만들어라, 옷을 입혀라 완전히 아들로 영접합니다. 아들은 미안해서 진정 머슴꾼의 하나로 대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이것도 지나간 말입니다. 합당한 말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잔치를 준비시킵니다. 아버지는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잃어버린 재산은 생각도 않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고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는 그것만 가지고 그렇게 기뻐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아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몽둥이를 들어서 때리든지, 크게 책망을 하든지, 엄하게 꾸중이라도 했으면 좀 시원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대해주시니 점점 더 입장이 난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이 탕자가 다소라도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자기 체면을 생각했더라면 아예 돌아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니 어디 가서 죽어버려야 했습니다.

또한 돌아왔다면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하며 이 환대와 이 잔치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탕자는 말이 없습니다. 할 말도 없었겠지마는 그대로 앉아서 이 잔치를 다 얻어먹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래도 되는 일입니까? 바로 여기에 귀한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의 과거나, 현재나 자기 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은 이 시간에 도저히 불안해서 이 잔치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잔치가 결코 즐거운 잔치가 아닙니다. 굴욕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탕자는 모처럼 자기를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가 마냥 즐거워하는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또 한 번 슬프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염치도 체면도 말이 아니지만 그대로 응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즐겁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보니 이제 아버지의 기쁨이 곧 아들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탕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형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저 아들이 돌아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대하십니까?" 형의 말도 맞습니다. 그 같은 마음은 탕자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탕자의 가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율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는 것만 기뻐할 뿐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은혜만이 승리하는 시간입니다. 손해와 이익을 따질 것도 없습니다. 누구의 체면도 알 바가 아닙니다.

사실은 이 탕자를 영접하느라고 아버지도 또 하나의 탕자가 되었습니다. 형편없는 아버지가 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냥 기뻐하기만 한 아버지와 그를 기쁘게 하려는 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승리입니다. 여기에 무슨 비판이 있고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오늘 현대 지성인들은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과거는 어떻고 미래는 어떠하고 거기에다 내 체면까지 생각하자니 은혜가 없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회개한 강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남을 죽였으니 내가 죽임을 받는 것은 당연한 형벌이다"하며 가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에 강도는 말이 없습니다. 말을 한다면 아마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보통 죄인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낙원에 가겠습니까? 문이 열려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죄인입니다. 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실 때 이것은 엄청난 은혜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승리입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절망의 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죄요, 절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죄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우상 숭배의 죄, 자기 살인 죄, 자포 자기, 자기 학대 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지불된 많은 은혜, 많은 사랑을 다 부정하는 죄입니다. 죄는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에 왔으며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죄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죄는 죄를 짓는 죄가 있고, 죄가 죄를 불러 반복하는 죄가 있고, 그리고 죄를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는 죄가 있습니다. 결국 죄는 나를 완전히 다스려 왕 노릇 합니다. 이제 꼼짝없이 죄의 종이 됩니다. 죄의 왕국 즉,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노릇하며 사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여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불가피하게 끌려가며 죄를 짓고 죄와 더불어 삽니다. 이것을 전적인 타락이라고 합니다.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를 이룬다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저 깊은 속에 또 죄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라고 내놓아야 합니까? 죄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 아닌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행위나 생각이나 모든 것이 죄 아닌 것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의로움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끝난 것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의를 나타냈고 그가 순종하고 의로우심으로 이제 우리에게 그 의를 물려주게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관하는 세계입니다. 죄악이 주관하던 세계를 은혜가 주관합니다. 율법이 지배하던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삽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아갑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고 축복과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안목을 지니게 됩니다. 전에는 이것도 죄요, 저것도 죄요, 그것은 절망, 절망, 절망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나를 보나, 이웃을 보나, 사회를 보나, 형제를 보나, 무엇을 보나 그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아무리 큰 악이 있어도 은혜는 더 큽니다. 율법이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다시 은혜 없는 율법도 없습니다. 만약에 은혜가 없는 율법을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죽이는 것이요, 절망케 하는 것이요, 사탄적이요, 악마적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율법은 정말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법, 생명의 법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이겠습니까? 이제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저 깊은 곳으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보면서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고는 율법마저 혹은 가책까지도 다 은혜로 소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법 그것은 자유의 법이요, 성령의 법이요, 생명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율법을 위하여 있느냐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즉, 우리에게 주신 법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유대 사람과 그리고 바리새인 교인들과 예수와의 사이에 의견이 상충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 교인들은 율법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저주하고, 우리를 사망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신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승리입니다. 율법을 이기는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엄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무척이나 매를 맞았습니다. 지금 생각을 하여도 좀 지나쳤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우리들을 많이 때리셨는데 제가 열 일곱 살 때라고 기억을 합니다. 그날도 무척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원래 장난이 심해서 사고를 많이 냈거든요. 매맞을 때 어머니께서 옆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면 일이 더 크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그날도 어머님은 밖에 나가 계시다가 제가 매를 맞은 다음, 아버님께서 문을 닫고 나 가시자마자 어머님은 아버지를 붙들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당신,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사랑하지 않는거요, 다 큰아들을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자꾸 때리세요" 제가 안에서 들으니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내 마음은 어머니가 알아주시는구나 했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님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신중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훈계와 그 교훈이 징계가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누가 효자입니까? 적어도 효자란 부모님의 모든 말씀과 훈계와 징계가 다 나를 위해서요, 나를 사랑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인도하고 잘되고 복되게 하기 위해 주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어떤 분이 몹쓸 병에 걸려서 친구가 찾아갔습니다. 문병은 갔지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참 진실하게 사신 분이기에 더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기도합시다 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려야 합니까?" 그리고는 친구가 울었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오히려 껄껄 웃으며 "여보게, 자네 지금 한 기도 취소했으면 좋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성경에 보면(요 11:3)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에게 '주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누이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병을 주셔서 나는 지금 남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네."라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내가 처한 형편이 좀 못마땅합니까? 혹 병들었습니까? 어떤 처지이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으로 계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은혜의 승리가 있습니다. 저주받았다, 죄의 가책이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고 그 속에 은혜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시련이요, 시련은 축복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율법을 이기는 은혜의 승리입니다. 최종적인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말적인 승리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될 만 한가하고 염려합니다. 사랑이란 대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가 대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만하다, 못하다 누가 생각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요, 사랑하니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십니다. 죄가 아무리 많아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죄도 은혜로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삐를 늦추어 주었으니 죄도 짓는 것이지 벌써 벼락을 쳤으면 죄도 짓지 못합니다. 탕자에게 아버지가 돈을 주지 않았으면 집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내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이것도 은혜요, 아무리 죄가 많아도 은혜는 더 큰 것입니다. 탕자가 미련한 사람 같지마는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생각해 냈다고 하는 그것이 은혜의 승리를 이루게 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야겠다는 그것이 은혜 안에 사는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보십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세상이 악하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 삽니다.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누가 자기 의로 살았습니까? 누가 자기 의로 살 것입니까?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 그 안에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의 내가 아니고 양심 앞에서의 나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 엄청난 사랑 안에서 내 가치를 찾고 그리고 은혜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간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기도 죄도 있고 율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책도 있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사 은혜를 알게 하여 주시고 은혜를 보게하여 주옵소서. 내 많은 죄보다 더 큰 은혜가 있었음을 알게 하시고 내 어리석음보다 앞에 있는 은혜의 약속이 있음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 은혜의 간증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범사에 은혜의 승리를 찬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은혜의 승리 (롬 5:17~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5장에는 너무나 잘 아는 탕자 비유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돌아온 동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좀 냉정하게 비판해 보면 그렇게 좋은 동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라고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어지간히 답답하고 어렵고 배고파서 돌아온 것입니다. 돌아온 동기가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탕자의 처지라면 어찌 하겠습니까? 돌아올 수 있습니까? 체면도, 형편도 말이 아닌데 어디 가서 죽어버리자 라는 생각은 없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체면이 말이 아니니 돌아오는 탕자의 심정은 참 착잡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형편이 없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흔히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면 후회스럽기도 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답지 못했습니다. 현재로 말하면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이 미련한 인생, 그렇다고 쉽게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처지에 이렇게 남루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들어서면서 자기는 아들의 하나가 될 수 없기에 머슴꾼의 하나로 받아주십사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머슴은 아무나 합니까? 지게도 져본 사람이 지는 것이지 마음먹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허리가 아프고 당장 병이 납니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며, 양떼도 지켜본 사람이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잣집 둘째 아들은 전혀 쓸데가 없습니다. 아마 풍류를 갖추고 술 먹는 데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무용지물입니다. 과거를 보나 미래를 보나 꽉 막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한 가닥 희망을 걸었습니다. 머슴이라도 좋으니 아버지의 집으로 갈 곳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 생각하며 돌아오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그를 환대합니다. 소를 잡으라, 반지를 끼워라, 음식을 만들어라, 옷을 입혀라 완전히 아들로 영접합니다. 아들은 미안해서 진정 머슴꾼의 하나로 대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이것도 지나간 말입니다. 합당한 말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잔치를 준비시킵니다. 아버지는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잃어버린 재산은 생각도 않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고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는 그것만 가지고 그렇게 기뻐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아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몽둥이를 들어서 때리든지, 크게 책망을 하든지, 엄하게 꾸중이라도 했으면 좀 시원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대해주시니 점점 더 입장이 난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이 탕자가 다소라도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자기 체면을 생각했더라면 아예 돌아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니 어디 가서 죽어버려야 했습니다.

또한 돌아왔다면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하며 이 환대와 이 잔치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탕자는 말이 없습니다. 할 말도 없었겠지마는 그대로 앉아서 이 잔치를 다 얻어먹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래도 되는 일입니까? 바로 여기에 귀한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의 과거나, 현재나 자기 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은 이 시간에 도저히 불안해서 이 잔치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잔치가 결코 즐거운 잔치가 아닙니다. 굴욕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탕자는 모처럼 자기를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가 마냥 즐거워하는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또 한 번 슬프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염치도 체면도 말이 아니지만 그대로 응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즐겁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보니 이제 아버지의 기쁨이 곧 아들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탕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형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저 아들이 돌아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대하십니까?" 형의 말도 맞습니다. 그 같은 마음은 탕자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탕자의 가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율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는 것만 기뻐할 뿐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은혜만이 승리하는 시간입니다. 손해와 이익을 따질 것도 없습니다. 누구의 체면도 알 바가 아닙니다.

사실은 이 탕자를 영접하느라고 아버지도 또 하나의 탕자가 되었습니다. 형편없는 아버지가 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냥 기뻐하기만 한 아버지와 그를 기쁘게 하려는 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승리입니다. 여기에 무슨 비판이 있고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오늘 현대 지성인들은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과거는 어떻고 미래는 어떠하고 거기에다 내 체면까지 생각하자니 은혜가 없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회개한 강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남을 죽였으니 내가 죽임을 받는 것은 당연한 형벌이다"하며 가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에 강도는 말이 없습니다. 말을 한다면 아마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보통 죄인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낙원에 가겠습니까? 문이 열려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죄인입니다. 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실 때 이것은 엄청난 은혜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승리입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절망의 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죄요, 절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죄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우상 숭배의 죄, 자기 살인 죄, 자포 자기, 자기 학대 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지불된 많은 은혜, 많은 사랑을 다 부정하는 죄입니다. 죄는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에 왔으며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죄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죄는 죄를 짓는 죄가 있고, 죄가 죄를 불러 반복하는 죄가 있고, 그리고 죄를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는 죄가 있습니다. 결국 죄는 나를 완전히 다스려 왕 노릇 합니다. 이제 꼼짝없이 죄의 종이 됩니다. 죄의 왕국 즉,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노릇하며 사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여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불가피하게 끌려가며 죄를 짓고 죄와 더불어 삽니다. 이것을 전적인 타락이라고 합니다.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를 이룬다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저 깊은 속에 또 죄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라고 내놓아야 합니까? 죄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 아닌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행위나 생각이나 모든 것이 죄 아닌 것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의로움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끝난 것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의를 나타냈고 그가 순종하고 의로우심으로 이제 우리에게 그 의를 물려주게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관하는 세계입니다. 죄악이 주관하던 세계를 은혜가 주관합니다. 율법이 지배하던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삽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아갑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고 축복과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안목을 지니게 됩니다. 전에는 이것도 죄요, 저것도 죄요, 그것은 절망, 절망, 절망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나를 보나, 이웃을 보나, 사회를 보나, 형제를 보나, 무엇을 보나 그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아무리 큰 악이 있어도 은혜는 더 큽니다. 율법이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다시 은혜 없는 율법도 없습니다. 만약에 은혜가 없는 율법을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죽이는 것이요, 절망케 하는 것이요, 사탄적이요, 악마적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율법은 정말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법, 생명의 법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이겠습니까? 이제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저 깊은 곳으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보면서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고는 율법마저 혹은 가책까지도 다 은혜로 소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법 그것은 자유의 법이요, 성령의 법이요, 생명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율법을 위하여 있느냐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즉, 우리에게 주신 법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유대 사람과 그리고 바리새인 교인들과 예수와의 사이에 의견이 상충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 교인들은 율법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저주하고, 우리를 사망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신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승리입니다. 율법을 이기는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엄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무척이나 매를 맞았습니다. 지금 생각을 하여도 좀 지나쳤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우리들을 많이 때리셨는데 제가 열 일곱 살 때라고 기억을 합니다. 그날도 무척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원래 장난이 심해서 사고를 많이 냈거든요. 매맞을 때 어머니께서 옆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면 일이 더 크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그날도 어머님은 밖에 나가 계시다가 제가 매를 맞은 다음, 아버님께서 문을 닫고 나 가시자마자 어머님은 아버지를 붙들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당신,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사랑하지 않는거요, 다 큰아들을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자꾸 때리세요" 제가 안에서 들으니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내 마음은 어머니가 알아주시는구나 했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님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신중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훈계와 그 교훈이 징계가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누가 효자입니까? 적어도 효자란 부모님의 모든 말씀과 훈계와 징계가 다 나를 위해서요, 나를 사랑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인도하고 잘되고 복되게 하기 위해 주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어떤 분이 몹쓸 병에 걸려서 친구가 찾아갔습니다. 문병은 갔지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참 진실하게 사신 분이기에 더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기도합시다 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려야 합니까?" 그리고는 친구가 울었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오히려 껄껄 웃으며 "여보게, 자네 지금 한 기도 취소했으면 좋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성경에 보면(요 11:3)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에게 '주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누이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병을 주셔서 나는 지금 남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네."라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내가 처한 형편이 좀 못마땅합니까? 혹 병들었습니까? 어떤 처지이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으로 계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은혜의 승리가 있습니다. 저주받았다, 죄의 가책이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고 그 속에 은혜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시련이요, 시련은 축복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율법을 이기는 은혜의 승리입니다. 최종적인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말적인 승리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될 만 한가하고 염려합니다. 사랑이란 대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가 대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만하다, 못하다 누가 생각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요, 사랑하니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십니다. 죄가 아무리 많아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죄도 은혜로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삐를 늦추어 주었으니 죄도 짓는 것이지 벌써 벼락을 쳤으면 죄도 짓지 못합니다. 탕자에게 아버지가 돈을 주지 않았으면 집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내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이것도 은혜요, 아무리 죄가 많아도 은혜는 더 큰 것입니다. 탕자가 미련한 사람 같지마는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생각해 냈다고 하는 그것이 은혜의 승리를 이루게 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야겠다는 그것이 은혜 안에 사는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보십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세상이 악하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 삽니다.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누가 자기 의로 살았습니까? 누가 자기 의로 살 것입니까?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 그 안에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의 내가 아니고 양심 앞에서의 나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 엄청난 사랑 안에서 내 가치를 찾고 그리고 은혜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간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기도 죄도 있고 율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책도 있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사 은혜를 알게 하여 주시고 은혜를 보게하여 주옵소서. 내 많은 죄보다 더 큰 은혜가 있었음을 알게 하시고 내 어리석음보다 앞에 있는 은혜의 약속이 있음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 은혜의 간증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범사에 은혜의 승리를 찬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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