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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화 모음 37편

by 【고동엽】 2022. 6. 10.
 
[처음 목차 돌아가기]
 
 
1.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생명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2.영혼이 낙원에 간다면 몸의 부활이 왜 필요합니까?

성경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 다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종말이 이르면 우리 몸은 부활합니다. 우리는 그 때 신령한 새로운 몸을 덧입게 됩니다(고린도 전서 15:42∼49). 몸을 떠난 영혼이 낙원에 혹은 천국에서 지낸다면, 그리고 영혼이 우리 자아(自我)의 정체(正體)라면 왜 구태여 몸의 부활이 있어야 하 는지 의문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의문에 대하여 시원스럽게 답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우리 몸이 다시 부활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영혼의 불멸을 말하나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입 니다. 죽음 저편의 세계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 저 편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어서 영원한 삶이 실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피안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보증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실한
증거요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그리스도가 누리시는 영광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로마서 8:15∼17).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사망을 이기고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42 ∼44).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광의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죽음에 대한 은유(隱喩)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죽은 자가 장차 깨어 일어날 것임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몸이 잠자는 동안 영혼은 영광의 세계에 이른다는 사실과 마지막 날에 몸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사실, 이 두 사실을 우리는 서로 조화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현대적인 개념을 빌려 이해한다면, 죽음 저 편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현 차원의 세계에 살면서 사물을 관찰하고 사고하고 추론하는 우리는 죽음 후의 세계, 즉 차원이 다른 세계의 것을 추론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께는 하루가 처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씀합니다(베드로후서 3:8). 이 세상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나 저 세상에는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영혼과 몸이 죽음으로 결별하고서부터 부활로 해후하기까지의 경과는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영원에 속한 현재입니다(시편 90:4)





3.몸이 부활할 때까지 영혼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하나님 의 양자가 된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낙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
함께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는 죄수에게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42∼4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 신이 떠나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으니 저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면 주께서 다시 와서 저희를 주께로 영접하여 주께서 계신 곳에 저희도 있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3).


성경은 믿음을 따라 죽은 이들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때 하늘에 있는 본 향을 사모했다고 말씀합니다(히브리서 11:13∼16).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앞서간 성도들을 가리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표현합니다(히브리서 11:33∼12:1). 하늘 나라에서는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찬양하 며 경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요한계시록 7:9∼17).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 의 보좌로부터 흘러나 길 가운데로 흐르는데 강 좌우에는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시키는 생명 나무가 있다고 말씀합니 다. 거기에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 서 주를 섬기며 주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밤이 없고 등불과 햇 빛이 필요 없는 그 곳,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한 그 곳에서 성도들이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한계시록 22:1∼5).





4.우리의 일상 속에 오시는 부활의 주님

내가 자라던 때 부활절은 결코 성탄절만큼 재미나지 않았다. 성탄절에는 갓 베어온 전나무와 쿠키를 굽는 향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고 특별히 포장된 선물 꾸러미들이 쌓여 갔으며, 성탄절 당일은 사촌과 숙모들, 삼촌들이 모이고 웃음과 얘기들이 넘쳐나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잔칫날이었다.
반대로 부활절은 단조로워 보였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내가 형제들과 함께 교회에 갈 때 옷을 차려입는 새로운 ‘부활절’ 조항을 제외하면 여느 때와 똑같았다. 맏이인 나는 언제나 넥타이를 매었는데, 몸이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다. 예배당의 백합들은 외부에서 구입된 것들이었다. 예배 중의 음악은 발표를 위해 뽑힌 최고의 가수들이 부르는 성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언제나 템플티룸(Temple Tea Room)에서 부활절 저녁식사를 했는데, 그곳은 종업원들이 청바지가 아닌 정장 차림을 하고 테이블엔 하얀 린네르 보가 깔린 시내의 유일한 식당이었다. 부활절과 성탄절 모두가 특별했지만, 부활절은 훨씬 더 격식이 있었다. 나는 집으로 가서 넥타이를 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부활절 이야기를 읽으며 기뻐한다. 나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편안한 마음으로 성 요한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있다. 넷째이자 마지막 복음서에 있는 부활에 대한 이 이야기는 좀더 특별하다. 그러나 이 특별함은 여러분과 내가 생각하듯 격식을 차린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도 고기잡이를 떠났다(?)


우리에겐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한 형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나눠주고, 먹는 것을 실천하는 기독교 생활방식 전통이 남아있다. 형태와 내용을 많은 부분 성경에서 따온 이 전통은 성찬예식에 명백히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전세계의 부엌과 장작불 둘레에서 배고픔에 의해서든 습관에 의해서든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식사 때 표현되고 재현된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제자들 가운데 일곱 명과 함께 잡수신다. 이 설정에는 강조점이 있으며 주목할 만하다. 이 일곱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두 번씩이나 주일날 연이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인 갈릴리에 돌아와 있다.
마태에 의하면, 그 이전에 그들은 사도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가서 제자를 삼아…세례를 주고…가르쳐”(마 28:19~20). 그리고 지금, 원래의 11명 가운데 7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 그들의 옛 어업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주 최근에 예수님께 들었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보내고 있다. 왜? 왜 그들은 그렇게도 빨리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왜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아덴으로 가는 최상의 방법을 연구하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는가? 왜 그들은 기운이 절로 나서 당장 가려고 안달하거나 열심을 내지 않는가? 왜 갈릴리에서 꾸물대고 있는가?


본문에 분명한 해답이 없는 데 대해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자 한다. 나는 나와 함께 수년 동안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의 고기잡이를 떠나는 것과 같은 유사한 상황에서 왜 손을 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안다고 어느 정도 자부하고 싶다.





5.부활절 계란 풍습에 대하여

부활절 계란 풍습은 기독교 풍습이 아닙니다. 부활절을 easter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사도행전12:4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물론 다른 영어 성경에는 이 날을 passover로 정정해서 쓰고 있지만 킹제임스(흠정) 번역에서만이 easter로 쓰고 있습니다.
번역되면 유월절로 번역이 되어야 함에도 어떻게 부활절로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절하고 easter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달걀은 이방여신 easter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종교에서 이 여신이 큰 달걀에서 부화했다고 하여 이날을 기념한 것입니다. 이 신의 이름은 아스타르테-이스터라고 합니다. 바벨론에서는 달걀에 색칠하는 것을 거룩한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염색한 달걀을 거룩한 제물로도 사용을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부활절이라는 날에 행하는 색칠한 달걀을 먹는 풍습은 원래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습관이었습니다.
대영백과사전 easter 항 부분에 보면 "다산과 새로운 삶의 상징으로 봄 축제 동안 달걀을 색칠하고 먹는 습관이 있던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까지로 소급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풍습은 절대로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인들의 풍습이나 축제가 아닙니다.
원래 카톨릭에서 이방 종교의 풍습들을 기독교의 상징적인 때와 맞추어서 사용하던 습관들이었습니다.
카톨릭백과사전 5권 227쪽 부활절(easter)항을 보면 이렇게 기술합니다.
"사순절 동안 달걀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활절의 즐거움을 상징하기 위해 붉게 물들인 달걀들을 부활절 상위에 갖다 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의 기도문을 보면 "오! 주여 우리가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의 이 피조물 달걀들을 축복하여 주의 종들에게 건강이 좋은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이것을 먹겠나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달걀 풍습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교 풍습에 불과하고 그것을 카톨릭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집단이 예수님의 부활을 빙자해서 기독교를 오염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계란이 부화해서 병아리가 되는 식의 어설픈 부활이 아닙니다.
또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상징해서도 안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의 부활을 왜곡시키는 일은 더 더욱 있어서도 안될 것이라고 봅니다





6.부활을 꿈으로 본 선교사

몽고에서 선교하다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던 외딸을 잃고 그를 무덤에 장사 지낸 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지쳐 잠이 들었는데 놀라운 꿈을 꾸고 그의 슬픔이 일시에 사라졌다.
꿈속에서 그 선교사가 자기 딸의 무덤 앞에 어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빛나는 광채 속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첫번째 긴 나팔소리가 들리니 모든 성도들이 무덤이 뒤흔들리면서 열리고 두번째로 나팔소리가 들리니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 묘 앞에 서고 세번째 나팔소리가 들리니 순식간에 성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사랑하는 자기 딸도 그들 틈에 있음을 생시처럼 뚜렷이 볼 수 있었다.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일시에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해져서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계속하여 복음 증거를 하게 되었다.





7.회교도와 기독교도

오래 전에 어떤 한 회교도가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는 너희 기독교도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교도가 아라비아 맥카에 가면 모하메드의 분묘를 볼 수 있지만 너희 예루살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기독교 신자는 말하기를 기독교와 회교가 다른 것은 바로 그것이다. 마호벳은 죽어 썩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 승천한 것이다.





8.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1967년 8월 29일 프랑스 앙주에서 생긴 일이다. 이 고장의 소방대장 피자니는 심장의 고동이 멎고 의사가지 사망진단을 내렸는데도 죽은지 30시간이 지나서 되살아났다.
그는 저 세상에 가서 자신의 출생비밀까지 봤다고 한다. 피자니는 언짢은 기분으로 소방서에 출근하였다. 휴식실에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비상벨 소리가 고막을 시끄럽게 울렸다.
왱 ― 피자니는 소방차에 타자 화재현장인 20층 건물 위로 올라갔다.
피자니는 익숙한 솜씨로 고가 사다리로 오르자 소방호수의 키를 잡고 줄기찬 물을 뿜어냈다. 그런데 웬일인지 빌딩 화재가 진화되어 고가 사다리에서 내려오는데 머리가 멍청해지며 눈앞의 빌딩이 빙그레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악! 피자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15m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단단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시궁창에 떨어져서 안도감을 가졌으나 절명이었다.
의사의 진단은 응급 가료할 것도 없이 죽었다고 하였다.
부모들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아들의 사망된 것을 확인하고 통곡을 하고 입관까지 하였다.
그 이튿날도 한 참 울다가 들어보니 관속에서 "이봐요, 좀 열어 주어요 답답해요"하고 소리가 들렸다.
친척들이 놀라서 겁이 났으나 관을 열어 보니 죽었던 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의사의 진단에 죽음을 확인한 아들이 일어나다니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피자니의 볼을 쓰다듬어 보고 팔을 잡아 당겨 보고하였다.
더구나 부모들은 깜짝 놀라게 한 것은 피자니가 죽음의 세상 생활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점이었다.
메마른 나무가 무수했고 하늘과 땅이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옆에는 오색의 꽃이 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현재 부모님은 자기 부모님이 아니라. 부모님은 자기를 낳아놓고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저승에 가서 보았기 때문이다.





9.부활절 인사

롬 10:15; 요일 1:5; 행 2:31
러시아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아침 해가 떠오르는 동시에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서로 인사하면서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소식을 전하는 풍습이 있다.
모든 사람이 부활절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사람이 마음속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갖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웃이 이미 부활을 알고 있더라도 상관없다. 그는 가서 다시 그에게 부활을 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자에게 익숙해져서 모두가 기쁜 소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 안에 사는 사람이 된다면 종교를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말이 될 것이다.(브룩스)





10.부활의 영광

미국 보스톤 교외에는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 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은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다. 수치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속에 들어가 칼을 갖고 오기는 했으나 그만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천막에 들어와서 칼을 바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홀로 지켜본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시체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찾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결단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세운 것이 골든 코넬 신학원이다. 아울러 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다.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No cross, No crown -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수 없다.'





11.부활의 몸

독일의 시인 괴테는 말하기를 “죽고 다시 산다는 도리를 알기까지 너는 아무래도 처량한 나그네이다”라고 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근거는 무너지고 인간이 순수하고 덕스런 삶을 살게 하는 동기들이 없어져서 결국 세상은 향락과 퇴폐의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사람을 자제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고상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부활 신앙이 없어질 때 그 다음의 교리는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활의 교리가 기독교와 함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교리인가를 인식할수 있게 된다. 고대에서는 하늘의 형체들의 빛을 색으로 표시했는데 해는 황금색, 달은 은색 또는 녹색, 화성은 적색, 수성은 청색, 목성은 오렌지색, 금성은 백색, 토성은 흑색 등이었다. 이렇게 별들의 색깔이 다르게 표현되듯, 그들의 영광도 다르다고 한다. 그들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표현되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이렇게 하늘의 형체들의 영광이 다르듯 죽은 자의 부활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창조된 땅의 형체들이 다르고 하늘의 형체들이 다르며 또 그들의 영광도 다르듯이 우리의 현재의 몸과 장차 부활한 몸이 다를 것을 강조해준다. 또 부활의 몸의 영광도 다를 것을 시사해준다.





12.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

미국의 저명한 한 내과의사 모리스 롤링즈 박사가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한 것을 종합한 <죽음의 문 너머>(Beyond Death\'s Door)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은 대개 죽음 직전에 기절한다. 통증이 없어지는 듯하며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간다.
가족과 간호원이 분주히 움직이며 의사를 찾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의사의 사망 선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자기는 이미 육체밖에 나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깨어난 후 그 방안에서 있었던 일과 대화 내용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은 자기가 죽었다고 믿어지지 않으며 자신의 육체는 속 빈 껍데기이며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의 시신 같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나는데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순간 마치 어느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 같고, 우주 로켓이 공중에서 분리되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 밖에 나가서도 존재하고 있고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신체 감각을 갖고 있는데 육체의 감각보다도 더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자기의 육체에서 이탈 후 두둥실 떠돌며 잠시 방안에서 머물다가 그 다음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고 증언하는 내용은 어느 보고에도 공통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죽으면 혼이 나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쁜 경험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불의 바다를 끼고 신음하며 그 공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으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는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가는 무서운 경험을 호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즐거웠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얼마 전까지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통증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 쾌적한 기분으로 다시는 앓는 것이나 죽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별안간 가슴의 통증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기분이다.”고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빛의 천사 또는 사랑이 넘치는 존재에게 이끌려 황금 빌딩과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는 경험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빛의 존재자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두터운 그리스도인들은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천상의 빛에 휩싸인 거룩한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합니다.
영혼은 심판을 받고 그 사람에 합당한 운명을 따라야만 하는데, 대낮처럼 밝은 빛 속에서 그가 생전에 행한 일들과 말이 하나도 남김없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밝혀지므로 이 세상에서 숨기고 감추어졌던 모든 사실이 사후에 다 밝혀져서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위대한 전도자이며 대 설교자였던 D. L. 무디 목사님이 죽음이 임박했을 때의 경험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1899년 12월 22일 금요일 아침, 죽음이 임박했을 때 목사님의 아들 윌은 복도 건너편 아버지의 방에서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그때 윌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가서 목사님을 보았는데 무디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윌,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고 말하고 나서 의식을 잃어 갔는데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고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의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주치의가 구명 노력을 하자 다시 살아나 자기가 이 세상 바깥 세상에 갔다왔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보았느냐고 묻자 무디 목사님은 먼저 죽은 아이린과 드와이트를 만났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한 후 영원한 내세로 갈 신호를 받고,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이곳에 잡아둘 수 없다. 나를 데리고 갈 마차가 방안에 와 있다.”고 말하며 밝은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게 되면 무디 목사님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Mrs. D라는 여자 분도 죽었다가 살아난 후 그녀가 죽어 있는 동안에 본 일을 기술했는데 찬란한 밝은 빛에 휩싸인 예수님과 그녀의 죽은 남편 등 친지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늘 나라에 머물러 있고 싶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음을 알리라”고 명하셔서 다시 이 땅에 보내졌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천사는 번쩍이는 건물과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 동화 같은 도시의 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도처에 아름다운 빛이 가득 했다. 그 빛은 불타는 듯 현란했으나 눈을 가려야 할 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가 죽은 후에 경험할 일들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13.반박의 글을 쓰다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밀한 조사와 연구 끝에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는 연구를 종합하여 책을 썼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유명한 책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 무근이라면 십자가에 죽인 바리새인들이 큰 증거를(세워) 선전했을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부활신앙은 우리들에게 새로워지는 기대감에 찬 생활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을 무력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낡음의 문제입니다. 험난한 세파에 치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낡음의 관념에 시달리는 이들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창조해가는 힘을 줍니다. 다른 교리와는 달리 부활신앙은 지하수처럼 우리 인격의 저변을 흐르면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생기의 근원이 됩니다.





14.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15.생명과 부활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두움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로 인해 모든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습니다.





16.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 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17.부활

부활에 반대하는 주장, 즉 부활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논의를 살펴봅시다.
한 가지 논의는, 4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모순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 근처라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말을 전해준 사람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무덤에서 말을 전한 사람은 "한 젊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젊은이"가 무덤에서 말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에 있는 사람은 "천사 하나"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두 천사"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이나, 틀림이 있는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확실히 모순이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어떤 드라마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이고, 사건의 외관 문제일 뿐이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중심 내용에 관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비유로써 생각해 봅시다. 세 사람이 축구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한 사람은 갑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을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 아무개 선수는 매우 지저분한 선수라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선수가 다만 지나치게 열심히 싸우더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에 의하면, 심판이 훌륭했다고 보는데 반해, 한 사람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러가지 생각이나 평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득점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형식을 변경할 수는 있으나, 얻은 점수만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보는 관점 외관, 그것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라는 사건은 시종 불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한 젊은이"가, 요한복음에는 "두 젊은이"로 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주후 60년경에, 요한복음은 주후 1백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가 40년간, 이야기 또 이야기되었다고 하면, 도중에 그 이적에 대해서 점점 구체적이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는 시종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은행가 제임즈 호프 심프슨경과 수표및 수표의 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일한 사람에 의해 싸인되었다고 생각되는 두 장의 수표를 손에 넣고, 이것을 햇볕에 비추어 보고, 받쳐보고서, 전혀 틀림이 없고 1미리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두개의 싸인이 일치될 경우면, 그 중의 하나는 위조수표라고 믿어도 틀림없습니다.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똑같이 두 번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학교의 교사는 두 소년이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듣거나, 대학에서 두 학생이 꼭 같은 답안을 제출했을 때는 이것을 진실이 아닌 공모나 합작인 것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이야기란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될 때, 반드시 틀리게 마련입니다.
그 틀림과 모순이야말로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사람의 창작이었다면, 계산이 조금도 어긋남 없게 조화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향대로 계산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그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William Barclay, A New People's Life of Jesus





18.부활을 설명한다면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





19. 부활

복음서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1)동일성(identity):이것이 중심점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장사 지낸바 바로 그
예수다.
2) 연속성(continuity): 예수께서는 육체적 감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신체의 형태로 부활하셨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도 부활의 육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3)비연속성(Discontinuity): 비록 육체적 부활을 하셨지만 그 신체는 이전과 똑같은 신체는 아니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세력을 소유한 변화된 몸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종말론적인 성격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에서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하는데서 더 분명해진다(고전15:20). 첫 열매란 오늘 우리에게 별로 명확한 뜻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이것이 전달하는 의미가
매우 생생했을 것이다. 첫 열매는 추수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실제적인 추수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곧 풍성한 수확을 하려는 추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라 함은
1) 신자들의 부활을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부활은 이제 희망 이상의 한 사건이 된다. 모든 것이 이 사건에 달려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라 함은 우리의 부활을 확증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활이 그의 부활과 같은 것임을 가르쳐 준다.(빌3:21, 고후5:4)





20.애벌레와 잠자리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줄기를 타고 물위로 올라간 수많은 자기의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은 탈바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애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는 성도의 영적 변화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중생의 감격과 기쁨에 살게 되면 근심하고 염려하고 애벌레같던 옛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에서 잠자리처럼 훨훨 날며 살게 될 것입니다.





21.부활에 관한 금언

0 기독교는 종교가 끝나는데서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죤 s. 웨일)
0 복음 서신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부활이 복음 서신들을 설명한다.(죤 s. 웨일)
0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믿는 것은 오직 그의 부활의 완성된 사실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파운스 박사)
0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좋으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더욱 선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 속에 부활시킴은 더욱 선한 일이다.
0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들 속에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들마다에도 쓰셨다.
0 주님의 왕관에서 빛나는 금강석은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마침내 천국의 불멸하는 존재들에게 내린 은총으로 부활한 모든 인간의 영혼에까지 다다른다.(마르틴 루터)





22.부활의 향기

백화점 야채코너보다 재래시장의 채소 난전이 더 자연스럽다. 다듬어져 하얀 살을 내보이는 정돈된 야채에 비해 재래시장에 펼쳐진 봄나물이 더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엉클어져 자유롭고 편안함이 봄기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봄나물에서 지난 겨울 부산하게 맨몸으로 땅을 뚫고 올라온 흔적이 보이는 듯하여 애착이 간다. 거친 흙을 뚫고 올라온 연한 줄기들은 예수의 부활을 닮은 것 같아 행복하다.
나물의 새순들이 땅속에서 딱딱한 흙을 뚫고 나오는 것을 지레 포기했다면 생의 향기는 기대할 수 없고 땅속에서 썩고 말았을 것이다. 봄나물은 생명이 있어 엷은 향이 우러나온다. 된장을 풀어 끓인 달래와 냉이국은 저장된 음식의 입맛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 좋다.
예수의 부활은 절망이 희망의 향기로, 죽음은 부활의 향기로 다가왔다. 성경에서 부활의 메시지는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하였다. 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메시지인가.부활이 있기에 내일이 있고 부활이 있어서 살맛이 난다. 봄나물이 봄의 향기를 전하듯 부활의 소식은 삶의 향기를 전함이다. /정종기 교수





23.부활의 새로운 역사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21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24.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한태완 목사(예화포커스)





25.부활의 기쁨

성경: 요한복음 20:19-29 * 찬송155장
첫 부활주일은 큰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모든 눈물을 거두어 주신 날입니다. 수난 금요일은 말 그대로 눈물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많은 여자들뿐만 아니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곡하고 애통해 하였습니다. 부활 주인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가까이 와서도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 그 모습을 보일 때에 그들의 기쁨은 말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잡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실 그들의 눈물만 거두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이 땅 위에 뿌려진 인류의 모든 눈물을 거두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리겠느냐?" 하는 의문은 욥기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은 이 인간의 깊은 욕구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대답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 잠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도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리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 기도: 이 부활주일의 기쁨을 생각할 때에 우리 가정에 새로운 승리, 새로운 기쁨의 크신 은총을 더하여 주옵소서.





26.부활절 성찬

김미자 집사의 남편은 말기 위암이었다. 암세포가 임파선까지 전이돼 의학적 치료는 끝난 채 임종만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두려웠다. 진통이 찾아올 때는 더욱 두려웠다. 그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김 집사가 부활절 성찬예배에 참석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자기 몫의 성찬을 챙겼다. 떡은 손수건에 싸고, 포도주는 작은 병에 담았다. 성찬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고통 속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편에게 성찬을 내밀었다.
“여보, 오늘 부활절 성찬입니다. 당신을 위해 내 몫을 받아왔어요. 이 떡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 영생하라고 주신 주님의 몸이고, 이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당하신 주님의 피랍니다.” 남편은 아내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았다. 기적이었다. 평안이 오고 고통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김 집사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성찬은 그렇게 받는 것 아닐 텐데요.”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27.부활의 종교

해리 리머박사가 한 회교인 관리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회교도 관리는 대답하였다.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회교 관리도 지지않고 대답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 스스로 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
또 리머 박사가 말하였다.“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음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회교관리 역시 대답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리머 박사는 다시 한번 강조해 말하였다.“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 관리 역시 또 대꾸하였다.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 리머 박사는 또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자들로 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분의 말씀은 실제로 증거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 관리는 말하였다. “우리는 죽은 이후의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28.부활의 주님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 했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속에 시가행진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한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작이 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들처럼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니요 산 자를 믿는 종교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예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을 찾을 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나?"라고 하는 천사들의 책망을 들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요, 책 한 권 쓰시지 않으셨고, 번듯한 집 한 채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으시면서도 세상의 부의 주인이 되시며, 군사 한 명 없으셨으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29.그리스도인의 D-day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프랑스 상륙을 허용하게 된다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프랑스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6일날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 대전을 결정적인 승리의 자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을 ‘디데이’라고 합니다. 물론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날은 ‘디데이’라고 안하고 ‘브이데이(V-day)’라고 합니다. 바로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직도 사단의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브이데이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로새서 2: 15)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30.부활은 인류를 향한 최고 선물

스칸디나비아에 페드로라는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페드로의 어선은 나뭇잎처럼 표류했습니다. 칠흑같은 밤, 페드로는 파도와 강풍에 맞서 몇 시간을 싸웠으나 방향과 기력을 모두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먼 곳에서 강렬한 불기둥이 솟구쳤습니다. 불기둥은 곧 육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페드로는 사력을 다해 불기둥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맞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통곡한 이유가 달랐습니다. “여보, 제 실수로 우리집에 불이 나서 세간을 몽땅 태웠어요. 이를 어떡하면 좋아요” 그 생명의 불기둥은 바로 페드로의 집에서 피어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껴안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여보, 고맙소. 당신이 실수로 불이 난 것이 나와 아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기등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침몰했을 것이오. 집에 불을 내줘서 고맙소”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불기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까짓 초가삼간이 불 타는 아픔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상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31.이디 아민 목사

1973년에 당시 우간다라고 하는 나라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이 독재자로 인해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그 가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판디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무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교회에 막 쳐들어 왔다. 목사님을 죽이려고. 그 분에게 총을 들이댔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그러시죠 뭐. 하지만 내가 이제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마지막이니 그러라고 했다. 목사님은 조용히 기도를 했다. 그런다 아무 다른 기도가 없고, 예수님께서 하시던 기도 그대로 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아멘"했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기도해줘서 고맙습니다"하고는 그냥 가더란다. 그 분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 금방 죽는다고 하지만 아무 두려움도 없다. 왜? 부활절 아침이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부활 신앙으로 충만해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곽선희 목사 설교예화 중





32.부활 신앙의 부활

미국 대통령을 지낸 부시가 부통령 시절에 소련 부레즈네프 수상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장례식은 공산당의 관례대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 색이나 붉은 색으로 덮여 있었다. 장례식의 말미에는 고인을 위한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순서가 있었고 이때 고인의 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품에 간직했던 백합 한송이를 꺼내어 관 위에 놓았다. 백합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리고 미망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식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여인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일어선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이 순간, 여기 저기서 미망인을 따라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조지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얼어붙은 소련 땅에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순간 부활 신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 이동원





33.부활 증인과 증거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 간의 기록이다. 사도행전의 수백 명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이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보다 진실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것은 없었다. 공모 사기 사건이라면 무슨 대가를 바랐을까. 금생과 내세, 영육간에 백에 하나도 유익이 없는 일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순교를 해야 했던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설명이 안 된다.





34.위기를 기회로

세상을 변화시킨 기독교 역동성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없는 박해와 도전을 만났지만 언제나 위기를 갱신의 계기로 삼아 스스로를 정화하며 세상을 압도하는 생명력으로 변화의 주체가 됐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신앙의 초석이며 변화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 어떤 슬픔과 공포,회의와 실망,고통과 상처도 부활의 사실을 믿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며 부활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감격의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자연 목사





35.부활절의 첫 복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36. 나 보이니?

연예인들의 특성상 그들이 신앙을 갖기란 매우 힘들었는데, 각고 끝에 연예인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제자들과 말씀하시는 장면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지요?"
미리 성경을 읽어오라고 누누이 말을 했건만 바쁜 일정에 누구도 성경을 읽어오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요.
모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이리 저리 휘저으며 유령 같은 몸짓으로 하는 말
"예들아~ 너희들은 내 몸이 보이냐?...."
엉뚱한 말 한마디로 어색한 분위기는 갑자기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엉뚱한 연예인이 바로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님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웃음은 사람에게 여유를 갖게 합니다. ⓒ최용우





37.3일의 비밀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 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즐거워 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의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게 늘 즐겁기만 하지요"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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