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 돌아가기] |
주후1334년으로부터 1345년 간에 영국의 성자라는 이름을 얻고 또한 당시의 가장 박학가였던 떨한 감독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외우면서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를 힘썼으며 또한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이 감독의 그와 같은 태도와 열성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지도하에 하나님과 교직에 열심으로 봉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성자란 별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매사에 감사하며,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이다.
2.죠지 물러
이 두가지는(영적/ 사회적) 건전한 영적 삶에 있어서 병행한다. 죠지 물러는 기도의 위인이었지만 동시에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도 위대하였다.
챨스 스펄젼은 군중 앞에서 설교하였지만 여러 양로원과 고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구세군 대장인 부드는 타락한 자들을 위한 복음전도자였지만 또한 실업 구제사업과 부녀자들을 위한 제반 사업을 대규모로 조직한사람이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내세는 물론 현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자들은 대체로, 현세에서 사람들을 위해 최대의 것을 하는 자들이다. 영혼의 가치에 대해 깨달으면 영혼을 간직한 몸을 점점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전체를 돌보아야 한다.
3.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를 가까이 하는 사람마다 그녀의 인격에 순결한 감동을 받습니다.
특별히 질투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 입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사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4.투병기
우리나라의 유명한 목사님 중에 모 신학대학장을 지낸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과 싸울때의 상황을 기록한 투병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이 마산 요양소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앞으로 석달밖에 살지 못할것이라는 사망선고와 같은 엄청난 말을 의사로 부터 들었다.
"의사가 석달만 산다고 하였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께 기도한 대목이 있다.
또 석달을 살더라도 죽을때까지 목사로서, 신앙인으로서 할일을 다하자고 하여, 어린 소녀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주고, 다른 환자를 위로하고 , 죽은 환자의 장례도 치르고, 설교도 하고 찬송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 나중에 의사가 찬송을 부르면 환자가 빨리 죽는다고 엄금하자 시를 쓰거나 감상문을 써서 환자에게 쪽지를 돌리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의사와 간호원이 오지않는 새벽에 숨어서 예배를 보았다는 눈물겨운 신앙의 활동이 그 책에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목사님을 하나님이 언제 데려갔는가? 석달?, 삼년?, 아니다. 삼십년을 더 살게 하셨다.
5.봉사의 동기
몸도 좋지않고 학벌도 좋지 않고 어느모로 봐도 자랑할 것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축복 속에 살고 있는 한 성도가 가만히 자신이 왜 축복을 받고 사는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옛날 시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기도하러 교회를 가는데 비가 오고 벼락치는 소리가 나고 천둥이 치는데 이왕 나온 김에 잠간이라 들러서 가자 하고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천장의 기와 이은 진흙덩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이를 본 그는 갑자기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더럽혀져서야 되겠는가 하고 떨어지는 진흙을 등으로 받아 계속 교회 밖으로 내다버리기를 수없이 하였고 그는 거기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느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아무도 나를 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확신을 나름대로 가지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된 그는 늘 "나는 자격이 없진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게 되었다" 고 고백하곤 하였다.
6.한 여인의 이야기
한 순간에 자신의 안락한 세계가 무너져 내린 여인이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남은 여생을 어두운 방안에 숨어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드러내주는 찬란한 햇볕 아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쪽 눈이 없어지고, 코가 비뚤어졌으며, 몸이 상처투성이고, 한쪽 팔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내부에서 뿜어나오는 광채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1982년 어느 아침 만취한 운전수가 몰던 차와 충돌하여 그녀의 차가 고속도로 중앙선을 넘어가폭발했을 때, 그녀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차에 타고 있던 모든 가족들은즉사하였고, 그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무서운 날이 있기 전에는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는 능력있고 자상한 남편 밑에서 소녀들이 꿈꾸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악몽의 날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으나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녀는 6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흉칙한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기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데 70번이 넘는 수술기간 중에 단 한 번 우리의 전도집회를 시청하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다. 7년 동안의 은둔생활 끝에 그녀는 더이상 숨어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데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무능력하지만 다른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활센터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 어느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7.조연과 악역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연도 필요한데 사람들은 서로 주연만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가 하면 노를 저을 사공이 없어 난처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색이 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북적기리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는 발걸음이 끊어집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라는 곳에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 오갈 곳 없는 이들 1천2백여 명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가족마저 외면한 이들을 누가 돌보는지 아십니까? 1백50명의 자원봉사자들이랍니다. 환자들에게 주연을 맡기고 자신들은 조연에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스타플레이어의 영광 뒤에는 그늘에 가린 조연의 눈물겨운 봉사가 있습니다. 복서의 금메달은 무명의 스파링 파트너와 코치가 만들고, 축구의 골게터는 조연의 헌신적인 어시스트로 탄생됩니다. 뭔가를 이루자면 악역도 필요합니다. 서로 나서기를 꺼리는 역을 누군가 맡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역만 맡으려 하고 악역은 맡기를를 꺼려 합니다. 그런 악역을 서로가 회피하려고만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조연도 필요하고 악역도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연도 악역도 나누어 맡아야 합니다. 조연과 악역에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줘야 합니다.
8.주는 사람
미국의 성공한 식품회사인 프리토에 관해 놀랄만한 것은 견고하게 짜여진
훌륭한 경영조직이 아니며 잘 행해지고 있는 광고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만명에 이르는 세일즈의 힘이며 그것의 99.5%가 봉사의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프리토는 우리의 짧은 안목으로 볼 때 분명히 비경제적인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30불 짜리 포테토칩 상자 두 개를 상회에 배달하기 위해 프리토 회사는 몇백 달러를 소비하며 트럭을 보냅니다. 그것은 돈을 벌지 못할 조치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는 포테토칩 한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또는 허리케인이나 어떤 사고로 인해 어지러진 상점을 깨끗이 청소해주기 위해 모진 날씨도 무릅쓰고 달려가는 세일즈맨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본사에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를 심은 결과 프리토 레이 회사는 많은 판매량을 내고 있으며 매년 포테토칩과 프레츨 판매가 20억불 이상에 이르렀으며 미국시장의 60-7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정신과 다른 사람을 돕기 원하는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으십시오. 이것은 봉사를 실행하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입니다. 주는 사람은 투자의 원리를 실행합니다. 받는 사람은 주는 것을 투자로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쌓아 두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는 사람은 승리하며 받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9.손
맹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원 봉사자 모임이 있었다. 방송국 성우, 국어 선생님, 감정이 풍부한 연극배우 등 다들 재미있게 책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맹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봉사자는 안경할머니였다. "발음이 정확하질 않는데..." "눈이 어두워 더듬거릴텐데..." "입에서 냄새도 날텐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군대던 봉사자들은 맹인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꼭 내 손을 잡고 읽어 주시거든요"
10.예배를 드리는 기쁨
음악가 곽상수 씨는 금년에 성가대 지휘 50주년을 맞는다. 22세부터 72세까지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이런 일은 억지로 안된다. 예배드리는 기쁨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연세대 송자 총장은 박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총장이 되었으나 여전히 성가대 말석에 앉아서 봉사하고 있다. 이런 일도 예배의 기쁨을 스스로 체험하는 자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11.행복의 비결
한 소녀가 산길을 가다가 예쁜 나비 한 마리가 가시덤불에 걸려 바둥대는 모습을 보고 가시를 헤치고 들어가 구해 주었다.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 구해낸 나비가 훨훨 날아가다가 돌연 천사로 변한다. 소녀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소녀의 소원은 "행복하고 싶은것"이었다. 천사는 귀에다 몇 마디 말을 속삭여 주고 간다. 소녀는 자라서 주부가 되고 할머니로 변해 가면서 행복하고 생기있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부러워했고, 존경했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했어도 전혀 후회없는 기쁜 얼굴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는가 묻자 그때야 속삭이던 천사의 말을 공개한다. 천사는 "누구든지 아무리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당신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그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존재가 되라.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행복하게 살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찾지말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자.
12.호세의 발
추운 겨울날, 캘리포니아의 한 부랑아 수용소인 마린카운티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걸인, 부랑아들로 부적거렸다. 간이침대와 담요가 턱없이 부족하여 흑인, 라틴아메리카인, 백인들이 서로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자원봉사자인 로드니는 난감하기만 했다. 몇몇 부랑인들은 다른 사람의 담요를 빼앗기까지 했고 한 흑인여성은 자신에게 담요가 돌아오지 않자 인종차별이라고 큰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런 혼란 중에 마지막 남은 담요 한 장은 라틴아메리카인인 호세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호세는 담요를 수용소 한가운데에 펼치더니 금새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 때 어딘선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호세의 발냄새였다. 악취가 온 수용소 안에 가득 차오르자 부랑아들이 발을 씻기려 했지만 91kg이 넘는 거구의 호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냄새를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호세를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하자 같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이 폭발할 것 같은 노한 표정으로 주위를 노려보았다. 실내는 금새 험악해셔 싸움이라도 한 판 벌어질 분위기였다.
그때 로드니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따뜻한 물을 담은 세숫대야와 비누, 수건을 챙겨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호세의 발앞에 무릎을 꿇고 양말을 벗겼다. 그리고 호세의 발을 대야에 담그고 씻기기 시작했다. 발바닥, 발목, 발등, 발가락까지 로드니는 아주 정성스럽게 발을 닦았다. 어느새 로드니 주위로 부랑아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로드니는 난폭한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할 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손가락이 떨리기까지 했다. 얼마 후 로드니가 수건으로 호세의 발을 닦아주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묵 속에서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운 손길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수용소에는 더 이상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세의 머리맡에는 부랑아들 중 한 명이 가져다 놓은 새양말이 얌전히 포개져 있었다.
13.장애아들의 어머니의 죽음
"하나님이 내게 보내 주신 버려진 이 아이들과 영원히 같이 살기로 했어요"
39년 동안, 병들어 버려진 아이들 속에서 대리 엄마로 살아온 김정순보모 (59. 시립아동병원 근무)가 지난달 29일 오전 6시50분쯤 출근길에 근무처인 아동병원앞 횡단보도에서 뺑소리 승용차에 치여 홀연히 장애아들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매일 출근과 함께 25명의 소아정신과 환자들을 목욕시키면서 "사타구니를 깨끗이 씻어줘야 냄새가 안난다"고 후배 보모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을 기억하는 병동 사람들은 어이없는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욕창이 걸리지 않도록 아이들을 안아 자세를 바꾸어주다 보면 찾아오는 어깨결림 등 육체적 고통으로 보모들이 3년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바꾸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김씨는 한사코 아동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질 때까지 밥을 먹였고 운동시간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든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웃음으로 대하며 보모의 자리를 지켜왔다.
병동 사람들은 그녀가 경련이나 발작이 찾아오기 전의 환자를 누구보다 먼저 발견해냈다고 말했다.
김씨는 57년 서울시 임시직원으로 채용돼 63년에 아동병원의 전신인 시립영아원에서 보모가 된뒤 이듬해 정식 행정직 공무원이 됐으나 병동 근무를 자원해 지금까지 행정직이면서도 병든 아이들의 병상을 지켰다.
행정직의 경우 밤 근무가 없는 데도 밤 근무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장애아들에게 정성을 기울였다. 병동의 어린이들은 부모가 치료를 포기해 버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장애아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발작을 일으키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온 셈이다.
이 병원 최등자간호과장(53)은 "영아원 당시 해외입양 간 아이가 처녀가 돼 찾아오고, 질병이 호전돼 재활원 등으로 떠난 아이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이들을 껴안아주곤 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31일 시어미니(90)와 남편 김홍식(63), 대학을 졸업한 두 아들 등 가족이 다니는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갖고 화장됐다. 그녀는 평소 집사 직분과 구역장을 맡는 등 신앙심도 깊었다. 서울시는 1일 무연고 장애환자 관리업무를 헌신적으로 펼쳐온 김씨의 공로를 인정, 지방 행정주사보(7급)에서 행정6급으로 1계급을 추서하고 표창장과 위로금 5백만원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14.서비스
영어 단어 가운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마 `서비스(Service)'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잘하면 흔히 서비스가 좋다고 말한다. 이 서비스라는 말은 `봉사'라든가 `섬김'이라는 뜻이 있는데 교회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서비스'라고 한다. 참으로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런데 이토록 좋은 의미를 가진 말 앞에 거추장스러운 어귀가 붙으면 완전히 이상한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령 `립(lip)'이라는 말을 붙여서 `립 서비스(lip-service)'라고 하면 `말 뿐인 호의, 공치사, 혹은 말뿐인 신앙인' 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눈이라고 하는 `아이(eye)'를 붙여서 `아이 서비스(eye-service)' 라고 하면 `주인이 볼 때만 일하는 체하는 것이 된다. 성경을 보는 것이 고작이요 실천이 없는 신자들'을 말한다.
다음으로 `귀'라는 `이어(ear)'를 붙여서 `이어 서비스(ear-service)라고 하면 `윗사람이나 나라의 명령을 들어준다는 것, 신자가 목사의 설교를 그저 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즉 "목사님, 실컷 떠들어대슈. 나는 그저 귀나 빌려 드릴게요"하는 식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가 "천국에는 목사의 입과 신자들의 귀만 외 있더라"는 말은 목사가 `립 서비스'만 했다는 말이요,
신자들은 `이어 서비스'만 했다는 말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국가나 백성들에게 `립 서비스'나 하고 국민들이 정부에 `이어 서비스'나 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
거기에는 수확하는 것은 위정자들의 입과 백성들의 귀밖에 더 있겠는가!
정부나 백성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충성스럽게 봉사할 때 뜨거운 `하트 핸드 서비스(heart-hand-service)가 되리라고 본다.
15.하나의 꿈이 또 하나의 꿈으로
첫번째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헨리 듀넌트는 `적십자사'의 창립자이다. 그가 은행장으로 있을때는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파리에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전쟁터에 가서 나폴레옹을 만나야겠다는 신념속에서 포탄이 날아오고 수많은 시체를 보았으며 피투성이된 환자를 보면서 인간 생명의 허무함을 느꼈다. 그는 부상자들을 돕고 거기서 한가지의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를 만나 경제적인 부를 획득하겠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그는 고향에 돌아오면서 한가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땅에 폭력과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돕는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한가지 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이 이 유명한 `적십자사'이다
하나의 꿈이 좌절 되었다할찌라도 듀넌트는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고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발견하여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16.예수 이름으로
미국의 「헨리 누엔(Henri Nouwen)」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명문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 박약자 수용소인 <데이 브레이크(Day Break)>학원의 직원으로 자청해 가서 봉사했다. 여기서 그는 정신박약자들 에게 용변 보는 법을 가르치고, 식사와 세수를 돕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버드」대학 교수가 된 후 책도 20여 권을 집필했으며, 그 책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누구나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할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그 길을 포기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요지는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님이 말씀하고 몸소 행했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만 체험된다는 것이다.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니 예수는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17.봉사료는 필요없습니다
서비스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평가받은 일본 교토MK택시 창업주 유봉식님의 성공이야기이다. 석유 회사 `니가이 석유'를 그가 인수한 것은 첫번째 사업이 실패한 지 3개월 만이었다. 다시 잘해 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도매상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해도 석유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그 동안 니가이 석유의 신용도가 땅에 떨어진 걸 몰랐던 것이다. 당장 급한 것은 신용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는 급한 대로 형에게 돈 1백만엔을 빌렸다.
그리고 그는 도매상에 현금을 당장 지급할 테니 석유를 보내 달라고 전화했다. 예상대로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트럭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는 석유를 그냥 내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돈부터 먼저 받고 내려 주게나" "아닙니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그의 엉뚱한 제안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도매상 인부들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석유를 팔겠다고 업자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후 니가이 석유 회사는 `24시간, 연중 무휴'라는 광고를 냈다. 더 이상 니가이 석유 배달 사전에 `잠시 후에', `내일'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밤 누군가 가게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휘발유가 떨어져 차가 멈추어 있는데 휘발유 5겔런만 파실 수 없을까요?"
중년의 신사였다. 그는 흔쾌히 휘발유 초롱을 자전거 뒤에 싣고 차가 멈추어 있는 그곳까지 배달해 주었다. 그 신사는 기름값으로 1천엔을 내놓았다. 거스름 돈은 봉사료로 받으라는 것이었다.
"손님 봉사료는 필요 없습니다. 기름값에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돈이 없으시다면 다음에 주십시오"
그 신사는 그러자하고 명함 한 장을 건넸다. 가게로 돌아와 명함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신사는 바로 재계를 대표하는 교토 물산의 고이케 사장이었 다. 신사는 그의 친절에 감탄했다면서 앞으로 회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름을 니가이 석유에서 구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일이 있을 후 그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서비스를 파는 거야."
18.봄은 반드시 옵니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여행용 가방 외에 또 하나의 가방에 꽃씨를 가득 담아 여행지에서 그 꽃씨를 뿌리고 다녔다. 이 사람은 특히 기차를 탈 때 달리면서 철도 주변에 꽃씨를 뿌렸는데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당신은 이 길로 두 번 다시 오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데 왜 꽃씨를 뿌립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봄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입니다"
19.놋 비문의 교훈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있는 낡은 교회 마당에 두 손을 활짝 편 예수님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그 마을 가까이에 떨어져서 그 조각상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이 물러가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그 조각상의 조각들을 찾아서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조상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그들은 몹시도 아꼈습니다.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몸체는 여전히 아름다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각상의 양 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렇게 한탄했습니다. “상처투성이 손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손이 없어서야 어떻게 주님이라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각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그때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이 기꺼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조각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라고 쓰여진 놋쇠판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수년 후 어떤 사람이 놋 비문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내겐 손이 없으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20.서비스 맨과 거지의 차이
미국의 유명한 실업가이자 자선 사업가인 록펠러가 한 호텔에 묵었을 때의 일이다. 호텔측은 이름난 부자로 알려진 그를 맞이하여 작은 실수라도 없게 하려고 무척 신중을 기했다. 록펠러가 머무는 동안 그의 시중을 들게 된 젊은 종업원은 지배인으로부터 세심하게 신경을 쓰라는 특별 당부를 받고, 혹시라도 록펠러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눈치 있게 알아서 척척 해내는 종업원의 태도에 록펠러는 매우 만족해 하면서 속으로 쓸 만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호텔을 떠나게 된 록펠러는 그 동안 자신을 돌봐 준 종업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호텔의 규정대로 숙박료의 일부에 해당하는 만큼의 서비스료를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 호텔을 나오다가 등 뒤에서 종업원이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쳇, 미국의 대부호가 겨우 요만큼의 팁을 주네."
록펠러는 호텔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서 그 종업원을 불러 말했다.
"젊은이, 자네 말대로 나는 지금 당장 자네에게 많은 액수의 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미국 최고 부자임에 틀림없네. 그러나 내가 자네에게 규정이상의 팁을 주는 순간 자네는 호텔 서비스맨이라는 당당한 지위에서 적선 받는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전락하고 마는 거라네. 왜 스스로 그 같은 위치로 전락하려 하는가?"
말을 마친 록펠러는 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멈춰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나는 그동안 자네를 눈여겨보면서 성실한 태도에 호감이 가 우리회사에 특채를 할 까 생각했는데 자네 스스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군."
록펠러의 충고를 들은 종업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1.[노인문제] 혼자 사는 노인 요구르트 배달원이 살핀다
요구르트 배달원들이 혼자서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들의 안부와 건강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서울 성북구는 거택보호자 가운데 혼자 사는 65살 이상 노인 6백5명에게 요구르트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배달원들이 이들의 안부를 매일 확인하는 방안을 마련해 추진중이다. 배달원들에게 대상 노인들의 집을 미리 알게 한 뒤 전날 배달한 요구르트병이 그대로 놓여 있거나 다른 이상이 있을 때 이들의 안부를 확인해 동사무소로 연락을 취한다는 것이다.
구는 이 사업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후원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인들에게 요구르트 비용을 대줄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후원자들이 생산 업체에 돈을 내면 이 업체가 요구르트를 배달하면서 배달원으로 하여금 노인들의 건강을 점검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후원자들은 노인들의 1달 먹는 값인 3천원을 기본 단위로 해서 몇 개 계좌든지 가입할 수 있다.
구 관계자는 "혼자서 어렵게 생활해가는 노인들은 건강이 악화돼 쓰러져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며칠이고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 사정을 잘아는 배달원들이 매일 안부를 점검해주면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이달 말까지 관내 30개 동별로 대상 노인과 배달업소를 결정하고
배달원들에 대한 교육을 마친 뒤 다음달 말까지 후원자 모집을 끝내 10월초부터 이 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22.크리스마스 씰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개발하고 이를 보급, 판매하기 시작한 이는 누구일까? 해마다 12월이면 접하는 이 의문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1890년에 내한한 캐나다 출신 여의사 로세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한국 최초의 여성을 위한 병원인 보구녀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도착 즉시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여성을 위한 의료교육을 시작하였다.
1891년에는 역시 캐나다 출신 의시이자 목사인 홀(William J.Hall)이 내한 하였고, 그는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앞서 내한한 셔우드 와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홀 의사는 청일전쟁 당시 만연하던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 치료에 몰두하다가 과로에 학질이 겹쳐 1894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34세였다. 한국에 온지 꼭 3년만이었다.
미망인 로세타 셔우드에게는 겨우 돌을 지낸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셔우드 홀이었다. 이때 그녀는 또 임신 7개월째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897년 그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에디스를 데리고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고 남편을 기념하여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기홀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이다.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살던 셔우드는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거쳐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었다. 역시 의사였던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결혼한 그는 아버지를 이어 선교사의 신분으로 1926년 내한하였다.
처음에는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면서 해주 의창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후 그는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의 퇴치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당시 폐결핵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기에 결핵퇴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서는 최초로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1928년 해주 교외 왕신리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뒤 결핵협회(The Tuberculosi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1932년 12월부터 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씰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씰, 그것은 홀 의사의 한국인 사라의 씰이었다. 그는 선교사로 내한한 이래로 1940년까지 14년간 한국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일제에 의해 마지 못해 한국을 떠났던 그는 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뒤 1963년 은퇴하였다.
본국에서 노후를 보내던 홀 의사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1978년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라는 자서전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그는 1992년 9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유해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23.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
"죽기전에 이북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 두손 붙들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 따라가야 한다고 전해야 되는데...그래도 두 어깨가 너무 아파 저녁에 잠이 통안오면 그냥 영원히 눈을 감고 싶어지기도 해."
지난 95년 1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장기려박사의 소망은 단하나, 북녘에 두고온 가족을 전도하여 천국에서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
"저녁에 가서 우리 가족들을 만나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건데 그리 안타까울 것도 없지..."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사랑을 몸소 실천한 장박사는 자신이 남을 도우면 누군가도 북쪽에 있는 자기 가족을 돌봐주리라는 믿음으로 늘 기도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끝내 가족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것은 지난 12월 25일 아기예수 탄생의 기쁨으로 온세상이 들떠있을 때였다.
"나의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85세의 나이로 타계한 장박사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예수의 참 제자였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베풀며 살아온 장박사가 가족과 헤어져 차남 가용(61. 서울대 의대교수)씨만 데리고 월남한 것은 지난 51년 1.4후퇴때다
잠깐 헤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이 이별이 40여년이 넘도록 계속될 줄 그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래서 눈만 감아도 자신이 살던 이북의 고향마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장박사는 밝힌바 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차남으로 장기려박사가 태어났을때 환갑을 맞은 그의 할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당시는 이북교회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장박사가 살던 입암동중앙에도 교회가 들어서 있었고 할머니는 어린 장박사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다. 장박사의 믿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실한 신앙과 사랑실천으로 일관해온 그도 삶속에서 잘못을 범한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팽이를 훔친일, 송도고보시절 화투놀이에 빠져지내던 일, 일본인 간호원의 빰을 때린일 등 그도 한때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더러 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곧 회개했고 기도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의사의 진료를 한번도 못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장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던 해에 김봉숙씨와 결혼했다.
경성의전 수석졸업생답게 장기려박사는 첫수술때 맹장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후 맹장염을 4년간 실험연구,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년뒤인 1943년 간암수술을 최초로 성공시키는 등 의학계에 명성을 쌓아갔다.
그의 명성은 두갈래로 갈라지는 조국의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놀아만 갔고 김일성대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요청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박해가 심해지고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아 공산당의 감시를 받던 장박사는 "서울대에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백인제교수의 편지를 기억, 월남을 결심하게 됐고 안타깝게도 뒤따라 올 것이라 믿었던 가족들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월남후 더욱 빛을 발한다. 부산에 도착한 장박사는 영도제3교회 창고를 얻어 피난민의 무료진료를 위해 복음병원을 개설했다. 그는 "치료는 의사가 하고 병은 하나님께서 낫게 하신다"는 신념으로 환자를 진료하여 악조건속에서도 매일 2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순회진료를 다니는 등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던중 장박사는 1956년 더이상 천막병원이 아닌 2백50평규모의 새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게 됐다.
치료비가 없는 입원환자에겐 주머니를 털어 퇴원시켜주고 그도 않되면 "오늘밤 몰래 뒷문으로 도망치게"라며 넌지시 일러주던 장박사의 모습은 의술을 지닌 사람들에게 두고 두고 기억될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운동'을 벌이며 빈민의 의료구호만을 위해 60여년간 외길을 걸어온 장기려 박사.
지난 91년 미국에 사는 조카를 통해 이북에 있는 부인과 두딸의 사진, 부인의 육성녹음 등을 알아보고 통일될 날만 기다리며 기도하던 장박사는 이제 이땅이 아닌 하늘에서 가족을 기다리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약속을 위해 혼자살아온 장박사를 두고 세간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이라도 인간적인 외로움은 마음에 한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섣부른 예측을 한다.
그러나 참신앙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한 장기려박사야말로 주님과 평생 동거하며 누구보다 다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환자들을 가족삼아, 환자들을 이웃삼아 살아간 장기려박사에게 위안과 힘이되어 주신 주님이 있었기에 그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저 뒷산의 바위들 처럼 환자들을 위해 항상 서있을 의사가 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장박사의 생전의 삶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또 그의 뒤를 이어 참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길 기대해 본다.
24.국경없는 의사들
지난 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환경회의는 비정부기구(NGO)의 위력을 과시한 회의였다. 1백71개국에서 온 9천여NGO들은 리우회의가 채택한 "의제(의제)21"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21세기는 NGO의 세기가
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빈곤·기아·환경·난민 등 지구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활약하는 NGO는 지구촌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다.
NGO의 출발은 1948년 유엔에 의해서다. 당시 유엔은 후진국 경제개발을 지원하면서 개발이익이 일반국민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민간 기구에 맡겼다. 그후 NGO는 그 개념이 확대돼 비단 유엔이 인정한 민간 기구뿐 아니라 국 제협력사업에 참여하는 민간단체들을 총칭하는 용어가 됐다.
지난 71년 프랑스에서 시작한 "국경없는 의사들"(MSF)은 세계 최대 민간 의료봉사단으로 세계적인 NGO로 손꼽힌다. 1백만명 이상이 사망한 비아프라 내전에 참가, 의료봉사활동을 벌이면서 전쟁의 야만성을 체험한 젊은 의사들은 국제의료봉사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MSF를 설립했다. "국경없는"이란 이름은 전쟁 또는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MSF는 정치적으로 피해국가의 영토. 주권을 무시하는 일이 있더라도 인도주의라는 대의(大義)에서 인명구출을 우선으로 한다는 활동목표에서 나왔다.
현재 MSF는 유럽에 6개 지부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 13개 사무국을 두고 있다.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후원자가 약70만명, 연간 5억프랑의 예산을 쓰고 있다.
MSF는 재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달려간다.88년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화학무기를 썼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들어가 이 사실을 전했고, 91년 걸프전 때는 60여대의 전세기를 동원해 난민 7만여명을 구출했다. 94년 르완다 내전에선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투치족의 후투족 양민학살을 폭로해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지난해엔 북한 홍수피해지역에도 의료진을 파견했다.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은 11일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MSF를 선정했다. MSF는 이를 반기면서 상금 20만달러를 자신들의 봉사활동에 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수상 결정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던 서울평화상이 앞으로 제자리를 찾는데 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신문
25.사회복지시설 '찬바람만 찾아와요'
"좋은 후원자님이 나타나서 내년에는 유치원에 다니게 해주세요."
경기도 고양시 `천사의 집'(02-3158-6501)에 살고 있는 예윤(4)이는 벌써 반년째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후원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인 12월 한 달에만 10여차례 후원자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올해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같이 사는 형. 누나들이 직접 사다가 달아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없었다면 예윤이의 크리스마스는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천사의 집에선 예윤이 처럼 낳자마자 부모가 버린 두살바기 아기부터 뇌성마비. 다운증후군.자폐아 등 장애인들과 치매에 걸린 87살 할머니까지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들의 엄마노릇을 하는 장순옥(46) 원장도 척추이상으로 등이 굽은 장애인이고, 장 원장의 외동딸도 정신지체장애인이다.
"다들 힘드니까 어디 이런데 찾아오나요. 정을 조금만 더해줘도 살아가는 희망이 생길텐데요." 5년째 혼자서 온 식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해먹이고 있는 장씨의 한숨 섞인 말이다.
"해마다 도움도 줄어들어요. 후원금이 들어오는 대로 방을 따뜻하게 하고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도록 만드는데 썼어요. 그런데 `살만큼 해놓고 사니 안 도와줘도 되겠네'하는 거예요."
지지난해 텔레비전에 천사의 집이 소개된 것도 소용없었다. 후원자는커녕 몸이 불편한 사람을 맡기고 싶다는 문의전화만 빗발쳤다.
올 연말 장애자.노인.어린이 등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나 형편이 비슷하다. 특히 규모가 작고 개인이 운영하는 휴식처들은 예외 없이 더욱 추운 겨울을 지내고 있다. `올해처럼 찾는 이 없는 연말은 난생 처음'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부모 없는 여자아이들과 여학생 21명이 살아가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김효주 아녜스의 집'(02-690-8461).
"3년전부터 도움도 줄고 찾아오는 사람이 뜸해지더니 올해는 완전히끊겼어요. 와서 돕지는 못할 망정 복지시설 관련 비리가 터질 때면 `돈많이 벌겠네'라고 비꼬지나 않았으면 좋겠어요" 강경숙(37) 원장의 원망 섞인 말이다.
`아녜스집'의 1년 예산은 5천만~6천만원. 이중 2천여만원은 연말 연시두 달간 모금한 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지금까지 걷힌 돈은 예년의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이 바뀌면서 당장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
그래도 규모가 크고 이름이 알려진 복지기관들은 그나마 평년수준을 유지한다. 고정적으로 후원하는 회원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장기후원자가 많아 큰 타격은 없다. 유니세프(국제연합 아동기금)도 올 모금액이 지난해 수준인 27억원 정도는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기관이나 단체들도 그때그때 부정기적으로 돕는후원자의 숫자는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음성 꽃동네 사무장 정광열 신부는 "전체 운영비의 70%를 회원들의 고정후원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회원 76만명 가운데 꾸준히 성금을 보내는 이가 3분의 1로 줄었다고 귀띔했다.
나환자 4백명이 살고 있는 경남 산청의 성심원(0596-73-2053)도 후원이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1년 예산 15억원의 절반 가량을 독지가들의 후원금으로 꾸려나가는데, 올해처럼 썰렁해서는 앞으로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관리를 맡고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박재홍 수사는"생활에 여유가 생겨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아무래도 자기복지를 더 챙기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올해 유난히 후원이 저조한 데는 불경기에다 소쩍새마을 사건이 잊혀질 만 한 때에 터져 나온 뽀빠이 사건의 영향이 컸다.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복지시설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이미 그전부터 줄어들던 도움이 격감했다는 지적이다.
부모 없는 청소년들을 돌보고 있는 부스러기 선교회(02-365-1265)의 경우, 올해 줄어든 1백97건의 후원자 가운데 개인회원은 1백43건이었다. 후원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천여만원이 줄었다. 때문에 이달 말까지 대주기로 약속한 57명의 학생에 대한 장학 지원금 7백만원을 못 주고 있으며 연료비 2백만원도 밀려있는 형편이다.
이런 추세는 해마다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전국 언론사를 통한 이웃돕기운동추진협의회의 모금액에서도 잘 드러난다(그래픽 참조). 93년 1백84억원에 이르던 모금액이 해마다 10억원씩 줄어들어 지난 겨울엔 1백64억원으로 줄었고, 올해는 1백40억여원에 그칠 전망이다. 그나마도 대기업의 성금액수가 많아져 개인 성금의 감소를 상쇄한 탓에 가능하다.
서울방송 모금 관계자는 "매년 각 학교들이 방학 전에 모금액을 보내오는데 올해는 전화도 뜸하고 오는 사람도 없어 모금창구가 썰렁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모은 총액도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해 10분의1 정도로 저조한 수준이다. 한국방송공사 역시 지난해에 비해 성금 총액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웃을 돕는 사회의 손길이 줄어드는 이유는 불황 탓도 크겠지만 남에게 무관심한 사회풍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몇년전만 해도 신문이나 방송에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가기만 해도 도움을 주겠다는 전화가 불티나게 쏟아졌었는데 요즘은 달라요. 매스컴을 타도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을 때가 많아요." 부스러기선교회 강명순 총무의 말이다.
# 유명 정치인 후원회는 '호황'
불황에 밀린 세밑 인심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정치인에 대한 후원만큼은 여전히 넉넉하다.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는 지난 10월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국회의원 후원행사가 열리고 있다. 내로라 하는 후원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기부금 불황의 유일한 사각지대다.
신한국당의 한 중진의원 보좌관은 "잘 나가는 의원들이라면 많이 걷히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며 "의원들의 절반 정도가 1억원 정도는 건진다"고 말했다. 야당의 경우에도 실력자들의 후원회는 성황이다.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야당의원의 보좌관은 올 후원행사에서 2억원 넘게 후원금을 모았다고 밝혔다. 같은 급의 다른 중진의원들도 대부분 "남들 하는 만큼은 모았다"고 밝히고 있다.
보통 경비를 빼고 5천만원 남짓 건지면 `괜찮은 장사'로 치는 통념에 비춰보면 성황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당에 따라, 국회의원 개인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행사 규모와 기부금 액수는 천차만별이다.`끗발 있는' 정치인들의 후원행사에는 천명이 넘는 참석자들로 붐비고 몇 억원의 성금이 걷히지만 어떤 후원회장은 파리만 날린다. 50여명만 찾아온 후원회도 있었다고 한다.
26.큰 사랑」이 있는 작은 공간
"일반 목욕탕에서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오세요. 무료로 목욕과 이발, 세탁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일 서울역 부근 동자동 11번지에 이색적인 목욕탕이 문을 열었다.
"나사로의 집"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이곳은 일반 목욕탕에서 푸대접을 받는 행려자들이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자유공간"이다.
규모라야 15평 남짓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1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과 이발실,1시간 안에 건조까지 마칠 수 있는 현대식 빨래방 시설이 갖춰져 있다.
행려자들은 목욕을 끝낸 후에는 말끔하게 손질된 의류 5백여점 중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을 수도 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2~5시에 문을 여는 이 목욕탕은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는 외국인 부랑자와 여성 행려자들을 위해 개방된다.
이곳의 설립자는 33년째 만성 신장 결석증을 앓고 있는 김흥용 목사(58).그는 오래 전에 한쪽 콩팥을 떼냈고 86년 나머지 한쪽마저 3분의2를 잘라낸데다 고혈압과 협심증까지 겹쳐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한국은행 사서로 일하던 김목사는 93년부터 모 선교회가 서울역에서 매주 목요일 개최하던 철야예배에서 "행려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은 있지만 마음놓고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사로의 집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95년 퇴직한 김목사는 서울역과 남대문을 중심으로 행려자들을 뒷바라지하며 목욕탕 건립에 본격 착수했고 2년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1일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영등포시장에서 청과상을 하는 부인의 도움도 컸다.
목욕탕은 문을 열자마자 소문이 전해져 문전성시를 이뤘고 한국은행 노동조합과 남대문경찰서는 김씨의 일을 돕겠다며 헌옷 수거에 나서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40절을 즐겨 암송한다는 김목사는 "혈압이 2백70~2백80을 오르내리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하루하루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나눔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27.봉사하는 대통령
세계 제2차 대전때의 일입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군대로부터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영장을 받은 젊은이들은 큰 도시로 집결하여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갔습니다. 워싱턴 기차 정거장에도 수백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은 기차역에 나와서 그들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들 가운데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 잔을 쟁반에 들고 늦은 밤까지 봉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장정 하나가 그 노인을 자세히 보니 그는 다름 아닌 루즈벨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훈련소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나르며 봉사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외치는 선행보다는 말없이 행하는 행동 하나가 더욱 귀감이 됩니다
28.주님께 대한 봉사
론펠공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식 때 썼던 금잔을 찾아내어 교회에 봉헌하기로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막 성문을 나서는데 한 문둥이가 달려나와 구걸을 하였다. 그는 기분이 상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주님의 금잔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너처럼 더러운 것이 어찌 나를 괴롭히느냐."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급히 지나쳤다. 그 후 그는 생사를 걸고 금잔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막 성에 들어서는데 또 문둥이가 달려와서 구걸하였다. 론펠공은 오랜 가난신고가 그를 부드럽게 만들어 긍휼의 정신이 그의 가슴속에 일어났다. 그는 그의 전 재산인 빵 한 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걸 받게." 그리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걸 마시게."
이때 갑작스레 문둥이가 주님으로 바뀌면서 "보라, 나다. 그 빵은 찢기운 내 몸이며 그 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참 성찬이다. 네가 찾던 잔은 네 손에 든 표주박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웃에 대한 봉사가 곧 주님에 대한 봉사임을 알자.
29.돌을 치워보니까
옛날 한 부자가 살았다. 그 부자는 평생을 자신만 알고 살아왔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한번쯤은 남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자는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큰길가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엄청나게 큰 돌을 올려놓았다. 그 돌을 본 사람들은 "에이, 어떤 놈이..." "어머. 위험하다. 돌아가야겠네." 라고 중얼거리며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돌을 본 한 젊은이가 돌을 끙끙거리며 옮기기 시작했다. 꼬박 두 시간이 걸려서 옮긴 돌 밑 구덩이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젊은이가 구덩이에 뭐가 있나 보려고 다가가보니 자루 하나가 있었다. 그 자루를 열어보니 휘황찬란한 보석과 엄청난 양의 금화와 은화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쪽지 하나.
"남을 위해 큰 돌을 치운 사람에게 주는 상이니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내가 하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박 계 영 -
내가 하는 좋은 일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값비싼 보상도 따르지 않으며, 곧 잊혀져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누군가가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 아닐까요?
30.봉사와 건강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는 매우 병약한 사람이었다. 청년기에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런 몸상태로 계속 과로하면 1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휴식이 최고의 묘약입니다."
윌리암 부스는 그 말에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대신 규칙적인 생활과 사회의 약자들을 돕는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씻고 83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아들 브람웰 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계단을 오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스무살을 넘기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브람웰 부스도 73세까지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온통 '봉사'와 '사랑실천'으로 채워져 있었다. 노동은 '장수'와 '건강'을 선물한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누린다.
31.김기창 화백의 봉사
제 5회 인존상 공공봉사 수상자는 78세의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 그는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는 정적(靜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고, 봉사에서는 동적(動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4세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후유증으로 7세 때 청각장애 증세가 나타나자 그림 그리기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70년간 그림을 그린 그는 돈을 벌어서 청읍 회관을 설립하고, 한국농아복지회 회장이 되어서 매년 1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래서 불행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그 돈을 기부했다.
32.美 명문대 입학조건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왔다. 불합격 사유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교육제도와는 너무나 상이하다. 우리는 오직 공부만 잘하면 합격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기주의자들만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33.남을 위해 봉사하라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을 때 이웃 주민이 물었다.“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테레사 수녀는 젊은 시절 캘커타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 너머로 거리의 한센병 환자들을 계속해서 주시했다.“나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을 보았습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을 마음속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고 수녀원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을 지었다. 그녀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약 15만 명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겼지만 온 세계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하라. 삶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34..서비스 정신
제임스 스미스는 오리건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류머티즘 치료제를 파는 제약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나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사표를 쓰겠다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1주일이 넘도록 열심히 뛰었지만 전혀 매상을 못 올렸기 때문이다. “저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니저는 그의 사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스미스는 입사할 때 이미 봉급과 영업비를 전액 가불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는 한 중년부인을 만나 상담을 해주었다. 그녀는 스미스와 한참 상담을 하고 나더니 약을 여섯병이나 매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액의 수표를 끊어주었다. 스미스는 그제서야 비로소 세일즈의 비결을 발견했다. “팔기 전에 먼저 서비스를 하자.” 그는 가장 매상을 많이 올리는 사원이 되었다. 25년 후에는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 경영인이 되었다. 성공하고 싶은가. 먼저 남을 위해 베풀라. 서비스 정신을 가지라. [국민일보]김학중 목사 (새안산교회)
35.봉사의 사람
충실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원과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선교사의 4대손인 스티븐 린튼 박사는 최근 자기의 삶을 나귀의 삶에 비유했다. 그리고 모든 선교사의 삶은 주인이 실어주는 짐을 싣고, 주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 짐을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티브 란튼 박사는 지난 수년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사랑의 구호품을 싣고 북한으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역할을 수행했다.
스티브가 오늘날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나귀로 만들어지는 데에는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4월, 스티브의 외고조부인 유진 벨 목사 부부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들 부부는 평생을 목포, 광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 묻혔다. 벨 선교사부 부의 딸인 사로트는 월리암 란튼 선교사와 결혼하여 일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들 2세대 선교사 부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스티브의 부친인 휴 린튼이었다. 스티브의 어머니 로이스는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의 원장으로 평생 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로이스는 최근에 호암상을 수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코 선교사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따른 것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기도: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기 원하시는 주님! 주님이 부르실 때에 즐거이 나 자신을 드리며, 주님가신 그 고난의 길을 나도 가게 하소서. 복음이 없어 곤고하며 갈망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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