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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7

by 【고동엽】 2022. 4. 2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7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 1
 
그리스도인 정체성 오류에 2 가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경건한 사람이다.
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 확장하는 사람이다.
 
1 번은 세속화와 세속주의를 설명하면서 자세히 말씀드립니다. 우선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인은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고전5:17-21)
2 세기 기독교 교리가 출발할 때부터 화해를 잃어버렸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경건하라는 세상을 악하다고 인식한 플라톤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회로부터 낙오한 사람(죄인)을 용납하여 화해하고 평화하라 하십니다.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어 집으로 가게 하시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 일행과 함께 식사하심이 이것을 말합니다.(마가2:1-17) 당시 병자와 세리는 기득 세력뿐만아니라 민중들도 혐오하는 사회에서 낙오한 죄인입니다.
 
2 번부터 설명합니다.
성직자가 교회를 키우고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선호하는 말이 순종 구원확신 하나님나라 확장 등 입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면서 각종 다양한 수익 사업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성소에 재물을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중단하라고 했습니다.(출36:6)
한국 교회는 교회에 사람과 재물이 모이는 것을 중단한 바 없습니다. 필요 이상의 재물은 반드시 타락과 부패 불화 원인이 됩니다.
재물은 하나님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유의 정치 실현이나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과제는 그리스도인 믿음이나 교회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1)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민주 시민으로서 열심을 내야 하지만 신앙인은 이러한 성취보다 소외를 더 주목해야 합니다.
자유의 정치 실현이나 정의 사회 구현이 믿음 목표이거나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삶의 변화 없이 이러한 일을 이룰 수도 없고 혹여 그런 공동체를 만든다 해도 자기가 그 공동체를 망가뜨립니다. 우리는 혁명가나 정치가에서 그 예를 봅니다.
 
 
교회가 각종 사업하는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사랑 공동체 등 어떤 대안 공동체로 보려는 시각 때문 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대 학자들에게도 완강합니다. 정치 신학자 홀슬리는 물론이고 제임스 던도 그러합니다.
제임스 던은 바울 선교가 대안 사회를 형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2)
바울에 대한 오해입니다. 기독교는 삶의 변화를 추구하지 몸 변화도 아니고 대안 공동체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천년 역사에서 기독교 대안 공동체가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곳에 정착하여 거점화 하지도 사람을 모아 세력화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떤 체재나 대안 공동체로 생각하니까 성서 해석이 왜곡됩니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11장 )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대부분 성직자들은 지금도 이 구절을
천국은 침노(폭행)하는 자의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강제로 억지로라도 천국을 차지하라고 가르칩니다. 인터넷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로 검색하면 우리가 천국을 얻기 위해 침노(폭행)하는자가 되자는 설교 다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면서 불의와 불화 악이 발생하는 걸 당연시합니다.
 
같은 구절 성서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세운 대안 공동체가 폭행(침노)을 당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본문에서 폭행(침노)하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3)
믿음으로 얻는 기쁨과 평화의 삶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좋은 관계로 기쁨과 평화하는 삶을 말합니다.(로마14:17)
 
하나님 나라가 믿음 중심에 오게된 경위
 
하나님나라 믿음은 성서 시대를 마감하고 2 세기 교부 시대가 시작되면서 20 세기가 되기까지 실종되었습니다. 머 한국 교회는 아직도 실종 상태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그동안 기독교에 예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십자가로 죄 용서받고 우리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대속 구원론이 전부였습니다.
정통 교리는 예수 가르침이나 예수 사역에서 유래하지 않았습니다.(4)
당시 영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했습니다.
 
 
역사 믿음이 아니라 관념 믿음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관념 믿음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대속 구원론에만 관심하여 예수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정통 교리를 정립함으로서 유대교 신앙인 정행 즉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올바른 행동을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보수 신학자들은 바울이 대속 구원 교리를 세웠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속 구원은 바울 가르침 1 % 정도 해당됩니다. 역시 복음서에도 1 % 정도 있습니다. 대속 구원론은 종교개혁자를 포함해서 2 세기 이후 신학자들 작품입니다.
황당한 사실은 진보 신학자들도 같은 생각으로 바울이 대속 구원론으로 기독교를 망쳤다고 바울 버리고 예수께로 가자고 주장합니다.(문동환) 이들 중에 성서 신학자는 없고 그냥 신학자들이 그럽니다. 그만큼 성서 연구가 안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 신학자나 성직자는 바울을 제대로 모릅니다.
 
성서 시대 이후 2천 년 기독교사에서 역사 예수를 처음 연구한 사람이 알버트 슈바이처(1875 - 1965)입니다. 그는 학생 시절에 카페에서 학생들이 무슨파 별로 모여 토론하는 걸 보고 자기는 누구를 따르는 아류 신학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슈바이처는 역사 예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복음서 전체가 하나님나라에 관한 소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하고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성서를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교리가 무섭습니다. 교리가 우리 눈을 감게 만듭니다.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하나님나라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자들과 함께 그 실현을 위한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말씀을 종말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슈바이처는 하나님나라가 국가나 체재 즉 어떤 대안 공동체가 아니라 삶의 변화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하나님나라이고 복음서 중심이 이것을 증언하는 것이라는 슈바이처 발견은,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는 천동설을 뒤집고 해를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발견한 코페르니쿠스 발견에 버금가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발견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신학을 중단하고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했습니다. 그 의료 활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철학 신학 의학 3 개 박사 학위가 있습니다.
그 이후 케제만 몰트만 판넨베르그 제임스 던 등이 하나님나라 신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 중심 신학이 되었숩니다.
한국 신학계와 성직자들은 아직도 하나님나라 신학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는 헛소리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BC 200 년 경부터 메시아가 새로운 나라 세우기를 기대하는 묵시문학이 태동합니다.
다니엘서와 4 에스라서 등이 이때 태동한 묵시문학입니다.
제 4 철학 그룹 서기관들이 주도했습니다.(홀슬리) 그래서 성서는 예수께서 하신 회당 첫 가르침을 권위가 있고 서기관과 달랐다고 증언합니다.(막1:22)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종말은 역사 끝을 말하는 역사 종말이 아닙니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시대를 종말로 인식합니다.(불트만)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의해 정치 군사로 번영되고 정의로운 나라가 세워져서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기를 희망하고 이러한 묵시 문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예수 제자들도 이러한 하나님나라 사유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나라가 아니라 각 개인의 삶의 변화를 통해 화해하고 정의롭고 평화한 나라가 되기를 가르쳤습니다.
세력을 형성하지도 않고 신으로서 무력도 사용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 실망한 제자들이 예수를 떠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만든 나라에서 한 자리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서로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떠난 제자들을 부활한 예수께서 다시 불러 모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는 사람은 예수 당시 제자들처럼 번영된 기독교 사회에서 자기가 1 자리를 하겠다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한국 교회가 저 세상 하늘 천국을 구원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성서도 아니고 유대 사상도 아닌 전적으로 그리스 사상입니다.
그리스 사유는 영원이 미래에서 오지 않고 과거에서 옵니다.
플라톤의 상기론想起論이 이것을 말합니다. 플라톤은 인류가 태동되기 전 본질을 상기하는 것이 영원입니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그리스 철학으로 신학한 초기 신학자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영원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5)
성서에서 말하는 영원한 삶 즉 영생은 죽지 않고 끝없이 산다가 아닙니다.
고대인 시간 개념에 시간과 영원이 있습니다.
 
 
영원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시간으로 하나님 시간이라고도 합니다.
시간은 인간이 지구가 해를 향한 움직임을 계산해서 편의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는 인간 등 생명체가 출생하여 죽음을 향해 가는데 시간이 간다고 합니다.
달리는 기차에 앉아서 보면 실제는 내가 가지만 창밖의 건물이 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생한다는 말은 미래를 현재로 당겨와 사는 것을 말합니다.(6)
엄밀히 말해서 시간에 현재란 없습니다. 미래에서 와서 순간에 과거로 가버립니다.
순간은 시간의 원자原子가 아닙니다.
 
 
영원의 원자입니다.
순간은 영원의 최초 반영이고 이를테면 시간을 멈춰보려는 영원의 최초 노력입니다.(7)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하나님나라는 현재를 최대한 늘려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을 올바른 관계에서(의) 기쁨과 평화로 사는 게 하나님나라입니다.(로마14:17)
기고가들이 종종 오늘을 살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 근거한 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현실을 나타내는 은유隱喩metaphor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현실을 성서 마태복음은 하늘나라(천국)
마가와 누가복음은 하나님나라
요한복음은 영생(영원한 삶)
로마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모두 같은 뜻 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영원(하늘)을 산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말씀은 죽어서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는 죄악된 삶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 죄악된 삶인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어 이 세상 풍조인 가치 체계가 아니라 하늘 계시로 살도록 하늘에 앉히십니다.(에베2:1-6)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께서 여신 영원에 참여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이 땅에서 하늘에 앉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계시한 영원을 파악하여 이 땅 현실이 영원(하늘) 현실이 되게 사는 사람입니다.
 
다음회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합니다.
 
1.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019, 107p
2. 제임스 던 예수와 기독교 하 차정식 새물결플러스 2010, 753p
3.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메디치 2014, 317p
4. 프랜시스 영 신경의 형성 강성윤 민경천 비아 2022, 29p
5. 쇠얀 키에르케고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치우 2011, 172p
6. 같은 책 174p
7. 같은 책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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