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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녹취 11

by 【고동엽】 2022. 4. 21.
한 주간도 건강하셨습니까. 지난 시간까지 저희가 사도행전 13장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말미에 마가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선교 여행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간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 여행부터는 결별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이 굉장히 단호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바울서신을 보겠지만 바울서신을 보시면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 속에서도 바울이 사도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바울이 개척한 교회 안에서도 바울이 이렇게 환영을 받지 못했을까. 바울이 굉장히 단호하고 엄격하게 목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를 이해할 때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임박한 재림 신앙을 믿었다는 겁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초대 교인들 대다수가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굉장히 독특한 신학을 전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주장합니다. 언제 신랑이 신부된 교회를 찾아올지 모르는데 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세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언제 신랑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그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신부된 교회는 항상 순결함을 지켜내야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의 순결함을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서 굉장히 단호합니다. 너무 역설적이게도 바울이 개척한 많은 교회 가운데 바울의 사역을 끝까지 지지하고 후원하고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한 교회가 두 교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이게도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짧게 만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순회 전도자 아닙니까. 어느 지역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다음에 자기가 믿고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이 교회에 대한 목회를 위임하고 바울은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주의 복음을 전했던 순회 전도자였는데 특이하게도 바울이 오랜 기간 동안 목회를 했던 지역이 두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가 에베소 교회이고 또 하나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바울이 3년 동안 목회를 했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합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목회를 했던 두 교회가 있던 겁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과 오랜 시간 만났던 에베소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에베소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지지하거나 후원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바울과 짧게 만났던 교회는 바울을 다 좋아했고 바울과 오래 만났던 교회는 바울을 대부분 싫어했습니다. 왜 그러냐면 바울과 짧게 만났던 교회는 전도자로서의 바울만 만난 겁니다. 그런데 바울과 오래 만났던 교회는 전도자로서의 바울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의 바울을 만난 겁니다. 목회자로서의 바울은 뭐를 강조했다고요?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신부된 교회를 찾아오실지 모른다, 언제 신랑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신부된 교회가 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세와 태도를 무엇으로 봤다고요? 신부의 순결함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지켜내는 것,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내는 것,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교회됨을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서 굉장히 단호한 목회를 했습니다. 바울의 단호한 목회에 의해서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한 사람도 있고 징계를 당한 사람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출교와 징계를 당한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얼마나 비판을 많이 했겠습니까. 공격을 많이 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받은 사람들이 또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에 대해서 반대하는 일단의 흐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 바울의 단호함 때문에 바울과 짧게 만났던 교회는 바울을 좋아했지만 바울과 길게 만났던 교회는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이 바울의 단호함이 밤빌리아 버가에서 돌아갔던 마가에 대해서도 일어났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전도 여행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가는 이런 마가를 더 이상 데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바울은 가지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더 이상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하지 못하고 바나바는 마가와, 바울은 실라와 새로운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 이야기를 저희가 지난주 마지막 시간에 했습니다.


14장에 보시면 바울은 주의 복음을 듣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주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수하게 많은 기회를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유대인들은 정치 군사적인 메시아를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뭘 선포한 겁니까? 정치 군사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이다, 그 메시아가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는데 당신의 백성이 메시아를 환영하지 못하고 도리어 로마의 힘을 빌려서 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라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유대인들은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듣기만 거부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복음을 선포하는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박해했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뭘 선포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포했는데 유대인들은 이 복음을 거부했다, 따라서 이제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겠다 라고 하면서 유대인이 거부했던 복음을 이방인에게 선포하겠다고 14장에서 바울은 담대하게 주장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된 거죠? 이제는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수용하는,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이제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심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새롭게 재편되어지는 이것이 14장에서 바울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14장 2~7절을 보시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환영자와 복음을 거부하는 적대자들이 등장합니다. 소수이지만 항상 복음을 받아들이는 환영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마치 뭐와 같은 거냐면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지배 가운데 놓여있던 조선이 해방되었다, 일본이 패망하였다 이런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이 땅에 있던 모든 조선 사람들이 다 기뻐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조선의 해방, 일본의 패망을 기뻐했겠습니까? 일본의 패망을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 조선이 독립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은 조선이 독립했다, 일본이 패망했다는 것이 너무 기쁜 소식이었지만 일본의 통치가 천년만년 지속되기를 원했던 친일파들은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이 하나도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얘기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도래했다 라는 선포가 어떤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지금의 질서, 지금의 체제, 지금의 문화가 끝장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를 원했던 사람에게는 이것이 진짜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반대로 지금의 질서나 체제나 지금의 왜곡된 통치가 천년만년 지속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은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도래했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환영하지 않습니다. 아멘으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순간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의 대규모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14장에서도 이 모습이 일어나는 것이고 나중에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에서 주의 복음이 선포되어 졌을 때 아데미 상을 제작하던 은 세공인들이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뭘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선포될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는구나, 이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포될 때 하나님 나라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환영자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반대자들, 적대자들이 항상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 문제가 벌어지게 된 겁니다. 바울이 이방 지역을 순회하면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을 아멘으로 받아들인 신앙인들이 생겼습니다. 이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이방 지역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이방 지역에 교회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초대 교회의 어머니 교회 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이방 교회를 방문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신앙을 보면서 깜짝 놀란 겁니다. 왜 놀랐냐면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가 메시아이고 예수가 구원자라는 신앙은 고백했지만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교인들이 이방 지역에 가서 보니까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믿고는 있지만 할례도 안 받고 음식 정결법도 안 지키고 절기 준수도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봤을 때 깜짝 놀란 겁니다. 이것이 무슨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냐 라고 하면서 이방 교인들을 불러 모은 다음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야기한 것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바울이 이야기 한 것은 굉장히 불완전하고 온전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왔던 그 신앙의 문화를 당신들도 행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여러분 할례를 꼭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들만 먹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꼭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들이 있습니다, 이 절기들을 꼭 준수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교육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이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느 지역에 교회를 세운 다음에 바울은 다른 지역을 순회하는 순회전도자였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와서 보니까 자기 교인들이 할례를 받기도 하고 음식 정결법을 지키기도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바울의 주장을 붙잡는 사람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자들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바울은 분노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말하는데 뭐가 옳은지 정말 우리가 지켜야 될 올바른 해답을 달라, 이런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바나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이것을 보통 신학자들은 AD 49년에 일어났다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언제 회심했는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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