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강) 바벨탑의 교훈! (창 11:1-32)
오래 전에 '성 베르나드'라는 유명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모든 덕 중에 겸손히 가장 중요한 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잘못은 교만에 있고 겸손하기만 하면 자유하고, 평화롭고,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덕을 익히기 위하여 유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기 규범을 만들었답니다.
①자기가 자기 죄를 알고 비천에 처할 줄로 알자!
그는 '내가 가장 큰 죄인이다, 모든 사람 중에 내가 큰 죄인이다'라고 자기를 스스로 가장 낮은 데로 두었답니다.
②자기 죄를 통회하고 사실대로 고백하자!
'죄가 그대로 나타나는데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마라. 잘못해서 잘못했다는데 그것이 잘못입니까? 숨길 것도 없고 변명할 것도 없다,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 일체 변명하지 말고 통회 자복하고 그대로 정직하게 자기를 내세우고 살아라' 이것이 겸손이요, 이것을 은폐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③남이 자기의 결점을 알고 그리고 업신여기던가? 멸시할 때 결코 그를 원망하지 마라!
'내 잘못이 잘못이니 만큼 무슨 말을 하든 말든 그대로 고맙게 받아 들이라. 추호도 원망하지 마라. 혹은 섭섭한 마음도 가지지 마라' 이것이 겸손이라고 자기가 자기를 일깨웠다고 합니다. 또 사람이 '자기를 비난할 때, 혹은 모욕을 할 때, 그런 굴욕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조용히 참어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모욕을 당할 때 절대로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나를 모욕하는 사람을 미워해도 안 되고 이것 때문에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모든 전쟁과 공포와 역경과 고민과 이런 많은 사건들이 있을 때 '걱정하지 마라. 언제 내 힘으로 살았냐?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인데 내가 뭔데 걱정을 하느냐, 그것은 교만이다, 걱정이 교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삶이 겸손이요, 참 자유자의 삶입니다. /아멘!/ 오늘은 교만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소개!▶
10장은 노아의 후손들의 족보 이야기였습니다. 노아의 아들들로부터 사람들이 점점 번성하여 졌는데 그들은 구음도, 언어도 하나였습니다. 입술의 발음이 같았고, 따라서 말도 같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여 가다가 시날 평지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날 평지는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고 있는 그 강변에 있는 광활한 평야지대랍니다.
고대문명의 발산지였고, 중동에 가장 기름진 평야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다함께 거주하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저들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크고 높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연대기에 학자들은 홍수 후 150년경일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속성은 처음부터 하늘에 닿으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하다가 타락했는데 이제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아 그대로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다시 있을지도 모를 홍수에 대비하고 그 탑을 통해서 자기들의 힘과 영광을 후대에게 전하고 과시해 보기 위한 목적으로 높은 성과 대를 쌓았다고 합니다.
바벨탑은 원래는 '하늘에 못'이란 뜻인데 후에 '혼잡하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계18장에서는 악의 대표적 상징적 언어를 바벨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누가 쌓았는가? 하자들의 견해로 니므롯이 쌓았다고 합니다. 니므롯이 누구인가? 함이 낳은 구스의 아들로서 노아의 4대손 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창10:8-9)라고 했습니다. 영걸이란 히브리어로 '깁보르'인데 좋은 의미로는 '영웅'이란 뜻이며, 나쁜 의미로는 '압제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무력으로 제국을 건설한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짐승과 같이 잡아죽이는 폭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특별한 사냥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쌓은 바벨탑의 넓이가 122미터이며, 높이가 46.7미터인 계단식으로 된 7층탑입니다. 바깥쪽에는 벽돌에 역청이 발라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술로는 별것이 아니지만 그 당시 건축법으로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언약을 대신하고자 했으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어리석고 우매한 짓을 한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불 신앙과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1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구음이 하나이니 참으로 큰복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최대의 과제가 무엇인가? 언어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각 국가마다 수많은 방언들이 있습니다. 국제화 시대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정복자의 언어가 곧 세계 공통어가 됩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정복하는 민족이 세계를 정복하게 됩니다.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서 치아와 구강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치아의 형성에 따라 방언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구음이 하나라는 말은 먹는 음식이 같다는 말입니다. 한 솥에서 밥을 먹는 식생활이 같다는 말은 생활양식이 같다는 말입니다. 생활양식이 같다는 말은 동일 문화권이라는 말입니다.
온 땅이 문화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문화가 같다는 말은 사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마음을 교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았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할/
하나님께서 언어를 왜 주셨습니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재능을 왜 주셨습니까? 요1: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게 전해주고 보여주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담 그와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어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자기 아내 하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창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그 뜻대로 살라고 인간에게 언어를 주신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자!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다. 앞으로 또 큰비가 내려 다 망할지 모르니 한번 단결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홍수 심판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분이 언제 바꿀지 모르니 어떤 조치를 취하자, 우리가 전천후 피난처를 만들자'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벽돌을 올리라, 역청을 칠하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로서 신호를 짜 공사를 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당시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므로 그 아라랏산 중턱에서 그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노아도 포도농사가 잘되어 포도주를 너무 마셨다가 아들까지 저주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세 아들의 자식들이 번성하면서 자꾸 밑으로 기름진 곳을 찾아 내려옵니다.
그들이 옮긴 곳은 태양이 잘 비치는 동남쪽을 택했습니다. 시날지방, 후에 아베드 국경이 된 곳입니다. 그들이 그곳까지 간 것은 참 잘했습니다. 강을 끼고 있고, 평탄하고 문명을 일으키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땅도 비옥하였으니 하나님이 충만하다고 복 주신 그 복을 받을만한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그곳을 아르메니아 북동 지역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곳은 노아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라산 평원입니다(창8:4). 그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물러가고 새 땅이 도래한 곳이니 축복의 성지입니다. 방주가 머물렀던 곳이니 구약시대에 지상 최초의 교회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창8:20절에 보세요!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후일에 기념 성소가 세워질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니므롯이 그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았으니 하나님을 분노케 하신 것입니다.
시날의 평지는 기름진 낙원이었습니다. 시날이란 두 강이란 뜻인데 유브라데와 티그리스강을 의미합니다. 어찌 보면 네 근원이 흘렀던 옛 에덴을 복원해 주었던 것입니다(창2:10-14).
그 지역을 오늘날 메소보다미아 평원인 바벨론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역청이 많은 곳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부족함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부요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범한 과오를 다시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생이 누구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시14:1-3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아멘!/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하면 큰일입니다. 여기서 '서로 말하되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결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리에 니므롯이 앉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맺은 계약의 자리에 니므롯의 아이디어인 계획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단을 세워야 할 곳에 바벨탑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전과 같은 홍수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을 위하여 무지개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언약을 불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로 심판해도 그 물이 넘치지 못할 높은 탑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벽돌을 돌로 대신했다'고 했습니다. 자연석이 풍족하지 못했던 바벨론 지역에서는 가마를 이용 벽돌을 구워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은 문명의 개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불에 구운 벽돌은 자연석보다 더 내화성이 강하답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고 했습니다. 역청은 지금 아스팔트입니다. 굉장히 단단하게 쌓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 보면 모조품도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지만 신앙만은 모조품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믿/
돌 대신에 벽돌을 쓰게 되고 진흙대신에 역청을 써도 된다지만 신앙은 모조품을 절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절대 참 신앙, 절대 순수한 신앙, 우리 모두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어떤 사람들은 불평 조로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믿지 않고, 알라신만 섬기는 저 중동 땅에 석유가 펑펑 나오도록 하시고 우리나라를 왜 석유가 한 방울도 안 나오게 하셨는가?' 그런데 여러분 그곳에 갔다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석유가 물보다 더 싸다고 합니다.
여러분! 석유 없이는 살아도 물 없이는 못삽니다. 우리나라는 이래봬도 복 받은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생수를 마시는 나라는 다섯 손가락을 꼽는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생수가 얼마나 시원합니까? 지금은 자연오염으로 수질이 많이 불결해 졌습니다만 석유 안 나온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생수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할/
중동지방에 물은 석회석이 너무 많아 걸러내지 않고 먹으면 한 달 안에 신장 결석증에 걸린답니다. 그곳은 물을 마시기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4절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기 '성'은 도시를 말하고 '대'는 '탑'을 말합니다. 성과 대를 쌓자. 그런데 하늘에 닿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꼭 하늘에 닿아야 할까요? 적당히 지어도 될텐데, 그 이유는 홍수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조상들이 홍수 때문에 다 죽었다는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홍수가 어디까지 올라 왔는가하면 아라랏산 꼭대기까지 물이 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을 모아서 성을 짓고 탑을 쌓되 아라랏산 꼭대기보다 더 높은 성과 대를 쌓으면 홍수가 나도 대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다 죽였냐는 반발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왜 홍수를 주었습니까? '회개하고 방주로 돌아오라고 피할 길을 주었습니다 만은 죄 속에서 그들은 전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 약속도 주셨는데 그들이 그걸 안 믿고 '하나님이 다시 그렇게 심판한다고? 좋아 할 테면 해보라지, 그것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성과 탑을 쌓아보리라'하고 하나님에 대한 으름장을 놓은 것이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4절에 분명히 바벨탑을 쌓고 목적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늘을 닿게 하라! ②우리 이름을 내도록 하라! ③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뜻을 알아보고 우리도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①하늘에 닿도록 하라! 탑을 쌓는데 하늘에 닿도록 쌓자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늘에 맞서게 하자, 하늘에 대항해 보자!'는 의도입니다. 왜 그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한마디로 그들 조상이 홍수로 인해 비참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비참한 심판을 경험했던 그들의 바벨탑을 높이 쌓아 가지고 하나님이 심판할 수 없도록 대항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마디로 의심입니다. 하나님은 창 9장에서 다시는 인류에게 홍수에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무지개 언약을 주었건만 그들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안하고 그래서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믿/
모든 불 신앙의 뿌리는 의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 같은 마음'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은 믿음입니다. 믿기만 하라,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 주님의 능력을 믿었더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할/
오늘도 믿음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의심은 파산이 옵니다. 인간끼리도 의심이 생기면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가 생기면 분쟁이 일어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의심을 일으킵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친구끼리도 심지어 성도와 목사간에도 끊임없이 의심을 주어 분쟁을 일으키게 하고 파산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절대로 마귀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믿/ 오늘 본문의 바벨탑을 하늘에 닿도록 쌓아보자고 외쳤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11:23)고 하셨습니다. /아멘!/
②우리의 이름을 내라! 여기 '내고'란 말은 '높이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높이 세우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거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바로 공명주의 운동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니므롯의 이름을 넣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이름에 우리의 이름을 넣는 니므롯 같은 무리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높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지라'고 했습니다. 또 '썩어지는 밀알이 되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뜻의 결과는 비참하게 흩어짐으로 분열로 끝났습니다. 분쟁은 다른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분쟁이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자의 마음과 뜻이 모인 그곳에 분쟁이 일어나고 맙니다.
③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라! 온 땅에 흩어지지 아니하고 성안에서 모여서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온 땅에 흩어지는 것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바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아 이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고 기도해서 능력 받고 또 다시 사명을 안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지체로써 가정 속으로, 사회 속으로, 직장 속으로, 사업체 속으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향기로서 그리스도인의 사신으로 흩어진 한 교회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그래서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클레시아)와 흩어지는 교회(디아스포라)가 있습니다. 모여서 은혜 받고 능력 받아 세상에 흩어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멘!/
▶4절의 바벨탑에는 정치적인 바벨탑과 과학적인 바벨탑과 종교적인 바벨탑이 있습니다.
①정치적 바벨탑은 하나님을 떠나 정치를 잘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저 이북의 사상이 그런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북은 국민들의 낙원이 아닙니다. 공산당원들의 낙원이요 김일성 부자의 낙원이 되었습니다.
②과학적 바벨탑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과학만능을 믿고 하나님보다 과학과 기술을 더 의지하여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탑입니다. 그러나 과학도 기술도 하나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믿/
③종교적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을 팔아 그 어떤 종교적인 연합과 단결로 큰 단체를 만들어 연합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문선명 집단입니다.
말세에는 모든 면에서 바벨탑을 높이 쌓는 시대가 되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따라 인본주의가 되어 집니다. 이러한 바벨탑을 높이 쌓아 정상까지 올라가면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계18장에는 바벨론의 멸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바벨론은 인본주의 세상을 가리킵니다. 2절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또 4-5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고하셨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쌓고 있는 성과 대를 다 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아하 이들을 그냥 두어선 안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강림하셨더라'라고 하신 말씀을 한 유대 랍비는 '하나님이 자비의 보좌에서 심판의 보좌로 내려오셨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성경 속에 몇 군데를 보면 '강림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①아담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동산 숲 속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셨습니다.
②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③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큰마누라한테 시기심을 발동시켰다가 혼이 나자 도망치다가 광야에 헤맬 때 하나님이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는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믿/
④소돔과 고모라성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절에서 인생들의 죄악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죄악의 자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곳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완전범죄라고 의시 대지만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멘!/
▶6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직역하면 '이제는 그들로부터 그들이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하나님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불순한 생각이 절정에 달했으므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와 담았다는 의미입니다.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자 우리가 내려가서' 5절의 강림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여기 '우리'는 복수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라는 복수를 썼습니다.
'언어를 혼잡케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참으로 신사적이십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회오리바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날아가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신사적이시고 또 유머러스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언어가 혼잡되었으니 위에서 벽돌 올려 하니까 엉뚱한 나무를 올립니다. 일하다가 그들이 낄낄거리고 웃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웃는 것보다 더 짜증이 나고 혈기가 낳습니다. 벽을 올려 소리치는데 역청을 올립니다. 역청 올려 소리칠 때 벽돌을 올립니다. 사람들은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이제 성질이 나서 주먹이 오고 가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이 같으면 생각이 같고, 그들이 이루는 문화가 똑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같은 족속으로 모두가 함께 모여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는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막으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언어를 각각 다르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손짓 발짓을 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마 대단히 큰 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싸움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들 가운데 알아듣는 사람이 몇 명씩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이게 되었고 그들끼리 족속을 형성하여 각각 자기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교만의 극치이자 상징이었던 바벨탑 공사는 자연적으로 그치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에게까지 높아지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은 그렇게 꺾이고 만 것입니다. /할/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고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인간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우주를 개발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창조주의 자리에 앉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바벨탑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무너진 바벨탑을 보면서 혹시 우리 속에 이런 무너져야 할 바벨탑을 쌓아놓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혹시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바벨탑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그 물질을 다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물질의 바벨탑 속에 갇혀 있다가 멸망당하지 않도록 그 물질을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습을 살피시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이 땅의 것을 의지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 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전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 저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쌓고 있는 바벨탑을 더 이상 쌓지 못하도록 저들이 의지하는 바를 흩어버리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놓았을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것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믿/ 우리에게 더욱 큰 지혜를 주시고, 더욱 큰 능력을 주시고, 더욱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할/
▶8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8절의 말씀을 보니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고 흩어질 것을 명하셨는데 그들은 흩어지지 말자고 굳게 손을 붙잡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의지를 불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끼리 맘이 맞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9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이란 말의 뜻은 혼잡, 혼란입니다. 즉 언어의 혼잡, 사상의 혼잡, 행동의 혼잡이 다가와서 그들을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힘을 모으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단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①인간의 한계의식을 알아야 합니다. 전 미국 닉슨 대통령 당시 그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한계의식을 곧 그의 정치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인간은 모든 일에 한계의식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인 솔로몬도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한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전3:1-4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우리는 모든 일에 한계의식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한계의식은 곧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우리가 신앙 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의식을 느끼며 바벨탑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할/아멘!/
②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탑을 쌓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곧 사상의 혼잡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인간이 다시 모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바벨탑에서 뛰어 내려 십자가 밑으로 모으시기를 바랍니다. /할/
▶10-32절까지는 다시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후손의 족보가 기록되었습니다. 본문 10절 이하에서는 '셈의 후손을 기록했는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셈의 후손의 족보만을 다시 기록한 이유는 셈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나고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다윗까지, 다윗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 것 같습니다.
마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과 족보가 다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족보를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메시야, 즉 구세주를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정하신 가문과 예정하신 조상의 후손으로 나실 것을 약속하셨고, 또 이렇게 나신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특별히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족보의 특징은 이때부터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르박삭은 438세를 살았고, 에벨은 464세를 살았으나 에벨의 아들 벨렉은 239세를 살았고, 또 그 아들 르우도 239세를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진데 대하여 어떤 신학자들은 홍수 후에 기후가 크게 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 원인을 신앙적으로 살펴봅니다. 바벨탑을 쌓는 죄를 짓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죄는 참으로 우리 인간에게 많은 불안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고 살면 장수의 복이 따릅니다. 잠10:27절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할/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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