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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말씀대로 순종한 노아! (창 6:9-22)

by 【고동엽】 2022. 4. 12.

(제15강)      말씀대로 순종한 노아! (창 6:9-22)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 모두가 주어진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멋있는 집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헛간을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훌륭하게 주어진 환경을 파멸로 이끄는 헤롯대왕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유를 구속당한 누추한 감옥에서 성경을 기록한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 신체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뛰어난 미모로 찬사와 흠모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일생을 마친 마리린몬로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마리린몬로가 생존시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한 여성으로써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아직 젊고 건강할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우며 돈도 많이 모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그의 또 다른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외롭고, 공허하여 기쁨도, 평안도 없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어떤 찬송작가는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딴 근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안에서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당당히 환경의 지배자가 될 것입니다. /믿/아멘!/ ◀제목소개!▶

 

  현대인들은 만사를 과학적으로 해부해보고 실험해보고 논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아담이래 노아까지의 당대의 문명문화는 굉장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5-7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 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런 죄악이 관영된 세상에 하나님은 의인하나를 구별해 놓았습니다. 누구인가? 노아입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할/ 오늘 본문 9절부터는 본격적으로 노아에 대한 해부가 나옵니다.

 

  ▶9절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의 내력을 말합니다. 이 말은 이후 전개될 이야기는 인류 전체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노아를 중심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사'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완전한 의인이 있습니까? '없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전7: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또  롬3:10절을 보세요!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런데 본문에서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주석가들의 설명을 한번 보겠습니다. 전도서나 로마서에서 의인이 없다고 말씀한 것은 절대적 의미에서 죄를 한 번도 짓지 아니한 완전히 무죄하여 완전히 거룩하고 완전히 의로운 의인은 한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류는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지은 자범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노아를 의인'이라고 한 것은 상대적 의미에서 노아가 그 당시의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순종하여서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든지 싸움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도 잘하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 불평도 합니다.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의롭게 보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의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멘! 믿습니다.' 고백하고 믿으면 됩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래 네가 나를 믿으니 맞다 네가 옳다.'고 하십니다. 의란 원래 옳다는 말로 '칭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실 나로서는 결코 옳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옳게 하리라'고 하실 때, '예! 제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시면 하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믿음이 '의'입니다. /믿/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한 것입니다. /할/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한 자'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노아도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먹고 벌거벗고 야단을 피웠습니다. 또 자기아들을 저주했습니다. 노아도 불안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완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말씀은 에녹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같이 걸어갔다. 하나님을 따라 갔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늘 교회에서 '엎드려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생활만 하면 '우리가 주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함께 동행'하는 줄 믿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왕이 당신을 종종 방문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 나는 몇 번 여왕의 심방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심방한 일이 있습니까?'하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무슨 말입니까? 난 심방을 받지 않습니다. 그분과 항상 같이 삽니다. 그분이 여기서 나와 같이 삽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10절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녹도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하나님이 그 가정을 축복하셔서 믿음으로 잘 따라 나오는 세 자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가정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환경에 얽매이거나 빠지지 말고 그 환경을 이기면서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배는 물이 있어야 하지만 그 물이 배 안에 들어오면 침몰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의 물결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믿음으로 우리를 온전케 인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아멘!/

 

  ▶11-12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노아의 시대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였는가를 강조해서 말해 주고있습니다. 11절 에 '온 땅이 패괴했다.'고 했는데 '패괴했다.'는 이 단어는 '솨하트'라는 히브리어로 '부패하다, 망하다.'라는 뜻으로 '완전히 부서진, 완전히 타락한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심성이 무너지고 도덕과 윤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이 굉장히 귀한 것인데 그것을 부패한 인간들이 사용하니까 그것들이 부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포가 땅에 충만'하게 되었는데 여기 '강포'라는 말은 '탈취하였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포악, 흉악'을 의미합니다. 즉, 강도, 살인, 약탈, 강간 등과 같은 악으로 세상이 '가득 찼더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바로 노아의 시대요, 이 시대가 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강포가 땅에 충만했다.'는 말은 한마디로 더 이상 악으로 채울 자리가 없어 밖으로 흘러 넘칠 정도라는 말입니다.
  이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한시도 심판을 지체하실 수 없을 만큼 시대의 타락이 무르익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행위가 부패해졌고, 만물도 부패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6절에 보면 이 세상의 죄악이 얼마나 깊었으면 '하나님이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겠습니까?
  여러분! 강포가 땅에 가득한 것은 끝 날이 이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13절에서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은 노아를 인정해 주십니다. 다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으로 그들은 다 심판에 견디지 못할 것인데, 그 죄악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주셔서 땅에 심판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이 사건을 사도바울은 히1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세상을 정죄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불신의 세상을 향하여 정죄를 선포해야 합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알리는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 읽어봐야 합니다. 마24:37이하에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여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하신 사건은 정상적인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쾌락을 위하여 술을 마십니다. 마약을 먹습니다. 환각제를 먹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 쾌락을 추구하는 많은 무리들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말세에 가장 큰 증거는 성적 타락입니다. 하나님은 말세의 표준을 여기에 맞춥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그랬고, 노아의 시대도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성적 윤리가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입니다.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더 무서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며 어느 날 천사장의 호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선포하셨으며 이날 주님께서 백보좌 심판대에 좌정하시사 온 인류를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 마치 노아 시대 때 홍수가 나서 모두를 물로 쓸어버리는 시간까지도 집 짓고 시집가고 장가가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경고하신 주님의 그 경고가 지금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믿/
  세상을 보면 주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사람마다 썩어질 육신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변질되어 서서히 썩어져 가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새벽기도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으며 오히려 새벽기도를 해야만 '신앙 생활하는 것이냐?'는 비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으며 주의 종들 가운데서도 새벽에 기도제단을 쌓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모두가 믿음의 전신갑주를 벗어 던지고 벌거벗고 사니까 믿음의 옷을 입은 자가 오히려 병신 취급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경악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경고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느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
  이제 14-22절은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입니다.

 

  ▶14절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여기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하'인데 '상자 혹은 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 한 번 더 사용되고 있는데, 모세를 담아서 나일강에 띄울 때 사용했던 갈대 상자를 '테바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는 같은 것입니다. 둘 다 물 위에 떠서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목숨을 살려주는 구원의 용도로 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구원할 자를 방주로써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주를 대강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아는 최선을 다해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그 규모가 대단했습니다. 어림잡아 보면 길이가 약 150미터, 폭이 25미터, 높이가 15미터 정도입니다. 일찍이 15세기말에 '칼럼부스'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탐험할 때 사용했던 배의 길이가 겨우 23미터 정도라고 하니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방주를 만들기 위하여 노아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불평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만들었을 것입니다.
  방주는 그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구원의 방주는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 것이므로 온 세상이 심판 받아 멸망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주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배가 아닙니다. 배는 노나 돛이나 기관이 있어야하고 방향을 인도하는 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가 지은 배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라고는 하지만 배가 가져야할 필요한 기구는 하나도 없고 다만 물 위에 떠 있는 건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노아가 지은 방주는 자기의 추진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이 운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운행하시는 방주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주는 사람이 피난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선입니다. /믿/ 오늘 저와 여러분이 계신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구원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너는" 너희는 이라고 하지 않고 '너는'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수입니다. 노아에게 개인적으로 한 말씀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믿으니까 아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누라가 집사니까 남편이 덩달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구원은 하나님과 1대 1의 관계입니다.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방주를 잣나무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잣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써 변함 없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나무로 방주를 짓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의 인격도 날마다 달마다 변함 없는 믿음의 인격을 소유하라는 의미인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잣나무와 같이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생명의 말씀으로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아멘!/
  또 잣나무는 굉장히 단단한 나무로 노천에 두어도 몇 천 년이나 간다고 합니다. '노아 방주의 발견'이란 책에 의하면 나중에 나옵니다만 노아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했는데 이 산은 해발 5천 미터나 됩니다.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배나 더 높습니다. 이 아라랏 산은 항상 눈으로 덮여 있답니다.
  이 잣나무는 노천에 두어도 몇 천 년은 간다는데 눈 속에 넣어 두었으니 지금도 그 모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고고학자들의 분석입니다. 이 아라랏 산은 터키와 소련의 국경지대에 있기 때문에 좀처럼 탐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 팀이 비행선을 타고 사진을 찍어 왔는데 노아의 방주가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고고학 때문에 노아 홍수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드시게 하신 것도 견고하고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명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간들을 막고" 나중에 보면 삼층으로 만들고 간들을 막았는데 이 간들은 동물들을 잘 간수하기 위함입니다.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역청은 아스팔트와 같은 것입니다. 왜 역청을 칠해야 할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역청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을 막아주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역청은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역청을 바르지 않은 방주는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출2:3절을 보면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담을 갈대 상자를 만들 때도 역청을 발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역청으로 칠하여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성도들도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의 죄가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여러분! 역청을 칠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여러분의 인생의 방주를 칠하십시오! 예수님 없는 방주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없는 인생은 실패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칠한 인생은 성공이요, 축복이요, 궁극적으로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아멘!/

 

  ▶15절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방주의 크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설계도입니다. '장이 삼백 규빗' 길이가 지금 환산법으로 계산한 학자들에 따르면 150미터라고 합니다. 또 폭이 25미터 높이가 15미터로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항공모함도 있어서 본문의 방주가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당시에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 방주를 시험해 보기 위해 똑같은 실물로 배를 만들어 보았더니 속도는 잘 나가지 않았으나 견고성이 더하여 안정감이 있다고 합니다. 학자들의 계산법에 의하면 다시 방주의 용적을 계산해보니 구만 톤급이라고 합니다. 당시는 어마어마한 최대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이 배를 노아가 120년 동안 만들었으니 노아의 재산도 굉장한 부자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부자가 재물에 더 무섭다고 하는데 노아는 자기 재산을 전부 투입하여 방주를 건설했습니다.


  ▶16절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6절에는 배에 창문을 내는데 위에서 꼭대기에서 한 규빗 내려와서 위에만 창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창문은 위에만 내게 했을까요?
  ⑴물이 방주 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하려는 이유이고, ⑵성도들은 위만 보고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아래를 보면 파도가 펄럭이고 비바람이 거세더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한마디로 성도들은 세상 환경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밤에 지나갑니다. 한밤중쯤 되어 풍랑이 불어오고 배는 흔들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먼 수평선에 희미한 그림자가 보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다' 소리쳤습니다. 그때 주님이 '내니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장 기뻐하고 반가워한 제자가 베드로입니다. '주여!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여 바다를 걷게 하소서' 그때 주님이 오라, 명함으로 베드로는 바다 위로 걷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만 바라보고 갑니다. 담대함과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가 파도와 풍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볼 때의 담대함과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공포와 의심으로 한순간 젖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물 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시면서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우리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승리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믿/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창문을 위에만 있게 하신 것입니다. 16절 하반 절에 방주를 상중하 삼층으로 짓도록 한 것은 고등, 중등, 하등 동물들을 구별해서 넣기 위함이라고 주석학자 '풀 빗'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방주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⑴방주에 칠해진 역청은 속죄의 피를 의미합니다.
  ⑵역청은 '덮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방주 안에 미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해서만 우리를 지켜주고 심판을 면케 해 준다는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⑶방주에는 창이 하나만 있습니다. 성령의 계시 창입니다. 성령의 창을 통해 비춰오는 생명의 빛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⑷방주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요14:6).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인간의 죄로 인하여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홍수의 심판으로 사람 뿐 아니라 땅의 생명 있는 육체를 다 멸절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자는 구원이 틀림없고, 죄 속에 있는 땅에 있는 자의 멸망도 명백합니다.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우리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구원을 주십니다. 아담에게도 언약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 이 언약을 파기한 아담은 오늘 우리 대까지 그 저주가 임하므로 가시와 엉겅퀴 나는 삶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방주를 지으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창12: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것은 언약입니다. 그리하면 2절에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할/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언약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약속은 쌍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믿/ 노아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120년 전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는 역사상 가장 먼 일기예보를 맞춘 사람입니다. 오늘날 일기예보가 길어봐야 한 주간 아니면 한 달 것 아닙니까? 그것도 가끔 오보가 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120년 후에 장기 일기예보를 전했습니다.    '120년 후에 홍수가 올 것이다.' 노아의 믿음은 환상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바울이 정의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 종말 뒤에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지금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을 주셨기에 보는 것같이 확실히 믿을 수가 있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곧 실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히11:7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경외했다.'는 말을 칼빈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이 합쳐진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경외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폭군이기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신뢰하면서 근신하는 두려움입니다.
  노아는 다가오는 심판이 너무나 분명해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의 경고는 생사를 건 말씀으로 받았고, 그것은 가장 믿기 어려운 120년 후에 일기예보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던 롯의 사위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경우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은 울립니다. 그런데 농담으로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은 노아의 때는 언제나 역사 속에 있고, 회개하지 않는 세대는 그때와 같이 망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능히 지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격려해 주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웃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재미있게 즐기고 있는데 장차 홍수가 나서 멸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찍어 방주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 가서 배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올라가서 배를 짓고 있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심지어 자기 사위들까지도 빈정댑니다. 방주가 완성되는 날,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들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파선 당한 배에서 구조선을 기다리는 승객들은 구조원을 보고 기뻐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구조선에 옮겨 타야 합니다. 방주는 가장 안전한 규격의 배입니다. 그 배는 키도 없고 속력을 내는 배도 아닙니다. 배는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배입니다.
  그 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모형입니다. 참 행복한 교회가 구원의 방주 됨을 믿습니까? 당시 배 밖에는 죽음이요, 배 안에는 생명입니다. 배밖에는 심판이요, 배 안에는 구원입니다.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요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나 외에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홍수 때에 방주 이외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 진리는 지금도 예수 이외는 구원이 없다는 진리입니다. /아멘!/

 

  ▶19-21절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 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로 인해 가족과  동물까지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표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담의 타락으로 전 인류와 피조 세계가 함께 저주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3:17) 노아의 의로움이 동물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곧 그분 한 분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그 공로를 힘입어 속죄함을 받은 것입니다(롬5:17-19). /믿/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다 준행하였더라'는 말씀은 120년에 걸친 노아의 인내와 믿음과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전력을 기울여 방주를 짓는 그 오랜 기간 동안 노아는 당대 사람들에게 갖은  조롱과 희롱을 당하고 또한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것을 다 준행하여 그 결과 자신과 가족, 짐승들까지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귀한 신앙이요, 복 받는 신앙입니다. 축복의 비결은 바로 순종에 있습니다. 순종한 만큼 하나님의 축복은 채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주인이 일꾼에게 논으로 가서 일하라고 하는데 '아니요, 밭이 더 급해요'라고 한다면 그 종은 주인에게 책망 받기 딱 알맞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켜야 복을 받습니다. 전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전도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냥개 한 마리가 거짓말같이 놀라운 묘기를 연출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의 묘기는 그 주인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기가 다 끝나자 개는 주인에게 꼬리를 치며 달려갑니다. 그때 주인이 기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했어! 잘했어!'하면서 고기 한 덩어리를 줍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순종하는 자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해서 그의 8식구가 다 구원을 얻고 의인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장차 있을 최후의 심판 날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천사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날에는 권세나 명예나 재산이나 지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삽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그대로 준행하는 자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32,500의 축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복을 받아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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