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손들! (창 4:16-26)
미국 뉴욕 항 앞에는 '리버티'라는 섬이 있습니다. 그 섬에는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왼손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있습니다. 이는 '자유는 세계를 비춘다'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북전쟁 후 프랑스 국민이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조각상은 'F.A.바르톨디'라는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여신상을 무려 20년에 걸려 완성했습니다.
이 조각상의 제작을 요청 받은 바르톨디는 '자유'라는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엄청난 세월이 걸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델 감을 추천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영웅들을 사진들도 모조리 검토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다.'라고 부딪치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몹시 고뇌스러워 하던 어느 날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의 모델이 떠올랐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자기의 어머니입니다.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여신상 모델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가까운 곳에서 가장 훌륭한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우리가 인류역사를 살펴 볼 때마다 또 성경을 상고해 보면 거기에는 두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가인의 계보와 아벨의 계보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살았지만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부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의 계보가 있고, 첩에서 나온 이스마엘의 계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계보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으나 이스마엘의 계보인 아람 족속들은 알라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예부터 오늘날까지 이 두 계보의 민족 간에는 싸움이 끝일 날이 없었습니다. 항상 화약고에 불이 언제 붙들지 조마조마한 동네가 바로 이스라엘과 아랍진영입니다. 이삭의 두 아들의 경우에도 야곱 계보와 에서 계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으나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에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속적인 생활을 누렸고, 야곱은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을까? 거룩한 욕심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도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믿음 안에서 지도자 모세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사사건건 하나님을 반역하고 지도자 모세를 대적하고 당을 지었던 고라의 일당도 있었습니다.
선지자 중에서도 발람과 같은 삯군 선지자가 있는가 하면 사무엘과 같은 훌륭한 계보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충성을 다한 제자가 있었고 돈 몇 푼에 자기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롯 유다와 같은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도 이조 말에 이완용과 같이 나라를 팔아먹은 자가 있으며 민영환과 같은 충성자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시대에도 이순신 장군이나 김덕영 같은 충신이 있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 배와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운 사람이지만 김덕영 장군은 육군으로서 외적을 막아 큰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그러나 당파싸움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이 세워지는 것을 시기한 반대당의 모함으로 김 장군이 그 당시 역모에 가담했다고 꾸며 한참 전승을 올리고 있는 김 장군을 서울로 잡아 올려 지금 단성사자리에서 그를 때려죽였다고 합니다.
그때 유명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이때 형리가 아무리 때려도 김덕영 장군이 죽지를 않습니다. 그때 김 장군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죄 없는 나를 역모로 모함하여 죽이려고 하나 내가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다. 정 나를 죽이려면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만고충신 김덕영이라고 글을 써놓고 나를 때려라 그러면 편하게, 쉽게 빨리 죽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형리들이 '만고 충신 김덕영'이라는 글을 써놓고 때렸는데 단 한 번의 매로 김 장군은 눈을 감았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은 이조 선조대왕 때 일이었는데 그때 각료 중에 윤두수라는 사람은 김덕영 장군을 살리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당파 싸움의 정적이던 유성용이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후 의인을 살리려고 한 윤두수의 후손은 그 가문이 크게 형통하였으나 반대로 그를 죽였던 유성용의 후손은 그 가문이 망해서 이렇다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인의 후예와 믿음의 뿌리로 이어진 아벨 다음 셋의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는데 그 동안에 굉장히 많은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성경에는 세 아들의 이름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가인과 아벨이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온전함으로 경외한 자이었고, 가인은 그러한 동생을 쳐죽인 첫 번 살인자였습니다.
경건한 백성인 아벨이 죽고 나자 하나님은 그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아들을 다시 주셨는데 그의 이름이 셋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이 셋의 후손을 통해 이루시려고 계획하시고 이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아담의 아들이었지만 가인의 삶과 셋의 삶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달랐던 것처럼 역시 가인과 셋도 달랐습니다. 이제 앞으로 성경은 셋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가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가인의 후손들은 보니까 그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16-24절까지는 불 신앙의 족보로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떠나 어떻게 살았는가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죄가 점점 장성해 가더라는 것으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생활이란 죄가 자라는 생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장성하여져서 의인 열 명이 없어 하나님께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노아 시대가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25-26절을 보면 앞의 가인의 계통과 믿음의 계통인 셋의 계보를 대조시켜 보여 주신 것인데 5:5절까지 이어지는 문장입니다.
가인은 자기 생각대로 방법대로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가 결국은 실패한 것입니다. 예배가 실패하니 생활 속의 도덕이 실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실패하면 형제 사랑하는 것도 실패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바르게 드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본문을 쭉 읽어 내려가다 보면 가인은 굉장히 타락하여 갔는데도 벼락 맞아 죽지도 않고 아이를 잘 낳고 집안도 잘 되어가고 돈도 잘 번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상당히 성공합니다. 그것을 보고 믿음의 사람들이 시험에 듭니다.
이상합니다. 예수 안 믿어도 돈을 잘 벌고,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보이는 현세에서는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멸망의 자녀로써 음부 어두운 곳에 버림받게 될 자녀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16절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끝없는 방랑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증표도 주셨지만 그의 삶은 항상 쫓기는 삶이었고, 안정을 찾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으로 나갔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나가게 된 것은 그가 지은 죄악 때문이었고,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저주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하소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자가 하나님 앞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을 때는 그것이 힘들고 거추장스러워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을 떠나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을 떠난 다음 얼마 있지 않아서 그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서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아예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왜 포기했습니까? 범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네가 왜 예배를 그렇게 드리느냐? 신앙생활 좀 똑바로 해라'고 간섭하는 것이 가인은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상상해본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않으면 늘 책망을 받습니다. '신앙생활 좀 똑 바로 해, 반쪽주일 지키지 말고 온전히 지키라'고 합니다. 여러분, 간섭이 관심입니다.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여러분!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부모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만나기만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칭찬을 해 줍니다. 그러나 부모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면 얼굴만 마주치면 책망을 합니다. '숙제는 했니? 어디 갔다 왔니? 또 오락실이야?' 이런 자녀들은 부모가 만나기만 하면 귀찮게 간섭하는 부모로 느껴집니다.
여러분! 왜 간섭하는지 아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속에 가인은 스스로 하나님과 교제를 포기해 버리고 하나님의 책망이 없는 곳으로 제 마음대로 살겠다는 심보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뛰쳐나가서 산 곳이 어디입니까? '놋으로' 갔습니다. 여기 '놋'으로라는 말은 놋 땅으로 갔다는 의미이지만 그곳에서 '유리 한다, 방황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풀이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보니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안하더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것 같고, 부족함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가득합니다.
▶17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이라는 인생도 별 수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 에녹을 낳고 놋이라는 곳에 머물러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 주위에 성을 쌓았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에녹 성은 가인의 왕국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그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왕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지 죄가 되는 일이든지 자기가 원하면 다합니다.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려면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어찌나 많은지' 항상 그것에 얽매여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등지고 나가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에녹은 가인의 아들입니다. 창5:24절에 보면 또한 에녹이 나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입니다. 그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이고, 오늘 본문의 에녹은 3대 손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한 사람은 아주 훌륭하고, 다른 사람은 아주 타락한 인물입니다.
에녹이란 뜻은 '헌신하다 시작하다'라는 말입니다. 왜 가인이 아들을 에녹이라고 지었을까요? 주석가 '카일'과 '칼라쉬'는 '가인의 회심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주석가들은 '경건치 못한 교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에게도 하나님의 위로를 주셨습니다.
①부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동침하니' 가인에게 있어서 아내는 더 할 수 없는 그의 위로자였습니다.
②미래의 소망인 자식을 주었습니다. 인간은 그의 분신인 자식을 통하여 자신을 연장 시켜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그 성을 에녹성이라고 했습니다. 도시를 건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불안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를 위하여 성을 쌓지 않았을까요? 인간 스스로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도시가 주는 이미지는 범죄와 타락입니다. 세속적 환락이 거기에 있고, 온갖 퇴폐적인 생활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그랬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아무리 높이 성을 쌓고 도시 문명을 개발하여 풍요와 환락의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 안에 참된 삶의 가치와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귀중한 것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러므로 참된 평안, 참된 양식, 참된 가치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
▶18절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본 절에서는 계속 '낳았고, 낳았고' 하여 자손이 번성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육신 적으로 볼 때는 복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죄 속으로 빠져갑니다.
본문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 특히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한 남편에 한 아내라는 결혼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멕에 이르러서 두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19절에 보면 알겠지만 인류 최초로 한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는 창조섭리에 어긋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9절"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가인의 후손 중에서 특히 라멕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18절 이하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라멕의 이름과 두 부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라멕은 '힘센 자'란 뜻으로 인간의 힘으로 문화를 건설한다는 의미요, 또 아다는 '꾸민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실라는 '딸랑거리는 자'란 뜻으로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건설에 보지만 그 안에 별 수 없이 딸랑거리는 얕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할/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 말씀 속에는 '자신을 위하여'란 뜻으로 곧 이기주의적인 목적과 욕망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가정 제도는 일부일처제입니다. 그런데 최초로 라멕이 하나님의 법도를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한마디로 불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라멕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스스로 거부하고 모든 일을 자기 수단과 방법과 힘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사실 라멕은 육신의 힘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미 문명시대에는 힘센 자가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지금도 비문명인들, 특히 저 회교국들은 힘센 자가 여자를 많이 거느린다고 합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보호를 자기의 보호로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라멕의 조상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를 주신 것은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겠다는 표였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하나님의 보호를 칼과 창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창과 칼이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믿/ 그래서 시인은 시127:1절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했습니다.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두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소개합니다. 원래 목축업의 시조는 아벨이었는데 아벨을 죽인 가인의 후손이 이 목축업을 발달시킨 사실이 좀 이상합니다. 아마 그의 조상 가인이 아벨을 죽인 죄로 땅에 저주를 받았는데 놋 땅에서 성을 쌓아 정착을 했으나 땅이 저주를 받으므로 농사짓는 일을 기피하고 목축으로 눈을 돌린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라멕의 후손들의 굳건한 인간의 의지력을 높이 살만합니다. 농사짓는 축복은 거부당했으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직업인 목축업에 도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도 최선이 안 될 때는 차선으로 도전해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최고로 좋은 것이 아니면 도전을 기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울 대학교 아니면 안가겠다고 고집하여 4수하는 학생도 보았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여기 야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업적인 목축업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목축업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야발 이후로 목축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야발에게 가서 어떻게 양을 기르고 소를 키워야 하는지 그 기술을 배워야 할 만큼 뛰어난 목축업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세상에 길이 남길 업적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21절은 아다에서 낳은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21절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악기를 잘 다루어서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을 쫓겨난 가인과 그 후손들의 삶은 슬픈 삶이었습니다. 이 슬픔을 위로하는 길은 음악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들의 노래 속에는 대개가 우수적인 가사입니다. 이별, 사랑, 슬프고, 외로운 가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입으로는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 자기를 들어다보니 슬픔 밖에 없더라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어떠한 인간도 그 삶은 슬픔과 저주와 절망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음악을 통해서 치유하려고 했고, 또 우상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음악을 창안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없는 영혼은 우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다처제의 부도덕이 시작되고 끊임없는 살상을 자행되고 있으므로 이들이 창안한 음악은 음란과 투쟁을 유발시키는 그런 음악이었을 것입니다.
▶헨델이라는 사람은 50세가 될 때까지 세속적인 유행가만 작곡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게 되었답니다. 회개한 영혼 속에 어떤 작곡이 떠올랐겠습니까? 세상의 광기 어린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메시아'도 신앙이 좋아질 때 곡을 쓴 것입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인데 어쩌다 헨델의 메시아를 들어보면 그 속에 할렐루야가 나올 때면 괜히 가슴이 벅차고 감동이 치솟습니다. 아마 헨델이라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 시대의 유행가 작곡가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유명한 메시아를 작곡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귀한 인물로 남은 것입니다. /믿/
그러므로 예술도 진정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술이 되어 질 때 크게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유발은 '악기 다루는 자, 음악인, 기쁜 소리'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발이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금을 만들었고 나팔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음악이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음악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이 유발은 커다란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발의 음악이나 그가 만든 악기를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음악은 인간 중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허무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허무한 것처럼 인간이 만든 모든 예술적 업적도 결국은 허무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이 없는 모든 인간의 음악이나 예술은 죽음과 허무라는 주제로 결론을 맺습니다. 어쨌든 가인의 아들인 유발은 인류의 문화 가운데 예술 분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22절에는 첩 실라 소생의 이야기입니다.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두발가인'이라는 이름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였다고 말씀합니다. 두발가인은 기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때까지의 사람들은 돌로 각종 기구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두발가인에 이르러서 비로소 구리와 철을 가지고 각종 날카로운 기계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철기 문화의 등장은 인류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두발가인의 구리와 철에 의한 기계의 개발은 사람들의 삶을 한층 편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철은 모든 기계제조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두발가인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동과 철로 창, 칼,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그 기계문명발달은 오늘날 화학무기까지, 핵폭탄까지, 탄두미사일까지 엄청나게 발달했습니다.
기계문명은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능률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으로는 인간들이 할 일을 기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리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봇, 컴퓨터, 기계들이 일자리를 다 빼앗아 버리면 이 땅에 실업자들이 솟아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째든 기계문명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진화론에 영향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받게 되어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어쩌고 하면서 수만 년이 내려오다가 청동기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오랜 고대시절에 벌써 동, 철기구가 나왔습니다. 두발가인이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경 속에 사실을 거짓으로 몰아 부칩니다. 노아의 홍수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대인들은 확증과 자료를 근거로 과학을 발달시킵니다.
지금 노아의 홍수를 비화로 이야기하면 머리 나쁜 축에 든다고 합니다. 왜? 고고학자들이 삽으로 땅을 파보니 산꼭대기에 고기가 수북히 죽어서 화석이 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고기가 산꼭대기에까지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중동 지방에는 토층이 있고, 그 밑에 다시 문명의 발자취를 발굴해 낸 지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 고대 사람들의 머리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쁘지 않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했으니 처음에는 원숭이의 머리가 발달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우리와 똑같은 머리에 지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아담이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이 지은 것입니다. 본문 속에 두발가인이 왜 무기를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인류는 따져놓고 보면 자기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나라도, 민족도, 자기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벌써 이때부터 물질적 부요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때부터 예술이 나왔고, 기계문명이 나왔고, 또 다음 23절 이하에 보면 인류 최초의 문학이 나옵니다.
▶23-24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시를 신학자들은 '칼의 노래'라고 합니다. 이 시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거만한 반항과 자신의 힘에 대한 교만한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폭력과 살인의 악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이 노래는 홍수 이전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시로 꼽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하고는 단을 한 달 내어서 쓰여 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표기는 시라는 뜻입니다. 라멕이 시를 한 수 읊는데 뭐라고 읊었느냐 보았더니 두 아내를 들어서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전부가 뭡니까? 자기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랑입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여러분! '나의 창상을 인하여'에서 이 참상은 '깊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고, 여기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에서의 상함은 '속이 상함, 깊지 않은 순간적인 혈기'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많은 처자식을 거느리다보니까 바람 잘 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의 부인들때문이든가 자식들 때문이든가' 깊은 상처를 입었나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잘 압니다. 그도 첩 하갈 때문에 가정이 풍파가 심했습니다. 그 가정싸움이 지금 저 중동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싸움입니다. 혈족 싸움이요, 종교싸움입니다. 무서운 싸움입니다.
라멕이 상처를 받은 나머지 화가 발하여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일부이처의 부정한 생활에서 일어난 가정 분쟁과 불화는 마침내 살인까지 한 것입니다. 라멕은 살인을 하고도 그의 조상 가인처럼 뻔뻔스럽게도 일말의 반성이나 후회의 빛도 없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고 자기의 별명을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가인이 보복을 당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가인이 보복을 당하는 경우에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 하였으나 라멕을 보복하는 자는 칠십 칠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자기가 자기를 높이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을 떠나면서 혹 누가 가인을 해롭게 한다면 칠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심판자이심을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 본문의 라멕은 자신의 소리로 라멕을 자기 동생도 아닌 사람을 죽였으니 자기를 괴롭게 하는 자는 칠십 칠 배의 벌을 받아야 된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얼마나 교만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입니까?
여기까지는 어두운 사건입니다. 불 신앙의 족보이이에 어두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25-26절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얻어도 됩니다. /할/
▶25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은 '지정된 자, 택함 받은 자, 안정된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니 그는 약하지만 마음은 평안하고 안정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성도 크게 쌓지 않았고 기계도 만들지 않았고 돈도 많이 모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평안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을 키위 보면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이 강퍅케 되어가고 악하게 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바라보면서 아담과 하와가 이제 우리집안에 믿음의 그루터기가 끊기나보다고 절망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남은 자가 있고, 택한 자가 있고, 하나님께서 긍휼로 베푸시는 자가 있다'는 그 증거로 셋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아담이 나올 때 아담의 나이가 130세였으니까 13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족속들이 번창했겠는가? 다만 셋을 주신 것은 믿음의 후계자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벨 대신'에 셋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가기 위해 믿음의 자손과 불 신앙의 자손을 곁들여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는 '연약, 약함'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겠나이다.' 이런 신앙으로 에노스는 출발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벨의 죽음이 있은 후 오랫동안 주께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었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할/
아벨의 죽음으로 의인의 씨가 없어지고 믿음의 계층이 끊어진 것 같았으나 순을 꺾으면 새순이 나오듯이 다시금 의인의 씨가 계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그의 손자를 통하여 다시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기본은 감사입니다. 죄인에게도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값없이 조건 없이 주시는 은혜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벨이 드린 첫 제사는 감사로 드렸고, 또 셋의 아들 에노스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가 아닌 셋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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