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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8-15)

by 【고동엽】 2022. 4. 12.

(제11강)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8-15)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 토인 부락을 지나다가 보니까 한 토인이 자기가 늘 절하며 섬기던 우상을 그만 나무에 가꾸러 매달아 묶어 놓고는 볼기를 신나게 때리고 있더랍니다.
  선교사를 보니 너무 이상해서 묻기를 '아니 당신이 그렇게 정중하게 모시고 받들고 섬기던 우상을 왜 그렇게 매달아 놓고 때립니까?' 그러자 토인이 '이유가 있지요. 내가 일평생 이 우상을 모시고 섬겼는데 복은 주지 않고 이렇게 어려운 일만 자꾸 생기니 매 좀 때려야 정신이 들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상은 아무리 몽둥이로 때리고 짓밟아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는 벌써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절에 서 있는 불상이 왜 불상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늘 서 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불쌍해서 불상이라고 부른 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상황을 묻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제목 소개!▶

 

  창세기 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 찾아 오셔서 인간을 향해서 상황을 묻는 질문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반역하고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동산 숲 속에 숨어 있을 때,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이 물음은 지금 하나님이 아담이 숨어 있는 현장을 몰라서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와 그 죄를 회개하길 원해서 찾으신 물음입니다.
  그런데 회개는커녕 아담은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었나이다.' 또 대답하기를 '당신이 짝 지어준 저 하와 때문에 내가 숨었나이다.'라고 변명만 일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물음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오리발만 내밉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너의 소속이 어디에 있느냐?'는 소속감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장소성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성동구 성수2가3동에 주민등록 번호가 확실히 나와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소속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육신 적인 주소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의 주소지도 분명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신 것은 영혼의 주소를 묻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영혼의 주소지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서'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13권의 서신을 기록하였는데 그 곳에 무려 164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 하나님 안에' 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육신의 주소는 그때, 그때마다 달라졌습니다. 때로는 에베소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로마의 감옥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안디옥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주소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주안에,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네가 지금 '하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신앙 안에 있느냐? 불 신앙에 있느냐? 순종하는 사람이냐? 불순종하는 사람이냐? 은혜 속에 있느냐? 불평 속에 있느냐?' 이런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계속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믿음 안에 있느냐? 은혜 안에 있느냐? 능력 안에 있느냐? 아니면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느냐? 저주 아래 있느냐?' 계속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주안에, 하나님 안에' 네 영혼이 소속된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본문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이 질문에 가인의 대답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며 거칠게 반항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 두 번째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네 남편이 어디 있느냐?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 네 자식이 어디 있느냐? 네 친구가 어디 있느냐? 주안에 있느냐? 세상 속에 있느냐?'를 묻고 또 묻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내 남편의 문제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물론 믿는 아내의 책임입니다. 믿지 않는 내 아내, 물론 믿는 남편의 책임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 형제, 다 믿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루 속에 그들을 전도해서 '주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님 안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저와 여러분 속에 있음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입니까?/
  10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마25장에 보면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 몇 가지의 달란트를 물려받았습니다. 그 받은 달란트로 얼마를 남겼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그 달란트를 심판하실 날이 오십니다. 이것을 행위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묻고 계십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자기의 위치를 물으시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신앙의 자리에 있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충성하고, 전도하는 자리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기도 중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행위로 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이삭을 아끼지 않고 모리아 산에 하나님의 제물을 바치고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아브라함을 가리켜 '네가 이제야 네 믿음을 알았다. 네 독자 이삭보다는 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고 칭찬해 주시며 수풀 속에 양 한 마리를 예비해 놓으셨다가 이삭 대신 양을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할/
  창16: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래의 여종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입니다. 이 하갈이 서자 이스마엘을 낳자 기세가 등등해서 자기의 상전인 사라를 업신여겼다가 그의 집에서 쫓겨나 사막 벌판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물으신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를 확실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물음을 던지십니다. '네가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느냐?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느냐? 무엇을 위해 높아지려고 하느냐?' 한 마디로 '어디를 향하여 네 인생살이를 달리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성경도 '너희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입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셨습니다. /할/

 

  ▶4장에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의 후손들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밭을 갈고, 땅도 일구면서 수고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또 고통하면서 자식을 낳으리라고 하셨는데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당했고, 영적으로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였으니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육신 적으로 가인을 낳을 때나 아벨을 낳을 때 하와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자식을 위하여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여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8절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가인이 하나님의 충고를 듣고도 전혀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고하니라'는 말은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책망(6-7)을 듣고 난 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때입니다. 즉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과 권면을 듣고서도 회개는커녕 분노와 불만의 억제치 못한 채 아벧을 죽이려 들판으로 꾀어내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라'
  하나님의 이 충고를 바르게 들었다면 하나님께 회개해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용서하소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이 이렇게 믿음 없이 성의 없이 드렸사오니 이제 다시는 그런 불 신앙의 죄를 범하지 않겠나이다'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커녕 아벨에게 따집니다. 누구를 닮았습니까? 그의 아버지 아담을 닮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도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오히려 무화과 이파리로 앞치마를 만들어 입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유전성이 있습니다.
  가인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아벨에게 가서 '아벨아! 하나님이 나의 재물은 받지도 아니하시면서 내게 심하게 하시더라' 이 말입니다.
  또 여기 '고하리라'는 말은 바로 책임전가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마치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가 형에게 충고하기를 '너는 요사이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 동생은 성적이 좋은데 이렇게 성적이 형편없어서야 되겠니? 좀 더 열심히 해라?' 아버지께서 충고하시고 방문을 열고 나가지 말자 동생에게 화를 냅니다. '야 인마 너 적당히 좀 해 너 때문에 이렇게 당하잖아!' 지금 가인이 하는 짓이 이런 상황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책임이 동생에게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네가 괜히 잘해 가지고 내가 골치 아프다 인마!'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행여나 실패했나요? 그렇다면 '내가 실패했나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십시오, 자기를 자꾸 정당화하려다 더 죄를 짓게 됩니다. '포피'라는 사람은 '한 가지 거짓말을 한 사람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스무 개의 거짓말을 금방 생각해 낸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8절 하반절에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이 사건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극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기 형제끼리입니다. 여기 '쳐 죽이니라'의 원 뜻은 '죽일 의도를 가지고 때리다'라는 말로 가인의 마음이 확고부동하게 사단에게 정복당해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 말입니다.
  지금 아벨을 죽인 것은 형 가인이 자기를 정당화하려다가 살인까지 한 것입니다. 들에서 죽였다는 것도 사람들이 안 보는데서 처치했다는 말인데 무엇을 말해줍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사람 눈만 피하면 완전 범죄 일 것입니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눈보다 더 정확하십니다. /믿/ 뒤에 가면 나오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죽이겠습니다' 가인이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 성경을 읽다보면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라곤 아담, 하와, 그리고 가인 아벨 네 명뿐이 없었지 않았나 의심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는 벌써 사람의 수가 많아졌답니다.
  성경은 아담의 자식들을 가인과 아벨 둘만 소개했지 그밖에 수많은 아들과 딸들이 있었고, 그들은 또 종족이 퍼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실 때 어떤 샘플 케이스를 하나님께서 그들 중 대표를 뽑아서 이런 인생 저런 인생을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성경 5:3-5절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그 족보에 보면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담이 930세까지 살면서 자녀를 낳았으니 그 숫자가 굉장합니다.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종족이 퍼지게 됩니다.
  아벨 대신에 준 아들이 셋인데 아담의 상속자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첫째, 둘째를 중심하여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을 중심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 가인은 왜 살인을 했나요? 동생을 미워하다가 살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미워하는 것은 벌써 살인이라고 하시면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도 네 형제를 미워하고 원망할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다시 와서 그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새로운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왜 형제를 미워합니까? 나보다 머리가 낫다든지 형편이 낫다든지, 그런 것들이 못마땅해질 때 미움이 일어납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고 왜 내 제사는 받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하나님께서 창4장을 통하여 인류시조가 범죄 하여 죽음이 왔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이면 다행일 것입니다. 가인 같은 자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은 끝'이라는 공식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어떤 고생을 해도 죽으면 끝이다, 어떤 죄를 지어도 죽으면 끝이다, 또 어떤 의를 행했다해도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죽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아벨은 죽었으나 살았습니다. 아벨의 죽음으로 아벨이 끝난 것이라면 아벨은 한 마디로 개죽음한 것입니다. 아벨은 너무 억울하게 죽은 것입니다. 아벨을 누가 복되다 하겠습니까? 인류 최초의 살해당한 자인데, 그것도 형에게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살아 있습니다. 히11장에는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할/ 히12:24절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하면서 거룩하신 예수의 보혈과 비교할만한 순교의 피로 아벨의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벨이 죽었습니까? 아벨이 끝이 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죽었으나 살았습니다. 그 믿음은 살아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생하는 자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아우가 어디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몰라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물음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인 것을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또 그 죄를 회개하도록 하려고 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물음입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회개하는 태도는커녕 '내가 알게 뭐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기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말은 '나는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기가 뻔히 아벨을 죽여 놓고도 전지전능하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일종의 반항적인 태도입니다.
  여기 '지키는 자'는 '돌보는 자, 시중을 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형으로써 마땅히 동생인 아벨을 돌보며 지켜 주어야 할 인간적인 책임이 있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형제의 형편과 처지를 염려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빌2:3-4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성경 중에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이때 예수님이 마22:38-3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주님은 눅10장에서 선한 이웃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웃을 구해주는 장면을 생생하게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눅10:33절 이하에 보면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의미로는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 것이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 그리고 '주막'은 오늘 날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오늘 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또 '강도 만난 이웃'은 '세상사람'을 상징한 것이고,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령을 상징한 것이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재림을 의미한 것입니다. /할/
  진실 된 이웃은 고통 당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며 도와주는 사람이며, 그보다 더 큰 이웃은 바로 생명을 주께 인도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형제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웃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인은 '네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즉 '아우를 돌볼 책임이 있느냐?'고 하자, 10절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0절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죽여 놓고 무슨 소리냐?'라는 책망입니다. 여기 핏 소리는 생명입니다.
  '호소하느니라'의 원어 적인 의미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다'입니다. 즉 '사람 살려!' 애타게 울부짖는 비명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때로는 '억압받는 약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법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왕하 8:3).
  또한 '핏 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 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로 그냥 간과하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멘!/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분만이 홀로 생명을 주관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요한 도전행위인 것입니다. 살인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11-12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본 절은 가인의 죄의 결과들입니다.
  ⑴땅에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그 땅으로부터 너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는데 이제 가인은 아우의 피를 흘린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죄는 인간에게 파멸만 가져다 줄 뿐이므로 무섭습니다.
  ⑵경작을 해도 소득이 없습니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아담이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땀 흘리고 수고함으로서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 가인은 이 저주의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므로 땀 흘리며 열심히 경작하여도 그 효력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땀 흘리며 수고하여도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헛수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행사가 주의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발걸음을 옮겨도 그 옮기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제비를 뽑아도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꼭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⑶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땅 위에 방랑자가 될 것이다' 여러분! 얼마나 불쌍합니까?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불쌍한 인생을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방랑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죄는 인간에게 평안과 안식을 빼앗아 가며 오히려 불안과 불행만을 안겨다 줍니다.
  ⑷죄는 중압감으로 인하여 더욱 더 괴롭게 합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가인의 회개로 본 학자도 있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좀 뻔뻔스러운 것 같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주여! 저는 이 채찍을 맞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요나를 한 번 보겠습니다. 요나가 타고 간 배가 풍랑이 너무 심해서 뒤집어 질 것 같아서 누구의 연고로 이렇게 되었는지 제비를 뽑아 보니 요나가 걸렸습니다.
  요나에게 묻습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이 풍랑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던지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두려워서 던지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점점 거세졌음으로 할 수 없이 네가 책임져야 된다는 요나의 말대로 바다에 던졌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가 마땅히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자처하면서 회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역시 뻔뻔스러운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죄벌이 너무 중합니다. 농사짓고, 살아야 되는데 농사조차 안 된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14절은 일방적으로 자기 형편만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14절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기 '오늘'은 '바로 이 날'이란 뜻으로 이는 가인이 범죄한 데 대해 하나님의 즉각적인 형벌이 선고되었음을 강조해 주는 말입니다.
  '이 지면에서...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 하게 되었다'란 말은 그분의 관심권 밖으로 벗어나 더 이상 그분의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를 만지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히브리인들에게서 독특하게 찾아볼 수 있는 제도입니다, 즉 자신의 혈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경우 반드시 그 죽은 자의 일가 친척이 보복토록 규정하고 있는 율법을 상기시켜 준 말입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신의 혈족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경우 그 죽은 자의 일가친척이 그를 대신해서 복수합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추장아들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 때 그의 오빠들이 복수의 칼을 들었습니다.
  본 절은 한마디로 가인이 지금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도 자기 생명만 귀하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너무 뻔뻔한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가 3:2절에서 말하는 것같이 '진노중이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뻔뻔스러운 가인의 회개일지라도 그 회개를 받아주시는 모습을 1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사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할/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가인이 악하지만 그 모든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손을 대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므로 하나님이 간섭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십자가의 보혈의 피입니다.
  여기 '벌'은 단순한 '형벌'이 아닌 '복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칠 배'는 칠 배의 쌍수로 '일곱 배'란 뜻인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7'은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임으로 벌을 일곱 배나 내리겠다는 것은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보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표'는 '오트'라는 말로 '기념비 증거물 깃발 표시' 등을 의미하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죄를 짓고 수년 동안 숨어살던 사람이 자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가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자수를 했다든지, 살인죄를 짓고 10년 동안 감추고 살던 사람이 스스로 경찰을 찾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들이 자수하고 나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죄를 짓고 숨어 있고, 혹은 도망 다니며 살아야 했던 날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를 그 한 마디로 대변해 줍니다.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 숨어야 하고 쫓기는 신세보다는 차라리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뭔가에 쫓겨 불안과 공포 속에 사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마음속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밖으로는 여유 만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만일 이 불안과 공포를 다 잊고 살 수 있는 어떤 표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표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그 죄를 묻지 않고 누구를 만나도 그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 그런 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런 표만 있다면 이 세상을 사는데 전혀 두렵지 않고, 전혀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할/
  그런데 성경은 그런 표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표를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있는 한 가인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를 가지고 있는 한 누구도 가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표를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한 두려움과, 그 형벌로 인한 무서운 고통가운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무도 쫓는 자가 없지만 늘 쫓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악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하나의 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할/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늘 죽음의 공포와 심판의 두려움 속에 살게 하는 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을 인하여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십자가만 붙들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십자가를 붙들고 있으면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고 어느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피 흘려 죽으신 견고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 십자가를 굳게 붙잡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의 형제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 표를 그들에게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참 평안과 안식과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
  '죽음을 면케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에 의하면 살인자는 당연히 처형토록 되어 있습니다(출 21:12/레24:17). 그렇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 살인자인 가인을 살려 주셨습니다.
  ▶왜 그를 살려 주셨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⑴죄악이 관영(貫盈)할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신 것뿐이라는 견해입니다.
  ⑵추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라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마13:24-30)에 근거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⑶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는 학설입니다. 즉 사람들은 가인이 당하는 저주와 고통(12-13)을 보고서 살인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교훈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⑷계명을 세우사 인간에게 생명을 주관할 수 있는 절대자이심을 인지시키기 위함이라는 견해입니다.
  ⑸본 절은 죄인에게까지도 미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신 사건이라는 견해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늘 연약해서 넘어지고 무너지고 쓰러진다 해도 우리와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간구하기만 하면 우리를 어여쁘게 보시고 우리의 간구를 들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요 구하지 않은 것이 불 신앙입니다. 시편기자는 시50:14-15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아멘!/ 여러분 예배의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는 '건져주리라. 구원해 주리라' 오늘도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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