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8-14)
룻소는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의 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요, 다른 하나는 육체에서 나오는 정욕의 소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어떤 소리들이 있었습니까?
⑴사탄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타락한 천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서 맨 먼저 무슨 소리를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했습니다. 창3: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사단의 소리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와 능력을 의심케 하는 질문입니다.
아담은 사단의 말을 들고서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저와 여러분 곁에 바싹 다가와 의심의 소리를 질러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시는데, 사단의 말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것이며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밝아진 것은 신령한 눈이 아니라 범죄의 눈입니다. 오히려 심령의 눈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단의 소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해서 죄를 짓게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허영심에 빠지도록 유혹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접근합니다. 우리는 지금 온 세상에 휩쓸고 있는 온갖 많은 소리를 듣고 삽니다. 그런데 이 소리 속에는 사단의 소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귀는 항상 천국 안테나에 주파수를 맞춰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양육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⑵사람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욕심에 의하여 사단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인격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먹게 만들었습니다. 6절에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자는 여자에게 약했나 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와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단은 부부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막고 하나님의 대화를 단절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짓고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었나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들의 마음은 죄로 인해 고통이 끝없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10절을 보니까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단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처럼 당당했어야 될 텐데 풀이 죽어서 겨우 하는 소리가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는 대답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승리자의 소리가 아닙니다. 패배자의 소리입니다. 불안과 절망과 공포에 떠는 소리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소리는 한 마디로 두렵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진실을 보는 것이 두렵고 무섭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⑶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는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찾는 음성입니다. 지금 범죄한 아담은 고통 중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 중에 방황하는 인생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집니다. 벌거벗은 고통 속에 있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 본문 속에서 하나님이 어느 때 그들을 찾아오셨습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8절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기 '날이 서늘할 때'란 말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란 말입니다. 원문의 뜻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입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수치를 무엇으로 가리고 있습니까?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이파리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빨래도 바람이 불 때 잘 마릅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애써 만들어 입은 치마가 아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구절을 '하나님은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천천히 오셨다.'는 의미로 해석을 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죽이고 말겠다는 조급한 모습으로 오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급히 칼집에서 예리한 칼을 빼 가지고 급하게 오신 것이 아니라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을 거니시며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자들의 공포를 더 하게 할지도 모를 죽음 같은 밤중에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죄진 놈은 급하게 죽여 버리라고 생각되기 쉬울까봐 하나님은 이른 아침에 찾아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히 하루가 끝나고 마지막 시간에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화내시기를 더디 하시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할/ 오셔서 조용히 아담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죄지은 인생의 모습을 보세요!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멀리하시지 않고 더욱 가까이 찾아오시는 모습을 봅니다. 아담에게만 그렇게 하심이 아니고 죄지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천부여 의지 없이 손들고 옵니다.' 하고 주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복하고 통회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믿/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최초로 하신 질문이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십니다. 창4장에서 범죄한 가인에게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장소를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 어느 형편에 있느냐? 믿음 안에 있느냐? 죄악 중에 있느냐?' 이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똑같은 음성으로 묻고 계십니다. '너희 형편이 어떤가? 건강은 어떤가? 사업은 어떤가? 신앙은 어떤가? 또 지금 너희의 서 있는 곳이 믿음의 자린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죄악 중에 서 있는가?'를 물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직분 자들에게 묻습니다. 목사에게 '너는 맡겨준 그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 아니면 게으르고 나태함에 빠졌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장로에게 권사에게 집사에게 구역 장에게 교사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리한 눈으로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잘한 자에게는 아낌없이 상급을 주십니다.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너희 상급이 크니라. 나의 즐거운 잔치 상에 참여함을 받으리라!' 그러나 게으른 자에게는 엄하게 벌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밖에 나가 이를 갈며 슬피 움이 있으리라!' 이 책망은 정말 두려운 책망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번 저와 우리들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가끔씩 자기의 자리를 확인해 봅니다. 등산가는 정상을 향하여 가는 길이 옳은 길인가를 확인합니다. 사업가는 기업의 장래가 확실한 가를 몇 번이고 확인합니다. 항해사는 배의 정확한 위치를 지키며 바닷물을 힘차게 가르며 달려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들, 자기의 실력과 수준을 늘 확인해 봐야 합니다. /믿/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것은 그가 낫고 싶어하는 간절한 그의 소원을 예수님이 다 아시면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내가 너를 낫게 할 수 있는 줄을 믿느냐?'고 믿음을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요6:28이하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께 무리들이 묻기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묻자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입니다. 왜 아담이 실패했습니까? 믿음이 확신이 없고 말씀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믿지 않으려는 불신 병에 빠졌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못 믿습니다. 국민이 정치인들을 못 믿습니다. 국회의원들 검은 돈 안 먹었다고 양심선언까지 해도 가짜가 많습니다. 진짜 참기름이라고, 순 참기름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도 가짜가 판치니까 복음도 순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좋은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 남편은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사모님! 저는 목수 중에 일류목수입니다. 그런데 사모님 댁 장롱을 최고 좋은 것으로 하나 짜 드리고 싶은데 안 하시겠습니까?' 집사님 보기에 그 목수가 진실하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얼마나 들겠느냐고 물었더니 요사이 돈으로 계산해서 이백 만 원쯤 든다고 했습니다.
'사모님! 그런데 제가 돈이 없으니 반쯤 돈을 주시면 재료를 사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집사님은 어리석게도 백만 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앞으로 15일 후에 최고의 농을 같다 드리겠으니 기대하십시오' 하고 갔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고 영수증도 하나 받지 않고 보냈습니다. 교회에 와서 그런 소리를 하니 모두가 웃으면서 집사님은 너무 순진해서 당하고만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5일이 지나서 이 사람이 빈손으로 달려와서 하는 말이 '사모님 돈이 조금 모자라는데 30만원만 더 주십시오,'
사실 집사님은 사람들이 자꾸 비웃어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혹시 오면 영수증도 받고 주소로 알아 놓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수가 워낙 말을 잘해서 그만 30만원을 더 주었습니다. 또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했더니 모두가 바보짓을 했다고 야단입니다. 130만원만 날렸다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생각해 보니 '자기가 바보짓을 했구나!'하는 후회도 되더랍니다.
목수가 약소한 날도 지났는데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사기꾼에게 어리석게 당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며칠 있으니까 정말 번쩍번쩍한 장롱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격을 쳐도 이백 만원은 훨씬 넘을 것 같았습니다.
그 목수가 사모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제가 이번에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실은 제가 돈 백만 원을 주실 때 떼어먹으려고 했습니다. 처음엔 세상에 이런 순진한 사람도 있나? 이런 사람 때문에 내가 산단 말이야?'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30만원 받을 땐 이 목수의 마음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이렇게 믿어주다니?' 그 돈을 떼어먹으면 벼락 맞아 죽을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만들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믿어 주니 변하더라는 간증입니다. 우리도 믿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주의 종의 설교를 믿으십시오, 마음에 철판을 깔고 들으면 안 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나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내게 주신 운명의 현실을 여러분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내게 주어진 것,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믿음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내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 현재의 현 주소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스스로 알길 바라고 스스로 고백하길 바라고 스스로 정직해 주시기를 바라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거역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해 주기를 바라서 그런 대답을 기다리며 묻고 계십니다. ▶몇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①범죄한 인간들 깨우치는 음성입니다. 죄는 양심을 죽이는 독약입니다. 마비된 양심은 죄가 죄인 줄도 깨닫지 못합니다. 죄는 사람의 영혼을 파멸로 인도합니다.
맨 먼저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죄 중에 있는 아담의 실체를 깨닫게 해 주시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 앞으로 나오라'는 음성입니다.
저주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책망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발견하라고 오신 것입니다. 죄를 뉘우치라고, 죄를 고백하라고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학과 성적이 떨어지면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합니다만 영혼이 파멸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장 귀한 것은 우리의 영혼임을 알아야합니다. 죄는 우리 영혼을 파멸로 떨어뜨립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는 영혼이 삽니다. /아멘!/
②고통 속에 있는 인생을 찾으시는 음성입니다. 벌거벗은 수치와 고통 속에 있는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특징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믿/ 인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찾아 주시지 않으시면 어찌 감히 인간들이 찾아 나설 수 없습니다. 눅19: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③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음성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하나님의 음성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음성입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은 항상 앞산을 바라보시며 '내 아들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애처롭게 기다리시는 자비의 아버지입니다.
지금도 히딩크 리더십은 유명합니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인도하는데 그의 철학이 있습니다. '실수와 실력은 별개다'라는 철학입니다. 실수했다고 해서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와 실력은 별개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실수 한 사람을 믿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력은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 실수했다고 하면 다 끝난 줄로 압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담이 실수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하라고 반드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실낙원이 된 것입니다.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폭력화되고 정치화되면서 계속 숨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총은 자비의 발길,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믿/ 하나님은 지금도 죄로 죽어 가는 영혼들을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되 은으로 금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십니다. /믿/ 사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만난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도 그 길을 불의한 자도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서 나아오라'고 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비하심을 입고 아담을 찾으셨는데 10절의 아담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10절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었으면 대답이 없어야 하는데 '내가 숨었나이다.'라고 토설합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앞뒤가 안 맞습니다. 횡설수설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면 아담처럼 어리석게 숨는 자가 되지 마십시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하지 말라는 것을 했고, 하라는 것을 못한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으시면 피할 것이 아니라 '네가 여기 있나이다.' 고백하고 주님의 자비를 받아야 합니다. 잠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할/ 이때 아담이 회개했더라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회개 할 때는 절대로 핑계되지 말고 엎드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지금까지 아담과 하와는 한 번도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벗고 있는 것도 몰랐고, 부끄러운 것도 몰랐고, 두려운 것도 몰랐는데, 죄를 범한 다음에 이렇게 부끄럽고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는 이와 같이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하는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아담에게 임하였던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임합니다. 죄지은 사람은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참 기쁨이 없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담이 벗은 줄을 물으려고 부르셨나요? 아닙니다. '내가 선악과를 따먹었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였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유명한 다윗도 잘못된 것도 많았고, 큰 죄도 지었지만 '왜 하나님이 마음에 그렇게도 합한 자'라고 했습니까? 죄를 깨닫고 옷과 마음을 찢으며 통곡하면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벗었다'는 말은 '부끄럽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래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범죄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마땅히 할 것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못 했을 때에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왜? 공부할 수 있는데 안 했습니다. 부지런해야 되는데 못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못했을 때에 부끄러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보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부끄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잊을 때입니다. 사명! 굉장히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일을 하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명은 생명입니다. 각 성도들에게 분량대로 재능대로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할/
▶11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①여기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라는 말은 '네가 벗은 것을 내가 몰라 그러는 줄 아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벗었다는 것을 네가 알게 된 원인은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는 실과를 네가 먹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식어졌다면 먼저 그 원인부터 찾아야 합니다. /믿/ 근본적으로 원인을 찾지 못하면 문제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원인을 찾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아담에게 그 원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죄에 빠진 원인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죄의 원인을 추궁하면서 깨닫게 하십니다. 이 때 '아하!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를 내가 먹었구나!'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범하면 아주 민감하십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는 '아이고 도적질했으니 내가 도둑놈이구나!' 이렇게 민감하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하라!'는 말씀에는 그리 민감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지키지 않고도 죄의 민감성이 없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아!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깨닫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생활 속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내 힘으로 해나가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힘이 듭니까? 내가 주님을 매고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를 돕습니까?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누구를 가까이 하십니까?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내가 부족하구나! 내가 잘못되었구나! 내가 어리석구나!' 깨닫고 통회하는 심령이 상한 심령입니다. 이런 심령을 구원해 주십니다. /믿/
②또 여기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에서 여기 '고하였느냐'란 말은 '일렀느냐'라는 말로 '반대편에 서다, 죄악을 고발하다.'의 뜻입니다. '누가 너의 벗은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더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벌거벗었음을 고발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고발하고, 우리의 열등의식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약한 것 때문에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약점과 강점이 있습니다. 약점은 자신이 약점으로 생각할 때 비로소 약점이 됩니다. 자신이 약점으로 생각하기 전까지는 결코 약점이 아닙니다. 약점은 얼마든지 강점일 수 있고, 강점이 약점일 수 있습니다. 삼손은 강한 것이 치명적 약점이었습니다. 바울은 약한 것이 강점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약점은 하나님께 의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약점은 거만하지 않게 우리를 막아줍니다. 약점은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하여줍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자아를 제어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강점에 약점을 덧붙이십니다. 약점은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방지하시려고 말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는 병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건강을 나쁘게 하신 것은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고후12: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약한 때가 곧 강한 때입니다. 내가 강하다고 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때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하나님의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거인으로 사용하십니다. /아멘!/ 다시 12절의 아담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12절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1절에서는 죄의 원인을 빨리 찾아 회개를 촉구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여자에게 돌리는 책임전가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모든 죄의 원인과 실패와 실수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이웃에게서 찾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남편을, 아내를, 출신학교가 좋지 않아서 나쁜 친구를 만나서 누구 때문에!'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서부터 온 죄의 속성이랍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여자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죄를 졌다는 논리입니다. 언제는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감탄하고 감격해 놓고는 이제 그 여자를 주셨기에 내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그 여자를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죄를 지을 이유가 어디 있었겠느냐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이는 아담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못된 태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신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용서받는 지름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하지 아니하고 나 때문이라고 솔직히 시인하였습니다(욘1:12). 죄는 자기가 범하고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죄 범한 사람으로서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1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 남편의 그 아내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은 선한 본을 안보고 나쁜 본을 잘 따라갑니다. 남편이 자기 때문에 먹었다고 핑계되니 '나는 할 말이 없는 줄 알고!' 하면서 '뱀 저것이 먹으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 제 남편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못난 저를 만난 죄 뿐입니다.' 이렇게 고백했다면 하와의 인격은 처음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인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도 핑계를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바로 각자의 역할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하와였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따먹고 나서는 남편에게도 그것을 주워 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이 최초로 죄를 범하는 일에서 리더십을 행사한 것이 하와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바울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여자의 리더십을 인정하기 어렵게 했던 것입니다.
하와의 존재 의미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와의 역할은 아담이 앞장서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또는 아담이 실패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아담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코가 입 대신 음식을 먹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이러한 역할의 혼동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의 역할이 있고 교인의 역할이 있습니다. 또 여러 교인들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을 받았다 하더라고 자기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았더라면 먼저 남편과 상의하고 남편이 이 사건을 주도해서 이끌어가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먹어버렸습니다. 자기가 결론을 내리고 결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워 먹게 했습니다. 자신의 결정을 남편에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아담은 가정과 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하와가 이미 금지된 열매를 먹어버린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내가 내미는 그 열매를 냉큼 받아먹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그 난국을 수습하려고 했어야 합니다. 만약 아담이 거기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올바로 대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운명이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담과 하와는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 생물에게 다스림을 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오늘날도 이 핑계는 개인이나 국가에게도 나타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분들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솔직히 감추지 말고 꾸미지 말고 덮어씌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잘못을 구하면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진실은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뱀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장면입니다. 여기 '모든 짐승보다'는 모든 짐승 가운데서 뱀은 사단의 도구로 전락한 뒤 짐승들로부터 경멸 당할 것을 말합니다.
'배로 다니고'는 '천박하고 미천한 존재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종신토록'은 '너의 생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은 뱀에게 영원한 저주를 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범죄의 결과는 비참합니다. 죄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생명의 동산, 은혜의 동산, 평화의 동산, 축복의 동산에서 죄는 버림받고 추방당하는 인간의 비극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는 절대 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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