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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셋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창 5:1-32)

by 【고동엽】 2022. 4. 12.

(제13강)      셋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창 5:1-32)

 

 

  4장에서는 가인과 아벨, 아담의 아들 중에서 대표로 두 사람을 들어서 그들의 자취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살았던 아벨의 계통이 나옵니다.
  아벨은 형으로부터 순교를 당하므로 다시 하나님께서 셋이라는 귀한 아들을 주어 믿음의 계통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셋의 계통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함부로 살다가 아무렇게나 죽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로부터 사람은 자신들의 족보를 소중히 여겨왔고 그것을 잇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대가 끊기는 것을 큰 죄로 알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의 그런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 족보입니다. 지금은 이 족보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지만 옛날에는 사람을 만나면 족보부터 따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족보를 중요시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족보들이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셋의 족보와 가인의 족보입니다. 창4:16-24절에는 가인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 장에는 셋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어 있는데 이 두 족보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①셋의 족보에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향수'라는 말은 한문인데 사전적인 뜻은 '복이나 혜택을 받아서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말은 '하나님께 받은 수명대로 복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셋의 자손들은 거의 다 구백 세 이상을 살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969세로 가장 장수한 인물이 므두셀라인데 셋의 자손입니다. 또 셋 자손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부름을 받은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자손 족보에는 '향수하고 죽었다.'는 인물이 없습니다. 가인의 자손 족보에는 죽은 나이조차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②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셋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으로 가는 족보라는 것입니다. 즉 셋의 족보를 따라 가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셋의 족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이므로 셋의 족보는 영생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셋은 아들을 낳자 이름을 '에노스'라 지었는데 그 뜻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셋은 아담이 범죄해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사모해서 '에노스'라 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셋의 자손들이 향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믿/아멘!/
  세상의 눈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다른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한 족보에 올라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시겠습니까? 셋의 족보에 올라 있는 사람들입니다. 보좌 앞에 놓인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할/

 

  ▶1-5절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 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실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당신의 피조물임을 다시 한 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을 만드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로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으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영을 지으신 것입니다.
  인생이 짐승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수 억 마리의 소와 한사람의 미개인과 바꿀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떡으로만 만족하여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할/


  또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직접 하나님께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3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지음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형상을 동시에 그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류 대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의 범죄 후에 하나님이 처음 주신 선한 마음과 인자한 마음, 사랑의 마음이 타락해서 아담의 타락한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타락된 아담의 마음을 전 인류가 유전으로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 죄를 가리켜 원죄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원죄 성이 있어 끊임없이, 끊임없이 악을 조성하여 자범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 죄를 해결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엡4:21-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의와 진리로 거룩한 자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서 구별된 거룩한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구별된 자라는 것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이런 저런 생각이 없으나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이 귀한 생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비유했습니다. 정말로 갈대 같은 약한 인간이지만 생각할 수 있다는 특권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온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이 생각의 특권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 의와 진리와 거룩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려면 먼저 예수 믿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인이 되었고 죄 있는 인간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형상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본 장에 나오는 이 족보는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되는 경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셋의 출생으로 사람의 형상이 되어 버렸고, 그의 아들로 또 그 다음 아들로 이어지다가 노아를 지나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
  본문을 보면 아담이 930년 살면서 자녀를 낳았으니 그 숫자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셋이라는 아들이 아담의 직계로 나옵니다. 물론 셋 앞에도 아담에게 많은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양 권은 족보상 아버지를 이은 자식을 큰아들로 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왜 셋을 기록했을까요? 성경은 혈통을 중요시한 게 아니고 믿음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계통을 써 내려옵니다.
  이새의 집에서도 아들이 여덟이나 있었지만 그 중에서 막내 다윗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의 대를 이을 자라고 인정하였습니다. 또 다윗의 아들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 첩에게서 얻은 솔로몬을 기름 부어 왕을 세웠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러신 것입니다. /할/


  ▶오늘 5장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담 이후로 10대 손에 이르는 계보를 정리한 것으로
  ⑴6-20절은 '아담에서 에녹의 아버지 야렛'까지의 족보입니다. ⑵21-24절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 대해서 기록하였고, ⑶25-32절까지는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오늘은 중요한 부분만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6-20절 '성경을 참조합니다!"
  지금 족보가 계속되어지고 있는데 그 속에서 특별한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늙지 않으려 해도 늙어지고 죽지 않으려 해도 죽습니다.
  늙고 죽는 것이 서러워 우리조상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인간의 죽음은 성경의 예언입니다. 창2: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죽는 존재로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창2:7절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 '생기'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5: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본문 속에 '죽었더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⑴아담이 범죄한 죄 값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요, ⑵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함이요, ⑶더 중요한 것은 '죽지 않을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길은 무엇입니까? 21-24절에 에녹이 믿음으로 죽지 않고 승천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에녹의 신앙은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죽음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키엘 케고르'는 '인간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이 분주히 뛰며 육신의 안일만 위하여 쌓아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나그네길이요, 여관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만해도 아이들이 모이면 땅 뺏기 놀이를 했습니다. 한참 땅을 많이 뺏어 신나게 노는데 어머니가 부릅니다. 그러면 그 땅 가지고 뛰어가지 않습니다. 손에 묻은 먼지를 훅 불고 집으로 뛰어갑니다.
  이 땅에 부귀영화도 그 부귀영화를 누렸던 현자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세상 것 다 제쳐놓고 빈손으로 가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보신을 잘하면 오래 산다고 해서 몸에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돗물꼭지에서 처음 나오는 물이 철분이 많이 섞여 있어 몸에 좋다고 새벽마다 그 수도꼭지를 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에 조깅이 최고라고 하면서 건강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천년만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인간에게 꼭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그냥 맞이하고 있어야 합니까? 더 무서운 것은 죽음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여러분!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인가? 그 심판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분명히 해답도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으면 심판에서 영원히 사는 자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행16: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아멘!/
  우리가 잘 아는 요3:16절은 성경의 요약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죽음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믿/
  요3:18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러분, 친구가 물 속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말리지 않았다고 간접 살인죄로 체포된 사연도 있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을 보고 말리지 않으면 자살 방조죄로 체포됩니다. 눈먼 아버지가 저수지 뚝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자식이 말로만 '아버지 위험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아버지는 그 저수지에 빠져 죽고 말 것입니다.
  가서 적극적으로 끌고 올라와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다고 누린 것이 많다고 의시 되지만 그들은 지금 눈먼 봉사처럼 심판의 불 못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여러분! 내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지금 그 불 못으로 가고 있다면 우리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간접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구해야 합니다.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때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성경은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21-24절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기사입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또 창6:9절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행이란 '하나님과 같이 걷는다'는 뜻으로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날마다 그분과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동행이란 '하나님이 우리 삶 전체에 개입하고 계심을 인정하고 항상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주위 사람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불경건과 죄악만을 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묵묵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믿/
  성경은 동행하는 자가 형통에 복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39:2-3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동행)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동행)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함께 간다는 것은 서로 모든 점에 있어서 일치되어야 합니다.
  ①목적지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②마음이 맞아야 하고, 뜻이 맞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관광회사에서 모집하는 여행을 다녀오면 돌아올 때쯤이면 서로 싸우고 원수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동행에서 제일로 중요한 것은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끼리 가야 합니다. 마음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함께 있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은 정말 없습니다. 

  ③상대방의 의견에 자신을 조화시켜야 하고, ④자기희생과 자기 자제가 있어야 하며 ⑤철저한 연합이 가능해야 합니다. /아멘!/
  성경의 암3:3절에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또 동행한다는 말은 철저한 연합 성, 즉 함께 사는 삶입니다. 한 가족처럼 부모와 자식이 한 집안에서 오순도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계3: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때 우리가 마음에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리고 자기의 선입감만 지키고 있습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는 인생 길에 동반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부부가 평생 붙어살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남편이 출장을 가고 아내가 친정도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동반자의 의미는 남편이 외국으로 출장을 가서 그곳까지 부인이 따라가지 못하지만 늘 마음은 남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도 외국에 나가있다 하더라도 늘 그 마음속에는 부인과 자식들의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동행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주여 내 사업장에 복을 주옵소서! 물질 주시면 나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겠사오니 주님이 내 기업체에 사장이 되어 주시고 내 가정의 호주가 되어 주소서!' 이런 기도가 동행하는 기도입니다. /믿/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처음과 나중이 같아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 말대로 자주 넘어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처음 먹은 마음을 변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마음의 중심은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성만찬을 그린 화가는 주후 450년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그는 성만찬 성화를 그리기 위해 무려 10년이란 세월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그는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성만찬 성화를 그리기 위해 예수님의 모델로 사람을 찾기 위해 여러 나라의 교회들을 순회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파리의 어느 장로교회의 성가대장을 보고 정말 저 사람이면 '주님의 모델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더랍니다.
  얼굴이 천사 같았고 신앙 또한 좋았습니다. 다빈치는 그에게 주님의 모델로 만족히 여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제 그림이 점점 완성되어 가는데 정작 이번에는 가롯유다의 형상을 그리고자 할 때 더욱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간교하고, 악독하고, 철면피한 사탄의 모습으로 간교한 모습을 그리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가롯유다의 모델을 찾아 헤매다가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의 뒷골목에서 가롯유다의 적격한 인물을 발견하고 드디어 가롯유다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을 때, 모델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다빈치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지금부터 10년 전에 내가 당신에게 예수님의 모델로 그림을 그렸는데 내가 신앙을 떠나 죄악에 빠진 것이 후회스러워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10년 전의 예수님의 모델 때 그는 평화스럽고 고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타락하니 그 고귀한 얼굴은 사라지고 가장 간악하고 악한 자의 대표가 될 만한 인물로 타락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평화스러운 얼굴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악한 모습 그래도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처음 결심하고 신앙생활 시작할 때의 마음과 끝까지 그 마음을 가지는 것이 동행입니다. /할/
  다니엘은 끝까지 그 신앙을 지켰으며, 그의 친구들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신앙은 참고 견디는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하기 위하여 일만 번 이상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에녹은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기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 이런 충성을 해야 합니다. 1년 충성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충성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는 용두사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참고 인내하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이제 에녹의 생애를 한번 간추려 보겠습니다.
  ①경건을 소유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65세부터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도 늦게 주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귀한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회개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한국과 중국과의 경계선입니다. 회개는 의와 불의, 선과 악, 광명과 흑암의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을 뛰어 넘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멘!/
  에녹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생활한 사람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았고, 하나님의 뜻을 본받는 자였으며, 빛의 자녀답게 살았고, 성령을 쫓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딤전4:7-8절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후3: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②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이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아십니까? 이때는 홍수심판 직전이었으므로 인구도 많았고, 각종 문명화시설이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으며 그 물질 문명의 영향으로 벌써 그 시대는 사회가 부패하고 죄악으로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일부일처의 원리는 깨어진 시대요, 살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양심이 없는 시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며 오직 만사를 정욕으로 살았고, 성도덕은 땅에 떨어진 시대, 흡사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과도 흡사합니다.
  이런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에녹은 옆눈질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간 신앙의 산 표본입니다.
  여러분, 환경은 무섭습니다. 환경은 큰 힘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환경 따라 변한다고 말을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화장터 근방에서 시장 터로, 또 다시 서당 옆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환경의 지배를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의 힘이요, 신앙의 힘입니다. 바울은 롬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습니다.
  ③히11:5절에 에녹의 신앙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⑴옮기 우기 전에: 하늘로 옮기 우기 전에 에녹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동행은 일반 행동이 아니라 상호 왕복 동행입니다.
  옮기 움을 받았다는 말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거의 예표자입니다. 휴거는 우리 주님이 심판하실 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공중으로 올리우는 현상을 말합니다.
  성경은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하나는 들림을 받고, 하나는 떨어져 환난을 당하고 또 둘이서 밭을 갈고 있는데 하나는 들림을 받고 하나는 떨어져 환난을 받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예수 믿다가 죽어 잠자고 있는 먼저 간 성도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들림을 받을 것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휴거라고 합니다.
  에녹이 산 체로 들림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 공중 재림시 살아서 믿던 사람들은 산체로 들리 움을 받을 것이고, 무덤에 묻힌 자도 살아서 공중으로 옮기어서 예수님과 공중 혼인잔치가 있음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⑵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히1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은 믿음의 두 골격을 가졌습니다. ①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까?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형편과 환경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역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②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믿는 백성들에게는 좋으신 것으로 상주시를 원하십니다. /아멘!/
  성경도 온통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려 32,500가지의 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엡3: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주실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시는 것,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는 절대로 같이 하지 않습니다. 약4: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어느 곳에 아주 긍지가 대단한 수탉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신나게 울어댑니다. 그리고는 우쭐됩니다. 마당에 있는 강아지가 물어보았습니다.
  '수탉아 너는 어째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냐?' 수탉은 목을 빼면서 자랑하기를 '저 태양이 말이야 아침마다 내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서 떠오르거든!' 지금 수탉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떤 액세서리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액세서리로 하나님을 착각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임을 깨닫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청지기임을 알 때,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가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도 옮기 우기 전에 더 큰 믿음으로서야 합니다. 믿음이란 안다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곧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 삶 속에 우리는 믿음의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셨으므로 빛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란 사람은 중세기의 일등 가는 신학자입니다. 그는 신학자이면서도 기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신학대전이라는 유명한 신학을 완성하고 감사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이때 아퀴나스는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주여 나는 주님이외에는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 만 있으면 전부라는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할/

 

  ▶25-32절은 므드셀라에서부터 노아까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셋의 후손 가운데 드디어 당대의 의인 노아의 족보를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그 땅은 저주받은 땅이어서 온통 죄와, 불의, 음란, 살인, 행음 사건이 터져 나오는 한마디로 세상 어디 한곳을 보아도 희망이 없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29절을 보면 그런 절망적인 가운데 노아를 통해 '믿음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뜻이 '안위함'입니다. 드디어 노아는 세상 죄악의 물결이 넘실댈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으나 듣고 깨닫고 나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창5장은 노아의 세 아들까지 소개하고 끝이 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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