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17강) 노아의 제사! (창 8:1-22)

by 【고동엽】 2022. 4. 12.

(제17강)        노아의 제사! (창 8:1-22)

 

  국가와 민족들은 각각 나무와 꽃들을 상징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징은 무화과나무입니다. 일본은 국화, 중국은 매화, 우리나라는 무궁화입니다.
  종교에도 이런 상징이 있습니다. 불교는 연꽃입니다. 기독교는 특정한 상징은 없으나 예수님이 요15장에서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포도나무에 특징은 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와 그 열매에 있습니다.
  장미는 꽃에 아름다움이 있지만 포도나무는 열매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요구하시면서 교훈 하신 말씀입니다.
  요15장에 나타난 포도나무에는 네 종류의 가지가 있습니다. ⑴열매 맺지 않는 가지인데 이것을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⑵겨우 과실을 맺는 가지가 있고, ⑶더 열매 맺는 가지가 있으며, ⑷많이 맺는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이 중에 어느 가지에 속해야 합니까? 마지막 제일 많이 맺는 가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지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8장도 노아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홍수심판의 사건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동양역사에서도 노아의 홍수의 심판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지개벽이라고 말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이 얼마나 죄로 인하여 범죄가 극심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홍수로 멸망시키기를 결정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고 의에 후사를 이어갈 씨를 삼으려고 120년 간 방주를 지어서 '이제 큰 홍수의 물난리가 나거든 노아와 너희의 식구들은 그 안에 들어가 구원을 받으라'고 하나님은 명령했습니다. 노아는 그 명령을 받은 후 120년 간이란 기나긴 세월의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 건조작업을 마치자 하나님께서는 쨍쨍하게 밝은 어느 날 노아와 그 식구들을 다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고 또 장차 땅 위의 종자를 보존할 짐승들과 조류를 들여보내시고 난 후 7일째 되는 날부터 땅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성경에 보면 40주야를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홍수가 지면을 완전히 덮어 버리고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물을 전부 다 멸종을 당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홍수가 150일간이 지난 7월 15일부터 물이 감하고 홍수가 물러가기 시작하여 아라랏 산에 방주가 정박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후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드러났고 다음해 2월 27일 약 1년 만에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40일이 지난 뒤에 까마귀를 내어놓았으나 까마귀를 돌아오지 않았고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내며 온 땅에 물이 덮여 정착할 곳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7일이 지난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내었으니 저녁때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고 했습니다. 또 다시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본문 8장에서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또한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노아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관리에 대해서 또 방주에서 나온 후 노아의 종교적인 신앙의식을 통해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까지는 '하늘에서 비가 그치고 물이 땅에서 물러간 기간이 무려 150일이나 걸렸습니다.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10월 1일에 드디어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날짜들을 분명하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1절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여기 '권념하사'는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평상시에는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홍수 계속되는 동안에도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8식구뿐만 아니라 모든 금수들의 생명을 잊지 않고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방주 속에서 약 1년 간 지냈다고 합니다. 배 안에서 비 오기 전 7일, 비 오는 40일간, 150일간은 물이 높이 치솟아 올랐고, 74일간은 물이 서서히 빠졌으며 140일간은 하나님께서 방주 문을 열고 나오라고 명하실 때까지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람과 물에 밀려다니는 도중에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방주 안에 있지만 벼락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물이 점점 많아지고, 아마 노아의 부인과 며느리들은 초죽음이 되어 비명을 지르고 괴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고, 답답하고 떨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보살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아의 8식구를 권념하심 같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사49:14-16절을 보세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시온이란 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움과 괴로움을 당하여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얼른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포로 중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망한 성도들이 '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 잊으셨나! 자포자기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사실 환난이 심하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금방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가 오래가고 고통이 심하게 되면 '나를 잊으셨다 하셨거니와'입니다. 여기 '하셨거니와'는 '너희는 그런 소리를 잘 한다마는'이란 의미의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15절에 다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아무리 독한 여자라도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잊는 여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간혹 다급하면 내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극단적으로 가면 자기 밖에 없습니다. 6.25 피난 때 자식을 많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뚝하면 자기 자식 버리고 저만 행복하게 살겠다고 도망치는 여자도 많습니다.
  청소년 가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들어 누웠거니와 병이 들어서, 사업이 망했다거나 좌우간 모진 여자들, 어린 새끼를 내버려두고 지 팔자 고치겠다고 나간 인륜과 천륜은 무시해버린 여자'들이 많습니다.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누구의 말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를 낳아둔 부모가 너를 잊고 도망가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너를 잊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만 바로 깨닫기만 하면 큰 위로가 되고 큰 수지가 맞습니다. /할/
  또 16절에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합니다. 손바닥에 섰다는 표현은 의인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표현처럼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잊지 않은 방법으로 손바닥에 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표현으로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항상 보고 계신다'는 의미이며, 또 새겼기 때문에 절대로 '못 지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노아를 권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념하시고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아멘!/
  ▶하나님은 노아의 무엇을 기억했을까요? ①하나님과 동행하던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창6: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행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뜻이 맞아 동업을 시작했다가도 얼마 안 가서 판이 깨지는 모습을 봅니다. 동행은 참 힘듭니다. 동행은 목적과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또 의사가 같아야 하고 보조도 맞춰야 하고 시종일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②120년 동안 쉬지 않고 날마다 방주 짓던 노아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변함 없는 순종을 의미합니다. 한 번의 순종은 쉽습니다. 두 번, 세 번, 아니 오 년까지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120년 간의 순종은 끝까지 순종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끝까지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에 '노아야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자 노아는 '아멘!'하고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서 1년 가까이 있을 라면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하겠습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야! 이제 헤엄쳐 나갈 수 있겠구나! 나가라'고 야단하며 성화를 부릴 만도 한대 노아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이 문 열고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기특한 노아의 신앙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지만 주님은 단 한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믿/ 불꽃같은 눈동자로,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할/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해 주시니 심판을 면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앞에도 더 무서운 불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24:21이하에는 심판을 경고합니다. '이 환난은 창세 이전에도 없었고, 창세 이후에도 없으리라, 전무후무한 대 환난의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구원  받을 육체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처럼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 된 성도들이 다 되셔서 심판을 면하시고 자손만대까지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 중에는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심판을 면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7배나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 들어갔으나 살아났습니다. 요나는 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되니 고기 뱃속에서 나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으며 바울과 실라는 감옥소에서 손발에 쇠고랑이 묶여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시므로 찬송 가운데 감옥소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믿/

 

  ▶6-12절까지는 물이 점점 감해져서 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오늘 우리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서 귀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비둘기는 체육대회나 평화대회 시에 곧잘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자유, 해방, 평화를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보내도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자유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비둘기의 이미지는 늘 좋은 편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이 다 탔을 것입니다. 노아는 비가 멈추자 많은 새들 가운데 까마귀와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보냈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냈는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까마귀는 밖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보냅니다. 물이 아직도 땅에 있으므로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비둘기는 입에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습니다.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땅이 마르자 비둘기는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비둘기는 비둘기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300종의 비둘기과 조류가 있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평지와 산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입니다. '구구'하는 소리를 내며 웁니다. 그리고 까마귀는 전 세계에 약 100종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밭이나 마을 부근에서 곡식낟알, 곤충류, 거미류, 작은 동물 그리고 동물의 사체 등을 먹으며, 식물성 먹이도 많이 먹는 편입니다.
  우리 옛 말에 보면 까마귀에 대한 속설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새로 앞일을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 반면에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불길한 조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능력과 죽음이나 질병을 암시하는 불길함의 상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돌아갈 줄 아는 새, 주인을 아는 새로 묘사합니다. 주인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줄 아는 것은 평화이며 자유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새가 공기를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자유이며 평안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이지만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아픔입니다. 돌아오는 자체가 희망입니다.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까마귀는 자기 맘대로 돌아다니는 새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유 같지만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가출한 청소년이 자유롭습니까? 밤새 경찰 차를 피해 대학로를 누비는 폭주족이 자유롭습니까? 부대를 벗어나 탈영한 군인이 자유롭습니까? 돌아올 줄 모르는 자는 자유도 모릅니다.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합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찬송에는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눅15장의 잃은 것에 대한 비유는 하나같이 파티로 끝납니다. 잔치가 벌어집니다. 세 비유는 똑같이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돌아오면 잔치를 베풉니다. 돌아오면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 여름에 동물들을 비교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까마귀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절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까마귀는 불신자의 모형입니다. 육에 속한 자의 모형입니다. 비둘기는 성도의 모형, 영에 속한 자의 모형입니다.
  캐나다 맥길 대학의 연구 발표한 바에 의하면 가장 머리 좋은 새가 까마귀와 어치라고 합니다. 앵무새는 예상외에 가장 멍청한 새라고 합니다. 가장 머리 좋은 새와 가장 머리 나쁜 새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다는 까마귀가 방주에서 나가서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구원의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방황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아주 잘 사는 것 같지만 죽은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얼굴이 예쁜 사람, 지나치게 배경이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애굽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멸망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요한일서 2:15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향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우리 마음은 까마귀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탕자란 말의 어원은 '제멋대로'(wayward)란 뜻입니다. 원래는 '과도하거나 넘쳐흐른다'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했습니다. 탕자란 돈의 씀씀이가 헤픈 사람을 가리키며, 재능이 남아도는 작가를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으로 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딤후4:10절 이하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섬기고 바울과 함께 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까마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과부의 기름병을 채워주는 기적을 베풉니다. 엘리사는 먼저 그릇을 다 빌려오게 한 다음 방의 문을 닫은 후에 그릇에 기름을 채우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같은 마음은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마6: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의존하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존하면 얻습니다. 빈 그릇들이 은혜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런데 왜 채우지 못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고 바라보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하늘을 향하는 문만 열어놓으세요. 그러면 성령의 기름으로 찹니다. 까마귀의 습성을 버리면 은혜는 쏟아지는 것입니다. /믿/
  ▶까마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①까마귀는 누추한 곳을 좋아하고 죽은 고기에서 먹이를 찾습니다. 썩은 고기에서 식물을 삼는 새이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육에 속한 자의 상징입니다. 죄악 세상을 좋아하는 인간의 타락된 속성을 가르치는 새입니다.
  신앙은 이 육신의 속성을 자재하고 인간의 부패성을 척결하는데 있습니다.
  ②까마귀는 우울한 새입니다. 어두운 새, 불안을 예고하는 새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까마귀 떼들이 동네어귀에서 날면서 울면 동네어른들이 모여서 '동네에 무슨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초상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까마귀는 부정적인 새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까마귀처럼 부정적인 성도들이 있습니다. 매사를 어둡게만 봅니다. 매사를 실망스럽게만 봅니다.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맑은 마음을 가지고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미래의 소망 가운데 큰 꿈을 갖는 신앙 인들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라보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바라보십시오, '크게, 높게, 찬란하게' /할/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③까마귀는 이기적인 새입니다. 본문에 까마귀를 내어놓았더니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주가 까마귀를 살린 은인이요, 보살펴준 노아의 8식구나 까마귀의 은인입니다. 한마디로 까마귀는 이제 방주가 아니라도 먹을 것이 많이 있는데 은인이고, 은혜고,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합니다.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배신을 합니다. 왜?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중심주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혼자 신앙생활 다 하는 것 같이 합니다. 그런데 문제나 해결되어지고 무엇인가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하나님, 잘 계시오, 나갑니다. 하고 세상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 그냥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만드십니다. 왜? 깨닫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겨 놓은 내 백성인데 너를 버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절대로 사람도 하나님도 배신하지 마십시다. 문제가 있으면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해결 해 주십시오' 해결되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만사가 형통할 때도 더 낮아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형통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라고 지으셨습니다. 또한 이것이 인간생활가치입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눅10:30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신앙을 본받아야 됩니다. 그 사람은 바라볼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원수지간처럼 냉대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제사장도 레위인을 돌보지 아니하고 피해 가는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싸매 주고 기름으로 발라주고 위로하여 주막집으로 데려다가 자기 돈을 주면서 그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해주면 해 주었지 바라는 마음으로 베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실천을 옮긴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의 실천가들이 되십시다. /할/
  본문에 이 까마귀는 많은 까마귀들 가운데 일단은 방주로 들어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또 사명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방주 밖에 교회 밖에 썩어질 고기 덩이 때문에 시체 위에 발을 붙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정신 없이 육에 속한 것 뜯어먹다가 사명도 망각해 버리고 마지막에 버림받은 육에 속한 사람, 까마귀 같은 성도가 있은 것을 예표해 준 사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결코 비둘기 성도가 되어야지 까마귀 같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할/

 

  ▶11절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노아는 까마귀가 돌아오지 아니함으로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같은 날짐승일지라도 정결하고 깨끗한 짐승이므로 곡식만 먹고사는데 방주에서 날아서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나가보니까 더러운 시체뿐인지라, 어디에 발을 놓을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비둘기가 방주를 떠날 때,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 것과 같이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여러분! 세상 속에서 찾지 못하면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비둘기가 그냥 돌아왔습니까? 영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홍수의 물은 당시 심판의 채찍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누구 한사람 믿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세상입니다. ▶30이 넘는 아들에게 돈만 쓰고 빈둥빈둥 논다고 어머니가 자식에게 꾸중을 좀 했더니 그 자식이 어머니의 목을 졸라 죽이는 세상입니다. 50분 후 동생이 돌아와 보니 눈이 뒤집힙니다. 그래서 흉기를 들고 형에게 달려들었다고 또 다시 동생의 목을 졸라 죽이고 화단에 묻어버렸습니다. 이런 '새끼가 부모를 죽이는 세상' 하나님이 심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②당시 흙탕물은 곧 죄악을 상징합니다. 비둘기가 이리저리 날아다녀 보았지만 흙탕물 때문에 접촉할 곳,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사실 비둘기는 거룩하고 구별된 동물입니다. 성품도 깨끗합니다. 아무 때나 앉지 않았습니다.
  마10:16절에 보면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레14:22절에 보면 구약의 비둘기가 하나님의 희생 제물로 드려진 새입니다. 비둘기가 돌아온 것은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땅이나 더러운 물 위에 앉을 수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이 돌아오게 합니다. 순결한 마음이 방주를 찾습니다. 마음이 순결한 자는 구원의 집에, 하나님의 집에 늘 마음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왜 평화가 있습니까? 본래의 자리, 가야할 자리로 돌아오면 평화가 있습니다. 돌아오면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교회에서도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져야 하고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희생될 때, 그 진가가 나타납니다.
  또 비둘기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새입니다. 까마귀하고는 대조적입니다. 마3:16절에 보면 성령의 임재를 비둘기로 표현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온유해지고 겸손해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믿음의 순결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비둘기는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노아는 그로부터 7일 후에 비둘기를 다시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새 감람나무 잎을 입에 물고 돌아왔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는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한 것입니다. 또 비둘기는 사명을 다 감당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비둘기처럼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되십시다.

 

  ▶13-19절을 성경에서 읽겟습니다.
  '방주에서 나오라' 새로운 새 희망의 새 출발의 신호입니다.
  ①낡은 질서가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사회는 의식주가 풍성하여 평안하고 풍성한 것같이 보였지만 그들의 날이 120년으로 한정되는 심판이 임박할 시대였습니다. 흥겹던 노래도, 즐겁던 향락도 홍수가 내리던 그 날 다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물 심판이 끝나고 첫 날이 시작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희망의 날임을 의미합니다.
  ②새 질서가 시작하는 초하루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건설한 강포한 문화는 홍수의 심판으로 무너졌으며 물이 걷히는 초하룻날 새 질서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네피림 족의 음탕한 노래도 끊기고 홍수의 밑바닥에 깔려 침묵한 지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기쁨에 넘치는 함성과 희망에 벅찬 감격의 새 시대가 도래되었습니다.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을 물고 왔으니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요, 감람나무 새잎은 새 질서의 신호입니다.
  16절 '하'반절에 '방주에서 나오고'는 7:1절에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과 대조적인 말씀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말씀을 120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것처럼 노아가 1년여 동안이나 대망 해 오던 소망의 말씀입니다.
  ⑴마치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깨어나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은 부활의 의미를 지니며 ⑵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완전한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17절 '하'반절의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홍수로 땅이 황폐해졌고, 주검만이 사방에 널려있는 참혹한 상황가운데서도 노아를 위로하며 동시에 방주 안에 여러 짐승들을 보존한 목적을 일깨워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생육, 번성, 충만하라'고 축복하십니다. /믿/


  ▶20-22절도 성경에서 읽겠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맨 먼저 무엇을 했을까? 매우 흥미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노아가 맨 먼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제일 먼저 천막이라도 쳐서 자기들의 거처를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제단을 쌓은 법도 한데 노아는 먼저 무엇을 했는가?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먼저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을 쌓았다는 말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사는 기독교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된 제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드립니다. 그런데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인간이 범죄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사는 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사와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화목제사가 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제사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화목했고 또한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 제물이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였습니다(레1). 신약 시대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벧전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아멘!/
  구약 시대에는 죄는 사람이 짓고 희생은 짐승이 대신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범죄하면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짐승이 대신 죽도록 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께서 친히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9: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0: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다시는 짐승을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으면 모든 죄는 해결됩니다. /믿/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오늘날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참된 예배요, 이 예배가 곧 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데 있어서 점과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이나 점이 있으면 제물이 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신15:19-21).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은 정결해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처음 것으로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왜 축복을 받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온전한 제물을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1:8-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너희가 내 단에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도 드리고 제물도 바쳤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한 것을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약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점과 흠이 없는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곧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가 있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온전한 제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물 되기에는 너무 흠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한 제물이 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면 거룩하고 흠이 없는 깨끗한 제물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은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온전한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으신 그분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치 않으십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흠이 많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흠이 많은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기억치 않으시기 때문에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노아의 제단은 어떤 제단이었는가?
  ①홍수의 재난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였습니다. 20절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기 여호와를 위한다는 말은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감사하기 위하여, 보답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은혜 받기 위해, 축복 받기 위해 내가 잘 되기 위하여' 제단을 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할/
  ②큰 시련의 경험은 큰 신앙을 산출합니다. 노아가 드린 제단은 제사라기보다 새로운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생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밀접한 신앙 교제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피부로 느껴야 합니다.
  ③노아의 재단은 더욱 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순종에 대한 서원입니다. '모든 정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한 새 중에서 취하여 드렸다'는 이 말씀은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드렸다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노아의 정성스러운 제물을 만족하시게 흠향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와 가인은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자비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한 심는 것과 거두는 것과 추위와 더위와 낮과 밤은 쉬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춘하추동 4계절과 모든 창조세계를 정상적으로 운행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노아의 후손들에게 정상적인 생활환경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날도 이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 인생들은 한 시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믿/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