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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고난.종려 설교

[예수정사기념예배] 넘겨준 자와 좇는 자

by 【고동엽】 2022. 4. 9.

[예수정사기념예배] 넘겨준 자와 좇는 자

 

사람들은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정반대로 대립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있었던 북한의 로켓 발사를 두고도 '위성 발사를 가장한 장거리 미사일 실험'이라고 지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해 주어야 할 과학기술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실로 인류 역사의 중심인 동시에 정점이요 또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사의 최고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천동지의 사건을 두고도 사람들은 두 편으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그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던 그 곳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자'들과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좇아간 자'들로 나누어졌으며, 그때로부터 무려 2천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오는 가운데서도 그 양자 사이의 첨예한 분열과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기리는 정사기념예배를 드리면서 과연 이 주님의 십자가는 온 세상 사람들을, 역사상의 전 인류를 어떻게 둘로 나누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을 넘겨주는 자'들로서 바로 십자가 구원을 멸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8절부터 12절에 "8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 예수라는 사람을 자기 앞에 끌고 왔지만, 법적으로 아무 죄가 없고 더욱이 로마 정부에는 아무 해나 위협이 될 인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나름대로 분명히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귀찮은 고소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고자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넘겨주자 헤롯은 "심히 기뻐했다"고 8절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자자하게 돌고 있던 소문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풀고, 또 예수님이 뭔가 흥미로운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을 구경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 쪽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시자, 실망한 헤롯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한" 후에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내었습니다.

  헤롯은 당시 로마 정부가 세운 분봉왕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왕이지 실권은 오직 총독에게 다 있었고, 그저 로마 정부가 자기네들이 점령한 나라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 총독은 헤롯왕을 얕보았을 것이고 헤롯왕 또한 빌라도 총독을 고까운 눈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고대 역사가들의 글에도 이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본문 12절에서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실로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공인된 사실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 관계가 본문 12절 하반절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는 말씀대로 한순간에 180도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아주 상반된, 평소에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헤롯과 빌라도 사이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지고 노는' 소일거리 때문에 그날 하루만큼은 친구처럼 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원수지간이었던 사이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일에서는 무슨 죽마고우처럼 죽이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희한한 '일시적 우정'은 빌라도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는데, 그 사실을 22절부터 25절에 기록하기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자기에게 도로 넘겨주자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 앞에서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빌라도는 14절과 15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14b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도 그렇고 또 그들과 같은 민족인 유대인 분봉왕 헤롯조차 아무 유죄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군중은 18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무력 봉기까지도 불사할 것 같은 분위기로 빌라도에게 막무가내식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본문 23절에 보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24, 25절)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불공정하고 불의한 일, 아니 엄연한 불법인 줄을 잘 알면서도 빌라도는 그저 백성의 기분을 맞추어 주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법적 선고를 내리고' '유대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넘겨주었던'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로마 총독이 유대 백성들을 얼마나 깔보고 경멸했는지는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로마 총독을 얼마나 미워했을지는 설명조차 필요 없는 일입니다.
  한쪽은 정복자이고 한쪽은 피정복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는 그토록 '상부상조'하는 사이로 변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 '적과의 동침'이라 부를 만한 일은 골고다 언덕에서도 또 일어났는데, 바로 35절부터 37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백성", 유대의 "관원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한 가지 일에 똑같이 일심동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웃고 희롱하는' 일에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사람들도 평소에는 도무지 마음이 합쳐질 수 있는 사이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유대 백성들과 유대의 관원들로 말하자면, 한쪽은 평민이고 한쪽은 상류계급이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양반들이 상인(常人)들을 멸시하고 반대로 상인(常人)들은 양반을 미워했던 것은 유대 사회에서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경하고 비웃는 일에는 똑같이 그 기분과 마음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기네들 원하는 대로 민족의 해방자가 되어 주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배척했으며, 관원들은 이 예수님이 자기네들의 특권층 생활을 파괴할 위험인물이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고발했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평소에 길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얼굴을 돌리면서 속으로 욕하고 지나갈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는 똑같이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조롱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로마 군병들까지 한몫을 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유대인들과 똑같은 말로 예수님을 "희롱"했던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평소에 유대인들을 대할 때에는 그야말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길거리를 가다가 로마 군인들을 만나면 아마도 그들 뒤에 침을 탁 뱉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앙숙이었던 사이가 신기하게도 한 가지 일에 대하여서는 똑같은 기분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는 일, 이 한 가지에 있어서만은 그처럼 사회적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 민족적 감정이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던 사람들조차 마치 서로 '친구가 된 것처럼' 똑같은 마음으로 낄낄거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는 일에는 하나같이 마음이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입니다.
  성격이 천차만별이고, 정치적 의견과 입장이 전혀 다르고, 사회적 이해관계가 서로 상반되고, 민족적 감정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처럼 서로 공감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고 실제로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대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일, 이 한 가지에 있어서만큼은 마치 가까운 친구처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한 통속'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좀 더 똑똑하고 무식하고가 아무 상관없습니다.
  똑똑한데 예수 안 믿었다고 죄가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식해서 예수 못 믿었다는 변명도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좀 더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도 아무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둘 다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경우에 부자라고 해서 가난뱅이보다 절로 죄가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니며, 예수는 안 믿었지만 가난하게 살았으니 심판 날에 좀 더 사정을 봐 주는 것도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좀 더 양심적으로 살고 누가 좀 더 악하게 살고 하는 것조차도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고 문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각양각색으로 달리 산다 해도, 그들 모두는 한 가지 사실, 정말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하여 '일심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인을 위한 대속의 희생이라고 전도하는 기독신자들을 마치 '미친 사람' 취급하는 데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십자가 공로를 믿으면 천당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 영벌이라는 이 성경 말씀에 대하여 그들 모두는 똑같은 소리로 코웃음을 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슨 종교적 광신자가 자기 착각에 빠져서 한 헛소리라고 조롱하면서 침을 뱉는 자세에 있어서는, 민족과 생활양식과 도덕과 법과 종교가 각각 다른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철저히 '같은 편'이요 절친한 '친구지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 가지 공통점이 마지막 심판 날에 지옥 영벌의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필요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나는 예수는 안 믿었지만 특별히 나쁜 짓도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는데 지옥 가야 한다니 억울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바로 이 죄목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롱하고 멸시하는 자'는 그 어느 누구라도 바로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자'와 똑같은 '한 통속'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좇아가는 자'들로서 바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6절에 "26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은 골고다로 가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라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 대신에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보통 큰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지시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으니 그 얼마나 대단한 '희생'이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하여 더 이상 아무런 주석을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죽으실 몸을 위해 옥합의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에 대해서는 그토록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구레네 시몬에게는 무슨 고맙다는 말씀 한 마디조차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시몬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거기에서도 그저 사건의 전모를 간략히 기록하고 있을 뿐, 시몬의 한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코멘트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몬이 행한 일 자체는 사실 아무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고 무슨 구원받을 공로가 되는 일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군병들이 강제적으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밖에 없고, 만약 그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자기 어깨에 그런 십자가 백 개를 지고 갔다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구레네 시몬에 대하여 고무적인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이 시몬을 가리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시몬의 아들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일이 계기가 되어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가망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었더라도,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사실이 어떤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따라가도 예수님을 좇는 일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것이 예수님을 좇아가는 바른 자세이겠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7절 이하 31절 말씀에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 뒤에 진짜로 예수님 따라가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예수님의 당하시는 고난을 목격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골고다까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시몬과는 달리 이 여인들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진심으로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뒤를 바로 따라가는 모범으로 여겨질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속단은 여기서도 또 한 번 빗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여인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연해 보이는 울음을 두고 예수님은 오히려 그렇게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의 다른 교주들의 죽음처럼 그저 애도해야 할 성격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루살렘이 당할 심판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로 인하여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당하고 죽임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이란 예수님같이 죄 없으신 분에게도 그 로마 군인들이 이처럼 행하고 있는데, 하물며 그런 중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마른 나무"같은 유대인들이 당할 재앙이야 오죽하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34절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도 똑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지금 진짜 큰일 난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실상은 "자기와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즉 바로 자기네들의 죄와 그 당할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회개하는 눈물로써 주님의 십자가를 좇아가야 마땅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정사(釘死)기념일을 지키고 있지만, 이 날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애도'하거나 '조상(弔喪)'하는 날은 결코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해 운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효과도 없는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신을 애도하는 '장례식의 종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시 살아나신 성자 하나님을 믿는 '부활소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날 정말 울어야만 할 일은 바로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정말 큰일 당할 처지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질 지옥의 형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죄인들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 죄는 설사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린다 해도 조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그 어떤 최고의 선행이나 많은 공로를 쌓는다 해도 용서는커녕 약간의 감형조차도 받을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대책이 없는 죄'를 실로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좇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바른 자세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를 기억하고, 그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그 죄의 중함을 통감하면서, 그 죄를 위한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합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어찌하든지 오직 이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는 생명이 되기를 위하여 뜨거운 기도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님을 바로 좇는 자세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을 애도하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 내 자녀의 죄를 두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임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철학교수가 "전 세계 인류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민족, 국가, 인종, 이념의 차이들이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을 가장 어려운 과제는 종교의 차이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옳은 말입니다만, 그 말을 조금만 바꾸면 더욱 정확한 말이 됩니다.
  바로 "종교의 차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의 차이"라고 하면 아주 틀림없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세상 모든 종교들의 통합 운동까지도 성취된다 하더라도, 이 차이만큼은 끝까지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십자가로 믿고 좇아가느냐, 아니면 그 십자가를 그저 웃음거리로 여기고 조롱하느냐'하는 이 차이만큼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해결되려야 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 인류 역사상의 중심부에 높이 세워져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완전히 둘로 갈라지도록, 그 생활에 극과 극의 차이가 나도록, 그 인생이 각각 정반대 방향으로 가도록, 태초로부터 시작하여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넘겨준 자'와 '좇는 자', 딱 둘로 나누어지게 만드는 분수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밤 바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다른 것들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얼굴 모양부터 시작해서 성격과 사는 방식이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이에 따라 속한 세대가 각기 다르고 학력도 차이가 나며 수입도 가지가지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가지만은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조롱하는 편에 같이 모여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자리에 다함께 모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날을 당신을 위하여 애도하는 기일로 주신 것이 결코 아니라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이 시간에, 나 자신과 내 자녀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십자가 쪽으로 '마음이 끌리고' 이 십자가를 '사랑하며' 이 십자가를 끝까지 '붙들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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