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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눅19:28-40)

by 【고동엽】 2022. 4. 8.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눅19:28-40)

 

눅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눅19: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눅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눅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눅19: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눅19: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눅19: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눅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눅19: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눅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을 흔히들 성(聖)금요일(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성금요일이 들어있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Passion Week)라고 부릅니다. 아울러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을 가리켜서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요12:13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종려주일이라는 이름이 연유되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바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한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제 곧 예수님이 로마의 속박에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마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마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마16: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눅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4: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와 같이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유대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의도적으로 피하셨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14: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막14: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를 원했지만,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만큼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때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자극시키셔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28절~35절). 둘째, 경배를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36절~38절). 셋째,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39절~4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바다보다도 더 깊고 더 넓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얕은 곳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더욱 깊이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왕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28절~35절).

 

오늘 본문 38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진실로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일반적인 왕들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이 세상의 왕들은 머리에 값비싼 보석들로 꾸며진 왕관을 씁니다. 화려한 왕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차려입은 수행원들이 호위하는 마차를 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멋지게 생긴 백마를 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이들은 나라의 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가던 일반 서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진실로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위엄과 존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어떠한 왕들도, 아니 이 세상 모든 왕들을 다 합쳐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위엄과 존귀입니다.  

 

눅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눅19: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유월절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지만, 왕이신 예수님의 주변에는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곧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바치시려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습니다. 이들 두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이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작은 시골 마을들이었습니다.

감람원은 말 그대로 감람나무, 곧 올리브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벳바게의 뜻은 “무화과의 집”입니다. 베다니는 “대추야자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두 나무 열매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시골의 작은 마을들의 이름으로 매우 적합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이 때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다음날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신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벳바게로 보내신 셈입니다. 눅22:8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마 이 때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보내졌을 것입니다.

 

눅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눅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다니에 계시면서도, 맞은편 마을 벳바게에 있는 나귀 새끼를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그 나귀 새끼를 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현재의 일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까지도 다 아셨던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낯선 마을에 들어가서 나귀 새끼를 임의로 풀어서 끌고 오는 것은 도둑질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여 푸느냐?”고 물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도 아시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대답할 말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을 모두 다 아셨습니다. 과연 이 세상의 어떤 왕이 예수님과 같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일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눅19: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눅19: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눅19: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눅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두 제자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건너편 마을로 갔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곳에는 나귀 새끼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나귀 새끼는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임자들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임자들이란 주인과 그의 가족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모든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하는데, 감히 그 누가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잠시 그 때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을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지만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벳바게나 베다니나 둘 다 자그마한 시골 동네였습니다. 그러니 벳바게 사람들은 그 때 맞은편 마을 베다니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나귀 새끼의 주인들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나귀 새끼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나귀 새끼의 주인들은 그 일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나귀 새끼를 내놓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를 예수님에게 끌고 왔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기에, 그 위에 안장이 얹혀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왕상1: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이와 같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도 노새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 노새가 다윗 왕의 것임을 보아서, 다윗 왕도 자주 노새를 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이와 같은 전통을 따르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님보다도 이미 오 백년 전에 예언한 말씀이었습니다. 왕이신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시고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사람들은 그를 열렬하게 맞이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이 예언을 아셨고, 또한 이 예언을 성취하실 때와 방법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성취에 쓰일 나귀 새끼가 어디에 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끌고 올 것인지 다 아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속물로 주어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다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그 때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그 때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지를 않습니다. 그 때에는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무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합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즐거이 헌신합시다. 그리해서 날마다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경배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36절~38절).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 곳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일으켜서 걷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에게 제사하면서, 그에게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급히 자기의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의 행위를 말렸습니다. 사람은 결코 경배를 받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경배를 조금도 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경배를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온 백성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눅19: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가실 때,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마21:8을 보면, 그 때 무리의 대다수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와 같이 왕이 가는 길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펴는 행위는 오래된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습니까? 이는 사람들이 왕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자신들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가 이제 곧 그 곳에 임하게 되리라고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눅19: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 산의 동편에 위치한 마을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은 감람 산의 서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처음으로 타셨던 지점에서는 예루살렘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감람 산을 넘으셔서, 감람 산의 서편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 곳에서는 예루살렘이 한 눈에 밝히 들어왔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도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도 분명 그 때 그 곳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동안 자기들이 본 바, 예수님이 행하신 그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먼저 선창하고, 이에 따라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도 다 함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눅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며 찬송한 내용이 여기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칭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찬송하기를,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땅에서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하늘에서의 평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을 무찌르시고, 예루살렘에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때, 비로소 하늘에도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그 결과로 하늘에 영광이 가득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서 찬송하기를,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세토록 온 백성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계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계5: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우리 모두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수님께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립시다.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저 하늘 나라에서도 세세토록 예수님께 경배하며,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39절~40절).

 

이 세상의 왕들도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을 심판합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만국과 온 천하백성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침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왕이신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눅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열광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전연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열광하는 무리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이 때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속으로는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을 책망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눅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무슨 뜻입니까? 지금 예수님은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셨습니까?

만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대신하여 돌과 같은 자연계라도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침묵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의 침묵은 급기야 다른 소리로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눅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눅23: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눅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와 같이 그들은 세 번씩이나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그 뒤로 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도, 구원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침묵은 오늘날까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침묵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만일 예루살렘이 침묵하게 될 때, 그 결과로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이것은 돌들이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구약성경 하박국서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합2: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합2: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갈대아 사람들, 곧 바벨론에게 내려질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로 성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남들을 죽이며 남들에게서 약탈한 것으로 자기들의 성읍을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벽을 쌓는데 사용한 돌들은 한 마디로 죄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돌들은 부르짖으면서, 계속해서 그들의 죄악을 성토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돌들이 부르짖으면서 바벨론의 죄악을 드러내었던 것같이, 돌들은 소리 지르며 예루살렘의 침묵과 그의 불신앙을 성토할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침묵하게 되고,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눅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지금은 온 예루살렘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침묵할 것입니다. 곧이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를 것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비통하신 심정으로 우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정치적인 평화, 곧 로마와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평화는 영적 평화, 곧 하나님과의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졌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이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사십 년 후인 주후 칠십 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의 원수 나라인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때 로마군은 다섯 가지를 했습니다. 첫째, 토둔을 쌓았습니다. 둘째, 예루살렘을 둘러 포위했습니다. 셋째, 사면으로 가두었습니다. 넷째,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다섯째,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침묵하며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의 돌들은 또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침묵과 그들의 불신앙을 크게 성토했을 것입니다.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살피시며, 그 곳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으로 경배합시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즐겁게 받으며 삽시다. 그리해서 공의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예수님께 늘 칭찬을 받으며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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