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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부활 주일 설교

도마에게 보이신 예수님! (요20:24-29)

by 【고동엽】 2022. 4. 8.
 
부활 목차 돌아가기
 

도마에게 보이신 예수님! (요20:24-29)

 

요20: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두 열한 번에 걸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활하신 당일에 다섯 번, 그리고 그 이후에 여섯 번입니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맨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다른 여자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베드로는 깊은 상심에 사로잡혀 혼자 떨어진 곳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고전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이셨다는 사실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깊은 상심에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잘못을 용서하시면서 사랑으로 그를 감싸주셨을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도마가 그 자리에 없을 때였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또 다시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도마가 그 자리에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여덟째, 예수님은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에서,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사건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두세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아홉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요7:5 말씀처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본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보이시고 난 뒤에, 그는 달라졌습니다. 약1:1 말씀처럼, 그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만일 야고보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빈정거리며, 아예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열째, 예수님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지막 열한 번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하던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번에 걸쳐서, 오백여 명 이상에게 보이셨습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이전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야고보도 있었고, 또한 예수님을 몹시도 박해하던 바울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뒤에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다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보이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도마(24절~25절). 둘째, 도마에게 보이신 예수님(26절~27절).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도마(28절~29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상심하고 있는 도마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를 그대로 다 들어주시면서,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굳세게 세워주셨습니다.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예수님은 항상 미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굳세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자처럼 살지 말고, 늘 성숙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도마(24절~25절).

 

요20:24 (1)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2)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3)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4)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5)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1) 열두 제자(the Twelve)

헬라어 성경은 여기에서 “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열둘”(the Twelve)이라는 수치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가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하나”라고 말하지 않고, 여전히 “열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열둘”은 예수님의 사도들을 뜻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는 열둘로 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가룟 유다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요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셋째, 주께서 택하신 바 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 첫째와 둘째 요건을 다 갖춘 사람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고, 하나는 맛디아였습니다. 셋째 요건을 위해 그 두 사람을 놓고 기도한 후에 제비 뽑았습니다. 그 결과 맛디아가 “열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열둘”(the Twelve)에 속하는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주권적으로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는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몸소 보이셨습니다.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때 도마를 찾아주시지 않았다면, 도마는 사도로서의 요건을 충분하게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도마를 위해서 일부러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미쁘십니다.

 

(2)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이고,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디두모도 도마도 둘 다 그 뜻은 “쌍둥이”입니다. 도마는 분명 쌍둥이였을 것입니다. 쌍둥이가 아닌 사람을 쌍둥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외경 가운데 하나인 도마행전에는 도마의 본명을 유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유다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다른 유다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의 본명을 부르지 않고 그를 도마라고 곧 쌍둥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일곱 명의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 가운데 도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도마도 본시는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고기를 잡던 일곱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도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서로 간에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과 도마도 본래부터 친숙한 사이였을 것입니다.

사복음서 가운데 오직 요한복음만이 도마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도마의 이름이 열두 사도들의 명단에만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 곳에서 도마에 관한 내용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다시금 유대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만 있었습니다. 그러할 때 도마가 나서면서 이와 같이 의연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예수님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서, 그와 같이 용기 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둘째,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곧 떠나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그 길을 제자들이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그 즉시 이와 같이 반문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때에도 도마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말한 의도는 나중에 예수님을 찾으러 가기보다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도마는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자서 가버리셨습니다. 도마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내용입니다.  

 

(3) 도마의 부재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보이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실 때, 도마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 그러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로잡히셨을 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도마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른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분명 도마도 한 동안 혼자서 깊은 상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야 어떠하든지, 그 동기야 어떠하든지 간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도마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도마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도마는 교회에서 이탈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 곧 예수님의 교회에는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늘 모이기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제자들의 증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그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먼 곳에 가서 증거하기보다, 먼저 가까운 곳부터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낙심 중에 혼자 있는 도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르되”라는 동사가 미완료형입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형은 그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도마에게 여러 가지로 간곡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들의 음성은 기쁨에 넘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은 도마를 나무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마에게 약을 올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낙심 중에 있는 도마를 위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마여, 왜 여기서 혼자 낙심하고 있느뇨?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느니라. 그러니 여기 혼자 있지 말고, 우리와 함께 다시금 교회로 가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 주변에는 도마처럼 교회를 떠나서 혼자서 낙심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 사람을 찾아가서 간곡한 말로 위로해줍시다. 그리하면 도마처럼 그 사람도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5) 도마의 반응

제자들은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여러 가지 간곡한 말로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제자들의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미 제자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자기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아울러 도마는 영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기의 손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기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도마는 예수님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과 바꾸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기의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기를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요구들 때문에,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제자들이라고 해서 도마보다 별반 더 낳은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전에는, 그들도 도마와 똑같은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막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이와 같이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다 믿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독 도마만을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분명 그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도마는 그토록 강하게 많은 요구들을 했을까요? 이는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도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옵게 되기를 너무나도 갈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마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를 찾아주셨고,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미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자에게는 언제나 자신을 보이십니다. 

 

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까? 물질, 권세, 명예와 같이 세상적인 것들을 애타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직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고,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찾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쁘신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을 찾으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도마에게 보이신 예수님(26절~27절).

 

요20:26 (1) 여드레를 지나서 (2)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3)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4)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1) 여드레를 지나서

유대인들은 날짜를 계산할 때, 그 날 당일도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 날 당일의 시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들은 그 날을 하루로 간주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 사이의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은 이틀, 곧 48 시간이 지나기 전에 부활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금, 토, 주일을 각기 하루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날은 언제입니까? 그 날도 역시 안식 후 첫날, 곧 한 주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날도 역시 부활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지금의 주의 날, 곧 주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고, 한 주간을 기다리셨다가 주의 날에 다시금 자신을 나타내셨습니까? 이는 제자들이 원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부활의 날을 새 언약의 날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날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따라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여기에 기록했습니다.

 

(2) 도마도 함께 함

제자들은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간곡한 말로 그를 위로했습니다. 결국 도마는 제자들의 손에 이끌림을 받아, 마가의 다락방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말하자면 도마는 예수님의 교회로 다시금 되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마28: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유월절 다음의 한 주간을 무교절로 지켰습니다. 이제는 무교절도 지났습니다. 그리고 무교절이 끝나는 안식일도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왜 제자들은 그 다음날 그 즉시 갈릴리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을까요?

그 날은 안식 후 첫날로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그 날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 갈릴리로 출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날도 자기들을 찾아주시기를 분명 기대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찾아오심

아직은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록 문들이 닫혀 있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없이 자기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그들은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그들은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날도 예수님은 닫혀 있는 문들을 그대로 통과하셔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몸은 더 이상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이 날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맨 먼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Shalom to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늘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강입니다. 늘 새로운 평강입니다. 무궁한 평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와 같은 평강으로 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4) 예수님의 당부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했던 말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도마의 속마음, 말하자면 도마가 자기도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순전히 도마를 위해서 그 자리에 다시금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나무라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를 그대로 다 들어주시면서, 도마를 향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마12:20 말씀과 같이, 진실로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눅15:4 말씀과 같이, 참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또한 히4:15 말씀과 같이, 정말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냥 바라보고만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주시며, 우리를 격려해주시고, 우리를 굳세게 하십니다. 참으로 미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쁘신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굳세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믿음에 굳게 서서, 어떠한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와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지 맙시다. 우리의 믿음을 밝히 드러내십시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시다.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시다. 그리해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도마(28절~29절).

 

요20:28 (1)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1) 도마의 신앙 고백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까? 도마에게 믿음을 더하시며, 그를 굳세게 세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은혜로 도마에게는 큰 믿음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그 즉시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의 신앙을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사실 도마는 자기가 요구했던 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마는 그의 손으로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도마는 그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또한 그의 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즉시 큰 기쁨과 감격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My Lord and my God!”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예수님은 온 백성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도마와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My Lord and my God!”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나의 모든 삶을 돌보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늘 나의 주님으로 섬기며, 또한 나의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성숙한 믿음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시면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은 도마는 덜 복되고, 보지 못하고도 믿는 우리들은 더 복되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비교급으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보고 믿든지 보지 못하고 믿든지 간에, 믿음 자체는 다 복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와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보이신 것은 그에게 믿음을 더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믿음이 성숙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서 우리 모두가 성숙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다음 주까지 이것을 이렇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믿겠나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작은 상자 속에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시한 일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들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는 보고서야 믿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숙한 믿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와 같이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믿음을 더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도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믿음으로 행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삼 주에 걸쳐서 예수님의 부활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보이심으로,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이심으로, 그에게 믿음을 더하셨습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큰 표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마12:39에서 친히 밝히신 대로, 이는 요나의 표적 곧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사신 부활의 표적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힘써 증거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먼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예수님에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신앙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무궁토록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로, 우리 모두 성숙한 믿음을 가집시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됩시다. 그리해서 하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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