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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마음으로 새 해를
본문/ 눅 15:17-24
일전에 TV 사극을 보다가 엉뚱한 대사 때문에 놀란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사극인데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느니라” 저는 순간 헛갈렸습니다. 이 말이 우리나라 옛 속담인가?
물론 이 말은 우리 속담도 아니고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해 본 일이 없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이고 특히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혼돈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왜 술을 부대에 담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술은 항아리나 도자기로 만든 병에 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자주 양을 몰고 집 떠나 먼 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와 같은 음식을 휴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항아리나 그릇을 가지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헝겊에 빵을 싸고, 양 가죽으로 만든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담아서 다녔습니다.
다음으로 “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새 술은 아직도 발효가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가죽 부대에 담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계속 발효가 일어납니다. 계속 발효가 일어나면 부피가 늘어납니다. 마치 빵을 발효시키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죽부대가 낡은 것이면 발효 도 중에 뜯어지거나 틈이 생겨 술이 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튼튼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본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가 가고 신약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층과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낡은 부대처럼 낡은 사고와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원치도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동안 과거 시대에서 기득권을 누려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가로막는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열린 사고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셔서 기득권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 과거의 신념 체계에 세뇌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새 부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 술이 생겨도 옛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터져서 못쓰게 되고 술도 다 새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새 술이 생기면 먼저 새 부대를 찾거나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 술은 반드시 새로 만든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새 부대는 준비해 놓지 않은 채 새 술만 찾는 것입니다. 모두가 새 술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새 부대를 준비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개혁이니 혁신이니 말을 많이 합니다. 말하자면 새 술을 마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새 부대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혁되고 혁신된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걸맞은 사고와 그걸 담아낼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설령 새 술이 생긴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술을 찾기 전에 먼저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적 자세와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막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작년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가 될 것입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새 봄이 찾아온 것처럼 우리에게 2016년은 새 봄과 같은 복된 시절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 봄이 되면 겨우 내내 입고 있던 두꺼운 겨울옷을 벗고 가볍고 시원한 봄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작년과는 다른 새로운 신앙적 태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새 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가 미리 유산을 챙겨서 아버지 품을 떠났습니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탕진했고 흉년까지 들어서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살기 위해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됐는데 먹거리가 없어서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게 됐습니다.
그러는 중에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지금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새 부대가 되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알려줍니다.
우선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탕자의 돌이킴은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는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게 됐습니다. 자기는 지금 먼 타국 이방 땅에 있습니다. 그것도 돼지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돼지우리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율법에서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돼지를 키우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를 먹거나 돼지를 키우는 사람은 추방당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탕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잘못을 깊이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려면 우선 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내 자신을 자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이 얼마나 멀리 나와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한 번은 친구 목사님이 운전하는 차를 탔습니다. 이분이 운전하면서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자신은 요사이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답니다. 나이 들면서 두 여인의 말을 잘 들어야 노후가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차 안에 있는 여인이랍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집에 있는 아내와 차에 장치되어있는 내비게이션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내비게이션의 안내 목소리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길을 잘 안내해 줍니다. 그러다 안내한 대로 가지 않으면 단박 야단을 칩니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그래도 고집부리고 계속 다른 길로 가면 경로를 재탐색해서 안내합니다.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또 야단을 칩니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로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내하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잘못된 길로 갈 때 내가 지금 어디로 잘못 가고 있는가를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는 경로를 이탈해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라고 야단을 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자기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새롭게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아버지께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청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겠다는 결단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방 땅에서의 삶을 청산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또한 돌아가서 내가 아버지 집에서 품꾼으로라도 아버지를 섬기며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려면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도려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무엇인가 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디스 라이트라는 분이 쓴 [단 하나의 결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단하나의 결심을 가진 사람’과 ‘단 하나의 결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많은 결심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이 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의 결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 하나의 결심이란 결심들을 이끌어 가는 결심 중의 결심을 말합니다.
이 책은 단 하나의 결심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링컨의 예입니다. 링컨은 스물세 살 때 이 ‘단 하나의 결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바로 ‘존경받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는 이 결심을 지켜가면서 마주치는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작은 결심들을 했고 그것을 지켜갔습니다. 그러면서 꾸준히 오직 존경받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까지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결단을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단 하나의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리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리라!”와 같은 단 하나의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결심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결심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성수주일을 하리라!”, “말씀을 읽으며 살리라!” “기도하리라!” “복음을 전하리라!” “이웃을 사랑하며 살리라” 등 결심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탕자가 결심한 대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산 받은 것 다 탕진했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동네사람들의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결단을 실천으로 이어갔습니다. 용기 있게 실천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아들로 자기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새해가 시작되면 저마다 크고 작은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조그만 난관이 앞을 가로막으면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조그만 유혹이 흔들면 쉽게 주저앉고 맙니다. 그래서 늘 용두사미가 되고 맙니다. 시작은 거창하게 잘 했지만 나중에는 늘 후회로 끝이 납니다.
마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합니다. 우선 이 사람은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유대인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하실 때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청을 들어주셨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병자를 직접 만나보지 않으시고 고쳐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병자에게로 가셔서 보시지 않으시고 고쳐주셨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말하자면 원격치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이한 치유과정에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직접 환자를 보시지 않고 여기서 말씀하시더라도 고치실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격치유에 대한 제안은 이 백부장이 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백부장이 남다른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을 칭찬하신 뒤에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천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 백부장이 순종하여 실천하자 그 시점에 병자가 나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순종하고 실천할 때 열매를 보게 됩니다. 믿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이 아무리 놀라운 믿음을 가졌다고 해도 가지 않았다면 병자는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결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도중 하나님의 도움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결코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하다보면 어느 새 주님의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새해에는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풍성한 실천의 열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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