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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찬양예배] 찬미하고 나가니라! (마가복음 14장 26절)

by 【고동엽】 2022.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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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찬양예배] 찬미하고 나가니라! (마가복음 14장 26절)

 

 

저는 혼자 있을 때 가끔 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부르는 버릇이 있습니다.
  특히 엘리베이터 안 같이 공명이 잘 되어서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보다 훨씬 더 멋지게 들리는 곳에 있으면 절로 무슨 유명 가수나 된 기분으로 오페라의 아리아 따위를 흥얼거리게 되고, 교회에 출퇴근 할 때에도 그 복도가 또 소리가 잘 울리는 공간이기 때문에 절로 콧노래나 휘파람을 불 때가 많습니다.

  아마 부교역자들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 있으면 ‘목사가 교회 안에서 점잖지 못하게’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어쩌면 저 자신도 그런 부교역자를 보면 건방지다고 야단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회장 목사가 부르니까, 아무도 그런 비판을, 뒤에서는 할지 모르겠지만, 제 면전에서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전에도 이런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당회장이 되니까 강단에서 이 별로 곱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 불러도 교인들이 다 박수 쳐 주고, 아무 데서나 휘파람을 불고 다녀도 “목사님 휘파람 소리 참 듣기 좋아요.”라고 칭찬만 해 주니, ‘참 권력(?)이 좋긴 좋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제 짐작에는, 저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면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는 것처럼, 복도 모퉁이에서 혹은 사무실 문밖에 제가 오고 있는 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니까, 저와 마주치게 될 것을 피해 버린다든지, 아니면 빈둥거리고(?) 있다가도 얼른 열심히 일하는 척 할 수 있으니까, 계속 그렇게 경고음을 내면서 다니시라고 해서, 제 휘파람 소리가 듣기 좋은 척 일부러 추켜세워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리를 해 봅니다. 저도 참 머리 잘 굴리지요?
  하지만 어쩌면 실제로 아주 경건한(?) 교인은 목사가 예배시간이 아닌 때, 교회 복도를 걸어 다니면서 혹은 길 가면서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고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한 신학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25절 말씀에서는 “저희가 찬미하며”라고 했는데. 이 ‘저희’는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을 함께 지칭하는 대명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합창을 하셨다는 뜻이 되는데, 그 어떤 해석가는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본문에 나오는 ‘찬미하다’라는 동사를 'recite' 즉 ‘낭송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동안 기도는 자주 하셨지만 노래를 부른 적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는데, 아마도 그 해석가는 예수님께서 노래를 부르신다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점잖게 보이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훼손시킨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휘메오’라는 헬라어 동사를 그렇게 ‘낭송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이며 사실 억지에 가깝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to sing' 즉 ‘노래하다’는 뜻의 단어인 것입니다.
  단어 뜻만 그럴 뿐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 관습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 찬미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예식을 지키면서 시편에서 소위 ‘할렐송’이라 불리는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할렐’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할렐루야’의 첫 단어로서 바로 ‘찬양’이라는 뜻의 말인데,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 도중에는 ‘할렐송’의 전반부인 시편 113편과 114편을 불렀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 네 번째 잔을 들면서 마지막 순서로 그 ‘할렐송’의 후반부인 시편 115편부터 118편의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유월절 잔치 도중 이 찬송들을 부를 때 그냥 목소리로만 하지 아니하고 악기 반주를 사용하거나 아예 악단, 오늘날로 치자면 작은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서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희가 찬미했다’는 것은 바로 이 유월절 잔치를 마칠 때 부르는 할렐송이었음이 분명하며, 물론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도 같이 부르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도 평소에 기도만 드리신 것이 아니라 찬송 역시 부르셨던 것이 분명한데, 특히 이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셨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면서 그 할렐송을 함께 부르는 시간은 우리 예수님에게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다락방을 떠나시면 피땀의 기도를 드리신 겟세마네와 멸시와 모욕을 당하신 빌라도의 법정과 무엇보다도 그 고난의 극치인 골고다로 이어지는 걸음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노래가 나왔겠습니까?
  아무리 평소에 콧노래 부르기 좋아하던 사람이라 해도 그처럼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바로 그 시점에 자기 입에서 찬미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런 때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즐거운 찬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찬송을 부르셨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할렐송의 후반부, 즉 유월절 만찬이 끝나는 시점에 불렀던 시편 115편부터 118편의 노래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찬양과 감사를 돌리고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라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우리 주님께서도 여호와께서는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경우에도 오직 찬양을 받으셔야만 하실 하나님이심을 노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라고,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크신 구원의 은총에 최고의 감사를 드리시며 찬미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노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우리 주님께서도 지금 곧 닥치게 될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성부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시며 평안히 의지하는 믿음을 노래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찬미는 하나님께서 그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이제 곧 주님께서 통과하셔야 할 상황에 딱 들어맞는 찬송이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신 그 주님은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스러운 모습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도 그렇게 노래하셨다면, 오늘 그 주님의 부활 승리를 맞이하는 이 기쁜 시간, 어찌 우리에게 찬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께서는 그 찬송을 solo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합창하셨습니다.
  세상 가요도 그렇지만 찬송 역시 여러 성도들이 함께 부를 때 훨씬 더 큰 영적 감흥과 힘이 솟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에 우리 할렐루야 찬양대가 부르는 이 영감의 찬미를 우리 경향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심령으로 화답함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찬미하면서 누렸던 그 기쁨을 이 시간 꼭 같이 느끼시고 바로 그 찬양의 은혜를 이 자리에서 꼭 같이 나누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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