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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통박사 조병호의 <신구약 중간사>

by 【고동엽】 2022. 4. 1.

헬라 제국과 신구약 중간사

 '아버지'로 불리며 페르시아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29년간 통치했던 고레스(키루스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두 번째 왕이 됩니다. 그는 7년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캄비세스는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는 나라의 중진 7명 가운데 새 왕을 선출했는데, 거기에서 선출된 사람이 바로 다리오(다레이오스B.C.522~486)왕입니다.다리오(다레이오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전 이미 총독직을 경험한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다리오(다레이오스)는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여러 자식을 두었음에도,페르시아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 고레스(키루스 2세)의 딸, 오토사를 또다시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다리오(다레이오스) 왕과 아토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바로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오(다레이오스) 왕과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이 연거푸 그리스를 침략하러 갔다가 모든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페르시아 제국은 힘을 잃어가게 되고, 결국 다리오(다레이오스) 3세 때에 그리스 북쪽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제국의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스 침공은 다리오(다레이오스) 왕이, 세 번째 그리스 침공은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이 한 일입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지만, 언제든 페르시아의 재침공은 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해 기금을 마련했는데, 아테네가 이 기금을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동맹국들의 비난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아테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항구도시인 고린도(코린트)까지 지배하려 하자, 스파르타를 비롯한 도시국가들이 마침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전쟁을 '필로폰네스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후 그리스는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권력이 이동해가다가,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에게 처참히 짓밟히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 역사는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아닌 헬라 제국이라는 새로운 강자 앞에 모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로 향해 진격해가면서 이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다레이오스) 3세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다리오(다레이오스) 3세는 살아남아 도망에 성공을 합니다.

 그러자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는 다리오(다레이오스) 3세를 추격하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말머리를 이집트로 향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발목을 두로(티루스)가 잡았습니다. 육지에서부터 0.5마일 떨어져 있는 두로는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가 항복을 요구하며 보낸 사절단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음 급한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발길을 6개월간이나 잡아놓았던 두로는 육지에서부터 섬까지 방파제를 쌓는 공사와 더불어 두로의 가장 취약한 남쪽 항구를 공격하는 마케도니아 군사들에게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생각지도 않게 두로에서 6개월 이상, 그리고 가사에서 2개월여의 시간을 지체한 알렉산더는 이후 시리아와 유대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어서 페르시아 제국을 단숨에 점령합니다.

 그러고 나서 알렉산더는 이후 70개 이상의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면서 그가 평소에 존중했던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페르시아의 문화와 융합하여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힘겹게 두로와 가사를 점령했던 알렉산더는 시리아를 점령하고 이집트로 내려가면서 통로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시작하자, 대부분의 나라들은 저항하거나 항복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저항도 하지 않았고, 항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어떤 군사적 피해도 입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세금 혜택까지 받았습니다.

 

 헬라어 70인역(LXX) - 구약성경의 세계화

 애굽(이집트)에서 프톨레미 왕조를 세운 프톨레미 소테르는 40년을 통치했고, 그의 뒤를 이은 프톨레미 필라델포스(B.C.283~246)또한 40년간 통치했습니다. 특히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Septuagint,LXX)을 남김으로 역사에 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유대의 율법서에 관심이 컸습니다. 때문에 그는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하고자 했습니다. 이 소망은 결국 구약성경 전체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어져 헬라 제국을 통해 성경의 세계화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셀루커스 왕조가 시작된 이래 가장 넓은 영토와 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프톨레미 왕조를 이겨 유대를 빼앗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이러한 기류를 두고 유대가 재빨리 셀루커스 쪽으로 지지를 보내며 안티오쿠스 3세를 도와 유대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냈습니다.(B.C.198)

 그러자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에 감동하여 유대를 통치하기는 하지만 , 그들의 신앙과 율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3년간 세금 감면의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가 죽자 셀루커스 4세가 왕이 되는데, 그도 로마에 바쳐야 하는 전쟁 배상금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에서 심한 반대가 일어났고, 오래지 않아 암살당합니다.

 B.C.175년 셀루커스 4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는 B.C.167년 10월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을 위해 제단과 우상을 세워 놓고, 돼지가 희생제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자 안티오쿠스 4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수많은 희생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희생자들은 대부분 하시딤(Hasidim) 운동에 가담한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시딤들은 초기 몇 개월 간은 안티오쿠스 4세의 탄압에 저항이나 보복을 하지 않았으나 모데인의 한 원로 제사장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의 마카비 혁명입니다.

 유다 마카비의 지휘 아래 정규전 대신 게릴라 전법을 사용한 마카비 혁명 가담자들은 코끼리까지 앞장세운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에게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마침 파르티아와 전쟁 중이던 안티오쿠스 4세가 동부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리시아스 장군은 전투 대신 마타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비와 타협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청결하게 되어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것이며, 유대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타협이었습니다.

 B.C167년 10월부터 B.C.164년 10월까지 3년에 걸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가 끝이 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자, 이날을 기념하는 축제를 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수전절'(修殿節, 혹은 봉헌 절)이고,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하누카'(Hanukkah)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스몬 왕조와 신구약 중간사

모데인의 제사장 마타디아로부터 시작된 유대의 마카비혁명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지면서 B.C.142년 마침내 시리아의 셀루커스 왕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릅니다.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대의 대제사장 겸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마타디아에서부터 시몬의 통치까지를 마카비 혁명 시기라고 하고, 요한 힐카누스 때부터는 하스몬 왕조라 부릅니다.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

 요한 힐카누스(B.C.135~104)

 아리스토블루스 1세(B.C.104~103)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B.C.103~76)

 살로메 알렉산드라(B.C.76~67)

 힐카누스 2세/아리스토블루스 2세(B.C.67~63)

 

알렉산더 야나이우스가 죽자,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여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여자인 자신은 대제사장직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정치는 자신이 맡고, 대제사장은 장남인 힐카누스 2세를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직에 오른 장남 힐카누스 2세는 야심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대신 막내인 아리스토블루스 2세는 매우 야심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B.C.64년 폼페이우스가 유대로 들어오자,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블루스 2세 두 형제는 다시 폼페이우스 앞에서 서로 자기가 유대의 통치자라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폼페이우스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두 형제 대신 오히려 로마가 유대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는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고 있었고, 사두개파는 좀 더 유능한 아리스토블루스 2세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함으로 이 결정은 폼페이우스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파가 사두개파를 누른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블루스 2세, 두 형제의 6년에 걸친 내전의 실질적인 승자는 누구보다도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였습니다.

 

 유대의 통치자이자 동시에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2세가 그의 신하 안티파터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많은 돈을 보내 전쟁에 큰 도움을 줍니다. 로마의 내전에 폼페이우스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에 선 것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도운 유대에 감사를 표하며 유대에 세금을 면제해주고, 힐카누스 2세에게는 그가 원하는 대제사장직을 재확인해두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유대의 행정장관 자리를 받은 안티파터는 자기의 장남 파사엘루스(Phasaelus)를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 총독으로 임명하고, 겨우 25세였던 자기의 차남 헤롯에게는 갈릴리를 맡겼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가 파사엘루스와 헤롯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하여 주었는데 그 이유는 안토니우스가 과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있던 시절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와 우정을 맺은 적이 있었기에 안티파터의 아들들을 무척 아꼈을뿐더러, 특히 헤롯의 정치력을 매우 높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안티고누스가 안토니우스에 의해 참수당함으로 대제사장직과 왕의 통치권을 함께 가졌던 하스몬 왕조는 126년만에 완전히 끝이 나고 유대의 권력은 이두메 사람 헤롯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로마제국과 신구약 중간사

로마는 수많은 나라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그들의 식민지로 두면서, 원로의 의원들 가운데 전직 집정관들이 총독으로 나가서 식민지를 다스렸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다스리는 식민지인 유대에 로마 황제는 통치자로 분봉왕을 임명하고 동시에 총독을 보내어 정치와 군사를 맡기고, 종교는 유대의 대제사장에게 맡겨 역할을 분담하게 하였습니다.

 로마가 유대에 이두메 사람 헤롯을 분봉왕으로 임명한 것은 껄끄러운 나라 유대를 통치하는데 매우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헤롯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터 시절부터 놀라운 정치력을 가진 인물로서 유대인들을 아주 잘 알았고, 정치적으로 로마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보낸 총독과도 잘 지냈으며, 유대의 대제사장과도 무리 없이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헤롯은 그의 사후에, 그의 아들들에게 분봉왕의 자리를 세습까지 했습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유대의 분봉왕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이두메인 헤롯은 로마와 유대 사이에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 그리고 유대인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자리에 있는 왕이었습니다.

 로마가 국방과 치안을 위해 파견한 유대의 총독은 유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병력을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주둔시켰습니다. 총독의 집무실도 가이사랴에 주둔시켰습니다. 신약성경의 백부장 고넬료도 가이사랴에 있는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유대에서 가지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권한은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 총독의 권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분봉왕 헤롯의 정치 -베들레헴 유아 살해 명령

성경은 헤롯을 베들레헴에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린 잔혹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그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났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조용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안내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를 찾으면 자신에게도 알려주어 자신도 그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떠난 박사들은 헤롯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들 나라로 몰래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헤롯이 내린 명령이 바로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에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아래로 모두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절에는 '호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내린 명령이 바로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로마 제국 하의 모든 식민지 백성은 정해진 날까지 반드시 고향에 가서 인구조사에 응해야 해했습니다. 때문에 요셉은 해산을 앞둔 마리아를 그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데려가야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호적'은 이처럼 로마제국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세계각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1년에 세 차례, 혹은 최소한 한 차례라도 예루살렘을 방문해 그들의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냅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허락, 혹은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행 2:5)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의 멸망

4년간의 유대 전쟁에서 사실 치열했던 것은 마지막 약 5개월간이었습니다. A.D.70년 예루살렘은 도성 전체가 완전히 로마에게 넘어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성전 기물들도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유대에서 도망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다시 유대인들을 선동했으나 그 일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의 보병 대대가 주둔했으며, 유대인들의 성전세는 로마에 있는 이방신 주피터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A.D.70년 유대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산헤드린 공회는 없어지고,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 세계를 떠돌다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율법을 통해 법의 민족으로 훈련시켜 온 세계 민족을 위한 제사장 나라를 삼으신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고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그들의 나라를 다윗 시대처럼 회복시킬 메시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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