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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무엇 때문에 근심(염려)했나요? (고후 7:10-11)

by 【고동엽】 2022. 3. 31.

결산/무엇 때문에 근심(염려)했나요? (고후 7:10-11)

 

  ▶어느 여집사 한 분이 가정을 비관하고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시어머니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집을 치우기가 무섭게 어지러 놓고, 남편도 시들해 졌고, 시어머니는 시시콜콜 간섭만 하고, 그래서 자살을 생각해 봤는데, 자살하자니 구원받지 못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죽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살할 수 없습니다. 나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너무나 고통을 당하고 있구나. 그래 알았다. 너를 천국으로 데리고 오겠다. 그러나 몇 가지만 순종할 수 있느냐?" "네. 몇 가지 죽기 전에 순종하겠습니다. 제 기도만 응답하여 주세요." 
  "그러면 네 장례를 치러야하니 네 집을 청소를 깨끗이 해라. 많은 사람이 와서 보아도 정말 깨끗하다는 평을 받도록 해라" 여 집사는 집안을 안팎으로 청소하면서 최선을 다 했더니 집이 몰라보게 좋아져 다른 집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딸아! 다음으로 할 일이 있다. 네 자녀들이 엄마가 죽었다고 슬피 울 것이다. 며칠 안 남았으니 원 없게 흠뻑 사랑하여 주거라" 
  여 집사는 흠뻑 사랑해 주었습니다. 자녀들이 최고 만족을 느끼도록 해 주었습니다. 안 가던 곳을 데리고 가서 구경도 시켜주고 요리도 만들어 주고 일류 식당도 데리고 가서 맛있게 먹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다음으로 할 일이 있다. 남편이 너를 아쉽게 느끼며 좋은 아내였는데 죽었다고 천추의 한이 되도록 3일만 사랑해 주거라"
  그 집사님은 남편은 최상급으로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부탁이다. 네가 죽으면 시어머니가 슬피 울도록 사랑해 주거라"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며칠 후 주님이 오셔서 "딸아! 이제 천국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집사는 마지막으로 집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보았습니다. 행복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주님! 조금 더 있다 가겠습니다." 
  벧전4: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미국의 대 부호이며 위대한 신앙가인 '프란체스코'는 예수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몇 가지 덕목들을 우리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⑴'절대적인 성실, 절대적인 정직'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이 필요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직함이 있어야 합니다. 모습에 대하여! 자기 처지에 대하여! 자기 삶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은 정직입니다.
  ⑵'순수한 동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던, 권사가 되던, 집사가 되던 동기가 선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이외에 다른 동기가 개입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⑶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라!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⑷위선을 버려라! 남을 의식하다 보면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타내고 드려내려고 하면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⑸기쁨으로 해라!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지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을 빼앗는 요소는 욕심과 탐심, 교만과 시기와 질투입니다.
  ⑹일(봉사)을 하며 보람을 느껴라!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보십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이 있고, 주고, 받는 법칙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보람을 느끼지 않으면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⑺늘 감사하라! 이런 감사, 저런 감사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큰 감사는 구원의 감사입니다. 구원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택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프란체스코'는 ㈀자고 일어나서 눈을 뜨고 정신이 들 때, 살아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 보았는가? ㈁내 가정, 내 주변의 환경, 되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해 본 일이 있는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해 정말로 감사해 본 일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제목소개!▶

 

  벌써 2005년도의 마지막 달 12월입니다. 인생은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누구나 그 길을 매일 매일 갑니다. 사람은 잠깐입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인생은 잠깐 왔다 지나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은 자리에 앉아도 영원히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그것이 영원히 나의 것이 아닙니다. 고 정주영씨는 현대에서 그렇게 많은 아파트를 지었어도 한 채도 못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언젠가는 놓아야 할 때가 오고, 벗어 놓아야 할 때가옵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모레도 가는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이 인생의 길에서 쉬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숨을 쉬는 인생은 낮에도 이 길을, 밤에도 이 길을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벌써 2005년도의 12월의 문턱에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정말 세월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 어른들은 <세월이 유수와 같다, 광음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2005년 한해를 마지막 보내는 12월에서 생각해 보니 세월이 덧없음을 다시 느껴지고, 인생의 허무를 절망하게 됩니다.
  한 해가 갔다고 하는 것은 이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돌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가는 세월만큼 우리가 발자취를 남겨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한 해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고, 누구를 위해 살았고, 우리의 발자취는 무엇을 남겼습니까? 

  구약에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은 부자지간임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삶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살다 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 아들 솔로몬은 세상 향락으로 살다 간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편을 남겼고, 솔로몬은 전도서를 남겼습니다. 시편은 다윗의 신앙고백이며, 전도서는 솔로몬의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편에서 구구절절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무엇을 고백합니까? 솔로몬은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는 물질도 부유한 사람으로 매일매일 호의호식 속에 살았으며 많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져본 사람인데 그가 결론적으로 고백한 것은 <야! 세상 살맛 난다! 기분 째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해 아래서 수고한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대조적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살다 간 믿음의 사람으로, 그의 시편 구구절절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상 향락에 취해 살다간 사람으로 그의 고백은 인생의 절망만을 노래하고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 간 사람의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가 있지만, 세상에 취해 살다간 인생의 고백 속에는 절망의 노래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인생은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서는 철이 없고, 젊어서는 정신이 없고, 중년 때는 틈이 없고, 늙어서는 형편이 없고...> 그래서 결국 없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먹는 것에 끌려가고, 젊어서는 정에 끌려 살고, 장년에는 돈에 끌려 살고, 노년에는 병에 끌려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감하시지요!
  오늘 저는 인생의 종착역을 한 발 앞당긴 12월의 문턱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무엇을 남겼는가?' 조용히 지나간 일년을 돌아보며 결산해 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 10절을 한 번 더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가? "너희가 하나님을 위해 근심해 본 일이 있느냐?" 쉽게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을 위해 근심하고 염려해 본 일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애통하기보다는 세상 바라보면서 먹고사는 것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건강 걱정, 자식 걱정, 돈 걱정, 출세 걱정, 사업 걱정> 이런 것들이 걱정의 대명사들입니다.
  "자식들의 실력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그 자식의 영혼 때문에 걱정해 본이 있는가? 남편의 사업 때문에 걱정은 했지만 그 영혼 때문에 걱정을 해 보았는가? 이웃이 잘 살아서 배 가 아파해 보았지만, 그 영혼들 때문에 걱정해 본 일이 있는가? 내 사는 것이 어려워서 걱정은 해 보았지만 교회 어려움에 대한 걱정을 한번이라도 해 본 일이 있는가?"
  본문이 주는 의미는 이런 영적인 깊이를 두고 주님이 우리들의 가슴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계가 깨지는 것 때문에 걱정을 했고, 자존심 상하는 것 때문에 걱정을 했고, 무엇을 잃을까 걱정을 했어도, 구역을 위해 걱정을 해 본 일이 없고, 여전도회, 남전도회를 위해 걱정해 본 일이 없고,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림의 성도 여러분! 오늘 결산합시다!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합시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할/
  근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육적인 근심, 즉 세상근심이요, 또 하나는 영적인 근심,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본분은 하나님의 듯대로 하는 근심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세상 근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①근심이란 말은 무엇인가?
  여기 근심이란 말은 염려라는 말로 헬라 원어에 '메림나오'인데 그 뜻은 '갈라놓는다'와 '마음'의 합성어로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놓은 것이 염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근심, 걱정, 염려는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인간을 약하게 하고 실패자로 만들어 불행에 울도록 만드는 무서운 악이요, 신앙을 타락시키려는 원수 마귀의 무서운 무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약해서 늘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머리털은 셀 수 있어도 근심의 숫자는 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도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그런 많은 걱정들 중에는 쓸데없는 걱정들도 참 많습니다. 서양속담에 '걱정도 버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파저 TV' 클럽에서 필요 없는 7가지 걱정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⑴지나난 날에 대한 걱정은 아무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떠나버린 차입니다. 과거지사는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아무리 몸부림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거지사를 가지고 이 지나버린 이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걱정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⑵기우가 있습니다. 기우란 오지 않을 일 있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기 나라' 사람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헛된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문입니다. 이 소문 때문에 기 나라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방종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서 망한 것이 아니라 오지도 않은 기우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⑶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이기도 합니다.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었다가는 오히려 큰일 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 내 뜻대로 고집하고 거기다 딱 못을 박고 그렇게 안 되면 어쩔까 그것 때문에 안달을 합니다. 잠을 못 이룹니다. 이런 걱정은 자아가 강하고 고집이 강한 사람에게 있는데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상하고 그 고집으로 남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세요! 그 유명한 겟세마네 기도에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할/
  ⑷자기를 내세우려는 데 걱정이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누가 나 좀 알아봐 주었으면 쓰겠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가 몰라주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안달이 다 나고 걱정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⑸남을 믿지 못해서 오는 걱정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은 혼자만은 못삽니다. 그리고 남의 힘도 빌려서 살아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신뢰문제로 오는 근심이 있습니다.
  ⑹날씨 때문에 하는 걱정입니다. 결혼 날짜 잡아놓고, 또 무슨 잔치 날짜 잡아놓고 날씨가 궂으면 어떨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거 참 부질없는 것입니다.
  ⑺병들까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걱정 중에 하나가 암이 아닌가 혹시 내가 불치의 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여기 근심이라고 번역된 '루페'는 슬픔, 아픔-고통, 걱정-근심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

  ②성경은 주의 자녀들에게 세상 근심을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365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인생들이 근심 속에 살다가 죽을까 봐, 일년 365일 매일 한 번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 경제공황 때 그 공황을 타개한 믿음의 사람 '루즈벨트'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날마다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연설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두려움, 그 자체를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외쳤답니다. /할/
  주님은 마6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빠질 때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기쁨이 떠나갑니다. 염려하는 자는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염려가 어떤 해결책이 되는 것이 못됩니다. 마6: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왜 성도가 염려합니까?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마6: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염려 근심이란 말은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갈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염려하다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해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염려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41: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딤후1: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할/ 두려워하는 마음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들어올 때 마귀를 꾸짖고 물리쳐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야 합니다. ▶두려움을 주는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약4:7-8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멘!/
  여러분! 기도하면 우리가 마음만 먹어도 생각만 해도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때문에 근심하고 염려했습니다. 내 자신만을 위해 염려했고, 내 가정, 내 가족만을 위해 염려했고, 나와 관계 있는 것 때문에 염려했습니다.

  본문은 그런 세상 근심을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세월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 보십시다. 이 근심이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능력으로,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아멘!/ 본문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③그리스도인은 근심이나 염려대신 예수를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정말 귀한 침대, 아주 값비싼 침대를 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간질간질한데,  이웃 사람들을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침대를 메고 다니면서 자랑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아프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병 문안 오는 사람에게 침대를 구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옆집에 사는 사람은 속옷 한 벌을 선물로 받았는데, 기가 막히게 예뻤습니다. 어찌 그리 예쁜지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한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 집에 오지를 않습니까? 속옷을 입고 마을에 나갈 수도 없는 차에 이웃이 아프다고 하니까 잘 됐다 하고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집 주인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 놓고 화려한 침대에 누워서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배야!"하면서 계속 침대만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옆 집 부인도 실제로는 병 문안을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속옷을 자랑하러 갔기 때문에 침대에 발을 얹은 후에 옷을 죽 올려서 속옷을 보이며 "어디가 그리 아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은 눈치가 있습니다. 누워서 눈을 껌뻑껌뻑하던 사람이 "보아하니, 당신 병이나 내 병이나 같은 병인 것 같소"라고 말했답니다.

  ▶침대 때문에 자랑하고 싶어 꾀병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속옷을 자랑하는 그 사람도 행복합니다. 아내를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남편도, 친정에 가서 친정 식구들에게 자기 남편을 막 자랑하는 아내는 행복한 아내입니다.
  어디에서든지 자기 학교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학생은 행복한 학생입니다. 어디에 가서든 교인을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목사님은 행복한 목사님입니다. 어디를 가도 자기 교회와 목사님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교인은 행복한 교인입니다.
  저는 어디를 가도 교회와 교인 자랑을 합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자랑거리가 많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살맛이 납니다. 평생을 살아도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어 보십시오.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후10:17절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자녀이니, 주님의 사람들이니 자랑해도 혼자 하지말고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이 되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할/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영어 성경에 보면, temporary, 임시입니다. 세상의 권력, 세상의 재산은 임시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원합니다. 세상의 집도 임시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임시입니다. 국회의원이 되어도 몇 년 뒤에 그만 두게 됩니다. 오늘 도지사가 되어도 몇 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생명까지도 temporary(임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 사람은 의지할 것이 아닙니다.
  렘17:5절을 이하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갈6:14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자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합시다. 주님의 피 묻은 복음을 자랑합시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염려)이 무엇입니까?

 

  ①조금 거창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만이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루고 있습니다. 저 북쪽의 김정일은 자기 자신의 마음도 알지 못하는 위인입니다. 언제 어떻게 도발해 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 이 나라 경제도 어렵습니다. 세계에서 빚이 많기로 네 번째 랍니다. 그런데도 사기성 호화 여행이 끊이지 않습니다. 보신관광이 끊이지 않습니다. 서민경제는 밑바닥인데 부유층들도 호화롭습니다. 경제 때문에 불경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염려할게 많습니다. 청소년 문제가 생각납니다. 지역갈등이 아직도 심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염려하고 기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민족의 죄의 문제를 기도해야 하고, 민족 구원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눅19:41절 "성을 보시고 우시며"
  평화의 성이어야 할 예루살렘이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후 70년경에 멸망할 예루살렘의 참상을 예언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위대한 애국자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 함으로 앞으로 미치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노라"고 했습니다.
  민족의 죄를 바라보고 주님도 우셨고, 예레미야도 울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조국을 위하여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단순한 애국이 아닙니다. 이는 주안에서의 애국입니다. 잠14:34절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이 민족이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통곡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②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사실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딱 한 가지 일로 염려하고 있습니다. 고후11:28절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자나깨나 주님의 교회 때문에 염려가 된다고 합니다. 교회를 염려하는 것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만이 교회를 염려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교회에 안 나가면 목사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파하실 까?> <내가 오늘 성가대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실 까?> 드라마에 빠진다면 마귀가 좋아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성도가 됩시다.
  빈자리를 바라보며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가 전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와 염려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헐뜯는 것, 우리가 기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를 위하여 충성하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염려요, 근심입니다. 재정부는 재정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 이것이 교회를 위한 염려입니다. 구역 장은 구역을 위해 충성하고 기도하는 것, 각 전도 회장은 각 전도 회를 위해 기도하고 충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염려입니다. /믿/
  이 염려 속에는 반듯이 회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어려움이 없이 잘먹고, 잘사는데 우리 교회 재정은 어떤가? 한번쯤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 여전도회에 충성하지 못한 것, 남 전도 회에 충성하지 못한 것, 구역 장이 충성하지 못한 것,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근심하며 안타깝게 기도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성도는 네 가지의 분명한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내 교회관이 있어야 합니다. 성림교회가 내 교회요, 성림교회는 우리교회다. 교회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 교회 다니면서 이야기 할 때는 남의 교회 이야기하듯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교회관이 분명한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고, 자랑하고 섬기는 자입니다. 
  ㉡내 목자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까? 누가 뭐래도 여러분들의 영혼과 삶의 축복을 위해 담임목사처럼 기도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잘 믿기를 바라는 사람은 여러분의 담임목사 밖에 없습니다. 내 목자관이 바른 사람은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내 가정관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을 잘 관리합시다. 믿음의 가정을 건설합시다! /할/
  ㉣내 사명관이 투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권사님들에게도, 전도사님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여집사님도, 회장도 사명이 있습니다.
  엡4:11-12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 모두 교회관, 목자관, 가정관, 사명관을 바로 세우십시다.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성림교회 지체가 된 것을 감사합시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완전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그 신앙은 바르게 성장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상급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발목을 묶는 곳, 구역을 묶고 각 기관을 묶습니다. 세상으로 빠져들려는 사람들을 믿음의 자리로 묶는 곳이 교회입니다. /아멘!/

  ③골육친척을 위하여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롬9: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큰 근심'은 형제, 골육 그리고 친척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할 정도로 근심하였습니다. 이러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④나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염려해야 합니다.
  행여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 주님이 기뻐하시는 염려입니다.
  히3:12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내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 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게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대열에서 떨어질까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렸다면 염려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렸다면 염려해야 할 일입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는가? 근심하고 염려하십시오.
  고전10: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넘어질까 조심하십시오, 의심하다가 넘어지고, 원망하다가 넘어지고, 교만하다가 넘어지고, 강퍅하다가 버림받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싫어진 것 때문에 염려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다면 다시 한번 사랑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람,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계명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사랑은 친구를 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15: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조금 이해가 안 가는 소리 갔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왜 하필 친구일까요?
  여기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친구인 너희를 위하여 내가 죽은 것이라" 친구의 사랑은 노예적 사랑이 아닙니다. 노예는 상전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참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동물들도 새끼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때로는 새끼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피한 사랑입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애정입니다.
  그러나 친구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그 진실을 사랑하고 이런 사랑이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 때문에 근심했고, 가족 때문에 근심했고, 나와 관계 있는 것 때문에 근심하고 몸부림쳤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 봅시다.
  11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혼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과 행동도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근심은 "⑴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⑵얼마나 변명하게 하며(자백하게 하고) ⑶얼마나 분하게 하며(뉘우치고 한탄하게 하고), ⑷(주님을 대함에) 얼마나 두렵게 하며 ⑸얼마나 (복음 증거를)사모하게 하며 ⑹얼마나 (주님의 일에) 열심 있게 하며 ⑺얼마나 (우리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벌하게 하였는가 ⑻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성경, 거룩)을 나타내었느니라"
  본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영적인 근심은 회개를 이루게 하고 구원을 이루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영적인 근심에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2005년 12월 4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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