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1-5)
본문의 저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야킴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이사야로부터 죽을 것이라는 통고를 받고 벽을 향하여 무릎을 굻고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탄원하던 마음을 표현했던 시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하고 낙향하여 안식일 날 성전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시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표제에 보면 ‘고라자손의 시’입니다. 고라자손은 레위 지파로 모세와 아론의 사촌형제들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모세에게 비판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땅이 갈라져 그 자손들이 모두 땅에 묻혀버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원래 이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문지기로, 진설병을 만드는 일로 그리고 찬양대로 활약했던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에 절기 때마다 백성들을 대표해서 성전에서 찬양을 맡아 사역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고라자손 중의 한사람인 시인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역 멀리 요단 북쪽에 거주 하고 있습니다. 그 멀리에서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눈물을 지으며 그 옛날의 성전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 자손은 지금 어떤 사정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에 있을 때 성전에서 문지기로, 찬양대원으로, 진설병을 구우며 즐겁게 봉사를 했는데 지금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때를 생각만 하면 그리움이 사무쳐 옵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상한 것은 지금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일입니다. 이 이방인들이 그를 보고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그때 이 시인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그 비참한 심정을 본문에서 시로 표현하고 있다는 학설입니다. 누가 저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문이 주는 교훈이 중요합니다.
①하나님을 갈급해 하자!
1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인간은 늘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더 행복해지기를 갈망합니다. 사람은 더 많이 소유하기를 갈망합니다. 더 아름다워지기를 갈망합니다. 더 평안해지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아파트로 옮겨갈 것을 갈망합니다. 외로움으로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기를 갈망합니다. 사람은 늘 이렇게 오늘 보다 더 좋아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목마름의 갈망은 영혼의 갈망이어야 합니다. 본문의 저자는 지금 어떤 심정인가 하면 시냇가를 찾아 헤매는 사슴의 심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슴은 목이 마르면 참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사슴은 늘 시냇물 언저리에서 서식하며 살아갑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갈급할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함의 심정을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급함도 아무나 가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도 영적으로 성숙해진 사람이나 느끼는 깊은 목마름입니다. 이 목마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입니다. /아멘!/
②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가?’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인은 낙심이 금물입니다. 낙심하게 되면 마음에 불안이 찾아오고 의심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가장 큰 약점은 불안해하는 일이고 낙심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마음에 의심이 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시인은 왜 그리 불안하다고 합니까? 2절에서 ‘내가 어느 때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고’하고 탄식합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먼 객지에서 성전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영적인 사람의 불안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 기도하지 못할 때, 바로 서지 못할 때, 전도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도 이런 불안의 마음이 찾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죄스러운 마음도, 불안한 마음도 사라졌다면 그 양심은 죄로 무디진 마음입니다. /할/
오늘 시인의 마음을 보세요! 3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하고 눈물을 짓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소명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값은 신성한 의무와 뜻과 소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잊어버리면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또 자기 양심이 자신을 조롱합니다. 마음속으로 ‘너도 참 한심하다,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하고 자신이 자신에게 조롱합니다. 사람은 그때 가장 초라하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비참해 집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시인은 이방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조롱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뼈아픈 조롱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살 때 그런 조롱을 받고 살았습니다. ‘네 하나님께 부르던 노래를 불러보라, 그러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조롱했습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③이 때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5절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할/ 오늘 시인이 낙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시인은 '나'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데 너무 바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62:1-2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할/
⑴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4절에서 이 시인은 미래 때문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자꾸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울해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이럴 때 빨리 우리가 신앙의 눈을 떠야 합니다.
⑵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자! /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시인은 결론을 내립니다. 한마디로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매사 결론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 중심,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하나님은 만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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