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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가 없노라! (엡 3:7-9)

by 【고동엽】 2022. 3. 16.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가 없노라! (엡 3:7-9)

 

  바울은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 이렇게 힘주어 고백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가 없노라’ /할/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①삶 속에서 아주 조그만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는 일이 은혜 속에 사는 비결입니다.
  최상의 은혜는 나의 생활 속에서 아주 조그만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고,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는 축복의 조건을 찾아내서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 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최상의 은혜입니다. /할/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나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측량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모든 것들이 감사할 뿐입니다. 큰 것은 큰 것대로 감사하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감사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약함조차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는 감사의 원리를 알고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최상의 은혜는 이렇게 아주 보잘것없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지혜를 갖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것에만 눈길이 갑니다. 작은 것에는 마음이 가지도 않습니다.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남의 집 아들 일등 하는 것만 눈에 보이고 내 아들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사실 일등 하는 것보다 건강하게 자라 주는 것이 몇 배나 더 좋은 일인데도 그것이 눈에 안 보입니다.
  남들이 큰돈을 벌어들인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그동안 평안하게 살아온 것이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사실 가정의 평안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와 축복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없으면 큰 것이 주어져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큰 것에도 소중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유산이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고는 늘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애굽의 막강한 힘이 부러웠습니다. 애굽의 찬란한 문화도 부러웠고 심지어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눈에 보이는 신들도 신비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두 애굽에 두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실로암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답답하게 흐르는 실로암의 물줄기가 시원치가 않았습니다. 자꾸만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중에 애굽의 문물을 수입합니다. 나중에는 애굽의 우상도 수입을 합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의 정신 속에, 의식 속에, 생활 속에,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최상의 은혜를 발견해 내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애굽 적인 것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애굽의 물결에 빠져서 나라가 망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작은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큰 것에도 고마워할 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작은 죽음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에도 작은 죽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게으름, 허송 세월, 과식, 폭주, 환락, 이런 것들이 작은 죽음입니다. 불평, 불만, 원망, 시기, 남의 탓, 이런 것들이 작은 죽음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을 좀먹고 갉아먹습니다.
  고목이 넘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그 고목이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를 맞고, 눈을 맞고, 개미가 알을 슬고, 얼었다 녹았다 하는 이 작은 죽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느 날 이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같은 작은 것들을 유념해야 합니다. 작은 은혜, 작은 축복을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는 생활을 하면 생활 마디마디가 감사할 뿐입니다.

 

  ②우리는 무엇보다도 내가 주님을 알게 된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안에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응답이 있고, 회복이 있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못 믿는 사람이 얼마입니까? 믿었다가도 도중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얼마입니까? 그런데도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모든 사람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주신 것을 측량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그냥 넘겨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과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것은 그의 나이 80세 때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80세에 부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섭리하셨습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버려진 일, 갈대 상자 속에 넣어져 떠내려가는 것을 바로의 공주의 손으로 건져내게 하신 일, 궁중에서 교육받고 자라는 일, 살인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고되게 훈련을 받는 일 등 이것이 우연한 일들입니까? 하나님은 그를 80세에 부르시기 위해서 그의 삶 마디마디 속에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태어나서 오늘 이 시간까지는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병들었던 일, 암담했던 일 등, 그러나 그런 일들이 있었으므로 오늘의 여러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님을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동족을 괴롭혔던 자신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거기다 사도가 되었으니 이것이 보통의 일입니까?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은혜입니다.

 

  ③내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것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위해서 일을 해주느라고 열심입니다. 매일같이 학교로 출근을 합니다. 언제 보아도 바쁩니다. 그런데 그에게 구역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바빠서 못하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런 분은 ‘내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바울의 그 기쁨이나 그 심정을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재미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있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도 드리고, 정신도 드리고,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활 속에 주어지는 아주 조그만 은혜들도 커다란 은혜로 알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생활 속에는 비로소 감사함이 스며들게 되고, 기쁨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고, 보다 더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축복입니다. 이 은혜 속에 사는 참 행복한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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