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를 배우자! (행 2:46-47)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의 종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을 오늘 본문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초대교회의 특징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무엇보다도 모이는 데 힘을 썼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모여야 뭘 해도 됩니다.
⑵순전한 마음으로 친교 하는 교회입니다. 모여서 교류하고, 대화하고, 서로 사귐을 이루었습니다. 서로 모여서 애찬을 나누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함께 모여, 서로 나누고, 위로하며, 서로가 보완해 가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⑶모든 이에게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빛으로 살았고 소금으로 살았습니다. 본을 보이고 덕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세상으로부터 평판이 좋아졌고 교회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았습니다.
⑷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성장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의식도 성장하고, 실생활도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그 말씀 속에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새로워져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꾸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십니다. 앞으로 나가게 만드시고, 확장하게 만드시고, 넓혀 가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조용한 사람을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드시고, 우유부단한 사람을 결단력이 있게 만드시고, 앉아 있는 사람을 일어나 뛰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곳은 발전하게 되어 있고, 움직이게 되어 있고, 번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할/아멘!/
그런데 이렇게 발전하는 신앙생활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마음먹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1.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선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구제 사업을 잘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도덕적인 삶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데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신자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가리켜서 성도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고 간구하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나의 구주십니다.’하고 고백하는 기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그 언약을 믿고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생명이고 능력이고 축복이고 응답입니다. /아멘!/
2. 섬기고, 나누는 생활입니다.
교회가 산 속에 있지 않고 도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점에서 아주 두드러진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모두와 이웃하고, 모두와 함께 하고, 서로 나누고, 서로가 보완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없는 사람은 열심히, 있는 사람은 나눔으로 협력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기독교가 해낸 일이 많습니다. 맨 먼저 한일이 문맹을 퇴치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게 하여 문맹을 퇴치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한 일이 축첩 반대 운동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축첩에 대해서 말을 못하고 그런 대로 수용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면 그 사람을 진짜 남자로 인정해주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다른 여인을 데리고 들어와도 우리의 여인들은 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여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부터 그것이 죄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서서히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고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이 땅에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가장 수지맞은 사람은 여성들인 셈입니다.
기독교가 금주 운동도 주도했습니다. 또한 당시 자선 운동은 기독교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고아원, 모자원, 양로원 등은 기독교에서만 하는 일처럼 인식된 사회 운동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 흐름을 주도했던 기독교의 사회봉사입니다.
그리고 신학문의 도입은 기독교의 공로 중의 공로입니다. 주일 학교 운동, 미션 스쿨, 기독교 대학의 설립, 오산 학교, 경신 학교, 숭실 학교, 정신 학교 등을 통한 인재 배출, 독립지사의 배출 등은 실로 기독교의 찬란한 사회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낙준 같은 이는 기독교에 들어가야 이 시대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여 스스로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과거 우리 기독교가 이 사회에 미친 업적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것을 다 잃었습니다. 기상도 상실했고, 사업도 다 사회에 빼앗겼고, 이제는 관심조차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회의 발전보다 교회의 발전이 정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발전해 가는 만큼 교회가 뒤따라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3. 배우는 생활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날마다 모이고 가르치고 읽고 그랬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배움으로 수정되고, 바로 잡히고,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리스도인은 시대를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너의 진보를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배워야 합니다. 세상도 배워야 합니다. 그 시대를 알고, 풍조를 알고, 그 시대의 시류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 시대의 유행도 알아야 합니다. 유행을 알려면 어설프게 다 지난 유행의 뒤나 좇아가지를 말고 하려면 유행을 주도해야 합니다.
경제도 알아야 합니다. 몰라서 속고 떼이고 실패만 하지 말고 정확히 알고 살아야 실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법도 배워야 합니다. 열심히 일을 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보다 효과적인 봉사의 정신과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4. 복음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 예수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은 만난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만난 예수를 와서 보라고 전해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이것이 증거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삶입니다. 우리들이 생동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나의 신앙을 증거하고 고백하고 간증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전하는 생활은 참으로 복된 생활입니다. 간증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간증의 삶은 지금까지 나의 생활 속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간직했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전하는 생활, 그것이 간증입니다.
나의 지난 과거의 삶을 정리해 보면 마디마디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들을 발견하고 모았다가 효과 있게 전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은혜로운 간증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더 발전하면 전도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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