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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세 가지의 당부! (빌 3:17-21)

by 【고동엽】 2022. 3. 15.

바울의 세 가지의 당부! (빌 3:17-2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고, 고전11:1절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풍속으로 보면 이 같은 말은 좀 교만한 말같이도 하고 좀 지나친 과신 같기도 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풍습으로는 나를 본받으라는 식의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바울의 심정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지금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무질서가 있었고 신앙적으로는 이단들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때였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풍조가 교회까지 파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지침을 내려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말이 ‘나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들을 보라’고 했는데, 여기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이 혼탁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않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19절에서 세 가지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1.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이 말의 뜻은 지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사는 목적이 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배를 위해서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도 다음이고, 하나님도 다음이고, 오직 관심은 먹고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그 당시의 세상 풍조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 배가 문제입니다. 배를 채우는 문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급의 문제가 이 배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순전히 배를 채우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만 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서 얻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0만 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모릅니다. 배가 고프게 되면 나머지 문제는 모두 다음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야, 6.25때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그랬더니 손자가 하는 말이 ‘배가 고프면 빵을 먹지요’ ‘야 이놈아, 밥도 없는데 빵이 어디 있어 먹니’ 손자가 또 말을 합니다. ‘빵이 없으면 라면을 먹으면 되지 않아요.’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보리밥 한 그릇 없는 판국인데 라면은 무슨 라면이냐’하고 큰 소리를 치십니다. 그랬더니 어린 손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우리 할아버지는 참 한심해, 라면이 없으면 우유를 마시면 되잖아요.’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어찌 배고픔을 알겠습니까?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입니다. 여러분, 일주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이것이 보통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 신경이 먹는 문제에 쏠리게 됩니다. 보이는 것, 생각나는 것이 모두 먹는 문제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간 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3일을 굶고 난 아이가 참다못해 말합니다. ‘아빠, 나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밥 될래’

  그래서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배가 우상입니다. 배가 신입니다. 여기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별짓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사람이 배를 채우게 되면 관심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배가 부른 다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 같지만 그 다음에는 더 좋은 먹을 것을 찾아 나섭니다. 그때부터는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질이 좋은 것으로 배를 채우게 됩니다. 더 좋은 맛을 찾아 나서게 되고 비싸지만, 더 멀지만, 마다하지 않고 찾아갑니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먹는 일로 소일했습니다.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즐기며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더 심해져서 실토록 먹고 약을 먹고 토해 내고 또 싫도록 먹고 마시고 약을 먹고는 토해냅니다. 그래서 하수구에 흐르는 물이 파란색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로마의 멸망은 저 하수구의 파란 색깔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그것이 곧 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배의 신앙입니다. 하나님보다 배를 더 중시하고, 신앙보다 먹는 문제에 더 우선하고, 예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그것은 모두 배로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사람은 배만 부르다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또 다른 양식 즉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물로써 당부한 첫 번째 당부가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2.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죄를 짓는 일이 장쾌한 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큰 죄를 지을수록 남자답게 인식되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새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세태를 보십시오. 오늘날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전과자가 회개하고 목사가 되어 간증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면 자신의 지나온 어두움의 생활, 죄스러운 과거의 생활을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참회하는 마음으로 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음을 겸허하게 간증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간증을 하는 것을 보면 부끄러워하고 죄스러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지나온 어두움의 생활이 무슨 영광스러운 경험이나 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삼아서 더 보태고 과장해서 웃기고 쌍소리하고 그럽니다. 그것이 뭐 자랑할 일입니까?

  이것이 다름 아닌 ‘저희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할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이 있었는데  ‘정신적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만 깨끗하면 되지 육신은 마구 뒹굴려도 죄가 안 된다고 우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습게 살았습니다.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은 통 속에서 쪼그리고 살았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평안하면 생활은 어떻게 해도 괜찮다고 하며 무질서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개같이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개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견유학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돈되지 않은 삶은 무질서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질서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영광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경고하게 된 것이 ‘너희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지 말라’ 이것이 눈물로써 당부한 두 번째 부탁입니다. /할/

 

3. ‘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신앙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믿/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의 정신이나 뜻, 그리고 관심이 이 땅 위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영적인 생활은 소멸되고 맙니다. 뜻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완전히 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어디에다 뜻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바울은 지금 옥중에 앉아서 밖에 있는 성도들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과 믿음의 깊은 결심과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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