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살 것인가? (롬 14:7-9)
만찬석상이나 회식하는 자리에서 서로 잔을 부딪히면서 외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위하여!'라는 구호입니다. 이 말속에는 한 개인을 위한 말일 수도 있고 집단이나 크게는 한 나라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을 위하든 돈을 위하든 권세를 위하든 쾌락을 위하든 아니면 주님을 위하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게 마련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가 항상 분명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믿는 사람들일수록 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더 뚜렷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본문에 '주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거듭 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를 위하여'입니다. 여기 이 '위하여'라는 말은 의식의 변화를 말해주는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이를테면 삶의 목적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여러 가지로 변해야 합니다.
①삶의 목적이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위하여'에서 '주를 위하여'로 목적이 바꿔져야 합니다. 전에는 세상을 위하여 살았고, 자신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목적으로 해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삶의 목적이 예수 중심으로 바꿔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궤도를 수정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위하여' 신앙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할/
②나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게 되면 내가 목적이 됩니다. 매사에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는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이 강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목적이 바뀌게 되면 나를 초월하는 의지가 생기고,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를테면 생각과 마음과 의식이 밖으로 향해 열리게 됩니다. 넓은 마음, 성숙한 의식을 갖게 됩니다. 주님이 그런 힘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믿/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전장으로 달려가 부상을 당한 군인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나라 병사만 치료해 준 것이 아니고 국적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적국의 병사까지도 부상을 당한 군인들은 모두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랬다고 나중에 첩자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때 한 말은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애국심만 가지고 '내 나라 군인만을 치료해 주고 다른 나라 병사라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을 버릴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예수를 만난 후에 변화된 가슴에서 나오는 열린 정신 때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하르나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이웃을 내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이웃 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삶의 목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멘!/
③세상을 향해서도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나 자신의 값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매겨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값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만큼 나의 값이 매겨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 좀 하자고 하면 큰 영광으로 알고 용기를 갖고 값이 떨어지기 전에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는 '누군가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일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어떤 주부는 '우리 여자들은 평생 가족들의 뒷바라지만 하다 죽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신 이유는 허무주의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이 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생깁니다. 가정이 있으니까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고, 악착같이 땀을 흘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가정이 없으면 사람이 부지런히 일해야 할 이유도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생활 속에 무엇이 찾아오겠습니까? 허무주의밖에 찾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화장은 왜? 누구를 위해서 합니까? 사람이 집에서 혼자 있을 때는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곱게 옷을 해 입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결국 변화 받은 사람은 이 같은 의식이 성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사회를 향해서 열려진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열려진 삶의 모습입니다. /아멘!/
④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살든지 죽든지' 이 말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만난 사람은 죽음까지도 '죽어지는' 죽음이 아니고 '죽는' 죽음을 죽는다는 말입니다.
'죽어지는' 즉 자살해서 죽는 죽음은 값이 없는 죽음이라면, '죽는 죽음'은 변화된 사람이 목적을 '위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죽는 죽음'을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위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8절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살고 죽는 문제는 나에게서 떠나 주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미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 위탁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내 운명이 좋게 전개되든 나쁘게 전개되든 그것은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철저한 예배 생활, 기도생활, 하나님 앞에 경건, 이웃 앞에 경건, 내 자신과의 경건을 이뤄가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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