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명하시는 주님의 권세! (막 7:31-37)
본문은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는 데가볼리에서 귀먹고 말 못하는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34절에 예수님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양 귀와 혀에 넣고는 하늘을 향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손에 침을 뱉어서 환부에 댄 것은 당시 헬라인이나 유대인들 사이에서 치료 행위로 사용한 민간 요법에 해당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탄식하시며 기도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귀머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시려는 아픈 마음과 고쳐 주시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를 '에바다' 하시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듣게 되었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에바다'라는 말은 '열려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막힌 귀야 열려라, 굳어 있는 혀야 풀려라.' 그런 뜻입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보자!
①듣지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불구자는 모두 불쌍한 사람이지만 그 중에서도 듣지 못하는 불구자는 더욱 불쌍한 사람입니다. 좋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고, 좋은 음악이나, 발달된 통신이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도 이 사람처럼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귀가 막혀서 위로부터 들려 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속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묵상을 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깊이 묻혀 있어도 그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이 고작 육신의 소리만 듣고, 생리적인 소리만 듣고, 욕망의 소리만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니면 매일 같이 듣는다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물가 이야기만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뚝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영음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의 답답함입니다.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바다'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소리도 듣고, 이웃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귀가 어두워서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독재자가 됩니다.
②말을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세상에서 답답한 사람은 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바다'하신 것입니다. 즉, 혀야, 풀어져서 할 말을 하고, 전할 말은 전하고, 꾸짖을 말은 꾸짖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들이 많습니다. 의와 진실을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모두 벙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해야 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입을 열어야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결백이 아닙니다. 그것이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탄식하시면서 혀에 손을 넣어 '에바다' 하신 것입니다. '혀야 풀어져서 할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혀는 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할 말을 해야 하고, 전해야 할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③더 심각한 것은 열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벙어리가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비극은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듣지를 못하고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를 흉보는 줄 알고 마음을 닫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열리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면 불행해집니다. 이웃끼리 교류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도 교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비극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 가운데는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를 도우려고도 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간섭하려고도 하지 않고, 간섭을 받기도 싫어합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구제 불능입니다.
그렇습니다. 귀가 열려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이 열려서 진리의 말을, 복음의 말을 선포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열린 가슴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바다'하신 것입니다.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⑴하늘을 우러러 보신 주님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막6:41).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보상과 상급과 능력이 임합니다. 약1: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⑵탄식하신 주님입니다. 여기 '탄식'은 신음과 같은 소리로서 예수께서 사람의 처지를 마음 속 깊이 동정하셨음을 보여준 것(칼빈)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환자의 고통에 주님께서 깊이 헤아리시는 안타까움의 탄식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따르는 무리들의 허기진 배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마음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오게 했습니다(막8:2). ▶죽은 아들 때문에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보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기적을 일으켰습니다(눅7:13,14).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나사로에게 생명의 부활의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요11:44).
⑶'에바다' 하신 주님의 명령은 ▶창조주 자신이 직접 명하시는 명령이요(막9:25), ▶자연만물도 순종하는 명령이요(마8:26-27), ▶치료되게 하는 명령입니다.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을 때,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는 결과가 있는 명령입니다(마8:3). 죽은 회당장의 딸에게, '달리다굼' 했을 때,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는' 결과가 있는 명령입니다(막5:41-42).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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