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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김명혁목사 명설교(55편)

십자가 신앙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히3:1

by 【고동엽】 2022. 3. 13.

십자가 신앙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히3:1, 벧후3:13  

 

히3:1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바라보는 대로.. 됩니다.

 

‘바라봄의 법칙’(바라보는 대로 된다, 바라고 소망하는 대로 현실에 이루어진다)은

세속적인 것을 바라볼 때.. 그건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설교를 살펴보는 이유는

‘십자가 신앙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그것을 단 한 마디로 짧게 대답하면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는 것, 또는 묵상하는 것이다.’입니다.

 

십자가 신앙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대속의 십자가,

-자기 부인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

-희생의 십자가,

-회개의 십자가 등,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는데

 

그 십자가 신앙의 여러 측면을,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깊이 바라보고 묵상하는데서

바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힘이, 내게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이 쓴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 마을 뒷산의 큰 바위가, 어떤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장차 이 마을에서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이다’며

위대한 위인이 등장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주인공 어네스트 소년도, 큰 바위를 쳐다보면서

언젠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그 마을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소년은 날마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매일 바라보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그러한 내용의 소설이었습니다.

 

인간은, 바라보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뭘 바라보는 그대로.. 자기 자신이 조각되어지고,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어집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까?

자기 자신만 날마다 골똘히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을 계속 바라보면.. 결국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주부들 중에 TV 연속극을 많이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뭐 재미있으니까 보겠지요.

 

그러나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그걸 너무 오래 하루에 한 두 시간씩,

일 년 365일 동안 쉬지 않고, 한 5년 10년 보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거기 TV 연속극에 나오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다 자기도 모르게 은연중에 배우게 되는 것이죠.

 

<탐욕적인 사람>은, 늘 물질에 벌벌 떠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일, 매 시간.. 그는 돈만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권력만을 늘 바라보는 사람은, 권력을 갖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이상한 <야망의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3장 1절에, 십자가 신앙을 가는 성도들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즉 쳐다보는 대상을.. TV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히브리서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매일 일상의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지 않는 삶을 살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설교를 듣기가, 대단히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에 이러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십자가 신앙의 길을 가야 되는데

‘십자가 신앙의 길을 가는 첫 단추’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평소에 자기 일상의 삶에 있어서

늘 바라보는 습관과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생각하라’는 말씀 말고도요,

조금 더 연장해서 보자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벧후3:13절. ‘우리는 그의 약속 하신 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라.’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확장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신앙.. 이것이 바로 ‘참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변질된 복음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한 때 ‘바라봄의 법칙’이 성행한 적이 있었는데,

‘세상 것’을 바라보고, 그 바라보고 소원한 대로 된다는..

그런 변질된 복음이 유행했던 적이, 한 때 있었습니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계4: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계21:1

 

그러니까 신앙의 선배들인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하늘에 열린 문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오늘 무엇을 바라보는가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요?

라는 것을 깊이 생각을 해 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앙

 

▶1. 자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할 적에요.

첫 번째로 <날 때부터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님, 그 점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린 아기로 태어나신 그 시점부터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시작”이었다.. 이렇게도 볼 수 있겠지요.

 

예수님이 어린 아기로 태어나실 것은, 이사야서에 벌써 예언되었습니다. 사7: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을 적에

-천사의 모습을 하고 오시지 않으셨고,

-강력한 주권자나 또는 힘센 장군의 모습을 하고 오시지 않으셨고

정말 연한 순bud처럼, 연한 가지처럼

그렇게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종, 기독교 사역은, 어린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연한 순과 같은

그러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이 참된 사역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졌습니다.

정치가들이 뭐 그렇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종교인들의 모습마저, 두렵고/ 무섭고/ 사나운 존재로

점점 변해가는 모습이 일면 있습니다.

 

정말 판사나 검사가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런 거야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종교인들마저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판단하고 심판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본래의 모습이, 어린 아기와 같은 모습, 연한 순과 같은 모습,

온유하고 겸손한 자의 모습.. 그것이 교회가 가져야 될,

또는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가져야 될, 원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님,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볼 적에

그런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에 교회는 너무 힘이 세졌고 너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세속화가 되었다’ 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겠지요.

 

교회가 힘을 휘두르는데, 세속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 교인들 가운데 있는,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이단은 막아야 되는데, 이단을 막는다고 하면서,

갖가지 불법적인 일들을 교회에서 자행한다면..

그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아니고,

그게 십자가의 길이 아닐 적에는.. 그것은 다 결국은 실패하는 길입니다.

 

세상은 자꾸 ‘네가 강해져라. 네가 힘을 키워라. 네가 물질의 힘, 권력의 힘,

또는 사람 숫자의 힘을 갖고 일을 하라’고

이렇게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키지만

 

예수님이 일하신 방식은 정말, 온유하고 겸손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아기로 오셔서

그 아기와 같은 성품으로..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감당하신 것이지..

 

예수님이 뭐 장군과 같이 권력을 휘두르시거나

뭐 사람들을 동원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무슨 큰일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평생 정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위하여..

본래는 ‘부유하신 자였지만 가난하게 되셔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정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의 힘으로 뭘 하려고 합니다.

<돈의 힘으로 하는 일>은.. 차라리 아예 시작부터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리를 가다보면 ‘짓다가 만 건물’을 발견 합니다.

왜 짓다가 말았는가 하면, 짓다보니까 건물이 약간 기울어서

계속 지으면 결국에는 무너질 것이니까.. 중간에 포기해 버리는 것이죠.

 

짓다가 말았으면, 지은 것만큼 이익이 아니겠느냐?

그것이 아니죠. 오히려 더 흉물이 되어버리고, 자연 훼손이 되고,

그걸 또 다시 해체하는데, 비용이 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라리 돈으로는.. 일을 아예 시작 하지 않는 것이 백번 낫다는 것입니다.

돈의 힘으로 일을 하면.. 그것은 흉물 같은 폐가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전혀 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가리며,

그걸 해체하는데 비용이 또 들어가는.. 그러한 이상한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너무 부유해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그러한 길로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셔서, 일평생 가난한자의 모습으로 사시면서

가난한자의 친구가 되셔서, 가난한 사람들을 한명씩 두 명씩

그 사랑의 힘, 인격의 힘으로..

그들을 전도하시고,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는 너무 세속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서

‘돈 없으면.. 전혀 주의 일을 못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돈을 많이 모으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모아져서 큰일을 하기보다는

크게 일을 그르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면서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를 살피고 있는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란

 

첫째로, 어린아이와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또 가난하게 사역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2. 자,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에서 죄인을 용서하신 긍휼과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칼을 뽑아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못 박는 로마 군병들에게

또 자기를 저주하는 그 유대인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칼을 뽑는 대신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시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라고 하늘의 아버지께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간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본받는다’ 하는 것은

죄인을, 원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그런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본받는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 그 위에서도, 죽어가는 한 강도에게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예수님은 그를 전도하시고, 그에게 초청해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정말 인간인지라, 원수를 증오하고 같이 대적하고 싸우고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자꾸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본받게 되고,

원수를 대적하지 아니하고, 포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게 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각 교회 안에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기운이

너무 많이 팽배해 있습니다.

또 거기에 진리, 성경말씀, 이런 것 까지 안 끌어들였으면 좋겠는데,

자기가 그렇게 분쟁하면서, 또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성경말씀과 진리를 인용해서까지

 

사랑과 용서와 긍휼의 그 진리는 무시해버리고

너무 우리의 교회 안에 분노와, 증오와, 용서하지 못하는 그러한 마음들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과거에서 지금까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유럽 교회에 성 프란시스가 있다면 한국 교회에는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손양원 목사님이 긍휼, 용서, 사랑 그래서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어떤 사람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책 제목을 붙였던 것처럼

정말 원자탄 같은 그런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 같은 그 원수를 향한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어머니에게서부터 뱃속에서 타고 그렇게 나왔을까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깊이 묵상 할 적에

거기에서 사랑이 나오고, 원수를 향한 긍휼이 나오고,

원수를 향한 화해와 포용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을 깊이 생각할 적에

정말 내가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신 사람이고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피를 내가 먹고 마신 사람이라면

내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으며,

내가 포용하거나 품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난다 하더라도..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며,

사람인지라 뭐 순간적으로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5초, 10초 지나면 금방 또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계속 이빨을 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게 할 수는 없죠.

예수님의 인품과 성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본받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계속 미워하며, 증오 가운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부족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도,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그러한 신앙은

배제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필연적 결과로,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분쟁과 분란에 휩싸이는 상태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죠.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장성한 자녀와 그 연로한 부모 사이에.

또 형제 간에.. 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유산 상속문제로

막 서로 원수로 되는 그런 형제지간이 많고,

그게 발전해서 조카-삼촌-이모-사촌간의 분쟁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법정 소송까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복음으로 인하여, 가족 간에 분쟁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거기에 더 보태서 ‘재산 분배로 인하여, 가족 간에 분쟁’을 더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성도는,

그 십자가에서 원수를 포용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

그 사랑, 그 긍휼을 본받아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사람은

<십자가 수난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합니다.

 

과거 1970~ 1990년대에만 해도 부활절이 되면 어떤 설교를 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그것을 이렇게 5~7가지 이성적 논거를 들어서

부처나 다른 교주들은 다 죽었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라는

그 역사적 사실을 주로 많이 설교를 했었는데,

지금 이제 우리도 기독교가 많이 발전을 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부활절의 참 의미는 뭐냐?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오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신앙을 재점검 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매 주일이, 일 년에 주일이 52번 있지요.

그 52번 주일이 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인 것입니다.

나아가 1년에 52일만 부활절인 것뿐만 아니라, 1년 365일이 부활절인 것입니다.

(그걸 매일 축하하지 않는 대신에, 딱 하루만 정해서, 부활절로 경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부활신앙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날마다 나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것이다.’

라는 참된 부활신앙을.. 우리가 갖게 된 것이.. 불과 15년이라고 봅니다.

 

그 전 까지는, 그냥 ‘부활 신앙’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는,

현실에 나와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

또는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또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생기와 기쁨이 충만한 사람들로,

또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는 해결되었는데,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줄 알았는데.. 보니까 예수님의 형체는 부활 후에 변화되었지만,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못 알아 봤잖아요. 뭐 무덤지기인줄 알았잖아요.

예수님의 형체가 부활 후에 변화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인줄 알았다’는 것이에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풀어주시는 말씀, 그것을 듣고는

우리가 평소에 듣던 예수님인 줄 그들이 알아보고

눈이 밝아지고 예수님인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면 부활체가 되어서, 지금과 같은 몸의 형체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떠한 부활 형체를 갖게 되겠지요.)

 

어쨌거나 지금 말씀드리는 요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 놀라운 사명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세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인데..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 볼 적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베드로 사도, 사도 바울, 모조리 다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가운데서

흐지부지하게, 어리바리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와 함께 동행 하며 살 때에

그 사람은 생명이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나이 90세가 되어서 밧모 섬에 유배되었던 사도요한도 (계시록 1장에 나오지요)

그가 보니까, 밧모 섬에 유배 신세가 아니라

자기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져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도 큰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발 앞에 자기가 엎드려져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하고

그는 요한계시록을 쓰고

90세가 된 연로한 나이 가운데서도, 귀한 사명을 감당했던 것을 봅니다.

(나중에 그는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갔다는, 그런 말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 3장 1절,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12장 2절 ‘예수를 바라보자’ 라는 말씀에 의거해서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자..

라는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생애/ 십자가/ 부활.. 그것이 다 구약에 예언되어 있지만

그래도 가장 핵심적으로 예언된 것은,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위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생애를 사시고,

또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의 부활이 자연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에 기준과 표준을

'예수님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고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광의적으로 확대하면

예수님의 탄생/생애/십자가/부활/승천까지.. 우리가 바라보고, 깊이 묵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바라보면.. 예수님의 삶을, 예수님의 생애를,

예수님의 인격을,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가 점점 본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돈, 돈, 하고 출세, 명예.. 하지만

나중에 천국에 갈 때는.. "크리스천으로" 갑니다. 아무 것도 못 갖고 갑니다.

장관도 크리스천으로, 총장도 크리스천으로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지..

뭐 자기 명함이나 이력서를 들고서, 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평생 추구한

예수님을 본 받은 인격, 십자가를 지는 삶..

그런 것은, 천국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중요한 신앙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본받은 인격,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온 가정과 공동체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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