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 (잠 14:26-27/시 115:13)
▶결혼한 지 10년이 가까운 어느 젊은 부부가 가끔 주일이 되면 말다툼을 합니다. 남편은 일주일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운동장으로 놀러가기를 원했고, 부인은 주일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닫고 신앙을 지키자는 일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남편의 주장도 옳았고, 부인의 주장도 옮습니다. 남편으로써는 피곤을 풀기 위해 즐기고 싶었고,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꼭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이 포함된 황금연휴에 남편은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부부 다섯 쌍이 바닷가로 가기로 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합니다. 부인은 어지간히 설득을 시켰고, 만류를 해 봤으나 남편의 완강한 실력행사에 하는 수 없이 남편을 따라 바닷가로 갔습니다.
우거진 숲, 푸른 잔디밭에 다섯 쌍의 부부가 짐을 풀고, 가지고 간 고기를 굽고, 밥을 지어 맛있게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뒤따르기 마련인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이제 순서에 따라 고스톱 판이 벌어집니다. 어쩐지 그날따라 남편의 끗발이 신통치 않습니다. 은근히 화가 난 남편은 계속 술을 마셔 댑니다. 밑천이 다 떨어진 남편이 이번 한번만 외상으로 하자고 우기고, 현금 아니면 받아줄 수 없다는 친구와 대판 싸움판이 벌어집니다.
의리가 있느니 없느니 멱살잡이까지 하다가 화가 난 남편이 부인을 부릅니다. 우리 먼저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한 몸으로 핸들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얼마 못 가 컨테이너 트럭과 부딪칩니다. 부인은 현장에서 죽고, 남편은 살았으나 의식이 없습니다.
남편이 며칠만에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부인의 장례식은 이미 끝난 뒤였습니다. 이 남편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통곡하면서 하는 말이 "당신 말대로 교회에 갔더라면 이런 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여보! 내가 잘못했소!" 통곡하며 소리쳐 울부짖었지만 이미 사랑하는 아내는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의 종들은 오늘도 외칩니다. "여러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십시오!" 가르치면 케케묵은 잠꼬대 같은 소리 그만 하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별세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똑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사는 세계가 다르고 사는 맛이 다룹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보통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신령한 세계를 맛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남들이 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있다고 믿고 보이지 않은 천국을 내 집처럼 여기고 기다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천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고 보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무덤으로 끝난다고 슬퍼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가는 코스가 다르고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이 다룹니다.
▶사변 후에 이북에서 월남한 자매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포목상을 해서 돈을 많이 모았고, 언니는 그런 대로 조그마한 가게를 하며 버는 대로 주님 사업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며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런 언니가 건강을 잃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동생은 언니를 부둥켜안고 탄식의 말을 합니다.
"일사 후퇴 때 사선을 넘어 살아보려고 애쓴 언니가 예수 믿고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죽으니 예수 믿고 잘 산 것이 무엇이며, 예수 믿고 덕본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때 언니는 조용하게 동생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동생! 울지 말고 가까이 와봐! 사람이 한번 났다가 죽는 것은 정한 것인데 반듯이 그 후에 심판이 있어! 내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라, 나는 천국으로 간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어" 이 말을 남기고 평화스럽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 때 동생은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날마다 싸우면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여겨졌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믿음을 지키며 살다간 언니가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언니의 손을 잡고 "언니! 편안히 가세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그리고 나도 언니의 뒤를 따라갈게요!"하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죽을 때도 아무 부러운 것이 없이 '나는 천국으로 가니 기쁘다'는 고백을 할 수 있으므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믿/
우리는 별세의 사람들입니다. 별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며 섬기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할/ ◀제목소개!▶
여러분! 인생의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몰론 이런 것들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근본적인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⑴건강이 행복입니다.
⑵즐겁게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정신 없이 즐겁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목회가 즐겁습니다.' 이런 목회자는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누가 하고 싶어서 합니까? 십자가니까? 사명이니까? 하나님께서 명하시니까?' 한다는 목회자는 불행한 목회자입니다. 여러분들도 주의 일을 기쁘게 즐겁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세계의 재벌 '카네기' 회사는 우리 정부보다 큰 규모랍니다. 그런 카네기 회사의 한 공장에 공장장이 공석이 생기자 후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그 공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는 인부가 눈에 띄었습니다. 얼마나 성실한 지 카네기는 그를 공장장으로 임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우리 공장에 공장장이 되어 달라'고 하자, 그는 당황하며 말하기를 '회장님! 나는 평생 이 곳에서 땜장이 일만 해 왔습니다. 땜질이라면 나는 누구보다 잘 합니다. 그러나 공장장이 되어 이 공장을 경영하라고 하면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겨 주십시오. 나는 내게 익숙한 일만 즐겁게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카네기는 '우리 회사가 잘 되는 것은 이렇게 명예도 버리고 욕심을 내지 않고 숨어서 열심히 일하는 이런 사람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정말 기쁩니다. 당신은 평생 이 곳에서 이 일을 잘 해 주세요, 대신에 당신 월급은 대통령 월급과 같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미국 대통령 봉급만큼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⑶웃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웃을 일이 있을 때 웃는 것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웃을 일이 없을 때에도 항상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의 조건입니다. '굿 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웃을 수 있다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내가 웃을 때 온 세상이 나와 함께 웃는다.'고 했습니다.
⑷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사랑을 주는 사람은 더욱 행복합니다. 솔로몬은 잠15:17절에서 말하기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낳다'고 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⑸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믿음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 박물관에는 그가 늘 한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할/ 꿈꾸는 남편과 기도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은 정말 행복한 가정입니다.
⑹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며 사는 자가 행복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세요! 잠14:26-2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할/ 또 시115:13절에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아멘!/
잠1: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이 참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보십시오. 이 시대의 특징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없는 세상입니다.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른을 두려워하다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세상은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거칠어졌고, 포악해졌고, 삭막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제일신조는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88서울올림픽 때 금 매달을 따 '세계에서 가장 발이 빠른 여자'라는 '그리피스 조이너'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달려갈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라는 질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달린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멋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할/
시29:1-2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128:1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기 '경배'는 '절하다. 무릎 끓다. 스스로 머리를 숙이다. 스스로 엎드리다. 스스로 예배하다'라는 의미이고,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긴다. 높이다. 믿는다.'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행위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만나실 때에는 제사를 통하여 만나십니다. 죄인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이 제사에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①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분을 드려서도 안됩니다.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생애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모두 드려야 합니다.
②제사는 물량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양(量)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질(質)이 문제됩니다. 부유한 사람은 소를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립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성입니다. 티 없는 정성입니다. 제물은 무엇보다 정성된 것이어야 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의복에서부터 마음가짐까지 다 정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③제사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산 제물을 죽여서 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제물을 드리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병든 것도 안됩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죽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바쳐진 제물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것이 제사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야 했을까요?
출5:1-3절에서 보면 모세가 바로 왕에게 선언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원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배를 위한 출애굽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출애굽의 목적을 선언합니다. 출5:1절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출애굽의 목적은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후 그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절기들이 만들어집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이 중요 절기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예배의식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 바로가 거절합니다(2절). 바로의 거절 앞에 모세는 다시 요구합니다. 3절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다시 요구합니다. 역시 이유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제사하는 백성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출3: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예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것만 바로 이루어지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소생하고 성숙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립니다. /아멘!/
▶구약에서 제사의 목적을 3가지만 기억합시다.
①알현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알현은 신하가 왕 앞에 자기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 중에 이렇게 잘 지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날이 되면 부모님을 찾아가 뵙습니다. 왜?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하시는 그 분들 앞에 제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 모습을 보여 드림으로써 그 분의 마음을 안심케 하고 그것이 그분들에게 최고의 예의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현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무엇 하는지 우리 형편이 어떤지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만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나와서 '하나님 은혜로 제가 이렇게 잘 지냅니다'하고 내 마음을 드리는 것이 제사(예배)의 목적이고 알현의 개념입니다. /할/
②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왕을 알현하려면 절대 빈손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황금을 가지고 알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죄인이 그냥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③교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막힌 담이 헐어지고 참다운 교제 속에서 감사와 감격이 있고 축복을 받고 그 은혜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예배)의 목적이요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입니다.
▶롬12;1-2절에서 ▶신약의 예배의 유익을 세 가지로 바울 사도는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①마음이 새로워집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혀를 깨물어도 안됩니다. 영적인 새로움(거듭남)이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②변화를 받습니다. 새로워진 증거입니다. 삶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환경이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나는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날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 다녔는데 왜 안 변했을까? 이유는 명백합니다. 가인처럼 예배를 드리면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혈기부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누구는 권사세우고 왜 나는 안 세워! 내가 권사 감이 안 된다고 웃기네' 그러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할/
③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뭐다. 내가 주 앞에서 해야 할 일이 뭐다. 생의 목적'을 바로 세웁니다 그리고 그 복된 길로 걸아 가게 해줍니다. 이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할/
▶먼저 제사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⑴하나님과 직통으로 대면할 때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입니다. 이때는 제사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뵈올 레야 뵈올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⑵가인과 아벨 이후에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8: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⑶모세 이후에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출25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 짓는 법을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고 이제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제사장들과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 이후 성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 주셨습니다.
⑷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행2장은 오순절 이후부터 교회에서 하나님과 예배를 통해 교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⑴경배입니다. 시138:2절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할/ 예배의 뜻을 영어 성경에는 '가치를 돌린다. 숭배한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숭배하고 존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⑵섬김입니다. 마4:10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라 하였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유일하신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란 우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만 왕의 왕으로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믿/
⑶드림입니다. 이 드림은 헌신이 요구됩니다. 히11: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예배는 먼저 기본적으로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마음의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세리처럼 회개하는 마음을 드려야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사랑하는 마음, 충성하는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마22:3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가장 승화된 감정의 발로이며 예배의 예술적 표현입니다. /할/ 엡5:19절에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할/
㈂몸을 드려야 합니다. 롬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 여기서 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육체로 할 수 있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 직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적 봉사환경이 다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재물도 드려야 합니다. 레22:20절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예배에 있어서 헌금은 은혜의 보답입니다. 또 감사와 헌신과 희생의 표시이고 충성심의 외적 상징으로서 예배 가운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 /할/
㈄순종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삼상15: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믿/할/
▶구약의 5대 제사를 알아보자!
①번제: 번제라는 말은 '위로 올라간다. 높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 드리는 '찬양과 기도와 헌금'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말씀과 축도'인데 내려오는 축복입니다.
창8:20-21절 사이에 보면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노아가 드리는 번제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번제를 드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⑴제물 위에 안수를 했습니다. 안수 행위는 죄를 고백하는 의식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이 됨을 의미합니다.
⑵번제물의 각을 뜨고 머리를 잘라야 합니다. '거룩'이란 말은 '짜르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 교만이 죽고, 옛 성품이 죽고, 옛 생활, 옛 습관이 죽어야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⑶각을 뜨고 난 후에 내장과 정갱이는 물로 씻었습니다. 정결의식입니다.
⑷번제물을 단위에 올려놓고 불살라 태웠습니다. 피만 제외하고 내장까지 모두 태워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으로 모든 것이 태워 없어졌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드렸다는 것은 이제 나에게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린다'는 말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번제는 아침과 저녁에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죽이는 훈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기 부인'은 자기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김익두목사님의 간증: '주님의 나팔소리가 아직도 멀었는데 왜 네가 살아나려고 하느냐? 더 죽어 있으라'고 하면서 자기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는 역설적인 종교입니다. 내가 죽어야 삽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임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내가 죽어 있어야 소리 없이 헌신하는 것이지 살아 있으면 '원만, 불평, 이간질, 남의 험담'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행위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②소제: 5대 제사 중 유일하게 피가 없는 제사로 번제와 화목제와 함께 드리기도 하고, 단독적으로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⑴소제에 꼭 넣어야 할 것이 있는데, '기름과 유향과 소금'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유향'은 성도의 기도와 향기로운 성도의 삶을 요구하며, '소금'은 불변의 언약이며(대하13:5) 맛을 내고, 방부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⑵소제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 잇는데, '누룩과 꿀'을 넣어서는 안 됩니다. '누룩'은 발효되는 성질이기 때문에 죄의 전염성과 부패를 상징합니다.
'꿀'을 넣지 말라고 한 것은 달콤한 쾌락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쾌락은 우선 달게 보이나 씁니다. 무절제한 쾌락은 인격의 존엄과 건강까지도 잃게 합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꿀을 제하라는 의미입니다.
⑶소제는 고운 가루를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고집덩어리가 깨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교만의 덩어리가 빻아져야 합니다. 욕심과 탐욕의 덩어리가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 부서져야 합니다. 부서지고 깨어진 뒤 가는체로 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혼잡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부드럽고 고운 가루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고운 가루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고운 가루 같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 모습과 말과 행동이 고운 가루처럼 부드러워야 합니다. 말이 거칠고 행동이 거칠어서는 하나님과 바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③화목제: 화목제는 '셀렘'이라는 말로 '샬롬'과 같은 의미로 '평화 또는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화목제는 세 가지 경우에 드렸습니다.
⑴서원이 이루어졌을 때 드렸습니다. 유명한 서원제는 한나가 사무엘을 얻었을 때 실로에 가서 드린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⑵감사할 일이 있을 때 드렸습니다. 그래서 감사제사라고도 합니다.
⑶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자원제로 드렸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성도와 성도, 성도와 이웃과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④속죄제: 속죄제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로, 의무제사입니다.
▶제사장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과,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 ▶백성의 지도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과 ▶일반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으로 구분되었습니다.
⑤속건제: 의무제사입니다. 성물에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렸고,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거나 훼손시켰을 때 드리는 제사로써 배상의 성격이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에배는 무엇인가?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11: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첫 것을 정성껏 드렸습니다. 여기 첫 것은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첫째 되고 가장 최선의 것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벨은 피 흘리는 재물을 드렸습니다. 레17: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벌써부터 아벨은 이 땅의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귀한 예배의 정신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예수 믿고 구원받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오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
▶아벨은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과 피를 순교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축복입니다. 형과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지 않고 형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면서 형의 손에 맞아서 순교자처럼 죽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치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처럼 또는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처럼 아벨은 형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 보이면서 고귀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는 하나님께 상달된 피 제사가 되었습니다. /할/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에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난 뒤에 짐승을 잡아서 죽이시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범죄한 인생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인생을 구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양이나 소의 피로 구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이 구속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이미 아담에서부터 주신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왜 안 받으셨을까요?
한마디로 믿음이 없고 의가 없고 정성이 없는 인간 행위 적인 제사를 드렸기에 그렇습니다. 또 그의 인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가인의 인격은 어떠했는가? 요한일서3:12절에 가인의 인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이 제사는 바로 그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가증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경외할 것인가? 예배하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시29:1-2)
시29:1절에서 시인은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예배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①예배를 계속해서 드려라!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돌리고 돌릴지어다' '계속해서 드리라'는 말입니다. ▶인체의 리듬은 일할 때 일하고 쉬어야 할 때 쉬고, 먹어야 할 때 먹고, 잠자야 할 때, 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간격은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1연분의 음식을 다 먹을 수는 없습니다. 사흘 휴가 기간동안 1년 밀린 잠을 다 잘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1년에 한번이나 한 달에 한번,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의 예배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의 시간입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정말 친해지면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은 되는 일이 없습니다. 되는 것 같지만 실속이 없고,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이 옵니다.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돌릴지어다" 이 표현은 예배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영광을 돌리고 돌릴지어다'를 우리말로 적용하면 '예배하고 또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한번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한을 정해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지속적입니다. 계속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같은 의식이지만 반복하는 것입니다.
반복이라는 것은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릴수록 예배의 깊이가 묻어 나와야 합니다. 예배를 오래 드린 성도일수록 예배의 깊이를 알고 예배를 통하여 더 큰 은혜를 받는 자리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지상에서 만의 일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 자체입니다. 예배하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배는 영원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하고 또 예배하는 지속성과 반복성이 그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8:26절 이하에 보면,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장관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 세례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국사에 바쁘고 교통 조건이 안 좋았던 때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남의 나라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 에디오피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고 후대 학자들은 추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에디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살기 힘든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잘 살던 그 나라가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주말이면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주일이면 가족들이 정장을 하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미국의 국력이나, 경제적 영향력이나 정치적 힘은 세계제일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 중반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세속문화가 거세게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미국 사람들은 주말이면 저마다 문을 닫고 산으로 바다로, 술집으로 파티 장으로 빠져갔습니다. 교회는 텅텅 비기 시작했고, 문은 닫거나 건물을 파는 교회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은 날개를 달고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위신이 추락했고, 경제가 흔들렸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포기하자 하나님은 저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미국을 염려하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포기하는 자들을 우리 하나님도 그들을 포기하십니다. 본래 미국의 정신은 청교도 정신이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받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미국 신대륙에 상륙하여 맨 먼저 교회를 짓고 첫 농사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의 정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돌리고 돌릴지어다!> 예배는 드리고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단해서도 아니 됩니다.
②합당한 예배를 드려라!
시29:2절 '상'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구약의 예배 방법은 제사입니다. 모든 제사는 정해진 법대로 드려야 합니다. 제물을 선택하는 법에서부터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법, 제사장의 제사를 집정하는 법 등이 소상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4: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롬12: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제단이라고 합니다. 제단은 제물을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제물로 나온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예배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복 받기를 원한다면 웃기는 소리입니다.
2하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기서 거룩한 옷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 제사 드리기 위해 입는 옷은 평상복이 아니었습니다. 최고급 천에 수를 놓고, 금 수술을 달아 만든 거룩하고 아름다운 옷입니다. 한마디로 금관 제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단정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예배드리러 갈 때는 꼭 정장을 합니다. 우리도 정장을 하고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십시다.
㉡행실의 옷입니다. 바르게, 정직하게, 깨끗하게, 선하게 살았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교재가 끊기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개인도 가정도 사업장도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합당하게 드려야 합니다. 합당한 예배는?
⑴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헌금, 옷차림, 마음가짐 등 미리미리 준비하는 신앙이 복 받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준비 없는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준비하는 신앙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자입니다.
▶한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예수를 믿게 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유별나게 불심이 깊어서 새벽 불공 전에 매일 같이 목욕 재개를 하셨답니다.
그분이 예수 믿고 나서 새벽 기도를 드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매일 새벽에 목욕재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교회 나오기 전에 남보다 1시간 전에 일어나 목욕을 하려니 잠도 부족하고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 꼭 그렇게 안 해도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돌로 만든 부처 앞에 헛된 불공드릴 때도 목욕 재개했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습니까?' 지금은 권사님이 되셨는데, 교인들이 '이 권사님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받으시는 것 같아요? 이분하고 예배를 드리면 예배가 달라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할/
⑵예배시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시간은 잘 지켜져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사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과 그의 스승이셨던 조만식장로님의 이야기는 지금도 게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재직들은 모든 예배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권사님이 본을 보이시고, 여집사님이 본을 보이고, 집사님들이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본을 보고 따라갑니다. /믿/ 특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은 잘 지켜야 합니다.
⑶바른 자세로 드려라! 마음이 바르면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태도도 바르게, 마음도 바르게, 찬송도, 기도도,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머리를 숙이거나 엎드려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것, 마귀가 좋아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할 것인가? 섬기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①갈보리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칼빈은 '벌에 쏘여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중심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선 예배의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졸거나 발을 꼬거나 장난질을 쳐서는 안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이런 '신전의식'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그분의 도움과 응답을 받기 위해,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에게 마음과 정성을 쏟아 바쳐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의 시간입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정말 친해지면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예배에는 ⑴축복을 받는 예배가 있고, ⑵드리나 마나한 예배가 있는가 하면, ⑶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예배도 성경에는 있습니다(사1:10-20).
⑴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간혹 성도들에게 예배를 잘 드렸느냐고 물으면 재미있는 대답이 나옵니다. '오늘 성가대의 음정이 틀려서 예배를 제대로 못 드렸어요, 애들이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서 집중을 못했어요! 교회 안이 너무 더워서, 너무 추워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 설교를 잘못해서 예배가 지루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모두 예배의 핵심을 잘못 이해해서 생긴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렸느냐, 못 드렸느냐는 결코 설교의 문제도, 성가대의 문제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제대로 했는가? 내 죄를 하나님 앞에 제대로 고백했는가?'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에 합당한 마음이 준비되었는가? 더 쉽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의 자세를 가졌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믿/
은혜로운 예배는 바로 예배드리는 성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누구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으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에 충실했습니다. 다윗처럼 예배를 중요시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시27:4절을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구구절절이 성전에 대한 그리움, 사모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평생을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사울로부터 쫓겨다니는 삶을 살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지고 사울은 점점 쇠하여 갔습니다. /할/
▶예배에는 몇 가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묶어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만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흐르는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①우리들의 예배는 감사가 필수 조건입니다. 감사 없는 기도, 감사 없는 찬송, 감사 없는 헌금, 이런 것들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빠지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②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배를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66:1절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기쁨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 안에서의 새 마음! 이런 기쁨이 찬송으로 기도로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③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드림'입니다. '우리 예배 보러 가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리고, 기도로 드리고, 헌금으로, 내 몸도, 마음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수22:5절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혈기 죽이고, 고집 죽이고, 변덕 죽이고, 아집과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깨끗한 양심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딤후1:3절에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④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 이 마음이 없으면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축복도, 은사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멘!/
⑤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거룩한 전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22:6-7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충성은 헛된 열심입니다.
그리고 예배보다 더 급한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는 오늘 못 드리면 다음에 드리면 되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배는 그 순간 지나쳐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배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가면 잊혀집니다. 들에 피어있는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주님 앞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죄 많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덧입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이것은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은행은 절대로 파산 당할 우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며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관심은 예배입니다. 예배 성공이 인생 성공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축복입니다. /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더니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켜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후 70년 유대는 로마 '티토' 장군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서기 70년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비극의 해가 됩니다. 그때 예루살렘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하나님의 성전은 불타버렸고, 성안에 살고 있던 9만 명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 시민들의 지주가 된 사람이 '벤 자카이'라는 랍비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벤 자카이'는 로마군 사령관을 찾아가서 '당신이 말하는 것에 순종 할 테니 나와 함께 랍비 10명이 기거할 수 있는 방 한 칸만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의 모든 집들이 불태워지고 파괴되었지만 '벤 자카이'와 랍비 10명이 살고 있는 집 한 칸만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벤 자카이'를 '민족의 배신자'라고 맹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벤 자카이'는 아무 말 없이 랍비 열 사람과 함께 20년 동안 작업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탈무드'를 집필해 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대는 달라지고, 사람은 죽고, 태어나고, 새 사람이 나타나고, 인류의 문명, 물질의 세계, 집이나 건물, 이런 것이 다 없어지고 파괴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는다'는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탈무드'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므로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신앙의 지침서로 받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복된 백성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길 줄 아는 백성이 복된 백성입니다. 시128:1-2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할/
▶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까?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①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잠1:7절과 9: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창조의 근본이시며, 본체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참다운 지혜자가 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에서 떠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잠16:6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③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잠14:2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에서 떠나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므로 생명의 샘이 됩니다.
예수님은 요7:37절 이하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생수의 강은 우리가 받을 성령입니다.
④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전12:13절 이하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삶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사33:6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여호와를 경외함이 우리에게 있어서 왜 보배가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구원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를 채워 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보배가 되며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4:7절 이하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⑥여호와를 바르게 경외 할 때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34:9-10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⑦여호와를 바르게 경외할 때 족하게 되고 재앙을 만나지 않습니다.
잠19: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⑧여호와를 바르게 경외하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시145:19절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⑨천사의 보호를 받습니다. 시34:7절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⑩범사에 잘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전8:12절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⑪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히5:7절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⑫자손들이 복을 받습니다. 신5:29절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시112:1-3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후손이 복을 받습니다. 2절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들은 그 당대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부요와 재물의 복을 받습니다. 3절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경제적으로도 풍요하고 여유 있는 유족한 생활을 약속하고 있는데 그 의가 영원하다고 합니다.
⑬하나님의 기념 책에 기록됩니다. 말3:16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⑭치료의 광선을 받습니다. 말4: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우리 모두 하나님을 잘 섬겨서 이런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할/아멘!/
⑮우리가 경외해야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⑴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충성도 크게 보십니다.
⑵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죄도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큰 죄,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죄도 돋보기를 쓰고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아간의 작은 죄를 크게 보시고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죄도 다 찾아내시는 분이십니다.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죄도 다 찾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⑶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사랑도 크게 보십니다.
⑷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헌금도 크게 보십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A. A. 하이디의 간증입니다. 사업이 기울고 빚더미 위에 앉아 있을 때 그가 기도원에 올라가 큰 은혜체험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어려움 가운데 작정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는 중에 그 동안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십일조를 안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물질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말3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일조 도둑놈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직원에게 그 동안에 못 바친 십일조를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자, 그 직원이 '사장님! 이는 경제원칙에 어긋납니다. 어떻게 빚지고 있는 데 빚을 더 얻어서 헌금을 드리라고 하십니까? 한 푼이라고 갚아서 이자 지출을 줄여야 할 때입니다.' 이 때 하이디가 '빚 갚는 것보다 도둑질한 물건을 갚는 것이 우선이다.' '사장님이 언제 도둑질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물질을 도둑질한 것은 사람의 물질을 도둑질한 것보다 더 큰 도둑놈이다. 나는 그 동안에 하나님의 물질을 도둑질하였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빚을 내어 그 동안 밀린 십일조를 다 드렸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하셔서 하이디는 미국의 재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헌금을 크게 보시고 크게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할/ (믿음의 교회 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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