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을 아는 지식

by 【고동엽】 2022. 3. 4.

하나님을 아는 지식

(원제: Knowing God) - 제임스 패커(J. I. Packer) 지음

 

이 책은 1973년 처음 런던에서 출판된 이래 세계 25개국에서 번역되어 500만 부 이상이 출판된 꾸준한 베스트셀러로 현대신앙서적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이다. 저자 제임스 패커는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대표적인 현대 기독교 지성 중 한 명으로 지금은 캐나다에 위치한 리젠트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연극 배우가 '햄릿'을 공연하기를 열망하듯, 나는 하나님에 대한 학술적인 논문을 쓰기를 원해왔다. 하지만 이 책이 그 논문은 아니다. . . . 누구든지 이 책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망하고 말 것이다." (p. 9)

 

저자는 이러한 겸양과 함께 이 책의 서문을 시작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그러한 논문 이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매우 체계적이고 진지하게 풀어간다.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우선 '왜 하나님에 대해 연구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코 비실제적이고 삶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나아가 이러한 지식은 사실 가장 실제적이며 우리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구 과제임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마존의 부족민 한 사람을 비행기에 태워 런던으로 데려와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트라팔가 광장에 내려놓고, 그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어나 영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남겨 둔다면, 그것은 매우 무자비한 일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채로 이 세상 속에서 살려고 애쓴다면, 그 것은 우리 자신에게 무자비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이상하고 미친 듯하며 고통스런 장소가 되고, 삶은 실망스럽고 불쾌한 일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하는 것은 눈가리개를 하고서 아무런 방향감각 없이 그리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p. 19)

 

이 책은 구약과 신약에서 때로는 무섭도록 엄격하게, 때로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진지하고 심오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묵상으로 안내한다. 저자는 우리가 대중적인 설교나 간증 등을 통해 익숙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 지혜, 인자와 같은 개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 진노, 심판, 질투 등과 같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분의 모습까지도 하나씩 풀어간다. 그 속에서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느끼도록 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한국기독교문서선교회 등에서 출판되었으며, 영문판은 "Knowing God"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IVP(InterVarsity Press)에서 출판되었다.

 

 

차례보기

 

제목: 하나님을 아는 지식

 

1.하나님에 대한 연구

2.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3.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4.오직 참되신 하나님

5.성육신하신 하나님

6.그가 증거하실 것이요

7.변치않으시는 하나님

8.하나님의 엄위하심

9.지혜로우신 하나님

10.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

11.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2.하나님의 사랑

13.하나님의 은혜

14.심판자 하나님

15.하나님의 진노

16.인자와 엄위

17.질투하시는 하나님

18.복음의 핵심

19.하나님의 아들들

20.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21.이 내적 시련들

22.하나님의 충족

 

내용 요약

 

제1부 여호와를 알라

1.하나님에 대한 연구

* 목적 : 하나님에 대한 연구가 왜 중요한가를 아는 것.

1. 저자는 누구를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는가? 그는 어떤 의미에서 여행자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 여행자, ‘발코니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조하여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국면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문제들에 직면한다. 그들은 ‘어떤 길로 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갈 것인가’와 같은 유형의 문제들 곧 이해뿐만 아니라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그런 문제들에 직면하는 것이다.

 

2. 이 책의 배후에는 어떠한 확신이 있는가?

-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연약한 점들의 뿌리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하나님의 도(ways) 및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향으로 인해 지금까지 두 가지 불행한 경향이 나타난 듯하다.

첫 번째 경향은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풍조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 대해서는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소하게 생각하는 그런 풍조를 말한다. 이처럼 현대의 풍조에 항복해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정말로 자살행위와 같다.

두 번째 경향은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회의주의에 의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세기 이상 동안 르네상스식 사고방식 안에 있는 자연주의라는 누룩은 서구의 사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어 왔다. 즉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직접적으로 또한 완전하게 통제하신다는 것을 부인하게 되었다.

 

3.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가? 묵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하나님에 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사역과 도 그리고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 자신이 아는 여러가지 것을 상기하고, 숙고하고,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이다.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영적 시야를 밝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마음과 뜻에 충분하고도 적절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다.

묵상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과 죄성을 묵상함으로 겸손해지며,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나 있는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함으로써 격려받고 평안을 얻는다. 즉 묵상은 우리를 위로해 준다.

우리가 이처럼 겸손해지고 고양되는 체험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점점 증가하며,그와 함께 우리의 평화, 힘, 기쁨도 증가한다.

 

2.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 목적 :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인가를 생각하는 것

1.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3.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네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정력을 내보인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들의 열심과 정력은 기도 안에서 최초로 표현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러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하나님을 거의 모른다는 분명한 표시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되 미리 아시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예정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계 역사와 각 인간의 운명에 대해 최후의 결정을 내리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인간들도 천사들도 하나님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러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셋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보여 준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위험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돌적인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넷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알며, 이러한 관계가 삶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 그리고 영원토록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평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4.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두 단계를 거처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것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세주를 찾아야만 한다.

 

3.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 목적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하는 것

1.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 목표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 : 3).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2. 하나님을 아는 활동에 포함되는 네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그것을 해석해 주시는 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을 주목하는 것.

셋째,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넷째, 하나님이 이처럼 당신에게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나타내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격적 교제’, ‘인격적 관련’, ‘은혜’의 문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심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아는 지식을 가지심에 따라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인격이 관련되는 일이다.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히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결과이다. 하나님이 먼저 주권적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아시는 그 아심은 그들을 향한 개인적 애정, 구속의 행위, 언약적 신실함, 섭리적 보살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한다.

 

4.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은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가?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이다.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나를 아시는 것에 좌우된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동료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나의 모든 뒤틀린 것을 보시며, 내 안에서 내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부패함을 보신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며 나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도록 하셨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를 지니게 된다. 단지 이것만 언급하더라도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4.오직 참되신 하나님

* 목적 : 우상숭배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상숭배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영향을 끼치는지 아는 것.

 

1. 십계명 중 제2계명은 우리에게 어떤 원리를 제시하는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출 20 : 4~5)." 이 계명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마도 여호와 아닌 다른 신들의 형상을 섬기는 것을 언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계명은 그러한 제한된 해설을 배제한다. 하나님은 상당히 단호하게, 하나님을 하나의 동물로 묘사하는 그림들이나 상들을 사용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으로 묘사하는 그림들과 상들을 사용하는 것 역시 금한다. 이사야 40 : 18에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을 생생하게 선포하고 난 후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2, 형상들은 어떻게 사람들을 호도하는가?

형상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기도를 드릴 대상의 형상이나 그림에 습관적으로 초점을 맞추다 보면, 곧 그 형상이 묘사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것에 기도하게 될 것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계시가 아닌 자신의 상상력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채로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신비로우시며 불가해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과 철학적 사고 범주 너머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으로 주셨고, 그 분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5.성육신하신 하나님

* 목적 : 성육신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

1.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고의 신비’는 무엇인가?

신성의 제2위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둘째 사람(고전 15 : 47)'이 되셨다는 것 그리고 신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참으로 완전하게 인간이셨고 마찬가지로 참으로 완전하게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것은 기독교가 지닌 진정한 걸림돌이나 만일 예수님이 성인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성경이 말해 주는 바를 믿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예수님이 영원하신 말씀이며, 창조 시에 성부의 집행자가 되셔서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신(히 1 : 2)" 바로 그 분이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이 세상 안에서 사시고, 이 세상에서 나가실 때, 창조의 능력을 보여 주는 일련의 행위를 행하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생명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2.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기는 하나님이었다. 요한이 말한 바 육신이 되신 말씀에 대한 일곱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기는 하나님이었으며,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었다. 요한은 이 주제를 주의 깊고 확실하게 해설하고 있다. 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여기에는 말씀의 영원성이 나타나 있다. ②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여기에는 그 말씀의 인격성이 나와 있다. ③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여기에는 그 말씀의 신성이 나와 있다. ④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여기에는 말씀의 창조성이 나와 있다. 그 분은 성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 행위에서 행위자셨다. 모든 것은 그 분을 통해 지음받았다. 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여기에는 생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그 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가 아니면 피조물들에게 생명이란 없다. 여기에 모든 형태의 생명의 기원과 유지라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있다. ⑥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여기에는 드러내시는 말씀이 나온다. 그분은 생명을 주시면서 또한 말씀을 아는 빛을 주신다. ⑦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여기에는 성육신하신 말씀이 나온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있는 아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셨다. 요한은 성육신에 의해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성육신은 예수님과 사단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말씀이 육신, 곧 진짜 인간 아기가 되셨다. 인간을 만드신 그 분이 이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사단이 된 천사를 만드신 그 분이 이제 사단에 의해 시험을 받을 수도 있는 상태가 되셨다. 그 분의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은 사단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히 2 : 17~18, 4 : 15~16)."

 

4. 왜 성육신은 하나님의 겸손하심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가?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성육신이 제기하는 물리적, 심리적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고심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권한다. 성육신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위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 6~8)." 그러므로 성육신을 해석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본문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구절이다. 이 모든 일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5. 성육신의 동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성탄절의 정신’은 주님과 마찬가지로 동료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그런 원리에 따라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런 정신을 보여 주는 사람은 마땅히 있어야 할 만큼 그렇게 많지 않다. 만일 하나님이 그 분의 자비로써 우리를 소생시키신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이러한 정신을 더 많이 생기게 하시는 일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적 소생을 바란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이러한 정신을 계발하도록 애쓰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 : 5)."

 

6.그가 증거하실 것이요

* 목적 : 성령님의 사역의 본질과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

1. 당신은 삼위일체 교리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당신의 삶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

2. 요한복음은 삼위일체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종종 삼위일체의 교리는 너무 신비롭다는 이유로 그것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신학적 잡동사니로 여겨진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요한은 구세주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 집에 그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실 것을 설명한 후에 계속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고 계시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보혜사의 개념은 ‘조언자’, ‘돕는 자’, ‘옹호자’, ‘우리와 친구가 되시는 분’ 등으로 번역된다. 격려, 지지, 원조, 돌봄 등이 모두 이 단어로 표현된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예수님이 그들의 원래 보혜사이며, 따라서 새로 오시는 보혜사의 임무는 예수께서 “그는 내가 너희를 돌보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너희를 돌보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 새로운 보혜사의 이름을 말씀해 주신다. 그 분은 ‘진리의 영’, ‘성령’이시다. 이 이름은 신성을 나타낸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숨결)은 유사한 표상이다. 이 두 문구는 하나님의 능력이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개념을 전달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숨결은 창조 기사에서 함께 나타난다. “… 하나님의 신(숨결)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 : 2~3).",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영)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 주님께서는 거룩하신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듯 그 분을 거룩하신 영(성령)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인격적인 영의 신성에 대하여 확증하신다.

 

3.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계는 무엇인가?

요한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주님이 드러내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곧 세 위격이며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성자는 성부의 뜻을 행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조되는 점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오시는 성령님은 그리스도 대신에 보혜사의 사역을 행하러 오신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 26)."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 증거하느니라(요 15, 16장)." 이 약속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4. 왜 성령님이 없으면 복음도 신약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령님이 없으면 첫째, 복음도 신약 성경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라고 썼다. 둘째, 믿음도 중생도, 간단히 말해 어떤 그리스도인도 없었을 것이다. 복음의 빛이 비추어도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 4 : 4)" 눈 먼 자들은 빛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눈 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전능하신 역사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기독교의 진리를 입증할 수 없다. 인간의 양심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주권적인 특권이다. 성령께서 실로 이런 식으로 증거하시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제2부 네 하나님을 보라

6. 변치않으시는 하나님

* 목적 : 하나님이 불변하신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파악함.

1.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감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낯선 세계, 즉 원시적이고 미개하며 기계화되지 않은 농경 시대인 수천 년 전의 근동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활동들은 대부분 그 세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모두 극도로 흥미롭긴 하지만,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두 세계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지 못하며, 때문에 성경에서 읽는 사실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갖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느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연결 고리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들과 관계를 맺었던 하나님은 우리와도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목적은 불변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히 13 : 8)" 그분의 손길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엄중한 도전 역시 가져다준다. 만일 우리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체험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동의 수준 면에서 그들에 훨씬 더 못 미치는 상태를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똑같은 하나님이라면, 이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8.하나님의 엄위하심

* 목적 :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인식하는 것

1. 성경에서 엄위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현대의 생각과 어떻게 대비되는가?

엄위하심(위엄 : majesty)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지혜, 임재 그리고 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인식하는 것이다(욥38~41장 참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하나님을 조그맣게 만들 만한 제한들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시편 139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지식과 능력의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특성에 대해 묵상한다.

둘째,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권세들이나 힘들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한 과업을 보라고 말씀하신다(사 40장). 열방과 세상과 이 세상의 위대한 자들을 보고, 마지막으로 별들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의기 소침한 사람들, 겁먹은 사람들, 남 몰래 자포자기한 사람들, 오랫동안 사건들의 형세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사람들, 그리스도의 대의가 다시 번창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선지자를 통해 그들과 변론하시는지를 보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 : 26)."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사 40 : 25)." 이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꾸짖는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 40 : 27)."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꾸짖는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사 40 : 28)." 이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이 엄위하심을 믿는 일에 더딘 것을 꾸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주권적이시고 만물을 꿰뚫어 보시며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일에 얼마나 더딘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분의 엄위하심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우리 마음에 새김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다.

 

9.지혜로우신 하나님

* 목적 :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위안을 찾는 것

1.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는 도덕적 선의 실제적 측면이다. 지식적 속성일 뿐 아니라 도덕적 속성이기도 하다. 지혜는, 최선이며 최고인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들을 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성향이다. 그러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게 발견된다. 하나님만이 원래부터 전적으로 변함없이 지혜로우시다. 지혜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인간의 지혜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요소들에 의해 좌절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좌절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능함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능력은 지혜만큼이나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전능함을 지배하는 전지함, 무한한 지혜에 의해 다스려지는 무한한 능력, 그것이 바로 신적인 성품에 대한 성경의 기본적인 묘사이다

 

2.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과 같다. 곧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놀랍도록 질서 정연한 복잡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그 분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창조 세계 및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최초에 가지고 있던 목적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각자에 대한 사랑을 아는 지식 가운데 계속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영원 전부터 그들에게 쏟아부어진 구원의 사랑을 기뻐하고, 하나님은 복음의 은혜를 통한 사람들의 반응하는 사랑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또한 우리의 영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영광은 내세에 가서 전체 피조 질서가 변화된 상황에서만 완전히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각 사람을 죄에서 구해 주시고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그들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오도록 하시고,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며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목적의 각 부분을 성취하는 데 중심이 되신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어야 하는 구세주로 또한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10.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

* 목적 :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은사를 이해하는 것

1. 비공유적 속성들과 공유적 속성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속성에는 독립성(자존성과 자기 충족성), 불변성(일관성 있게 행동하게 하는 절대 불변성), 무한성(모든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함 즉 하나님의 영원성과 편재성) 그리고 단순성(하나님 안에는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요소들이 없으며, 그렇기에 우리와 달리 그 분은 서로 다른 갖가지 생각과 욕구에 의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열될 수 없다는 사실)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특성이기 때문에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단지 인간이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속성 중 어떤 것도 공유하지 않으며 또 공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선하심, 진리, 거룩하심, 의로우심 등과 같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성, 자유와 전능하심 등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과 공유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성경 말씀의 의미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영적인 존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그 분에게 반응할 수 있으며 선택과 행동을 할 능력을 가진 책임 있는 도덕적 행위자로 본래 선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정직하게, 한마디로 하나님처럼 만드셨다. 타락시에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대부분 손상되었지만 성경은 지금 하나님이 그 분의 구속 계획을 완수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속성들을 새롭게 전이하심으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다는 성경 말씀의 의미이다.

 

지혜는 공유적 속성이다. 하나님이 원래 지혜로운 것같이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지혜를 나누어주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어떠한 조처를 위해야 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두 선행 조건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 111 : 10)."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 :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의 계명이 …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시 119 : 9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골 3 : 16)."

 

2. 전도서에 따르면 지혜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지혜로운 삶에 대해 개략적인 지침을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 할 수 있는 한 선을 행하라. 하나님이 언젠가 당신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은밀한 가운데서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은 삼가라. 현재에 살며, 그것을 철저히 즐기라. 현재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선물이다. 너무 교만하거나 너무 경건해서 웃거나 흥겨워하지조차 않는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 당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면서 인생의 문제들은 하나님께 일임하라. 궁극적 가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측량하시게 하라. 당신 편에서 할 일은 주어진 모든 분별력과 진취성을 이용해서 앞에 놓여 있는 기회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길이다. 그리고 믿음의 삶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불가사의한 섭리의 하나님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그 기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놀랍도록 복잡한 우주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죄와 사단으로부터 구속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비록 지금 당장은 자신의 손을 감추고 계시다 해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혜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 - 화평과 겸손과 사랑 - 이며, 그 뿌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난 현현으로 믿는 믿음인 것이다.

 

3. 왜 하나님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와 우리 삶 속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섭리적 목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감추시는가?

수도원 영성의 교훈에 따르면 일곱 가지 중요한 죄 가운데 나태함(무감각)이 있다. 나태함은 완고하고 기쁨이 없는 냉담한 마음을 말하며, 오늘날 여기저기에 그러한 죄가 만연해 있다. 그 증상은 개인의 영적 무력증과 더불어 비판적인 냉소주의를 보이며 다른 사람의 독창력과 진취적인 기상에 대해 거드름을 피우며 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의 배후에는 종종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가 쓰라리고 당황스러운 경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은 그 분의 지혜로 우리가 겸손해지고 또 계속 겸손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믿음으로 행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감추신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마치 운전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당신은 왜 길이 좁아졌는지 혹은 그처럼 심하게 구불구불한지 묻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나타나 있는 실제 상황을 제대로 보고 행하려고 애쓸 뿐이다. 운전을 잘하기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처한 우리의 삶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냉정할 정도로 명민하고 현실적으로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지혜는 유토피아적 환상들, 그릇된 감상 또는 장미빛 안경을 쓰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죄로 말미암은 이러한 고질적인 비현실주의는 우리가 지혜를 갖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시간과 환경에 의해 정해진 인생의 모습을 본다. 죽음이 조만간에 모든 사람에게 닥치지만, 정해진 순서 없이 우연히 닥치는 것을 본다. 인간도 짐승과 마찬가지로 죽으며, 선한 자도 악한 자와 마찬가지로, 지혜자도 우매자와 마찬가지로 죽는다. 악이 맹렬히 날뛰며, 악한 자는 번창하고 의인은 번창하지 않는 것도 본다. 이 모든 것을 보면 당신은 하나님이 사건들을 정하시고 명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통상적인 섭리 안에 있는 신적 목적을 이해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인생은 정말로 무의미하다는 결론 앞에 압도된다. 또한 인생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건설적인 노력들 역시 아무런 가치도 없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사업을 일으키고, 돈을 벌고, 심지어 지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의 모든 일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만사에 신적 목적을 발견해 내려는 낙관적인 기대는 궁극적으로 바로 이러한 비관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실들을 직면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참된 지혜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훈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가 요크 역의 통제실 안에 있으며 이 시점에서는 하나님이 왜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셨는지에 대한 내부적인 정보를 즐기고 있음을 주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식이 우리 몸에 배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확신하며,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즉시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우 고통스럽고 불가해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비밀 회의장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기분 좋은 환상은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하나님이 자기를 무시하셨다고 느낀다. 자신의 영성 부족을 탓하기도 한다. 육체적, 정신적 혹은 영적인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무익한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이전에 가졌던 생각에 대해 아주 철저히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이후로 우리의 영적 생활 전체가 황폐하게 될지도 모른다.

 

 

11.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목적 :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1. 모든 성경에서 추정할 수 있는 두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삼위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주의 모든 일을 조정하시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우주의 절대적 왕이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이 행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 뜻을 표현하는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은 어떤 두가지 이유 때문에 말씀하시는가?

통치의 방편일 뿐 아니라 교제의 방편이다. 곧 우리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정녕 그대로 된다. 세상을 다스리고 우리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3. 하나님의 토라의 세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왕이신 하나님에게서 온 ‘토라’는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율법이요, 일부는 약속이며, 일부는 증거이다.

 

4.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진리란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분은 ‘진리의 하나님’이며 ‘진실이 많은’ 분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인격이시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 이외의 것은 될 수가 없다. 그 말씀은 실재를 보여 주는 지표로서,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장차 우리에게 되어질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를 보여 주며, 어떻게 진정으로 인간적이 될지를 가르쳐 주고, 도덕적 자기 파멸에 대해 경고해 준다.

 

우리는 이성적인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지니도록 만들어졌다. 즉, 우리의 영혼은 예배, 계명 준수, 진실됨, 정직함, 훈련, 자제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동료들을 섬기는 것 등을 실천함으로써 ‘가동’되도록 만들어졌다. 만일 이것들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양심이 위축되고 수치심이 말라버리며, 진실함, 충성, 정직함의 능력이 침식되고, 인격이 분열되어 버린다. 그런 사람은 지독하게 비참해질 뿐만 아니라, 꾸준히 비인간화된다. 이것이 영적 죽음의 한 측면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은 아버지이신 성경의 하나님과 구세주이신 성경의 그리스도께 향해 있다.

 

 

12.하나님의 사랑

* 목적 :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는 것

1.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지상의 낙원을 얻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롬5:5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 가지 사항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 : 5)"라고 했을 때, 그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넘쳐흐르고 이제 그 마음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부은 바 됨이라는 동사를 주목해 보라. 그것은 문자적으로 흘러나오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넘쳐 흘렀다”라고 NEB는 번역하고 있다.

둘째로, 완료 시제로 쓰여, 완성된 행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고정된 상태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넘쳐흐르고 이제 그 마음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지식을 심어 주는 것은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즉, 거듭난 모든 사람, 모든 참된 신자에 대한 성령님의 정규적인 사역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 : 8, 16)."는 진술은 성경에 나오는 말 가운데 가장 엄청난 말이면서 또한 가장 오해되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잘못된 개념들이 마치 가시 울타리처럼 주위에 자라나 그것의 참된 의미를 시야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심령에 분명히 이해될 때, 그것을 깨닫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충분히 보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나머지 진술을 전제로 한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부르사 나라를 이루게 하셨고 정복과 사로잡힘과 포로 생활을 통해 자기 백성을 연단하셨으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내어버리시고 요한이 이 글을 쓰기 직전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으며, 언젠가는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마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 양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또한 불순종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 : 24). 영은 육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인격과 권능과 속성들은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어서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변덕스럽고 동요가 심한 것이 아니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오히려 자비와 은혜의 태도, 자유롭게 선택되고 확고하게 고정된 태도로서 하나님의 전존재가 스스로 내리시는 결정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또한 빛이시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도덕적 실재와의 접촉을 잃어버리고 자신들이 한 일 중 죄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한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 : 5)." 빛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측량한 거룩함과 순결함을 뜻하며, 어두움은 도덕적 사악함과 불의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빛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 기준과는 분리된, 제멋대로 하게 놓아두는 인정 많은 너그러움이라고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도덕적 특질에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영접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훈련하시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 : 6~11)." 하나님의 사랑은 엄격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행복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더욱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있는데도 이들을 어려움에서 막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으로 해당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 : 20)." 우리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하나가 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촉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 관한 한 하나님은 매순간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 우리에게 사랑이시다. 심지어 하나님이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하셨는지 알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그 안에 그리고 그 배후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인간적으로 보면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라도 기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 : 11)."라는 윤리적인 사항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썼다. 나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특성과 정도를 보면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

 

 

13.하나님의 은혜

*목적 : 은혜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

1. 은혜의 교리는 어떤 네 가지 중요한 진리를 전제하고 있는가?

① 인간의 도덕적 악덕

현대인들은 그들이 이룬 가공할 만한 과학적 진보를 의식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지 물질적 부를 도덕적 성품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며, 도덕적 영역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아주 친절해서, 약간의 미덕이 커다란 악덕을 보상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도덕적인 면에서 자신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사소하고 가벼운 과오들-음주,도박,무모한 운전, 성적 방종함, 악의 있는 거짓말과 악의 없는 거짓말, 거래상의 사기 행위들, 음란 서적 등-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내심으로는 철저하게 선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타락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 있고 부정하며 하나님의 정죄를 받기에 합당할 뿐이라는 생각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

②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

현대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체하려 한다. 악은 무시할 수 있는 한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널리 공인된 금언인 듯하다. 그러나 응보가 하나님의 세계의 도덕법이고 행악자에게 소망이란 없으며, 하나님께 응보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수 없다.

 

③ 인간의 영적 무력함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 : 20)."라고 단언한다. 일단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후에 희생제사나 도덕적 행위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어느 누구의 힘으로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경적 믿음을 가지려면 우리는 이 점을 알고 그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

④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인간 피조물에 의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다. 각 개인의 운명은 하나님이 그를 그의 죄에서 구하시기로 결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하신 행동이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강요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이 생각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처럼 큰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일단 어떤 사람이, 자신이 앞의 네 가지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신약의 은혜의 복음은 그에게 경이로움과 강한 기쁨의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죄인들의 행위나 죄과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값없이 보이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가혹한 대접을 받기에 합당하고 가혹함 외에는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하심을 보이는 것이다.

 

2. 은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로서 한데 결합되어 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 : 5, 8)."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2 : 11)."

 

3. 은혜와 칭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 특정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죄 사함의 근원으로서의 은혜이다. 복음은 죄의 용서와 그에 따르는 우리 인격의 용납 곧 칭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칭의는 유죄 판결을 받고 무시무시한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상태에서, 엄청난 유업을 기다리고 있는 상속자의 상태로 극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칭의는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결정적으로 신뢰하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칭의는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큰 대가를 치르셨다. 그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4. 은혜와 구원계획의 관계는 무엇인가?

둘째, 구원 계획의 동기로서의 은혜이다. 죄 사함은 복음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은혜의 교리 전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선물을, 창세전의 택하심으로 시작되고 교회가 영광 가운데 온전해질 때에야 완성될 구원 계획이라는 맥락 안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신의 회심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영원한 계획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5. 은혜와 성도의 견인의 관계는 무엇인가?

셋째는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서의 은혜이다. 구원계획이 틀림없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으며(벧전 1 : 5)." 또 입을 것이다. 내 믿음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스스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은혜가 먼저 나를 믿음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은혜는 끝까지 내 믿음을 지켜 줄 것이다. 믿음은 은혜에 의해 시작되고 은혜에 의해 지속되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빌 1:29).

 

6. 다음 진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에서 교리는 은혜이고, 윤리는 감사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가 도덕적 방종을 조장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보답으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이 일단 불러일으켜지면, 그 사랑은 기쁨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금후로는 ‘선한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사에 넘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행하며, 날마다 다음과 같이 부르짖게 될 것이다. “오! 나는 얼마나 많이 은혜에 빚진 자인지.

 

 

14.심판자 하나님

*목적 :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

1. 성경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언급되어 있는 몇 가지 경우를 찾아보라.

하나님의 심판의 실재성은 사실이며 성경 역사의 곳곳에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이 지상에서 살아갈 삶을 저주하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멸하시기 위해 홍수를 보내심으로 노아 시대의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화산 작용에 의한 대 이변으로 삼켜 버리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애굽인 술사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심판 기사는 구약 성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교만한 헤롯에게, 복음을 반대한 엘루마에게 심판이 임한 것을 볼 수 있다.

 

신약 성경 전체는 다가오는 우주적 심판의 날이 확실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로 뒤덮여 있다. 신약 성경은 ‘심판의 날’, ‘진노의 날’, ‘다가오는 진노’를 예상하며,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자라고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 : 22, 27~29)."

 

성경에서 심판에 대해 설교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실”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1:9, 12:14)를 알 수 있다.

 

2. 하나님이 심판자라는 사실에는 어떤 네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가? 왜 하나님은 이 각각의 사법적 기능을 수행하실 수 있는가?

1) 심판자 하나님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2) 심판자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것과 일치하는 분이시다.

3) 심판자 하나님은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닌 분이다.

4) 심판자 하나님은 판결을 시행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다.

 

3. 응보란 무엇인가? 왜 저자는 그것이 ‘창조의 불가피한 도덕법’이라고 말하는가?

응보는 하나님이 지닌 성품의 자연스럽고도 예정된 표현인 듯 보인다. 응보는 창조의 불가피한 도덕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종종 우리는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롬 2 : 5)"이 이르면 정확한 응보가 이루어질 것이며, 부당함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모든 사람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행동은 구원을 얻을 만큼 선한 반면 다른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곧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 “값없이 주는 죄사함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에 따른 심판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행위가 지닌 중요성을 깨닫고 나면,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 : 24)."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 : 10)."고 말했다. 이 두 진술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먼저, 칭의라는 선물은 분명 신자들이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막아 준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 : 11~15에 나오는 심판에 대한 환상에서 나타난다. 거기에는 각 사람의 행위를 기록한 ‘책들’과 함께 ‘생명책’이 펼쳐져 있으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불못에 던지우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으로, 칭의라는 선물은 신자들이 심판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평가를 받는 것은 전혀 막아주지 못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 : 12~15)."

최후 심판은 또한 우리의 지식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율법이나 복음을 통해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 것이며, 자신이 아는 최선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다. 하지만 받아야 할 응분의 벌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 최선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로마서 2 : 12과 누가복음 12 : 47~48을 보라. 여기에서 작용하는 원리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서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의로운 것이다.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의로우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주의 두려우심(고후 5 : 11)'이신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나서야만 하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심판 날에는 우리의 과거 삶 전체가 예수님 앞에서 상연되어 조사받을 것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대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5. 왜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자라는 사실로 인해 기뻐해야 하는가?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율법이시다. 하지만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복음이시다. 지금 예수님에게서 도망하면, 당신은 그 때에 가서 그 분을 심판자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희망이 없다. 지금 예수님을 찾으면 당신은 그 분을 발견할 것이다.(‘찾는 자는 찾을’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는 것을 알고, 장차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고대하게 될 것이다.

 

15.하나님의 진노

*목적 :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

1. 당신은 진노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진노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불의와 비열함에 의해 야기되는 의로운 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2. 하나님의 진노는 어떠한 것인가?

진노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달갑잖게 느끼는 근본 원인은 진노라는 개념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불안한 의심인 듯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노란 자제심의 상실, 전체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부분적으로 불합리한 ‘격노’의 폭발을 연상시킨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인간의 분노가 종종 그런 것처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고, 성마르고, 도덕적으로 비열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보다는 객관적인 도덕적 악에 대한 올바르고도 필요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분노가 필요한 곳에서만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모두 의로운 것이다. 선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도 똑같이 즐긴다면 그 하나님이 선한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만드신 세상안에 있는 악에 역반응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이 부과하시는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빛을 비추실 때 그 빛으로부터 물러남으로써 스스로 선택하는 상태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택한 것을 주는 것이다.

 

3. 로마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벌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행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죄인들에 대한, 불경건함과 도덕적 악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반응으로써 하나님의 정의의 표현이다.

2)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 나나니 ”(롬1:18)

현재시제인 ‘나타나나니’라는 말은 항상 진행되는 지속적인 드러남을 의미한다.’하늘로 좇아’라는 말은 복음이 아직 미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전 우주적인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타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각 사람의 양심에 직접 각인된다.

3)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해방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3:9-10,19)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가오는 진노에서 건져질 어떤 방법이라도 있는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9)라는 말씀이 있다. 누구의 피에 의해서 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죄사함을 받고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가? 믿음을 통해서, 즉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믿음으로써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피-예수님의 희생의 죽음-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기초를 형성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4~25). 여기에서 화목 제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속하고 죄책을 소멸시킴으로써 진노를 막는 희생제물이다.

 

4. 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우리가 자주 묵상해야 한다고 하는가?

우리는 언제나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의 가증함을 둘러대며, 죄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보응을 연구하고 깊이 숙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죄의 가증스러움을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심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두려운 장엄함에 대한 ‘경건함’과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가 없다.

셋째로, 우리의 영혼이 ‘장래 노하심’(살전 1:10)에서 우리를 건지신 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 열렬한 찬양을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6.인자와 엄위

*목적 : 하나님의 인자를 하나님의 엄위와 연관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

1.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현ㄷ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얼빠진 생각과 혼란의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직감들을 따르는 습관들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2) 현대인들은 모든 종교를 똑같이 대등한 것으로 생각하며, 기독교적 출처뿐 아니라 이교적 출처에서 역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3) 사람들이 자신의 죄성의 실상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인자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엄위라는 개념과 분리시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롬11:22)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인자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엄위라는 개념과 분리시키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가?

- 19세기 몇몇 독일 신학자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현대 서구 개신교 전체를 오염시켰다. 그들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며, 하나님의 성품은 사실상 엄위를 찾아볼 수 없는, 멋대로 하게 놓아 두는 관대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3. 어떤 속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인자를 이루는가?

-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하다고 부를 만한 모든 도덕적 자질 그리고 그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롭다고 부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도록 하는 그 관대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 관대함 :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리고 받는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가에 구애받지 않고 일관되게 그것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성향을 의미한다.

 

4. 하나님의 엄위란 무엇인가?

- 문자적으로 ‘잘라내다’(롬 11:22).

-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자하심을 일축해 버린 자들에게서 그 인자를 단호하게 거두시는 것을 타나낸다.

 

5.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엄위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강조하는가?

- 하나님은 성급하게 엄위하심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더디 노하시며”(느 9:17, 시 103:8, 145:8, 욜 2:13, 욘 4:2),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출 34:6, 민 14:18, 시 86:15)

 

6. 인자와 엄위에 대한 고찰에서 어떤 세 가지 교훈을 이끌어 내고 있는가?

1) 하나님의 인자에 감사하라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18)

 

2) 하나님의 인내에 감사하라

3) 하나님의 징계에 감사하라

 

 

17.질투하시는 하나님

*목적 : 하나님의 질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

1.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십계명 제2 계명에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고 직접 말씀하심.

2)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2. 질투를 어떠한 두 종류로 구분하는가?

1)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은 신인동형론적인 것이다. –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시며, 우리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하나님을 닮았다.

2)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질투가 있으며, 그 중 하나만이 악덕이다. –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결혼한 것으로 여기며, 거기에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충성에 대한 요구가 수반되는 것으로 본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불순종과 신실치 못함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영적 간음으로 보셨으며,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질투와 복수를 유발시켰다.

 

3.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목표는 무엇인가?

- 역사가 지속되는 한 지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 이후에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백성이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언약적 사랑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이다.

- 성도들이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

4.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의 두 가지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1)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2)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꼐 대해 열심이 없는 교회들을 위협한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5~16)

신앙에 있어서의 열심이란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시키려는 불타는 열망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자연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신자들이 회심할 때 각 신자들의 마음에 불어 넣으시는 열망이다.

신앙에 열심있는 사람은 두드러지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지하고, 왕성하며,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고, 전심을 다하며, 영적으로 열렬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보며, 한 가지 일만 신경쓰고, 한 가지 일을 위해 살고, 한 가지 일만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제3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8.복음의 핵심

*목적 : 복음의 핵심을 깨닫는 것

1. 화목이란 무엇인가?

약에서 화목 개념은 속죄제, 속건제에 관한 규정된 의식들에 나타나 있다. 또한 화목은 민수기 16 : 41~50과 같은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비방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멸하겠다고 위협하신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 염병이 그치니라(46~48절)."

 

신약에서도 화목에 관련된 네 개의 본문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근본적 이유에 대한 바울의 진술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 : 21~26)." 두 번째는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히브리서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 : 17)." 세 번째는 우리 주님의 천상 사역에 대한 요한의 증거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 : 1~2)." 그리고 네 번째는 요한이 내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 8~10)."

 

2. 화목과 속죄의 차이는 무엇인가?

3. 저자는 화목에 대한 어떤 세 가지 사실을 진술하는가? 어떤 이유로 각각의 사실은 중요한가?

4. 복음이 해결해 주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5. 화목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추진력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6.

19.하나님의 아들들

 

20.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21.이 내적 시련들

 

22.하나님의 충족

출처 : 예수 생명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