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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 목사] 예화모음 126편(2)

by 【고동엽】 2022. 3.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 제 생일잔치에나 한번 와주시면

 

어떤 나라에 큰 난리가 났습니다. 급기야 왕이 그 왕궁을 버리고 시골로 피난을 갑니다. 왕은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어느 마을에 몰래 숨어 들어갔습니다. 한 농부가 이 낯선 길손들을 잘 영접해주었습니다. 변장을 한 왕과 신하들은 며칠 동안 거기서 잘 묵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라 정세가 회복되어 왕은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왕은 그 농부가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 것과,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남을 잘 대접해준 것이 기특해서 농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농부는 낯선 길손들이 그실 왕과 신하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왕은 농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그러나 농부는 이렇다할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이제 와서 제가 출세를 원하겠습니까, 영화를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금은보화를 원하겠습니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 제 생일잔치에나 한번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환갑인 지라, 자식들이 힘을 모아서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어준다는 군요.”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며칠 후, 한 나라의 왕이 시골 초가집에 사는 일개 농부의 환갑잔치에 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집은 귀한 집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일 하나로 인해 농부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 하나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종교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는 소실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서자로 태어났기에 그의 생활은 언제나 우울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자세는 아닙니다만,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시간에까지도 성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강의하는 선생님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질책하듯이 “너, 지금 무슨 책을 보고 있느냐?”라고 물어보자 가가와 도요히꼬는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 진리를 찾는 순간, 다른 책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자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는지 목사님께 보여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 여러분, 잘 믿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 여러분 가정의 어린아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아이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보십시오. 그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하십시오.

 

 
 

 

▣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옛날 장작불을 때는 난로 앞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었다고 합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입니까 ? 잠자리에서 금방 일어나 불을 쬐려고 하면 불 속에 들어가도 춥습니다. 그러나 몸소 장작을 패면 패는 동안에 덥고, 불피워서 덥습니다. 이중으로 따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

 

18세기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세인트 폴 성당을 재건할 때의 일입니다. 여러 해가 걸리는 그 큰 공사를 추진해나가던 어느날 크리스토퍼 렌은 평상복 차림으로 공사 현장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는 채석장에서 돌을 다듬느라고 수고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 이 사람은 묻는 사람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여섯 자 길이에 석 자 폭 되는 돌을 다듬고 있소” 그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반갑지 않다는듯이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오. 벌써 몇 해째 이렇게 돌만 다듬고 있소.”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입니다. 그의 글을 읽고 감동받은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겠습니까 ? 왜 나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서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나요 ?”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가 쓴 글을 여러 번 읽어 보았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확실한 의식, 그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하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와 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공교롭게도 같는 주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됩니다. 그런데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주영하가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병입니다

 

어느 소아과 병원 의사 선생님이 파리하게 병든 어린 아이를 진찰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으로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까 ?” 하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병입니다.” 다시 어머니는 물었습니다. “나는 이 어린 아이를 열심히 사랑했는데요.”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머니는 사랑했다고 하지만 이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흔적이 없습니다.”

 

 
 

 

▣ 커다란 금 십자가

 

어느 때 친구가 전에 없이 커다란 금 십자가를 가슴에 단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붙들고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어느 사람이 쓴 논문을 보았더니 가슴에 단 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위선도가 높다 그러더구만” 그랬더니 그는 당장 떼서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마디 더했습니다. “주머니에 떼서 넣는 사람은 더 위선자라고 그러더구만.”

 

 
 

 

▣ 너 왜 우냐

 

어느 어머니가 딸 셋을 데리고 혼자 살았습니다. 거기에다 고아원에서 양녀 하나를 더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 애를 동생으로 알고 너희들이 같이 사랑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가 낯선 곳에 와서 계속 웁니다. 언니들이 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위해서 인형도 갖다 주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입히고 하며 별 방법을 다 썼지만 이 어린 아이는 계속 웁니다. 사흘이나 우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제일 큰 언니되는 아이가 너무 답답해서 “너 왜 우냐” 하면서 같이 붙들고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둘이 쓰러져 잤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울더랍니다. 문제는 나와 함께 울어 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 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유명한 정신 의학자 칼 융(Carl G.Jung)은 “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심리적 현상이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 벽에 부딪히거나 혹은 ‘이것이 한계다’하고, 지능의 한계, 능력의 한계, 그리고 인생이라는 길에서 이것이 한계다, 하고 느끼는 순간에 이러한 심리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불안함’입니다. 이 한계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한계 밖의 일에 대해서는 예측도 불허합니다. 그러므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앞에 어떤 일이 있을까 하며 그야말로 망망한 대해에 던져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둘째는 ‘억압감정’입니다. 아주 확 눌려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보다 더 무겁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는 아주 사라진 것같이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 제자의 길과 그 개체

 

그런고로 본훼퍼 같은 신학자는 <제자의 길과 그 개체>라고 하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시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 가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첫째, 단독 결정이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 물을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문제이니까. 아내고 남편이고 자식이고, 아무와도 관계없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생명의 문제이니까 단독으로 결정해야 한다. 둘째, 단독으로 나서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혼자 나서야 한다. 셋째, 세상과의 관련성을 청산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끊어버려라. 툭툭 잘라 버려라. 그러지 않고는 결코 사람의 바른 모습, 그리스도인의 바른 제자가 될 수 없다’

 

 
 

 

▣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학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내가 이 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선배되는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선배되는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 되느니라. 명령 떨어지는대로만 시간시간 복종하면 돼. 네 앞에 할것까지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아, 간단하군요.” 가만 있다가 이 머리좋은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럴 때는 말이야,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단히 중요한 예화입니다.

 

 
 

 

▣ 이것이 예수믿는 것이다

 

왜 우리의 신앙 생활이 나약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의 관계성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 문제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예수 안에서 이제는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믿는 것이다.”

 

 
 

 

▣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189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자에게 찢기어 병신이 된 팔을 그대로 안고 단상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칭찬할 때, 그는 답사하기를 “저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렵니다. 지금까지 저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의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진리

 

성 어거스틴은 진리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말했다.

첫째, 진리는 사실이다. 즉 셋에 셋을 곱하면 아홉이고, 다윗은 유대나라 왕이었다는 사실이 진리라는 것이다.

둘째, 진리는 실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말이다.

세째,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가 진리이다.

네째, 그 실재를 깨달은 사실 그만큼이 진리다 라는 것이다.

 

 
 

 

▣ 인류에게 봉사하였다

 

여러분, 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를 좋아한다. 그분은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대한 장례식을 원치 않습니다. 나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분은 부디 너무 길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에서는 나의 노벨 평화상에 관하여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위, 명예 등에 관해서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의를 위해 외쳤다고만 해 주십시오. --- 오직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에게 봉사하였다고만 말해 주십시오.”

 

 
 

 

▣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인정할 만큼 정결하고 경건하게 일생을 살아 온 한 수도사가 있었다. 마귀들이 그를 시험하였다. 돈으로 시험하고, 여자로 시험하고, 직위로 시험하고 ---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시험하였으나 수도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마귀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럴 때에 어느 마귀가 자신있게 나섰다. “내가 시험을 걸겠다”하고 수도사에게 다가갔다. “수도사님 !” 하고 인사를 했다. “왜 그래 ?” 수도사가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마귀는 점잖게 말한다. “수도사님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번에 수도사의 얼굴빛이 달라지더란다.

 

 
 

 

▣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설화 한 도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이 되어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뿐 아니라 온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주겠다” 라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굿간 한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쬐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 나는 생선마리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 일 없을 때에는 쓸모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말인가’ 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어느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있을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 앉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 이런 내용의 설화입니다.

 

 
 

 

▣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사람으로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한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의 한 분입니다. 그는 언어에도 능통하여 성경을 34개 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으며 또한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어느날, 큰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를 모시고 베푸는 환영회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으레 못된 사람이 끼게 마련인가봅니다. 그곳에도 윌리엄 커레이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에 배가 아파서 망신을 주려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에게 참으로 무례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젊었을 때에 구두를 만드는 직공이었다면서요 ?” 과거를 들춥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순간에 이렇듯 불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윌리엄 커레이는 껄껄 웃으면서 평화로운 얼굴로 대답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신다가 헤진 구두를 깁는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부르심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

 

내가 구라파의 어느 교회에 갔다가 참 좋은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예배당 정면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지만 내가 방문했던 교회의 예배당 정면에는 동그랗고 커다란 등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라고 그랬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눈 앞에 앉아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 이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예배드리자 해서 그런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 아닌가 ?

 

 
 

 

▣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1920년에 김인서 장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윤병구 선생입니다. 이 사람은 비폭력과 무저항주의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김인서 장로를 만나게 되자, 대뜸 한마디 합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했는데, 그따위로 해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대항해야 될 게 아니오?” 그 때에 김인서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소인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대용(大勇)이요, 영적 용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해서 윤병구 선생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

 

콘스탄틴 대왕은 로마에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의 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니, 그의 신하인 문무 백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기독교인이었기에 부하들에게 관직과 기독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명령했다. 기독교를 따르려면 관직을 포기하고, 관직에 있으려면 기독교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 때에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왕께는 죄송했지만 관직보다는 예수님을 택했다. 물러서는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편안했지만 왕은 대단히 괴로웠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더니 그 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등지고 관직을 택했던 것이다. 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남아 있는 변절자들을 다 내어 보내고 오히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들을 다시 불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 기왓장 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이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 때 루터는 말했다. “재판정 기왓장 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는 “오, 하나님이여 !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는 외마디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나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깨끗이 맡겨야 한다. 그래야만 놀라운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저 유명한 인도의 정신적, 민족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독실한 예수 숭배자이면서도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숭배하면서 왜 전형적인 교인이 되지 않고,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그는 그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가 교회에 안나가는 이유 가운데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 안두루스라고 하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간디는 그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고, 그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도 듣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간디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예배당 문지기가 유색인종이라고 해서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교회에 다시 나가지 않았답니다.

 

 
 

 

▣ 중생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

 

어느 신문기자가 유명한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부드 대장에게 물었습니다. “다가오는 미래에 닥쳐올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침 윌리엄 부드는 나이가 많아 임종을 가까이 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세계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위험은 중생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입니다. 추상적인 지식만을 전하는 말만 하는 철학적 기독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하지만 그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없는 천국을 말하는 잘못된 교리, 이런 것들이 앞으로 문제될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문제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 교회의 오해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몇 가지로 큰 오해가 있다. 에밀 브루너의 <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하고 있듯이,

첫째, 교회를 학교(institute)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룹별로 여러 가지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지만 그것 자체를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 공부와 교회는 별개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서 교회를 학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헬라식의 판단이다.

둘째, 친교(koinonia, fellowship)하는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며 친교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은 망상이다. 물론 성도의 교제가 있지만, 이것이 결코 교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세째, 교회를 자선사업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향하여 “도대체 교회가 무엇하고 있느냐 ?”고, 교회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야단을 한다. 자신들은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 교회가 돈을 쓰지 않고 무엇하느냐고 원망인 것이다.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는 구제할 뿐이지 구제를 위한 기관은 아니다.

네째, 불의에 항거하는 어떤 저항단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 그렇다면 가게

 

어떤 사람이 도시에 나와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니까 ‘이 귀한 복음을 어떻게 나만 듣고 있겠는가, 내 고향에는 아직 교회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으니 내가 선교사로 고향에 가서 예수를 전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스승을 찾아가 뜻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우리 고향에 선교사로 가렵니다.” 그러자 스승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거 어려울걸세. 고향에 가서 예수를 전해보아야 누가 자네 말에 귀나 기울여주겠는가.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셨는데 ---”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조롱하지만 않는다면 만족하겠습니다.” “글쎄, 조롱도 할 것이고 욕을 할지도 모르는데 ?” “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돌을 던지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위로가 되겠습니다.” “만약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 “돌을 던진다면 칼로 찌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칼로 찌른다면 ?” “칼로 찌르더라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죽게 된다면 ?” “예, 그렇다면 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그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제야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가게”.

 

 
 

 

▣ 어찌하여 너는 한국으로 가지 않느냐 ?

 

한국교회사를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언더우드 박사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1884년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인도행을 결심합니다. 당시 많은 질병과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던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년 동안 의학과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이렇듯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무렵, 어느날엔가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한국으로 가지 않느냐 ?” 그는 환상을 겪은 뒤에, 정신을 수습하고 한국이 어디 있나를 지도상에서 확인해봅니다. 이것이 언더우드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입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아침, 인천항에 첫발을 내림으로 한국교회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 졸지에 개새끼가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그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나 호랑이 맞아?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어미는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은 새끼니까 너는 틀림없는 호랑이다." 또 물어봅니다. "강아지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맞아?" 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야,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나는 김익두 목사님 살아 생전에 몇 번 뵌 것을 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촌 서북교회에서 목회할 때 제가 그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으로부터 친히 들은 이야기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서 제가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자주 말씀드립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교통수단이 좋지 않을 때에 여름에 보따리를 걸머지고 산을 넘어가는데, 너무 덥고 괴롭지마는 빨리 올라가서 산정에서 바람을 좀 쇠면서 쉬고 갈 것이다 생각하고, 참고 올라가서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때라 윗통을 다 벗어 젓히고 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렇게 쇠고 있었어요. 그런데 맞은 편에서 술취한 친구 하나가 비틀비틀 올라오더니 딱 쳐다보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그러고는 막 때리는 거예요. 그냥 맞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할까요?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수듯이' 그냥 부수는 거예요. 그냥 때려부수는 겁니다. 한참을 때리더니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리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이 "형님 다 때렸소? "그러고 악수를 했는데, 그 김익두 목사님 손이 아주 억셉니다. 딱 붙들고 악수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하셨습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김익두야!" 사내가 깜짝 놀랐대요. 아이쿠, 죽었구나. 벌벌 떱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하던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까지 끝나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네가 살았지 않았느냐." "아이구, 그러면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뭘 어떡해? 따라와." 데리고 가서 부흥회 참석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하고, 그가 뒤에 장로가 됐다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씀하시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제가 한순간 적에게 이롭게 한 것은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봉무제라고 하는 노나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부라는 고을의 원님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불현듯 이웃 제나라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봉무제는 모든 고을 백성들을 서둘러 성 안으로 모이게 하여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침 보리를 추수할 때인지라, 성 밖 들판에는 보리가 노랗게 익어 있었습니다. 만일에 성 안으로 피해 들어간다면 제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다 약탈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봉무제에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성 안으로 피할 것이 아니라,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보리를 추수해서 각각 가지라고 해버립시다. 그러면 너도 나도 달려들어서 재빨리 추수할 것입니다. 1년 동안 수고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적에게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봉무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결국은 그냥 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았고, 제나라 군사들이 그 많은 곡식을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이 사실이 온 나라에 알려져서 봉무제는 급기야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임금님은 봉무제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적에게 이로운 일을 하였느냐? 차라리 그 곡식을 불질러버리든지 할 것이지!” 그는 정중하게 말합니다. “제가 한순간 적에게 이롭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거두어 먹으라고 한다면,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도 피땀흘려 살 생각은 안하고, 남의 것은 공짜로 아무 때에나 얻을 수 있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불로소득을 한 것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못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10년이 걸려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임금님은 봉무제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고는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 자전거 도둑은 빼놓고요

 

토리라고 하는 네 살 된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오빠에게 조그마한 새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오빠는 자전거 뒤에 토리를 태워주었습니다. 토리는 자전거 타는 것이 재미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뒤뜰에 놓아둔 자전거를 그만 도둑맞았습니다. 온 집안이 이 일로 인해서 다 기분이 안좋았습니다. 특별히 토리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토리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아버지, 어머니, 오빠 주신 것을 감사하구요, 모든 것을 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전거 도둑은 빼놓고요.”

 

 
 

 

▣ 보시오. 행복하지 않소?

 

어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비가 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길에 온통 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짜증을 냈습니다. “하필이면 우리 결혼식 하는 날에 재수없이 비가 와가지고.....” 신랑이 신부를 달랩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이런 날로 정한 게 잘못이지. 또 비가 온다고 해서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려서야 되겠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그것이면 됐지 이까짓 비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소?” 아무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후, 방안에 들어와서 불을 켜놓고 보니 그것 참 분위기 있더랍니다. 비가 오니 밖에도 나갈 수 없고 둘만이 방안에 있으니 절로 무드가 생깁니다. 신랑이 말합니다. “보시오. 행복하지 않소?” 여러분, 날씨 탓할 것 없고, 세상이 어떻고, 라고 말할 것 없습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고요해야 합니다.

 

 
 

 

▣ 선과 악이 공존한다

 

탈무드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노아 홍수 때의 일입니다. 많은 비가 오고 이제 홍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물에 잠기게 될 때, 노아는 모든 짐승들을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선(善)이 혼자서 덜렁덜렁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전부 한 쌍씩 들어오라고 했는데 너는 왜 혼자 들어오는 것이냐?”하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선은 자기와 짝이 될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제서야 노아는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사람들이 ‘세상에 왜 악이 있을까? 왜 선과 악이 함께 있을까?’를 머리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이런 이야기까지 생긴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유는 묻지 마십시다.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 30년 동안을 고생했다

 

한 젊은 농부가 어떤 농부와 나란히 이웃하여 오랫동안 살았는데, 어느날 이웃 농부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독을 당하였습니다. 아주 분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가 난 농부는 복수할 양으로 존슨쵸라고 하는 잡초씨를 이웃 농부의 밭에 뿌렸습니다. 당연히 그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얼마 후에 그 농부의 딸과 그 밭을 이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습니다. 농부는 그 밭의 잡초를 없애느라고 무려 30년 동안을 고생했다고 합니다.

 

 
 

 

▣ 선을 한가지도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것

 

페르시아의 왕이 어느 날 세계적인 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 무엇이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그리이스의 현자는 “늙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도의 현자는 “사람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 만한 선을 한가지도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회복시켜 주시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시력은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의사는 당황해서 재수술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은 돌아왔으나 또다시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할수없이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양자택일을 해야겠는데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 시력입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입니까 ?” 그 환자는 깊이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잊어버려도 괜찮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회복시켜 주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 우러러뵈는 연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이 동경땅에 발을 디디었다. 들은 바로는 동경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이 적국의 장군을 뜨겁게 환영했다고 한다. 매스컴들은 그 모습을 가리켜 이례적인 광경이었다고 보도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 환영 군중을 향하여 유명한 일장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의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을 하고 있다. “온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 문제입니다. 도덕 문제는 종교 문제입니다. 종교 문제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하고 연설을 맺은 것이다. 오늘에 다시 음미해 보아도 위대한 연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맥아더 장군의 면모가 절로 우러러뵈는 연설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맥아더 장군이 지적한 문제는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이다.

 

 
 

 

▣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

 

중국의 철학자인 노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것이 얌체 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 그러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에 노자는 대답합니다. “강하면 부러진다. 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센 바람이 불 때에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제자는 되물었습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마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다시 노자가 대답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은 남들의 미움을 받기 쉽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한다.”

 

 
 

 

▣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학교라고는 국민학교만 조금 다녀본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적도 많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중에 스탠톤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링컨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가 한 말은 유명합니다. “링컨은 교활한 어릿광대, 오리지날 고릴라이다. 고릴라를 구경하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주 스텐필드로 가라. 거기에 가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것이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그 스탠톤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도 당신을 비난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여유있게 대답합니다. “그 자리는 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하거든요. 그런고로 다 극복할 수 있어요.” 여러분, 링컨은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훗날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에 가장 슬피 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강합니까? 이 여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링컨은 철저한 사명의 사람이기에 평생 자기를 비난하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독일 쾰른지방의 어느 건물 지하실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낙서로 남아 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햇빛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에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엄연히 계심을 믿는다’ ---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그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어느 전쟁 포로가 하나님께 고백한 기도의 말을 새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

 

 
 

 

▣ 예언할 수 있는 재능

 

어느 날 한 신문 기자가 윈스턴 처칠 경에게 기자 회견을 청하고 물었습니다. “정치가가 되기 위하여 가장 바람직한 자질은 무엇입니까 ?”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일 내주 내달 내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언할 수 있는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

 

프랭클 박사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치하의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대한 것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 6백만에 이르는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갔습니다. 끔찍한 생체 실험과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가스실로 옮겨져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나치 독일의 그 죄악상과, 유대인들이 그 핍박과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는가를 고발하고 연구하면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를 이렇게 끝냈습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쇠약해졌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은 살아남았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동료들에게도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 똑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소망을 지킨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 애굽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

 

어느 때 미국의 시카고에서 미술품 경매가 있었습니다. 값비싼 미술품들이 다 경매된 뒤에 오직 하나의 그림이 남았습니다.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싸게 14불 75센트에 팔렸다고 합니다. 뒤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은 희랍 화가인 미네르바의 <애굽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 이라고 하는,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서 아주 유명한 그림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17세기에 잃어버린 것인데, 시카고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내 그 그림은 다시 5만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다. 5만불도 넘는 이 귀한 그림을 14불 75센트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 결국은 둘 다 망한 것이다

 

옛날, 욕심 많은 사람과 질투심 많은 사람이 한 수도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갈림길이 나왔다. 수도사는 두 사람과 헤어지는 기념으로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한 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다른 사람은 앞 사람이 소원한 것의 두 배를 가지게 될 것이오” 욕심 많은 사람은 생각했다. ‘내가 먼저 소원을 말하면 저 녀석이 나보다 두 배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겠지. 그렇게 큰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암 없구말구’ 질투심 많은 사람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채 서로 상대방이 먼저 소원을 말하기만 기다렸다. 시간이 한없이 흘렀다. 마침내 수도사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재촉했다. 그러자 욕심많은 사람이 질투심 많은 사람의 멱살을 부여잡고 위협했다. “네가 먼저 소원을 말하지 않으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 !” 질투심 많은 사람은 힘으로 상대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좋다 ! 내가 먼저 말하지 ! 수도사님, 제 왼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 자, 어떻게 되겠는가 ? 질투심 많은 사람은 한쪽 눈을 잃고,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을 다 잃게 되었다. 서로가 제 유익만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둘 다 망한 것이다.

 

 
 

 

▣ 그 물건은 저 집에 가면

 

일본에 미우라 아야꼬라는 기독교인 여류 작가가 있다. 그가 쓴 <빙점>이라는 소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분은 한때,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웠으므로 집 앞에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냈다. 그러나 돈만 벌겠다고 악착을 부리지 않고 오는 손님들에게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봉사했다. 그 결과, 이 구멍가게는 사람들의 신용을 얻게 되었다. 오히려 장사도 잘되어서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올 만큼 번창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일하는 아내를 보고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이웃이 다 어려운 사람들뿐인데 우리 가게로만 손님이 몰려서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면 어떡하지 ?”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곧 가게 물건을 줄였다. 어떤 물건은 아예 가져다 놓지도 않았다. 손님이 찾으면 “그 물건은 저 집에 가면 사실 수 있습니다” 하고 다른 구멍가게로 손님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남모르는 기쁨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빙점>이라는 소설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 기가 막힌 한 편의 촌극

 

언젠가 우리 교회가 아닌 예식장에서 우리 교인의 자녀들의 결혼식을 주례한 일이 있습니다. 주례사가 끝난 다음에 피아노 5중주의 축하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 곡목이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조바니 마르티니의 유명한 노래입니다. 그러나 곡목은 사랑의 기쁨이지만 그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이 사실을 신랑 신부가 알았더라면 기절할 노릇이지요. 이런 때에는 모르는 것이 다행입니다. 아무튼 그 노래가 나오자마자 저는 내심 ‘아이쿠, 큰일났구나, 어떻게 저런 곡을 연주할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또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가사의 뜻이 완전히 결혼 망치는 것일 때도 있습니다. 그저 멜로디만 생각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는 걱정을 해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한 편의 촌극입니다.

 

 
 

 

▣ 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

 

제인이라고 하는 믿음이 좋은 학장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그를 존경해서 이렇게 불렀답니다. ‘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같이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은혜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듯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깃발과 같다. 어느 성에 깃발이 올라가 있으면 그곳에 임금님이 와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은혜가 있으니 나는 기쁠 수밖에. 내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덕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마음이 기쁘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있으니까. 내게 기쁨이라고 하는 깃발이 휘날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숨길 수 없습니다. 그는 기뻐할 수밖에 없어요. 항상 기쁠 수밖에 없어요. 사랑은 동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 진정한 친구

 

니코마코스라고 하는 교수는 그의 윤리학에서 우정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쾌락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사귀는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저 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얼굴보고.... 그런 것 자체가 좋아서 만날 뿐이지 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용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이득이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 또 사귀어 두면 이모저모로 유익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그런 의미의 우정입니다. 세 번째는 덕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서로가 존경하기 때문에, 그 인격을 존경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함께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는 것입니다.

 

 
 

 

▣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테레서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보다 잘사는 사람도 많고, 당신보다 높은 사람도 많고, 당신보다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혹 그들을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수녀는 어린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보지 않으니까 남이 어떻고, 저가 어떻고 하며 시기 질투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럴 마음도 없고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 협력할 줄을 몰라요

 

너무나도 어이없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여러분도 잘 아는 얘기니까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뉴욕이나 로스엔젤레스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느 유대사람이 생선가게를 합니다. 그런데 유대사람이 옆자리에 한국사람이 생선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깜짝 놀랍니다. ‘아이쿠, 큰일났구나! 저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새벽부터 일을 하니까 손님 다 뺏기겠구나’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또 그 옆에 한국사람의 생선가게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이제는 됐다!’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저 사람들끼리 서로 질투하니까요. 자기네들이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경쟁하고 질투합니다. 결국에는 둘다 망할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게 한국사람입니다. 혼자 앞에서 큰소리 치는 것은 잘해도 뒤에서 이름없이 섬기고, 받들고, 봉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둘만 모이면 싸우고, 셋이 모이면 망하고 맙니다. 협력할 줄을 몰라요.

 

 
 

 

▣ 나같이 우수한 종자는

 

그 옛날, 로버트 케네디의 인기가 한창 높았을 때입니다. 그의 기사가 라이프지에 크게 났습니다. 그때 그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스키장 눈 위에 웃통을 벗고 누운 것을 사진찍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자녀가 몇 명입니까 ?” “열하나입니다” “어떻게 그다지도 많은 아이들을 가지셨습니까 ?” 이 질문에 대한 로버트 케네디의 대답이 라이프 지에 기사로 실렸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섬찟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나같이 우수한 종자는 후손을 많이 퍼뜨려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으로서 누가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따위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로버트 케네디의 최후를 보십시오. 그러한 기사가 실린 지 얼마 후 그는 유언 한마디 못 남기고 비명횡사를 당했습니다.

 

 
 

 

▣ 예수의 역사 2천년

 

<예수의 역사 2천년>이라고 하는 책이 불과 며칠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예일대학 교수, 자루스라브 페리칸이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역사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고찰한 그런 책입니다. 그는 이 책 속에서 세계의 모든 역사는 곧 예수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예수를 영접했느냐, 예수를 배반했느냐, 또 예수께 충성을 다 했느냐, 아니면 예수의 진리를 져버렸느냐, 이에 따라서 모든 나라, 모든 개인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그런 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세금매길 것이 없군요

 

어느 목사님 댁에 세무서에서 세금을 정하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재산이 얼마나 있습니까 ?” “저는 부자입니다.” “그래요 ?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 “우선 천당가는 티킷을 가졌고, 건강한 아들딸이 있으며, 지혜로운 아내가 있고, 그리고 오늘 밤에 누워 잘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부자입니다.” “예, 부자임에는 틀림없는데 세금매길 것이 없군요.”

 

 
 

 

▣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기 규범

 

성 베르나드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덕중에 겸손이 가장 중요한 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잘못은 교만에 있고 겸손하기만 하면 자유하고, 평화롭고,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덕을 익히기 위하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기 규범을 만들었어요. 첫째, 자기가 자기 죄를 알고 비천에 처할 줄로 알라. '내가 가장 큰 죄인이다, 모든 사람 중에 내가 큰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자기 스스로의 위치를 가장 낮은 데에다 두라. 두 번째, 자기 죄를 통회하고 사실대로 고백하라. 죄가 그대로 나타나는데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 마라. 잘못해서 잘못했다는데 그것이 잘못입니까? 숨길 것도 없고 변명할 것도 없다,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 일체 변명하지 말고 통회자복하고 그대로 정직하게 자기를 내세우고 살아라. 그것이 겸손이요, 이것을 은폐하려고 그러면 안 되지요. 셋째는, 남이 자기의 결점을 알고 그리고 업신여기던가 멸시할 때 결코 그를 원망하지 마라. 내 잘못이 잘못이니만큼 무슨 말을 하든 말든 그대로 고맙게 받아들이라. 그것이 겸손이다. 추호도 원망하지 마라. 혹은 섭섭한 마음도 가지지 마라. 그것이 겸손이다 라고 자기가 자기를 일깨웠다고 합니다. 또 사람이 나를 비난할 때, 혹은 모욕을 할 때, 그런 굴욕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조용히 참으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내가 모욕을 당할 때 절대로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나를 모욕하는 사람을 미워해도 안 되고 이것 때문에 원망할 것도 없어요. 그것이 겸손이다, 이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전쟁과 공포와 역경과 고민과 이런 많은 사건들이 있을 때 걱정하지 마라. 언제 내 힘으로 살았냐?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인데 내가 뭔데 걱정을 하느냐, 그것은 교만이다, 걱정이 교만이다, 그거예요. 옳은 말이에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겸손한 것이요, 자유한 것이요, 그것이 겸손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

 

저는 겸손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꼭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 프란치스입니다. 성 프란치스의 제자가 환상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 구경을 했는데 거기에 보좌가 쭉 있는데 가장 높은 보좌가 있더래요. "이건 누구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란치스가 앉게 될 의자라'고 그랬습니다. 아무리 스승이지만은 너무 높아 진다니까 좀 질투가 났어요.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 다음에 성 프란치스를 만나가지고 조용한 시간에 "선생님은 선생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척 대답하시는데 "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때 제자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건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성자입니다. 세상에 강도, 살인, 뭐 도적질, 많은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나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거든.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있는 거야.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분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이렇게 말할 때에 제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에요. 가장 높은 사람이요, 가장 의의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보았다 !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보다도 방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하루는 우연히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함께 놀던 아가씨들이 따라나오며 반색을 합니다. “오랫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왜 안보였어요 ? 어서 들어오세요.”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갈길을 가며 중얼거리더랍니다.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보았다 !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옛날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다.” 이렇듯 철저하게 나 아닌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 내 관심은

 

에이브라함 링컨이 남북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니 만큼 의미가 큰 것입니다마는 어쨌든 서로 싸우고,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양쪽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양쪽이 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전쟁을 합니다. 또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7년으로 길어져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링컨은 대답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건가? 나는 하나님께서 내편에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정녕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그것 뿐이네.”

 

 
 

 

▣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강물에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구조대원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대꾸도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합니다. 그제야 구조대원이 물에 물었습니다.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소?” 구조대원은 말합니다. “저렇게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에 물에 들어가면 저가 나를 꽉 붙듭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손을 들어야 돼요.”

 

 
 

 

▣ 이것이 은총입니다

 

H. A. 아이론 싸이드 박사가 쓴 [In the Heavener]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얘기 한 가지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 갔다가 살인에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나와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는 담담하게 말을 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순간에 죄인은 “조건이 있는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왕은 깊이 생각하고는 그를 석방했습니다.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영국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여종은 없었다--석방된 이 죄인은 여왕의 종으로 일평생을 살았는데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답니다. 자, 이것이 은총입니다.

 

 
 

 

▣ 빨리 전화를 걸어서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산모는 자기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간호원에게 “우리 바깥 양반에게 빨리 전화를 걸어서 아무 일류대학 부속 유치원 근처에 땅을 사라고 말해 주시오” 라고 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세계문학 전집을 사다 주고, 당장 어른이 되고 당장 위인이 되기를 바라는 교육에 대한 극성은 알아줄 만합니다.

 

 
 

 

▣ 그때 들은 이야기

 

어느 사형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안 믿고 전도를 받아 들이지 않던 철저한 무신론자인데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목사님을 부르더랍니다. 그래서 제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 성경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며, 예수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다닐 때 교회에 가면 상준다고 해서 친구들 따라서 몇번 가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아무리 지워 버리려 해도 지워 버릴 수가 없고, 그 이야기는 죽음을 며칠 앞둔 이 시간에 내 마음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공자에게 안회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제자가 32살로 세상을 떠날 때에 공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랑하는 제3자와 함께 있을 때의 일입니다. 먼 길을 여행하는데 양식을 구하지 못한 공자 일행은 근 일주일이나 굶었습니다. 안회는 사방에 다니면서 식량을 구해와 밥을 지었습니다. 그 냄새가 너무도 좋아서 공자는 안회가 밥을 짓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회가 솥뚜겅을 열더니 속으로 ‘아,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내가 인의예지를 그토록 가르쳤는데 제가 먼저 먹어?’라며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래서 은글슬쩍 그런 내색을 비추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안회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솥뚜껑을 열고 보니까 얻어온 쌀이라서 그런지 수수가 몇 알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밥을 스승님께 드릴 수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제가 그것을 골라 먹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 때에 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때때로 믿어서는 안될 때가 있다. 또 마음을 의지하고 살지만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믿어서는 결코 안될 때가 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내 의견은 옳고 남의 의견은 틀렸다는 것입니까? 믿을 만한 눈도 믿을 것이 못될 때가 있습니다. 내 판단, 내 지식, 내 마음도 더더욱 믿을 수 없을 때가 있기에 온유한 마음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러니 예수믿어

 

한국교회사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이 저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기 경험을 말씀해주신 것 중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김익두 목사님은 모내기 하는 사람들이 점심 먹는 데 찾아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런데 한 젊은 청년이 나서서 “목사님, 이 마을에서도 전도해도 잘 안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며칠 전 비오는 날,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불이 붙어서 그만 나무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또 바위에도 벼락이 떨어져서 바위가 깨지고, 논바닥에도 떨어져서 논바닥이 이렇게 패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논바닥이 무슨 죄가 있고, 바위가 무슨 죄가 있고,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은 돌아서서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국민학고에 다녔나, 서당에 다녔나?” “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의 손에 무엇이 있었던가?”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그 막대기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때때로 흑판이나 책상을 치고, 그러는 것이지요.” “흑판이나 책상이 무슨 죄가 있나?” “아,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조니까 졸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끝까지 졸면 어떻게 되겠나? 마침내 그 막대기가 아이들 머리위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와 같이 벼락이 나무를 쳤고, 바위도 쳤고, 논바닥도 쳤다마는, 다음에는 사람들 머리에 떨어질 것일세.” “그것, 안되겠는데요.” “그러니 예수믿어.” 그래,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죠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 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열심히 쌓으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가서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기 위해서 방에 들어갔지마는, 이 어린아이는 정신없이 벽돌을 많이 쌓아놓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아이는 돌아서며 하는 말이 "쉿, 아빠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중입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이를 교회에 데리고 갈 때마다 떠들기만 해서 아무 말씀도 못 듣고 오는 것 같고 믿음도 없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만큼의 신앙심도 생긴 것 같고 해서 대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말을 멈추었으면 좋았을 걸, 한 마디 더 물어보았습니다. "얘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느냐?" 아이가 대답하는 게 걸작입니다. "아버지도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죠. 사람들이 다 잠들어 있잖아요. 떠들면 깨잖아요." 아버지가 이 어린 애를 데리고 교회에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때마다 졸고 앉았거든. 교회는 가면 자는 곳이다, 이렇게 이 아이에게 생각이 되었더라는 겁니다.

 

 
 

 

▣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1924년 제8회 올림픽 때에, 파리에서 열렸는데, 그 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에릭 리들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는데, 이 사람은 100미터 선수입니다. 이 사람이 기록이 좋아서 틀림없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유망주였는데, 하필이면 자기 경기가 그 배치된 것을 보니까 주일날이에요. 주일날 뛰게 되었어요. 이 청년은 뛰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사람들이 그를 비난합니다. 이 사람은 조국을 배반한 자요, 위선자요, 옹졸한 신앙인이요, 비겁한 사람이라고 갖은 욕설을 했어요. 국가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나간 사람이 주일날이라고 해서 안 뛰겠다는 그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갖은 욕설을 다합니다마는, 나는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올림픽 선수 되고, 금메달 목에 걸고 안 한다 이겁니다.

그렇게 다 집어치우고 조용히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권유하기를, "자, 100미터는 놓쳤지만 400미터가 남아있는데, 혹시 뛸 수 있느냐?", "해보겠다."고 대답합니다. 100미터 선수가 400미터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출발에서부터 100미터 뛰는 솜씨로 총알같이 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 200미터만 뛰고는 쓰러질 모양이다." 하고 걱정했는데, 400미터를 그대로 주파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100미터 선수인데, 어떻게 100미터 선수가 100미터 뛰는 솜씨로 400미터를 뛰었느냐고, 이런 기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200미터까지는 내 힘으로 뛰고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내가 100미터를 거부했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 나머지를 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맡기고 뛰었는데, 이렇게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1808년 비엔나에서 대작 <천지창조>가 연주된 적이 있다. 그 곳에는 작곡자 하이든도 물론 참석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몹시 늙고 병약하여 자기 의자를 끌어당길 힘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연주가 끝난 다음 감격한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여 하이든에게 갈채를 보내고 환호하였다. 하이든은 그 갈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자세로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지, 내 작품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의자에 앉다가 실수하여 뒤로 넘어지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이 하이든의 마지막 말이 된 것이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수상인 모세 다얀은 그의 운전 기사에게 늘 친구처럼 대했다고 한다. 아침에 서로 만나게 되면 운전기사는 모세 다얀에게 “모세, 오늘 아침은 어떻소 ?”라고 마치 친구에게 하듯 인사를 해서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모세 다얀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는 앞에 앉고 하나는 뒤에 앉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다.” --- 다시 말하면 나는 수상이요 저 사람은 수상의 운전 기사일 뿐 사람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란 말이다.

 

 
 

 

▣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노르웨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숲속에서 놀다가 처음 보는 이상한 새알 하나를 주웠습니다. 소년은 이 알을 가져다가 자기집 거위가 품고 있는 거위알틈에 넣었습니다. 얼마 후에 알은 다같이 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알에서 나온 새는 부리가 뾰족하게 생겼고, 깃털은 검은색입니다. 이 검은 새는 흰 거위새끼들을 따라 뒤뚱뒤뚱 걸르면서 함께 놀며 자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독수리가 나타나서 저들을 위협합니다. 어미거위는 빨리 피하라고 난리를 칩니다. 거위새끼들은 뒤뚱거리면서도 잘 도망가는데, 검은 새는 날갯죽지가 커서 빨리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뒤뚱거리다가 급한 김에 날개를 쭉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휭’하고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 새는 독수리 새끼였던 것입니다. 독수리였으나 거위 속에서 거위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큰 바람을 맞고, 또 위기에 들어서서는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훌쩍 시원하게 날아오르는 독수리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자기를 아는 일

 

헬라 철학의 비조라고 하는 탈레스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을 충고하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 남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입니까 ?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서점을 경영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한 손님이 책방에 들어와 책들을 뒤져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이 책이 얼마입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1달러라고 프랭클린이 대답하자 손님은 “조금 싸게 안됩니까 ?” 라고 흥정을 합니다. 이에 프랭클린은 “그렇다면 1달러 15센트를 주십시오” 라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손님은 “여보시오, 깎자는데 더 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라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천연스럽게 다시 “1달러 50센트입니다” 라고 값을 더 올려 부릅니다. 급기야 화가 난 손님이 따지고 덤빕니다. “왜 오히려 점점 더 비싸게 부르는 거요 ?” 프랭클린은 그 손님에게 대답합니다. “시간은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말씀으로 남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입니까 ?”

 

 
 

 

▣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사형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 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레닌그라드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

 

 
 

 

▣ 고백록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원래 시간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인식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에 예속된 현재가 있고, 현재에 속한 현재가 있고,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기억일 따름입니다. 다만 과거에 속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미래도 그렇습니다. 다만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동물과 같이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현재에 예속된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 라고 생각하는 철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막살이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 소녀 하나가 추운 겨울날에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나가라고 내쫓아서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아버지께서 잠든 다음에 들어 가려고요” 어린 아이는 아버지가 잠든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고 새벽 일찍이 아침상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때려서 내쫓았는데 너는 왜 오늘 집에 들어 왔으며 또 아침상을 차려서 가지고 오는 거야 ? 이 못난 아버지가 밉지도 않으냐 ?” 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더랍니다.

어째서일까요 ? 이 소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에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다마는 본심은 착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너도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말씀이 참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넋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성 다미엥이 몰로카이 섬을 지나가다가 불쌍한 문둥병자들의 무리를 봅니다. 그는 돌아와서 그 섬에 내려가 일생을 문둥병자와 함께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갖은 정성을 다하여 일생을 봉사하기로 한 것이니 갖은 봉사를 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다미엥의 마음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비판까지 합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병든 우리를, 불쌍한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당신의 기쁨일 거라고, 취미일 거라고, 사치한 행위가 아니냐고 -- 영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봉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저 유명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 그는 마침내 문둥병에 걸립니다. 그리고나서 저들을 돌보니 그 때에야 저들이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화폭에 그려 보겠다고 마음먹고 그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섰습니다. 여행도 다녀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지나가는 군인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입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대답이 화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그런 것이 어디 없을까?’ 그런데 아무리 헤메어 다녀도 이 세 가지를 한 데 모아놓은 소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이, 화가는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문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아이들이 “아빠”하면서 달려옵니다. 그 때, 그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 여기에 믿음이 있구나!’ 또한 남편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정숙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로 영접해줍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그는 집안에 들어설 때에 모든 생각을 다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참 평화를 느꼈습니다. 비로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정을 화폭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더는 방황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 흉내라도 좋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 보고 싶어합니다. 지금처럼 사진도 많고, 텔레비젼도 많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옛날에는 실제로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든 먼데서든,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듭니다. 한편,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예, 그렇게 하시지요.” 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왔습니다. 제 어머니를 아기 업듯이 단단히 받쳐 업고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된 사연이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참으로 효자로고.”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자, 이 소문이 퍼지자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 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라고 일러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을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흉내라도 좋아.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 흉내라도 내보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쩌면 그렇게도 부모님이 꼭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까?

 

 
 

 

▣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영국의 유명한 학자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지는데도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립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고 고스란히 비를 다 맞으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대체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물어보자 그제야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헌 책 장사를 하셨었지, 그런데 손님들과 어느날 어떤 책을 갖다주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야.....”하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내 몸이 아주 좋지 않구나. 네가 나 대신 오늘 하루만 시장에 좀 나가주렴.” 아들은 발끈 화를 냅니다. “헌 책 장사 하시는 것도 창피스러운데 내가 그런 심부름을 할 것 같아요?”라며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할수 없구나. 힘들어도 내가 나가야지.”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서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그 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 그 아들이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부탁을 거역했던 것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 얼마나 더 벌을 받아야 알겠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 참으로 불행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세상 어느 직장에 가서든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합니다. 순종을 못배웠으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행합니다. 순종을 기쁨으로, 순종을 자랑으로, 순종을 자유로 경험하면서 순종할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 노예는 자유하게 됩니다

 

신학자 윌리암 바클리는 이 말을 옛날의 역사를 예로 들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한번 노예로 팔리면 일생동안 노예입니다. 아무 소유권도 없습니다. 그의 재주, 그의 능력, 그가 버는 돈도 전부 주인의 것입니다. 그에 관한 한 무엇이든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주인의 것입니다. 때때로 노예가 주인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충성되고 아주 진실되게 일을 하면, 주인이 그것에 감동을 해서 자기 소유에서 얼마의 돈을 줍니다. 그러면 노예는 이 돈을 신전에 갖다 맡긴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노예가 얼마동안 일을 잘하여 주인이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울 때에 얼마의 돈을 주면, 노예는 다시 그것을 신전에 갖다 맡기고, 또 주면 맡기고.....이렇게 하기를 반복하여 그 액수가 어느 정도로 차면 노예는 주인을 모시고 신전에 가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찾아서 자기 몸값을 치릅니다. 그 때부터 노예는 자유하게 됩니다.”

 

 
 

 

▣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려고 만났지

 

빌립 브룩스라고 하는 미국의 감리교 감독 한 분이 연로한데 지금 중병을 얻어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누가 와도 안만나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렸을 때에 학교를 같이 다니던 잉글슨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전도를 했건만 끝까지 무신론자이기를 고집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을 다 거절하던 사람이 이 친구는 만나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갔습니다. 가족들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귀한 분들은 다 거절하시면서 왜 그 변변치 못한 무신론자 친구는 만나셨습니까?” 그러자 이 감독이 아주 유머러스하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천당에 가서 만날 것이니 인사 안해도 되지만, 저 친구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니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려고 만났지.” 여러분, 같은 시간에 사는 것 같으나 절대로 같은 의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 모든 것을 즐겼을 뿐이다

 

발명왕 에디슨은 식사 시간을 놓쳐가면서, 어떤 때에는 18시간씩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일을 많이 했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이렇습니다. “나는 한 번도 일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즐겼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즐겼고, 하고 있는 일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노동한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 그렇게 많이 죽여서 다 무엇에 쓸꼬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무지몽매한 흑인들을 위해 의료 선교를 펼치다 죽은 의사요 철학자요 음악가요 신학자였던 슈바이처 박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이야기 한토막을 전해 준다.

어느 날 그는 한 식인종 추장과 함께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슈바이처 박사는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세계대전까지 화제로 삼게 되었다. 박사의 전쟁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식인종 추장은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전쟁이 나면 한 열 사람 정도 죽습니까 ?” 박사가 “열 사람이라니요. 백 사람 천 사람 --- 당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는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식인종 추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더란다. “백인들은 사람 고기를 먹지도 않는다면서 그렇게 많이 죽여서 다 무엇에 쓸꼬 ---”

 

 
 

 

▣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에 별로 좋은 말은 아니지만 철면피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얼굴이 살갗이 아니고 철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의 유례를 보면, 중국에 왕광원이라는 출세주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웃사람들에게 아첨을 하는 데는 너무 낯간지럽게 행동해서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가령 높은 사람이 시를 읊든가 하면 그 시가 아무리 졸작이라도 높이 칭찬하여 이태백이도 따를 수 없는 시라고 아첨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광원의 얼굴에는 열 겹이나 되는 철갑을 깔았다고 말을 하게 된 것이 오늘날 철면피라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1555년, 니콜라스가 예수의 복음을 증거했다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집행당하기 하루 전날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동생되는 분이 찾아와 말합니다. “형님, 마지막이 되는 밤인데 제가 형님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함께 하룻밤을 지낼까 합니다.” 그러자 내일 아침이면 죽게 될 니콜라스는 말합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나는 평소와 하나도 다름없이 오늘밤에도 편히 잘 것이다. 푹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돌아가거라.”

 

 
 

 

▣ 당나귀를 발길로 걷어차나 ?

 

헬라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어느날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한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몽둥이로 소크라테스의 어깨를 여러 번 내리쳤다고 한다. 그는 어이없이 때리는 매를 그대로 맞았다. 조금 후에 또다른 청년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선생님, 저런 나쁜 놈에게 그냥 매를 맞습니까 ? 같이 때리시든지 아니면 욕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 하며, 오히려 그 청년이 흥분했다. 소크라테스는 껄껄 웃으면서 “자네는 길을 가다가 당나귀에게 채이면 돌아서서 당나귀를 발길로 걷어차나 ?” 하고 대답하더란다. 사람 아닌 사람하고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 아닌 그에게 충고는 해서 무엇하며, 미워해서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 제 3차 경고문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 가면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와 같은 큰 강이 있다. 물론 이 강은 계속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흐르는 물이다. 여기서는 노를 젓지 않아도 보트가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그런데, 어느 지점까지 내려오면 빨간 줄을 그어놓고 위험에 대한 제 1 경고문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위험하니 되돌아가라는 것이므로,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가야 한다. 제 1 경고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제 2 경고가 있고, 여기서부터는 되돌아가기가 조금 더 어려움을 알려 준다. 마지막 세번째 경고에서는, 이 경계선을 넘어가면 아무리 노를 저어도 상류로 올라가지 못하는 지점이다. 그대로 폭포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지점인 것이다.

인간성 상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 1 경고를 알아차렸을 때에는 살 길이 있다. 그러나 제 2, 제 3 경고를 무시하면 그때 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 이미 악마의 노예가 되었기에 그대로 떨어져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귀 죽는 것을 보고

 

이솝 우화에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사자와 나귀와 여우, 이 세 마리의 동물들이 협동으로 사냥을 했단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공정하게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사자가 나귀더러 말했다. “네가 한번 공평하게 나눠 보아라.” 그러자 나귀는 사자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사냥한 것을 똑같이 삼등분했다. 사자는 “내가 제일 많이 수고했는데 이건 공평치 못하다 !” 하고 화를 내며 나귀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더러 공정하게 분배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여우가 분배했을 때에는 사자가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여우는 사자 몫을 자기 몫보다 훨씬 많게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자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느냐” 고 묻자 여우는 대답했다. “나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해냈지”.

 

 
 

 

▣ 너무나 집이 낡아버려서

 

미국의 제 2대 대통령을 지냈던 존 애덤스는, 나이 많이 들어서는 종종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공원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그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존 애덤스는 대답을 합니다.

 

“예, 안녕합니다. 건강합니다. 그런데 집이 다 낡아서 지붕은 파손되고, 벽은 떨어지고 바람에 흔들려서 받침대까지 세웠습니다. 너무나 집이 낡아버려서 곧 이사를 갈까 합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존 애덤스는 대통령을 지낸 분이요 가정형편도 넉넉한 분인데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 한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니,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 하시다니요?”

존 애덤스는

“허, 이 사람 모르시는구만. 날 좀 보구려”

하면서 대머리가 다 된 자기 머리를 가리킵니다.

“이것 보라구. 지붕이 다 낡았지 않았소?”

또 자기 늑골을 보이면서 말을 합니다.

“이것도 보라구. 이렇게 바람벽도 다 낡아서 이제 바람이란 바람은 다 새게 되었어요. 아예 바람에 흔들려 쓰러질 지경이라 이렇게 지팡이에 겨우 의지하고 있지 않소? 받침대로 지탱하는 낡은 집이니 곧 이사가야지 뭐.”

 

 
 

 

▣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요

 

독일의 염세주의 철하자 쇼펜하우어가 공원 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공원은 텅비었습니다. 공원을 청소하는 공원지기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길래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요?”

이 퉁명스러운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요.”

 

 
 

 

▣ 지도자급의 고래 한 마리가

 

최근, 뉴질랜드의 북쪽에 위치한 그레이트 베리어 섬 해안에서 무려 140여 마리의 고래가 급히 헤엄쳐 뭍으로 올라오더니 다시는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집단자살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 희한한 사건을 놓고 전문가들이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그 연구 결과는 이렇습니다. 고래가 떼를 지어 다니는 데에는 반드시 지도자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고래는 그 지도자가 인도하는 대로 헤엄쳐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도자급의 고래 한 마리가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 리더십의 네 가지 요소

 

신시내티 대학의 총장을 지내다가 지금은 U.S.C 대학의 경영학교수로 있는 베니스는 지도자가 지녀할 리더십의 네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럴듯합니다.

첫째,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가이딩 비전(guiding 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책임은 이 비전을 사실로 승화시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 --- 지도자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분명한 방향감각을 가지고, 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마는 비행기 안에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까 ? 거기에 세계지도와 비행기가 나타나 실제 비행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까지 왔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다. 몇 마일 왔고 앞으로 몇 마일 남았습니다. 몇 시간을 왔으며 앞으로 몇 시간 지나면 도착할 것입니다 ---. 이런 것을 계속 보여줍니다. 이렇듯 지도자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이대로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둘째, 패션(passion)이 있어야 합니다. 정열과 열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스피레이션 옵티미즘(inspiration optimism), 즉 낙천적 영감이 필요합니다. 낙천주의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 망했습니다, 끝났습니다, 잘못됐습니다’ 라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 망한다고 해도 그만은 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 틀렸다고 해도 그만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지도자에게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미래로 향한 열의와 정열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째, 인테그러티(integrity) --- 성실성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실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기본적으로 알고, 그리고 솔직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시인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엄청난 실수를 할 것입니다. 사실을 인정하는 솔직한 마음이 우리에게 신임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성숙된 인격, 그것이 바로 성실성입니다.

네째,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미경험지를 향하여 백성을 인도하는 용기,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는 용기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 나도 초조하거든

 

전쟁준비를 해놓고 돌격의 때를 기다리는 장군이 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될 것입니다. 잠을 이룰 수 없이 초조해서, 그는 막사를 나와 군영을 돌아봅니다. 밖에 젊은 보초병이 서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 “초조하고 두렵습니다, 장군님” 장군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좋은 짝이 되겠네. 나도 초조하거든. 나도 불안해. 자네, 나하고 산책이나 하면서 이야기 좀 나누세.” 초조하고 불안하다고 말하는 병사를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도 초조하거든’ --- 이 한마디의 말이 병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 아랫사람과 고난을 함께하는 사람,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의로운 고생을 선택하는 바른 결단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문은 깨우쳐줍니다.

 

 
 

 

▣ 다만 피와 땀과 눈물을 약속합니다

 

처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자로, 11년 동안이나 영국 수상직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후보자들이 선거에 나서서 유세할 때,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내가 수상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 뭘 해주겠다’ 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처칠 경은 언제나 한결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피와 땀과 눈물을 약속합니다. 여러분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합니다.” --- 그는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바로 그것이야

 

옛날 한 젊은 재상이 나이많은 임금님께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죄의 유혹을 피하고 많은 시험을 이겨서 나라를 위한 깨끗한 충신으로 일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임금님은 그 젊은이의 그 뜻이 기특하여 지혜를 베풀었다. 재상으로 하여금 컵에다가 물을 가득히 채워서, 이 컵을 들고 제한된 시간 안에 시내를 한 바퀴 돌되, 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하명했다. 그리고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을 재상 뒤로 따르게 했다. 젊은 재상은 질문 한번 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임금님이 명하신 대로 제시간에 물컵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임금님은 크게 칭찬하시며 그의 수고를 고마워했다. 그리고 묻는다 “자네가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여자를 보았나 ?” “못 보았습니다.” “그럼 술집을 보았나 ?” “못 보았습니다” “그러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얼마나 나왔던가 ?” “임금님, 못 보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이때 임금님은 “바로 그것이야.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하노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시시한 일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이야”라고 말하며, 왜 그런 일을 시켰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백인 교회학교에 흑인 아이 하나가 다니고 있었다. 사실 흑인이 백인교회에 다니려면 따가운 눈총이나 여러 가지 서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이 철없는 어린아이는 늘 좋은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그에게 “너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 하고 물었단다. 그 아이는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옵니다” 라고 정말 예쁜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가 있다. 마귀가 찾아와서, 너는 이렇게 죄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실패했다, 너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죄인이다 ! 하고 몰아붙인다. 이에 루터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 --- 이래서 이긴 것이다.

 

 
 

 

▣ 사랑과 약속

 

영국 비토리아 왕조 때의 최대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알프레드 테니슨 경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서 열렬히 연애를 하던 끝에 결혼을 약속했다. 약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수업 중이고 가난한 데다 유명해지기도 전이어서, 섣불리 결혼을 했다가는 도대체 생활을 꾸려 갈 수가 없는 것이다. ‘1년 뒤에 보자’ ‘좀 더 기다려보자’ ‘조금 더, 조금 더 ---’ 하다가 무려 17년이나 흘려보내고야 맺어지게 되었단다. 요새 같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그토록 오랜 세월도 기다릴 수 있게 했는가 ? 다름아닌 ‘사랑과 약속’이다.

 

 
 

 

▣ 비서가 목사한테 설교를 하고 있다

 

위어스비라는 목사님에게 여비서가 있었다. 사고를 당해서 그 여자의 남편은 장님이 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그 여자 자신도 많은 시험을 겪고 고생을 하더란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비서를 위로한다. “나는 당신과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묻는다.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 목사님이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랬더니 여비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목사님” 하고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받아내야 되겠어요.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 비서가 목사한테 설교를 하고 있다. 옳은 이야기이다.

 

 
 

 

▣ 이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인간미를 이야기하자면 미국 뉴욕의 시장 중 남달리 유명한 시장으로 알려진 라과디아씨의 일화가 생각난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빵을 훔치다 체포되어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다. 그는 어찌하여 빵을 훔쳤느냐고 노인에게 묻자 울먹이면서 대답하기를 “죄송합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지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손이 갔습니다”라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다. 재판장은 “당신의 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벌금 10불을 내시오.” 판결을 하고서는 자기 지갑을 열어 10불을 내놓으면서 “이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처럼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죄로 이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나같은 죄인으로 벌금 내실 분이 있으시면 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모자를 벗어 돌렸다. 그 자리에서 47불을 모금해서 노인에게 주었고, 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정을 나갔다는 이야기이다.

 

 
 

 

▣ 나이많으신 어른께는

 

미국의 어느 극장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막이 열려야 할 순간에 큰 모자를 쓴 할머니가 객석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매니저가 발견했다. 매니저는 그가 모자를 벗어 주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다가 시간이 촉박하여 마이크를 들고 지혜롭게 말했다. “당 극장에는 나이많으신 어른께는 모자 쓰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할머니는 모자를 벗었다고 한다. “할머니 모자 좀 벗어 주세요”라는 말과 매니저가 한 말을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재치있게 하면 그 말의 효과는 극대화되는 것이다.

 

 
 

 

▣ 성 글라라 수녀

 

유명한 성 글라라 수녀는 젊었을 때 상당히 사치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녀가 된 다음에 그 생활을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일부로 쇠사슬로 된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험한 옷을 입으며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고행을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며 그의 고행을 높이 말하는데, 때로는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글라라 수녀는 이 비난을 참고 참다가 한번은 맞대고 욕을 해버렸다. 그리고는 또 마음이 아파 회개하면서 잘못을 찌른 혀를 바늘로 찔러 며칠 동안 말도 못하고 밥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다섯 개도 안 팔릴 거다

 

예측이 빗나간 것 가운데 대표적인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있답니다. 1943년, 그때 컴퓨터가 처음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로버트 왓슨이라고 하는 IBM 회장께서 컴퓨터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이거는 만들어봤댔자 온 세계에 다섯 개도 안 팔릴 거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천만 대가 팔리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런가 하면, 1970년에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기를, 이대로 가면 2010년에 가면 석유 매장량이 완전히 바닥이 난다. 석유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서 쓰고, 넉넉히 쓰고 남는답니다. 그것도 봐야 알겠지만.

 

 
 

 

▣ 당신이 살아온 그대로 다시 살게 됩니다

 

독일의 의사 안다라는 사람이 전해주는 독일 어느 마을의 전설 이야기가 있다. 그 마을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목욕할 수 있는 큰 컵이 하나 있는데, 컵을 한 바퀴 돌리면 그 컵 속에 들어 앉은 사람이 젊어진다고 한다. 돌리는 횟수만큼 사람이 점점 젊어지는 신비스런 컵이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오셔서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컵을 여러 번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컵을 돌리는 사람은 할머니에게 “할머니의 소원대로 젊어지기는 하겠습니다만, 다만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그대로 다시 살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서약서에 싸인을 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가만히 생각을 하더니, 그러면 젊어지는 것을 취소하겠다고 하며 되돌아갔다고 한다.

 

 
 

 

▣ 로마서 8장 18절

 

일찌기 미국의 인디에나 폴리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흉악한 절도범 하나가 지명수배 되어 쫓기다가 어디엔지 숨어 있습니다. 지하실에 숨어 있는 것을 형사가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문을 확 여는 순간에 양쪽이 다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제 어느 쪽이든 일단 먼저 쏘면 저쪽도 쏘게 되어 있어요. 둘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듯 긴박한 시간인데, 한첨 벼르고 있다보니 컴컴하던 실내가 윤곽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니 거기에 성경책이 놓여 있어요. 이걸 보고 형사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총을 버리고 성경책을 펴 들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을 읽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형사는 “자네는 이제 한동안 감옥생활을 하겠지만 장차 받을 자유와 영광에 비교할 수가 없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범인이 총을 버리고 무릎을 꿇더랍니다.

 

 
 

 

▣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

 

저는 아침마다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을 한번씩 읽어보거나 외워봅니다. ‘하나님이시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옵소서 ! 그리고 고칠 수 없는 것과 고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지혜를 주옵소서 !’

 

 
 

 

▣ 노벨상 제도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노벨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1833년에 스웨덴에서 노벨이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학자요 발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33세에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날 조간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 내용인즉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자가 동명 이인을 잘못 알고 “노벨이 죽었다” 하니까 그 노벨인 줄 알고 당장 ‘노벨 사망하다’ 하고 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노벨한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다, 죽음이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 라고 되어 있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 있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죽는다면 이 기사가 사실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노벨상 제도입니다.

 

 
 

 

▣ 밤새 새끼를 꼬라는 것

 

옛날에 어느 돈많은 할아버지가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해 섣달 그믐날 그 노비들을 다 해방시켜주겠다고 노비들 앞에서 공언했습니다. 노비들은 굉장히 기뻐하며 손꼽아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노비로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꿈에 그리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창 기쁨에 들떠 있는 노비들에게 주인은 짚단 하나씩을 나누어주면서 그것으로 밤새 새끼를 꼬라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른 노비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부려먹고도 이제 고작 하루 남았는데 그게 아까워서 끝까지 부려먹겠다고 ? 원 세상에, 이리도 고약한 할아버지가 또 있을까 ?’ 그들은 되는대로 짚을 한움큼씩 잡고 굵직굵직하게 새끼를 꼬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내던져놓고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또 한쪽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으니 기왕 하는 것 끝까지 잘해주고 나가자.’ 그들은 밤새도록 곱고 가늘게 새끼를 꼬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광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노비들한테 말했습니다. “여기에 쌓여 있는 엽전을 어제 각자 꼬아놓은 새끼줄에 끼워라. 끼울 수 있는 만큼 끼워서 가지고 가거라” 자, 노비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립니다. 새끼를 아무렇게나 굵게 꼰 사람들은 끄트머리에 겨우 몇 개, 그것도 간신히 매달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하루까지 충성한다고 곱고 가늘게 꼰 사람들은 거기에 엽전을 끼고 끼고 해서 바리바리 실어가지고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이다

 

요한 웨슬리가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웬 여자가 다가오더니 웨슬리에게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만일 내일 밤 12시에 목사님이 죽게 되어 있다면 남은 시간에 목사님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 웨슬리는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대답합니다. “여기에 적혀있는 원래의 계획대로 할 것입니다.”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이다 --- 참으로 뜻깊은 대답입니다.

 

 
 

 

▣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한 농부가 친구를 보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에게는 땅도 많고 재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자선사업에 쓰도록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서를 써놓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속상하구나.”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암소를 보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남들 보기에 많이 먹고 살도 쪘지만, 죽으면 내 살과 가죽을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남들은 왜 나를 보고 ‘돼지야, 돼지야’ 하며 손가락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암소가 핀잔을 줍니다. “너는 실컷 먹고 살이나 잔뜩 쪄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고나서야 고작 쓸모없는 고깃덩이나 주인한테 바치지만, 나는 어떠냐 ? 나는 열심히 밭을 갈아주고 짐도 져주고, 심지어는 우유도 바치지 않느냐 ? 나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도움을 드린단 말이다. 그러고도 죽은 다음에는 주인에게 고기까지 바치지 않느냐 ?”

 

 
 

 

▣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종말에 대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이야기했는데 들어보라.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어느 극장 뒤쪽에서 불이 났다. 관객들은 재미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극장 주인은 불난 사실을 갑자기 알릴 경우에 벌어질 큰 혼잡을 예상하고 조용한 설득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선 배우들 중에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한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모두 차분하게 이 극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인기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 위에 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이러저러해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 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를 친다. 아주 재미있어 한다. 당황한 연극 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곧 불길이 번져올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심히 박수만 친다. 아무도 믿어 주지를 않는다. 자, 어찌 되었겠는가 ?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극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나이많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 차라리 당신 스스로 고치라

 

책에서 읽은 이야기 입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는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기술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골치 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잔소리 많은 환자라고 합니다.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다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 ‘차라리 당신 스스로 고치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영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미안한 말씀입니다마는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아이를 가르쳐 만사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또는 공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따지는 그런 체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하면, 이것 먹으면 낫느냐, 이렇게 하면 꼭 낫느냐, 왜 그러느냐,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합니다. 치료라는 것이 A+B는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살고 죽고가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구나 할 밖에요.

 

세 번째 환자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환자입니다. 예를 들어 항생제 같은 약은 투여하고 나서 적어도 사흘이 지나서야 효과가 납니다. 그런데 약을 한 봉지 먹고는 왜 안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낫느냐,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본래 위장이 좋지 않아서 가끔 발작을 했습니다. 그래, 십 년 동안이나 한 의사로부터 계속 치료를 받았습니다. 위가 나빠질 때마다 그 의사에게 가서 회복하고, 또 회복하고..... 그러다가 그 방면에 더 훌륭한 의사가 있다고 듣고는 새로운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거기서 치료를 다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두가 후회했습니다. ‘전에 치료받던 그 의사에게서, 그 병원에서 치료받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이런 것입니까? 우리의 교육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영 순종할 줄을 모르고, 영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고---- 이런 인간은 구제불능입니다. 의사도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골치 아파합니다.

 

 
 

 

▣ 단 한 가지 안해보신 것

 

월링턴이라는 영국의 해군제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해군제독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병사하나가 상습적으로 탈영을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있어서 탈영은 사형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병사는 붙잡아서 감옥에 넣어두면 또 탈영하고, 붙잡아두면 또 탈영하고.... 사고뭉치입니다. 더이상 이렇게 놓아두다가는 영구 해군의 기강이 무너지겠기에 마침내 군법대로 사형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윌링턴 제독은 병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치고 싶었다. 제대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너에게 채찍을 들기도 하고, 처벌을 하기도 하고, 강제로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기도 하고,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도 안되는구나, 그런고로 너는 사형이다.” 그 때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제독님, 제독님께서는 저 병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하셨는데, 단 한 가지 안해보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제독은 곰곰히 생각하고는 맞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를 무죄석방,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병사가 그때부터 좋은 청년이 되었더랍니다.

 

 
 

 

▣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어떤 청년이 성경을 보는데, 전체적으로 보는 법이 없고 또 한 절씩만 봅니다. 성경을 보기는 봐야겠기에 꼭 한 구절씩만 보는데 아무 데나 점치듯이 딱 펼쳐 봅니다. ‘예수께서 가시니라’--그래, 나도 가야지, ‘예수께서 주무시니라’--나도 주무셔야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성경을 딱 펼쳐놓고 보았더니 마태복음 27장 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영 찝찝한 기분이 들은 청년은 아무래도 한 절을 더 봐야겠다 싶어 또다시 성경을 펴보았더니 누가복음 10장 37절이 나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더 곤란해진 청년은 다시한번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3장 27절이 나왔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겨왔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을 순교사라고 합니다. 이 순교사의 금자탑이라 할 만큼 두드러진 인물은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입니다. 그는 2세기 초중엽 서머나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던 감독인데, 그의 장엄한 순교는 모든 사람 중에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86세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기에 믿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법 때문에 어쩔수없이 폴리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형 집행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감독이여, 나는 당신이 이렇게 나이많은 노인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소. 그러니 거짓으로라도 제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놓아 줄 테니 다른 지방에 가서 예수를 믿든지 전도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때에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겨왔습니다. 그분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고 거짓말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 그는 한마디의 거짓말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를 위하여 두 시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 뒤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담대한 죽음입니까 ? 당시 온 교회가 그의 순교를 애도했음은 물론, 지금도 유럽에서는 해마다 폴리캅의 순교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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