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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1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1-30

by 【고동엽】 2022. 3.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1.거짓 선지자와 십자가

제가 듣건대 전에 어떤 거짓 선교사가 자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외치면서 자기의 말을 들르라고 부르짖었는데, 그의 이마에는 은으로 만든 둥글 한 것으로 가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 그것으로 가리고 다니느냐고 물어 보면, 만일 그것을 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그 빛을 보는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소경이 되는 까닭에 부득이 그 곳에 은으로 만든 것을 붙였다고 말 하드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잘 때에 그를 따라가던 사람이 그것을 한번 뜯어보았습니다. 몰래 뜯어보니까 그 이마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문둥이 흔적이 있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할 때에는 죄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죄에 속았습니다. 죄의 마력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우리 주님까지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하였던 그 죄의 정체를 알게되었습니다.
죄의 다스리는 권세가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볼 때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그 고난받으신 것으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 즉 자기의 살을 찢고 자기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는 죄에는 죽었지마는 의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십자가의 빛

우리가 예배당 뜰에 나가서 서울 사방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것이 보입니다. 삼각산이 보이고, 여러 가지 고층 건물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그것을 먼저 보지 말고 오늘 같이 해가 잘 비칠 때에 해를 한참 쳐다보세요. 그러다가 다음에 사방을 돌아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해를 본 눈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고 원수 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서 그 다음에 세상 것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것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향락이 귀해 보였지마는 물질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지위나 권세 같은 것들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서 오직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밝은 빛으로 그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나님의 의, 오직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십자가>에서

 

 
 



3.리빙스톤의 기도

만일 우리의 이 서울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한다고 하면, 이 서울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첫 째는 의로운 성이 될 것이요, 죄가 없어질 것입니다. 깨끗한 서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화평과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전체,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나라의 진정한 왕이 되시고 우리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 우리 국가 전체의 의와 평강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종려 주일은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영접하는 주일입니다.
제일 먼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턴이 바로 세상을 떠나기 전 날 아침 아니면, 그 날 아침에 마지막 일기를 남긴 것이 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간단한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오! 주여, 내 왕이여,” 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요, 자기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오늘 이 의의 깊은 종려 주일, 우리 하나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고, 우리 나라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해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는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에서

 

 
 



4.영원히 거하는 생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꽃과 같이 떨어지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어야 될 것입니다. 일시 일시 변하는 인간의 명상이나 인간의 사상에 두지 말고, 변하지 아니하는 우주의 지표 적 진리가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이 요한 1서 2장17절을 다시 들으십시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이처럼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북경 구경을 한번 했습니다. 고궁을 구경하고 별궁도 여러 곳을 가서 구경하는데, 한 곳에 가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아름다운 궁궐 가운데 어떤 한 방을 가리키면서 그 방이야말로 청조 말기에 가장 사치하고 호화롭고 세도를 부리던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방이라고 합니다. 그 방에는 아무 것도 없고 낡은 침대와 베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내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호화롭고 사치하고 그렇게 세도하던 서태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그 베개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에 권세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도 지나갑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에 가서 30여 년 전에 제가 졸업한 대학을 한번 더 방문하는 혜택을 가졌습니다. 집은 여전합니다. 캠퍼스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집도 여러 채를 더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한가지 섭섭한 것은 30여 년 전에 저를 가르쳐 주던 은사는 볼 수 없고, 다만 이 도회에 아직까지 살아 남아있는 은사는 80노인 밴드벨드 박사라고 하는 한 뿐이었습니다. 여러 은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제가 이번에 세 주일 남짓하게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다녀온 셈입니다. 돌아와서 서울을 돌아오게 될 때에 한 가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상은 삼각산은 여전합니다. 한강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계를 보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옛 정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권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지나갑니다. 권세도 지나가고, 일대의 문화도 지나가고, 예술도 지나가고, 주의와 사상도 지나가고, 모든 유행도 지나갑니다. 너무 유행만 따르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데모만능인 줄 생각합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청춘을 자랑하지 맙시다.
저는 6·25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 곧 따라갔습니다. 저는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라고 그래서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며 설교를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예배를 다 보고 여러분과 인사를 하는데 알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까맣고 자그마한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인사를 하면서“저를 알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좀 많이 당합니다. 암만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마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는 말“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저 남산 모루, 전에 목사님이 남산 모루에 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을 때 그 교회에 다니던 아무개올시다”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40년 전에 그 남산 모루에서 알던 그 아무개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잘 생긴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는데 3, 40년 후에 보니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세상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연령을 따라서 지나갑니다. 어릴 적에 있던 욕망이 좀 크면 사라집니다. 청년시대의 욕망이 노년이 되면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의 정욕도 환경의 변함에 따라서 또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5.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그러나 여러분, 지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여기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의 생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도“창천 유이 생남자( 蒼天有義 生男子) 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뜻이 있어서 남자를 내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경륜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거하겠다고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평양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흔히 대동강변 그 청루벽 아래와 모란봉과 을밑대와 그런 곳에 자주 산보하였습니다. 산보를 할 때에는 가끔 이런 생각이 납니다. 대동강의 물결은 그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또 항상 끊임없이 아래로 흘려갑니다. 그렇지마는 한편에 높이 솟은 모란봉이나 을밑대 청루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과 같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 만세 반석 위에 생의 근거를 둔 사람은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비결은 첫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영원한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도겠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되겠습니다.

 

 
 



6.하나님의 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 번은 어떤 교우가 자기 목사에게 가서 묻기를“어찌해서 주님께서 가룟 유다 같은 이를 택하셨습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곧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서서히 대답하는 말이“나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누구나 스스로 자기자신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는 오직 자기가 죄 덩어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 공통의 경험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열심히 살펴 볼 때에는 과연 예수 님의 제자들이 한 번 말씀한 바와 같이“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줄 생각합니다. 좀 더 양심이 예민하면“나는 쓸데없는 사람이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이렇게 낙심하기도 쉬운 줄 생각합니다. 혹은 자포자기 할 수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내가 저희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그리면서 계속해서“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 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7.하나님의 선한 손

제가 오래 전에 당한 경험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주저하지마는 오래 전 이야기이니까 괜찮은 줄 압니다. 제가 신의주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무슨 일이라고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마는 한 번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지고 용기도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 혼자 잇는 방에 들어와서 그저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있는데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확실히 모르지요. 제가 그 동안 잠깐 잠이 들어서 꿈인지 아닌지 모르지마는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합니다. 또 어떻게 피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더 갈 수 없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오른편 쪽으로 그만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 30년 전에 본 일이지마는 어제 본 일 같아요 ― 아마 사람의 손의 10배나 큰손이 오른 쪽에 와서 넘어지는 저를 얼른 붙들어서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무 피곤해서 왼쪽으로 또 넘어집니다. 또 다른 손이 왼쪽에서 못 넘어지게 붙듭니다. 앞으로 꼬꾸라집니다.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앞으로도 꼬꾸라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그 험한 길을 이 손이 붙들어서 가게 합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다가 깨어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읽은 성경이 이상하게도 에스라 7장 9절입니다.“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이것은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는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자기 동포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먼 광야 길입니다. 원수가 많은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넉 달을 걸어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천성 행로가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따라가는 길도 마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길처럼 황막한 광야 길입니다. 때때로 험한 준령이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장강대야(長江大野)가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때때로 함정이 잇습니다. 때때로 원수가 복병 하여 우리의 길을 기다립니다. 연약한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잇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손은 만 유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부탁하세요, 살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부탁합시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나를 믿다가는 실패합니다.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손>에서

 

 
 



8.하나님을 경외하라

미국의 유명한 목사요 또 초대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 잠깐 지낸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 번은“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이라고 하는 주제로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하는 말 가운데 마치 죄인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은 어떤 사람이 아주 흉측한 벌레를 손에 잡고 장차 불에 던지려고 하는 것 같은 운명에 있다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죄인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서 형벌 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세상에서 잠깐 지은 죄 때문에 영혼을 형벌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그러나 이 진리는 보통 성경에 가르친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님 자신이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보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는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가복음 9장 47-48절에는 주님께서 친히“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바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 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됩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9.모세의 신앙

그러면 사람은 어찌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못 보시는 줄 압니다. 전파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공기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나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 “눈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느냐?”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십니다.
우리와 같이 성경을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옛날 사람의 말 가운데도 암실기심이라도 신목여전(暗室欺心 神目如電)어두운 방안의 속이는 마음일지라도 신의 눈이 번개처럼 밝게 본다고 하는 옛날 사람의 경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는 것이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도 더 분명히 보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광선보다도 더 밝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하여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0.제2의 기회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고 하는 우리 한국의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실수와 실패는 곧 인간의 것이올시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십니다.
운동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선수가 달리다가 넘어진다고 할 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경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첫 번 전쟁에 패전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2차대전의 역사를 지금도 여러분께선 생생히 기억하시지마는 연합군 측에서 처음에는 다 패전하였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할 것 없이 독일에게 첫 번 전투에서는 전부 패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유럽을 점령하고 히틀러도 온전히 굴복시킨 것입니다.
태평양전쟁도 역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아주 참패를 당했습니다. 진주만이 다 부서지고 말레이시아를 다 빼앗기고 싱가포르를 다 점령당하고 필립 핀도 다 점령당하고 마지막에 맥아더도 쫓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뿐만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우리가 실패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마지막에 성공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갈 때에 나는 원하지 아니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유혹이 들기 쉽고 죄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시험에 드는 것을 아는 대로 곧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11.둘째 축복의 기회

우리가 실패를 했거나 시험에 들었을 때 기억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시험에 들기 전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조금 지어도 괜찮다면서 더러 시험에 들기를 귄 합니다. 하지마는 정작 시험에 한번 듭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의 말이 변합니다. “옳지 너 죄지었지? 이젠 소망 없어 누가 다시 너를 신용하겠니? 누가 너를 다시 사람으로 보겠니? 누가 너를 용납하겠니? 아주 정말이야”이렇게 마귀가 시험합니다.
죄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둘째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탕자로서 갖은 죄를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께서 두 손으로 영접해서 환영했습니다. 삭게오 같은 사람이 민족을 배반하고 요즘 말로 부정 축재를 하였고 여러 가지 죄를 지었지마는 온전히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는 영접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 강도가 죽기 전에 회개를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 강도를 낙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시험에 들어 한 번 죄 지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축복을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제2의 기회>에서

 

 
 



12.성결한 생활

전에 어떤 경관이 거지통에 가서 거지들을 전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있는 거지를 만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이름은 김백억이올시다”순경이 그 말을 듣고“김백억이야, 금백억이 거지통에서 사나?”아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낳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이 다음에 돈 많이 모으고 잘 살라며 이름을 백억으로 지은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백억이라고 하는 녀석이 마지막에는 거지통에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아름다운, 보배로운, 거룩한, 이름을 주셨으면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聖徒)이름을 가지고 속도(俗徒)의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또한 지난날의 2천여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거의 완전한 자리에 올라섰다는 여러 성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대강 짐작해서 깨달을 수가 잇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의 첫째 특색은 성결 이올시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올시다. 시편 24편에“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뜻을 허탄(虛誕)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다시 말하면 손이 청결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이 청결하고 입이 청결합니다.
전에 어떤 성자는 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얼음 구멍에 그 몸을 던진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성자는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뒹굴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 자기의 마음에 깨끗한 것을 회복한 성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서 살지마는 그 살은 짠물에 배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속세에서 살지마는 더러운 물이 그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에베소서 5장 3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말입니다. 성도의 모습의 첫째 특색은 성결함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성결하고 그 입이 성결하며 그 뜻이 성결하고 그 행실이 성결해서 더러운 세상에 살지마는 그 생활을 깨끗이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13.화평한 생활

그리고 이들 성자의 생활을 살펴볼 때에 둘째 특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화평(和平)이올시다. 시편 34편에“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귀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화평을 구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모습의 둘째로 뛰어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회평입니다. 그 마음속에 화평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잇고, 그 말이나 성품에 화평이 있고, 그 생활이 화평을 구하는 생활, 이것이 특별히 뛰어나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며 어떠하든지 악을 선으로 이기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분한 마음이 나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 가운데 오래 품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는 그 화평의 마음이 곧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14.성 프랜시스와 슈바이처 이야기

전에 성 프랜시스가 자기의 제자들과 같이 어떤 산간에 살 때에 어느 날 저녁 프랜시스가 잠깐 나간 사이에 그 산중에 있던 도둑 몇 사람이 들어와서 그 제자들을 보고 먹던 떡이 있으면 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대단히 노해서“이 도둑놈들아, 너희들이 일해서 먹지 아니하고 도둑질해서 먹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선생님의 마른 떡까지 빼서 먹으려고 왔느냐?”하고 제자들은 대단히 책망해서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다 듣더니 프랜시스는 오히려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면서“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인데 너희들은 왜 떡을 주지 아니했느냐? 떡을 내어 주면서“이제 이 덕을 가지고 산에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떡을 먹이고 돌아 오라”그래서 이 제자들은 밤 세도록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도둑을 만나서 그 떡을 다 먹였다고 합니다. 그 도둑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제자들과 같이 프랜시스에게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 가운데는 프랜시스의 유명한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화평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아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올시다.
지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한 번 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교회에 어떤 잘 믿는 교인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자주 귀가 멀어서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예배당에는 꼭 출석합니다. 한 번은 물어봤다고 합니다.“당신은 설교 한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뭘 하려 예배당에 늘 옵니까?”“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그 사도신경에 있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데 내가 비록 설교는 듣지 못하지마는 성도들이 모이는데는 같이 가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성도로서 할 것이 아닙니까?”성도의 교통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15.무아의 봉사

그리고 이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 보건대 셋째 특색은 무아의 봉사입니다. 말없는 봉사입니다. 앞에서 프랜시스 이야기를 했지마는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합니다. 병자를 도와주고, 김 못 매는 이 있으면 김 매주고, 추수 미처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를 해주는 등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문둥이들만 사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안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20세기에서 우리 기독교도들 가운데 성자라고 이름을 들은 이는 제가 기억하는 대로 아마 서양에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 일하는 슈바이처 박사이고 동양에서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목사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다‘내’가 없는 말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봉사가 귀하지마는‘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른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특별한 특색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아프리카 캐머룬에 가서 순회할 때에 어떤 곳에 가보니까 전부 흑인만 있고 선교사는 지금 두 집밖에 없는데 그 중 한 가족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가고 그 흑인만 사는 동네에 미국 여자 선교사 혼자서 병원을 차러놓고 의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으니까 본래 그 여자의 아버지가 개척 선교사로 그 곳에 와서 의사 활동을 하다가 열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미국에 돌아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그 흑인들만 사는 그 곳에서 홀로 그들에게 봉사하는 광경을 볼 때 제 마음 가운데 과연 여기에 성도의 모습이 있구나 하고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모습>에서

 

 
 



16.이전투구와 용두사미

함경도서 오신 교우 많이 게신데 좀 미안하지마는 전에 어떤 사람들이 팔도 사람들의 성격을 이야기하다가 함경도 사람들의 성격을 평한 것을 보면 이전투구(泥田鬪狗) 라는 말로 비평했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진흙 밭에 개 싸움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얼른 들을 때에 함경도 사람을 욕하는 말이라고 들을 수 있지마는 절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하는 말이 아니고 칭찬하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진흙 밭에서 개 싸움하는 것을 보면 그저 이 놈들 싸움 붙은 다음에는 멎지 않습니다. 그저 그냥 싸움만 계속합니다. 아마 대부분이 함경도 사람의 성격이 한 가지 무엇을 시작하면 중간에 놓지 아니하고 그냥 끝까지 하는 그 성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편 우리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을 그대로 풀면 머리는 용인데 꼬리는 뱀이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일을 벌려 놓아 큰 일을 하는 것 같으나 끝은 후지 부지 얼버무린 부진한 형상을 뜻합니다. 시작은 좋게 나왔다가 그 다음에 사그라집니다.

 

 
 



17.석수와 큰 바위

여러분,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려 부수려고 할 떼, 맨 처음 쇠못을 하나 대고 방망이로 첫 번 땅 때리고 나서 보아야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두 번 때려도 마찬가지로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같아서는 못하겠다고 그만 둘 것입니다. 그러나 석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때리고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리고 마지막에 금 날 때까지 때립니다. 마지막에는 큰 바위가 깨뜨려지고 맙니다.

 

 
 



18.모니카의 끈기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15년 동안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권면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가서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모니카는 이 은전을 찾은 것입니다.
이 은전을 찾으니 이 여자가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기 자세히는 없지마는 은전을 갖고 보니 처음에는 빛이 번쩍 번쩍 났었는데 지금은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먼지가 묻고 녹이 쓸고 더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손수건 같은 것으로 빡빡 닦아서 아주 반들반들하게 빛냈습니다. 그리고 보니 황제의 화상이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신께서 이와 같이 잃은 보배인 인간의 심령을 찾은 다음에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온전히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십니다. <잃은 보배를 찾다>에서

 

 
 



19.대리석 십자가에 새겨진 ‘오직 예수’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에 있는 유럽의 제일 높다고 하는 알프스 산 어떤 높은 봉우리에 흰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십자가를 해 세웠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 위에는‘오직 예수’란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냐? 일찍이 어떤 분이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에 피서를 갔다고 합니다. 어떤 날 그 분이 자기 사랑하는 딸을 데리고 알프스 어떤 높은 봉우리에 등산을 하였습니다. 높은 산꼭대기를 조심조심해서 올라갔지마는 그만 실수해서 그 사랑하는 딸이 발이 미끄러져서 높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결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여름 서늘한 스위스에서 평안히 지내려고 피서 갔다가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 분은 지위도 상당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위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그이에게 참된 위로를 주신 분은 예수밖에 없는 것을 그 분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그 산봉우리 위에 큰 대리석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다가 새기기를‘오직 예수’우리에게 최후의 소망과 위로를 주실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오직 예수만 의지합시다. 돈을 의지하지 맙시다. 세력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믿고 의지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봅시다. 베드로처럼 세상 물결을 바라보지 맙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만 바라봅시다. 세상의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따라갑시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도 역시 그런 줄 압니다. <오직 예수>에서

 

 
 



20.피얼스 박사의 증언

어떤 목사 수양회를 할 때에 피얼스 박사가 오셔서, 보통 신문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사실, 특별히 쿠바에서 된 일을 우리에게 말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중국 사람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바에도 중국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과히 만치 않았는데 특히 1948년 이후로 중공군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면서부터 중국 본토의 피난민들이 쿠바에 와서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믿는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합니다. 자연히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쿠바가 중공을 승인합니다. 특별히 중공에서 사람을 데리다가 쿠바를 전폭적으로 적화 계획을 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는 미리 다 조사해서 누가 카스트로 정부를 지지하며 반대하는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중국사람부터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 가운데 이 적색 정부를 지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모두 색출해서 중국 본토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본토에서 피난해 갔던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쿠바의 신자들이 밤낮 자지 않고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언제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면하고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깨어서 여기에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깬 사람은 잠꼬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잠깐 있던 일, 같은 일 때문에 싸움하지 않습니다. 큰 원수가 있는데 작은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깬 사람은 기도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 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합니까? 혼자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구역에서 구역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제일 기도하기 좋은 시간은 새벽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나 나오십니까? 새벽 기도회에 참여 못하는 것은 늦잠 때문에 못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합시다.
깨여있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합니다. 자기의 책임은 우선 감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 깨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한에 복음을 전파하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았을 때에, 무엇보다도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전파합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때를 당하여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격려합니다.

 

 
 



21.하나님의 물통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귀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나쁜 버릇은 늦잠 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고 늦잠을 잡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답답해서 그 이웃에게 가서, 좀 불량한 사람이 그 동리에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예, 제가 내일 아침에 깨워들이지요”“그렇게 하겠나”그렇게 하겠습니다.“그럼, 그렇게 해보게”
그 이튿날 아침에도 해가 중 낮이 되었는데 안 일어납니다. 그 불량한 사람이 왔습니다. “일어났습니까? 아직 안 일어났어“제가 깨어 보지요, 물통 하나 있습니까?”물통을 가지고 우물에 나가더니 찬물을 가득 받아 가지고 들어와서 문을 활짝 열더니 다짜고짜로 찬물을 얼굴에 좍 끼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곤하게 잠자던 사람이 후다 닥 일어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여러 번 권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통해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격려하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경고하며 여러 번 경고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아니하면 저는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통을 들고 와서 전부 물을 끼얹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그 물통이 공산당일지 어떻게 압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에서

 

 
 



22.신교의 자유가 있기까지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당해서 우리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여기에 대해여 알 만한 몇 가지를 특별히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대로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제1세기에 주님께서 오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신 후 온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시 로마 제국에 널리 펴지게 된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핍박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로마 정권의 핍박이 가혹했지마는, 당시의 믿는 사람들은 담대히 사방에서 복음을 전파해서 주 후 313년에는 기독교도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로마 제국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해가 되지 아니해서 기독교는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콘스탄틴 황제에게 의해서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때부터 전 로마 제국이 신봉하는 유일(唯一)의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불행이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서,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서 로마 제국이 이루어졌고, 콘스탄틴노불을 중심으로 하는 동 로마 제국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정치상 발전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서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교회들은 점점 콘스탄틴노불에 있는 대주교가 통치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두 교회 사이에 큰 교리 상 차이는 없지마는 대체로는 교권의 충돌로 말미암아서 동편에 있는 교회와 점점 멀어지다가 마지막에 1054년에 불행하게도 동 교회와 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입니다. 그래서 11세기부터, 지금으로 말하면, 동편 유럽과 중동지대에 있는 교회를 정통교회 혹은 헬라 정통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다시 말하면 로마 교회의 다스리는 서 로마 제국 판도 안에 있는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부른 게 된 것입니다.

 

 
 



23.카톨릭의 자취

본래 카톨릭(Catholic)이라고 하는 말은 라틴말로‘일반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세계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따금 쓰는 에큐메니칼이라고 하는 말과 뜻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11세기 까지 내려오는 동안은 부분적으로 인도의 말토마 교회라든지, 애굽의 콥틱 교회든지, 혹은 수리아 교회가 분열되었지마는 기독교 전체는 대체로 이 카톨릭교회라고 하는 이름 아래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동서교회가 분열된 까닭으로 그 다음부터는 서편에 있는 교회만을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역사상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유럽은 대체로 이 서 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아래 있게 되었는데, 여러 암흑 세기를 지나오면서 불행히 이 서 교회가 많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신덕(信德)이 없는 사람들이 교황이 되고, 주교가 되고, 혹은 신부가 되며, 심지어 교직을 매매하게끔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부패해 내려오다가 16세기초에 와서는 심지어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데 속죄 표를 사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일을 교황청에서 감행하게끔 된 것입니다.

 

 
 



24.루터와 종교개혁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 색슨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났는데, 그러나 그 때에 신앙의 법대로 경건한 가정에서 났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엄격한 신앙지도를 받았고, 소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졸업한 후에는, 그 당시에 흔히 하던 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얼마 후에, 신부로서 안수를 받으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맡은 과목은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과목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당시 교회의 교훈과 행사가 성경의 교훈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신부는 마음 가운데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이 성 베드로(St, Peter)라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모자라는 돈을 모금하는데 속죄 표를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이 청년 루터는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되었습니다. 그래서 95조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면서 속죄 표 파는 것을 반대했고, 그 당시의 소위 참 회개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죄 사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인데 속죄 표를 사서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대를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 비텐베르크 작은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마는 이 소식이 온 유럽에 펴지게 되었고 종교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과 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해서 물론 능력으로 탄압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교들도 부득이 핍박을 받다 못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종교전이 16세기 와 17세기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같은 데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전부 일일이 심사해서 학살한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부지기수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1572년 8월 23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때는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7천명에서 1만에 달하는 많은 신교도들의 생명을 파리에서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끌다가 마침내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신교도들이 양심대로 주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양심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값비싼 희생이 지불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에서

 

 
 



25.구교 국가의 신교 핍박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보느냐? 물론 이 20세기에서 구교가 신교를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래도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되겠는데 현재 20세기에서도 구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서는 신교가 핍박을 받는 교회가 많습니다. 가령 스페인에서도 현재 받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갔던 남아메리카 방문 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같은 나라가 특별히 그렇습니다. 그곳은 천주교가 절대 다수이니까 위에 대통령으로부터 순경에 이르기까지 천주교가 정권을 다 잡았습니다. 핍박하려면 얼마든지 핍박합니다. 콜롬비아에 가서 제가 그 소식을 직접 들어보니 과거 20년 동안에 이와 같은 천주교 나라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이 118명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66곳이 파괴당했다고 합니다. 이 구교 압박으로 폐쇄 당한 학교가 무려 2백 학교나 된다고 합니다.
먼젓번 피얼스 박사도 교역자 수양회 때 와서 말했지마는 그 자리에서 직접 앉아서 다 적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 수양회 때 한 3백 명 모였는데 그 가운데서 구교도 핍박으로 인하여 감옥에 갔던 사람은 손을 들으라고 하니까 62명이나 되었습니다. 자기 예배당 파괴당한 교회가 몇 사람되는지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28명이 들었습니다. 직접 총알에 맞고 매맞은 사람은 몇 사람이냐고 하니까 26명이 손들었습니다. 자기 교인 가운데 순교 당한 그런 교회 목사가 몇 사람이냐고 물어 보니까 24명이 손들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현재의 사실입니다. 우리 신교가 이런 것을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26.귀한 유전 보전

과거 4백년 동안에 어떤 나라는 신교로 내려 왔고 어떤 나라는 대체로 구교로 내려온 까닭으로, 신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문화의 영향과 구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영향을 역사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북아메리카에 있는 미국과 캐나다는 대체로 신교들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 나라입니다. 남북 아메리카의 문화의 수준을 비교해 보세요. 유럽을 보면 저 북구와 영국은 다 신교입니다. 그 아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거이 다 구교입니다. 그 두 나라들은 문화가 어떠한지 여러분께서 연구해 보면 분명히 신교와 구교가 일반 국가와 문화에 주는 영향이 어떤지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자유를 존귀(尊貴)히 여기는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과 미주주의 정치는 신교를 중심한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가만히 볼지라도 이 민주주의 제도가 잘 운영되는 나라는 신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 이 제도가 잘 운영됩니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도 민주주의 제도는 가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든지 독재자가 나타나서 항상 어지럽게 됩니다. 구교도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 한국에 있어서 신교도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하다고 하는 것을 꼭 깨달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이 앞으로 자유가 있는 건전한 민주주의로 발전하려고 한다면 어떠한 종교가 우리 민족의 머리를 지배해야 되겠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 나라의 제일 긴 강을 압록강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산봉(山峰) 천지라고 하는 못에서 발원됩니다. 그 압록강 물이 천지에서 처음 내려 올 때는 물이 맑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에 오래 살았는데 신의주에서 그 강을 보면 더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왜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요? 천지와 같이 원지에 돌아가듯 신약의 본원 지에 돌아가서 맑은 순수한 복음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유전을 감사히 생각해서 이 유전을 바로 지키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오직 의인의 믿음으로>에서

 

 
 



27.은혜는 물에 새긴다

영국에 유명한 트랜취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 그이가 특별히 예수 님의 이적에 대한 주석을 중심해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가다가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자기가 살펴보는 대로 모든 은혜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아마 제일 드문 은혜입니다”이런 말을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속담과도 과히 틀리는 말이 아닙니다.“원수는 돌에 새기지마는 은혜는 물에 새긴다”곧 잊어버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의 충신이 마르고 가정에 효자가 드물고 사회봉사자가 적고 세상에 참된 신자가 적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마는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감사하지 아니한 문둥병 자 아홉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자기의 영혼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또 한 사실을 주의해 보세요. 문둥병 자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렸는데 이상스럽게 전부가 유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 사람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사람이올시다. 이 유대사람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올시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올시다. 여러 선지자들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올시다. 매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올시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 사람 전부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 줄 압니다. 우리가 한 가지 마음 가운데 꼭 깨달아야할 것은 은혜를 많이 받는 자가 더 잘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자 집 자녀들과 가나한 집의 자녀들을 비교해 보면 어떤 집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더 잘 아는가? 부모의 혜택을 많이 받은 부자 집 자녀들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보통 집 자녀들인가? 예외가 있지만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외아들이 밥투정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이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 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fp 받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28.평범 속의 감사

요즘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 불이 끼지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친구가 좋은 등을 준비해서 이런 때 여러분에게 준다고 말하면 그 은혜를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받은 햇빛을 주실 때에 아침마다 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들이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전에 6·25 때 괴뢰군이 여기 들어온 다음에 우리 교우 몇 분의 도움을 받아서 저도 피난을 갔습니다. 한강을 건너서 시흥으로 해서 수원에까지 갔는데 괴뢰군이 들어온 바로 그 날은 아주 맑고 더웠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 거리에서 남으로 남으로 그냥 밀러 내려갑니다. 저도 무리 가운데 섞여서 내려가는데 얼마쯤 내려가다가 보니까 어떤 긴 옷을 입은 성공회 선교사들 두 사람이 큰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 한 잔씩 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더운 날 땀을 흘리면서 가던 피난민들은 감사의 그 물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물 한잔 받아서 마신 생각이 잊어지지 않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특별한 한국 같은 데는 물의 축복을 받아서 어디 가든지 몇 자만 파면 맑은 생수를 주시는 이 하나님 앞에 물을 마실 때마다 감사를 들이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을 한 다음에는 물을 마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느라고 힘을 쓰지마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하나가 중한 병으로 앓는데 호흡하기가 대단히 괴로울 때에, 어떤 친구가 산소를 한 통 보내서 그 호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넉넉한 공기를 주어서 항상 숨쉬며 살면서 숨쉴 때마다 기도를 들입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29.요 임금과 격양가

큰 은혜일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우리가 어떤 때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옛날 글을 보면 요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잘 하였는지 모든 백성들은 아무 근심 없이 평안히 삽니다. 그 때 백성들이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흙을 치는 노래입니다. 그 격양가의 내용이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청정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이 어아( 帝恩而於我)하야 하관언(何關焉)고? “우리가 밭을 가라서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이게 격양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 때 백성들이 요 임금이 너무 정치를 잘 해서 그저 평안해서 잘 사니까 오히려 노래 부르면서 임금의 은혜가 무슨 상관이냐며 그의 은덕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아홉 명의 문둥이와 같이 참 죄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라>에서

 

 
 



30. 승리의 불과 하나님의 불

두 가지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외부로부터 내려오는 이 거룩한 불을 받아서 내 자신을 깨끗케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더러운 그대로 있다가 마지막에 소멸하는 불에 멸망을 당하든지 …여러분 어떤 불을 원하십니까? 불은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승리의 불이 되고 악한 자에게는 소멸의 불이 되고…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0장 9절에 이 같이 고백했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안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자기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에는 불이 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만들게 한 것은 그 심령 속에 이 거룩한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6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이 불이 붙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 속에 불이 타 올라왔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불을 던지려, 땅에 던지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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