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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1권-7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191-227

by 【고동엽】 2022. 3.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191.에디슨과 시험

전에 어떤 사람이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에게 가서 조용히 묻기를“선생님도 혹시 시험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는 노인일 적인데 눈을 크게 뜨면서“시험? 시험에 못 들어 봤다 왜 그런고 하니 시험에 들 사이가 있어야지”너무 연구하기에 바빠서 시험에 들 시간이 없었단 말입니다. 분주하면 시험에 들 기회가 사실 없습니다.
한가한 사람이 시험에 잘 듭니다. 한가지하니까 놀이터에 가게 됩니다 분주히 공부하지 않고 한가히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시험에 빠집니다. 여자들 가운데도 분주한 여자들보다도 소위 유한 마담이라고 한가한 여자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 사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 내 책임을 충성되게 분주하게 잘 감당하는 사람,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놀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습니다.

 

 
 


192.지혜로운 왕의 교훈

전에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잇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자 이 금 잔에 기름을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르라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에 왕이 묻기를“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물어 보았습니다.“그만 못 보았습니다”“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그러면 자내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뵈웠나? 우리가 다 뵈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 가운데 제일 좋은 비결은 우리가 열심을 품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가정에 있어서나, 내 직장에 있어서나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 유혹이나 시험에 들 사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언제든지 최선의 방어라는 전법이 있는 것입니다. <유혹을 삼가라>에서

 

 
 



193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앙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약점이 무엇인고 내가 항상 연약한 방면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아서 이것을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내 속의 죄의 법을, 옛사람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못 박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194.링컨의 온전한 신앙

1861년 11월 11일 아침이올시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택을 받아서 취임하기 위하여서 자기가 20년 동안 살던 그린필드를 떠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때에 미국은 큰 시련기를 당하였습니다. 노예문제로 말미암아 또한 그 밖에 여러 복잡한 문제로 말미암아 남북전쟁이 일어날 큰 위기, 즉 미국이 분열되느냐, 파괴가 되느냐 하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큰 국가적 위기에 이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링컨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에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링컨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일찍이 워싱턴의 어깨에 놓였던 짐 보다 더 큰 책임을 진 나는 언제 이곳에 돌아올는지, 사실 돌아 올 수가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 곳을 떠납니다. 그(워싱턴)를 도와주신 하나님이 또 나를 이 때까지 인도하시고 내 전 운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는 나는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7, 8년이라고 하는 오랜 남북전쟁을 통해서 미국 유사 이래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내 자신을 압시다. 이 세상의 물결은 높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려 다닙니다. 내 자신을 믿지 맙시다. 우리의 운명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신앙생활과 내 자신>에서

 

 
 



195.크리스천의 기쁨

여러분 가운데 지난 금요일 저녁, 로드 부장의 말씀을 들은 이가 계실 줄 압니다. 그는 한국 구세군에 오래 있다가 불행히 6·25 때에 이북에 납치를 당해서 오랜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다시 영국에 돌아가 계시다가, 이번에 잠깐 한국에 와서 이북에서 자기가 지내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거기에 참여한 사람은 다 많은 은혜를 받은 줄 생각합니다.
그의 경험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가 한 번은 너무 피곤하고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약해졌습니다. 어떻게 피곤한지 촌보(寸步)를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캄캄해지는 듯 하는 경험을 한번 당할 때, 돌연히 시편 23편에 있는『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풀어주시니…』 이 말씀이 자기의 머리 가운데 번개 같이 나타났답니다. 그는 새로 힘을 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해서 선(善)을 이루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196.기쁜 마음은 새로운 힘

우리 믿는 사람이 가지는 여호와의 기쁨은 아침에 돋는 해와 같습니다. 점점 커갑니다. 점점 밝아집니다. 영원히 하늘 나라까지 우리의 기쁨이 더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양사람 가운데도 군자의 락(樂)과 소인의 락이 다르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의 즐거움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쁨이 너희 힘이라』우리 믿는 자의 마음 손에 있는 이 기쁨이 우리의 능력이올시다. 슬픈 마음은 무리하게 만듭니다. 곧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쁨이야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입니다. 기쁨으로 하는 일은 힘드는 줄 모릅니다.

 

 
 



197.음악과 소젖

제가 몇 해 전에 미국에 가서 이곳 저곳 구경하는 가운데 어떤 큰 목장을 구경했습니다. 큰 젖소가 백여 두 되는 큰 목장입니다. 젖을 짜는 방이 아주 넓은 방인데 그들은 전부 소젖을 짜되 기계로 짭니다. 어떻게 여러 소에서 젖이 많이 내려 흐르는지 수돗물 내려오듯 합니다.
그렇게 많은 젖을 짜는데 제가 한가지 이상하게 여긴 것은 그 젖 짜는 방에다 라디오를 놓았습니다. 소만 있는 그 젖 짜는 방에 라디오를 놓고 늘 좋은 음악을 보내주지 않겠어요? 저는 웃으면서 소만 있는데 라디오는 무엇 하려 놓았는가 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소도 라디오 음악 소리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의 소들은 우리 농촌의 동포들 보다 퍽 낮다는 생각이 납니다. 사실 소도 마음이 기뻐야 젖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아마 아기 어머니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기뻐야 젖도 잘 나올 줄 압니다.

 

 
 



198.지혜로운 체이슨과 올시어드의 거문고

여러분 가운데에 옛날 호머라는 헬라 시인이 말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헬라 나라는 우리 한국의 남방과 같이 조그마한 섬이 많은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섬 가운데에 문화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옛날 그 여러 섬 가운데 사이렌이라는 아주 요망한 여자들만 사는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특별히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주 미혹 적인, 사람의 마음을 유혹시키는 이런 노래를 잘 불러서 섬 안으로 지나가는 선부(船夫)들과 그 여자들이 좋은 노래를 좀더 듣기 위해서 섬 옆으로 가까이 가다가는 그 여자들에게 꾀어 간답니다.
그 섬에 들어가서는 돈 있는 것은 다 빼앗기고 아주 망하고 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이 헬라 사람들은 누구든지 배를 타고 갈 때에 조심하느라고 결심하고 가지만 막상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조금 더 듣자고 가까이 가다가는 쑥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체이슨이라고 하는 아주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섬 옆으로 부득이 그의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제자들을 한 사람도 유혹에 끌리지 아니하고 내가 섬을 지나갈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에 헬라에 유명한 음악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거문고를 아주 잘 타는 올시어드라는 사람으로 그때 헬라에서 가장 유명한 제금(提琴)가였습니다.
이 올시어드를 청해 같이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배가 그 섬 가까이 갈 떼에 올시드를 보고“여보 당신이 잘 타는 음악 소리를 들러 주시오”그러니까 유혹의 섬 가까이 가서 이 올시어드가 거문고를 내서 좋은 음악을 탑니다. 그러니까 이 배 가운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좋은 음악에 도취해서 그 섬 가까이 다다라서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도 하고 떠들었지만 그 노래는 아주 듣지도 않았습니다. 이 올시어드의 거문고 소리를 듣다가 이 노래 소리를 들으니 그것은 돼지 소리만도 못하다고 늦겠습니다. 그래서 그저 올시어드의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평안히 그 섬을 지나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배울 진리가 있는 줄 압니다. 내 심령 속에, 내 마음속에 기쁜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영적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더러운 죄악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인 줄 압니까? 과연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 되시는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분명히 내가 체험했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나와 같이 동행합니까? 주님께서 과연 내 생활의 목자입니까? 내가 과연 주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까? 이 참된 여호와의 기쁨, 이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이 기쁨을 다 받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기쁨>에서

 

 
 



199.전도의 은혜

그리스도의 중심이 되어 전도할 수 잇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과연 복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0.사장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아마 전에 이런 말을 들으신 줄 압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예수를 잘 믿는 분이올시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고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 믿으란 말을 한 마디도 못합니다. 자기의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서 다른 이야기는 늘 잘 하지마는 한 번도 예배당에 가자는 전도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내가 이제는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결심이 그저 누구든지 나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조금 앉아 있자니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비서가 예수를 믿는지를 알 수도 없고 또 한번도 이 비서에게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해본 일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첫마디로 그가 예배당에 다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비서가 눈이 둥글 해지면서 그것을 왜 갑자기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다.“그래 예배당에 가는가?”“저는 예배당에 가지 않습니다.”“그럼 예배당에 가야지, 예수를 믿어야 해”이렇게 이 비서한데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서가 하는 말이“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제가 15년을 모셨는데 저한테 예배당에 가자고 하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해서 저는 제 생각에 나 같은 놈은 아주 못되어서 예수를 못 믿는 놈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오늘 저한테 이렇게 전도를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그런 대답을 하였단 말입니다.<4대 은혜>에서

 

 
 



201.주일학교에서 잘못 없이 매맞은 마음의 상처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 가서 우리 교회에 새로 나오는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의 신앙 경험을 들어보니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에 주일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주일 하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오랫동안 예배당에 안 나오다가 다시 나오는데 어떻게 되어서 그때 그가 그만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천년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옛날 일제 말기 우리 교회가 일제 탄압아래에 있을 때에 열두 시가 되어서 사이렌만 나면 묵도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이렇게 설교하다가도 열두 시가 되면 설교하다 말고 다 묵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를 우리가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그 때 예배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일학교에서 아마 무슨 집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열두 시가 되니까 다 묵도하라고 해서 묵도하는데 이 학생이 묵도를 안 했다고 합니다. 또 하기야 정성(精誠)하게 묵도한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 아이가 묵도를 안 했다고 주일 학교 선생이 와서 그 아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자세히 들으시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무심하게 아마 질서를 유지하느라고 선생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아이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섭섭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래 동안 교회에 안 나가다가 그 후에 장성해서 아무래도 자기가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일학교에 나오다가 어떻게 우리교회의 직분 맡은 분이나 목사가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안 나오는 학생은 이 사람만 아닌 줄 생각합니다.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불건전한 신앙생활, 곧 모든 경건하지 못한 언행들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혼자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특별히 우리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 다고 하면서 우리가 생활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큰 장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 생활을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생활을 통해서 말하자면 요사의 말로 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줍니다. 여러분은 다 아이들이 구경하는 활동사진의 배우인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이라고,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 행동으로서 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그 것을 본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여러분 부모들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지마는 자녀들 가운데 아직 신앙생활에 돌아오지 못한 가정이 있다고 하면 깊이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우리 가정에서 하는 일 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명실공히 신행(信行)이 일치해서 나의 제일 가까운 자녀에게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히 외형으로 예배당에만 출석했는가? 우리의 생활이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장해가 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꽃 주일>에서

 

 
 



202.마가 요한 이야기

묵은 땅이라도 다시 갈아서 곡식을 심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여러 인물을 공부하는 가운데 마가 요한을 생각합니다. 이 청년은 본래 좋은 가정에서 태여 나고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장성한 모양입니다. 바나바의 생질로서 많은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특별히 택함을 받아서 제일 먼저 바나바와 바울이 첫 번 전도 여행을 떠나갈 때에 사도들을 도와주는 특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옥토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마음 가운데 점점 잡초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생각만 주장하게 되고 사도들을 도와 줄 마음이 적게 되었습니다. 아무 재미가 도무지 없는 것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 마음이 점점 굳어져서 마지막에는 위대한 사도를 배반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슬 때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는 다시 용서하고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지마는 바울은 아예 저버렸습니다. 그런 쓸 때 없는 청년을 바울은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와 같은 거절을 받은 후에 마가 요한이 자기 마음 가운데 크게 깨달음이 있은 줄 압니다. 자기의 묵은 밭을 다시 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잎에 회개하고 자복(自服)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보면 이 묵은 밭을 다시 갈아서 알랙산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큰 교회를 세운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을 뿐더러 마가복음을 기록해서 공을 세웠고 그 다음에 바울의 편지 가운데도 마가는 그에게 심히 필요하니 꼭 데리고 오라고 하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묵은 밭이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성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밭을 갈게 하면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03.임어당 박사 이야기

얼마 전 타임 잡지에도 세 사람의 회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 달 전쯤 미국 장로교회에서 발행하는「프레스비터리안(Presbyterian)이라고 하는 잡지에 그의 신앙 고백 문이 길게 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본래 중국에서 난 사람으로서, 오래 미국과 유럽에 여행하고, 영어로 책을 많이 쓴고, 중국말로도 책을 많이 쓴 임어당(林語堂)박사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입니다. 상해에서 기독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교수로 있을 때에 점점 딴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을 기독교 철학보다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백하는 대로 점점 거기로 기울어졌습니다. 사람이 이성대로 살면 그뿐 아니냐? 자기자신(自己自身)을 자신(自信)하게 하는 인본주의사상(人本主義思想)이 점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전한 유물주의자(唯物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부인하고 이 세상에 실재는 물질밖에 없다는 이런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려다가 자기 부인을 따라서 한 번은 뉴욕에 있는 메드슨 장로교회에 예배보려 같이 갔다가 그 목사의 감화를 받게 되어 한 번 가고 또 가고 여러 번 가서 온전히 그 마음의 변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 일년 전에 그 교회에서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그 교회에 입교해서 교인으로 일년동안 조용히 있다가, 일년 후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온 세계에 자기는 다시 기독교로 돌아 왔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오래 그 밭이 묵어 있었고 잡초가 났습니다. 좋지 못한 풀도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묵은 밭을 갈았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다시 그 땅 속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임 박사는 온 기독교회는 물론 온 인류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잇는 줄 확실히 압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묵은 땅을 기경 해야 되겠습니다. 묵은 땅을 그냥 두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 것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그저 주시는 햇빛을 받고, 그저 주시는 이슬을 받고, 때때로 내리는 단비를 받으면서, 아무 열매도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열매 없이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도 다시 갈면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해 본 사람은 다 잘 알 것입니다. 묵은 땅을 갈고 곡식을 심으면 그 후에 특별히 잘 됩니다. 묵은 땅이 다시 은혜를 받게되면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 읽은 성경 말씀(호10:12 렘 4:3)도 우리가 묵은 땅을 기경 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임 하사 의를 비처럼 충만히 내리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에서

 

 
 



204.그리스도의 약속

여러분 가운데 이따금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기 는 믿었지마는 과연 내가 구원을 얻었나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까? 그렇게 의심 날 때가 있으면, 이 요한 복음6장 37절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제가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정 문제를 고민하면서 나의 구원이 예정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심이 나는 분일지라도 이 요한 복음 6장 37절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 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그의 약속은 참이요 그의 약속은 진실합니다.

 

 
 



205.버틀러 감독의 이야기

전에 영국 국교에 버틀러 라고 하는 유명한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 감독이 임종시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병이 중해서 꼭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때에 자기에 가까운 친구가 되던 목사가 가까이 그 옆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이 감독이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스스로 알면서 그 옆에 있는 친구에게“내가 일생토록 죄를 멀리하고 어떻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가진 애를 써 왔지만 나는 원래 약한 인간이니까 지금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내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어온다”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그 옆에 앉아 있던 목사가 하는 말이“아, 감독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다 속량 해 주신 구주가 아닙니까?”그 감독이“그렇지, 예수 님께서 참 구주가 되시지, 그러나 꼭 내 구주가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의심스러워 반문했습니다. 그 때, 옆에 앉았던 그 목사가 다시 하는 말이“감독님, 예수 님의 이 말씀을 잊어버리셨습니까?「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그 말을 들을 때에 이 감독의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지면서“과연 그렇다, 내가 성경을 수천 번 보았지마는 그 구절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구나,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가는 구나”그 말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 하리라』내 과거의 생활로 말미암아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내가 과연 주님 앞에 온전히 왔습니까?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습니까? 내 주 앞에 왔으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물리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206.중생의 체험

요사의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도 흔히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 믿는 것은 예배당에 가고, 찬송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듣고, 그리고 열 가지 계명도 배우고 그리고 산상보훈도 좀 배우고, 어떻든지 좋은 도덕적 교훈을 많이 배워서 좋은 교훈대로 힘써서 하나씩 둘씩 좀 고쳐나가고 이렇게 수양을 잘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독교의 신앙이라 하면 기독교는 유고 도덕 사상에서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유교 사상이 그것입니다. 좋은 도덕적 교훈을 얻어서 그대로 생활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 기독교는 사람을 그보다 더 깊이 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성품이 죄악으로 부패해서 죽은 영혼입니다. 기독교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시 나는 것과 같이 변혁이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정신입니다.
먼저 나무가 좋아져야 좋은 열매를 맸습니다. 나무를 그냥 두고 열매만 아무리 개량하려고 애써도 쓸 때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무의 성품이 변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 성품이 변하는 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다시 나야 합니다.

 

 
 



207.거듭난 사업가의 이야기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께서 이 사람(니고데모)의 간증하는 말씀을 들었지마는 동남아 여러 지방으로 다니기는 세 분이 같이 다녔습니다. 한 분은 의사요, 한 분은 사업가였는데 그분이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이 분은 본래 어렸을 적에, 믿는 가정에서 나서 주일학교도 다녔고, 또 교회에도 그렇게 열심히는 못 나왔지만 교회에 나왔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 번은 어떤 친구의 초청을 받아서 저녁을 같이 먹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때에 영국에서 온 잘 믿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을 묻는고 하니“당신 거듭났습니까?”“중생입니까?”이것을 솔직히 물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믿어 오기는 왔지마는 그렇게 갑자기 대 놓고서 이런 질문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당에 잘 다녔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더랍니다.“그 동안 다니는 것은 좋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 났습니까?”또 물어 봅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 어물어물하면서 대답하는 말이“난 연보도 상당히 하는 사람인데…”“아 연보도 늘 하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났습니까? 또 물어 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솔직히“난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되물어 보았습니다.
그이는 어떻게 하야 거듭난다는 말을 그 때 그 분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 말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거듭 나는 체험을 얻었습니다. 그후에는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다른 여러 사람을 많이 주께로 인도하고, 자비로 동남아까지 같이 와서 주의 일을 하려고 많이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다 거듭났습니까?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와서“당신 거듭났습니까?”이렇게 분명히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글세 자세히 모르겠는데요”이렇게 대답할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이 중생의 체험이 어떤 분에rps 갑자기 되고, 어떤 분에게는 시일을 요구해서 천천히 거듭나서 자기 자신도 혹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중생 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몽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먼저 중생으로>에서

 

 
 



208.덕불고 필유린

이런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나는 아무리 교회 봉사를 잘하고 신방도 열심히 잘하고 하지만, 교역자나 장로가 누구 하나 칭찬하는 때가 어디 있나? 그저 빽이 있어서 윗자리로 올라가지”이와 같은 고독을 느낄 때에 맥이 풀리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힘써 나오던 사람 가운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시험에 빠져서 낙심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시험이 마음 가운데에 들어올 때에 고요히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얼굴이나 보고 선을 해서야 그것이 무슨 선입니까? 남의 칭찬하는 말이나 듣고 그 말에 격려를 받아서 우리의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계속해서야 그것이 무슨 참된 선의 파종자(播種者)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 내려오는 성현의 말씀 가운데도“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란 말이 있습니다.『덕은 외롭지 않은 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장차 때가 되면 세상 사람도 알아 줄 때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든지 모르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입니다.

 

 
 



209. 컬럼버스의 끈기

컬럼버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컬럼버스가 제일 먼저 그냥 서편으로만 항해해 가면 직선으로 인도 곧 동양에 갈 수 있겠다고 하는,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경영할 때에 도와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지막 서바나 왕족의 후원을 받아서 배를 지어 가지고 출항하여 서편을 향해 갔지마는 아무리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심지어 같이 가던 선원들도 반항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컬럼버스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계속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냥 노를 저어라고 하여 끝까지 나아갈 때에 인도까지 오지는 못 했지만 인도 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노를 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기 이상의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날 주는 것입니다.

 

 
 



210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르다

그리스도의 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와 핍박을 받았습니까? 예수 님께서 친히 또한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악하다고 하는 거짓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그랬습니다. 옛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무슨 성과가 되어지지 않을 때에 조금 잘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선한 씨를 뿌려도 무슨 특별한 효과가 없습니다. 무슨 특별한 열매 맺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럴 때에 그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이 말을 첨가했습니다."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이르겠다고 그랬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거둔다고 해서 봄에 뿌려서 그 이튿날 곧 거둡니까?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211.곡식 모가지를 뽑은 이야기

옛날 맹자의 말 가운데 잇는 제 나라 어느 사람처럼 곡식을 심어놓고 빨리 크지 않으니 까 너무 급해서 얼른 커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루아침에는 나가서 전부 모가지를 뽑아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올 때에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내가 심고 거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둡니다. 어떤 경우는 이 세대에 심은 것을 다음세대에 가서야 거둡니다.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심은 것을 하늘 나라에서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곧 무슨 성과가 나지 아니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낙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12.자이언트 킬러스

성경에 잇는 말씀과 같이 떡을 물위에 던지면 오랜 후에 그 떡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지난주간 잠깐 시간이 있어서 그 주 타임 잡지를 펼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 북해도 어느 해변에서 된 일인데 그 해변가에 아이들 네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이 있습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 네 살, 그 다음이 열 두 살, 그 다음이 열살, 아홉 살 된 남자 네 형제가 그 해변가에서 살았습니다.
어부의 아들이니까 물론 헤엄도 잘 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날이 맑아 헤엄치려 가자고 하면서 제일 큰애가 먼저 헤엄을 쳐서 한 50야드 박에 있는 바위를 향해 헤엄쳐 갑니다. 그러니 또 둘 째 놈이 따라가고, 셋째 놈이 따라가, 넷째 놈까지 연달아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제일 큰애가 보니까, 저편에서 큰 상어 한 마리가 마주 옵니다. 상어는 사람까지 잡아먹는 놈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얼른 돌아서면서“야 상어 오는데 빨리 도망하자』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서서 언덕으로 헤엄쳐 돌아갑니다. 조그마한 아이들은 언덕에서 조금 갔었으니 까 곧 언덕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큰애는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 상어가 거이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가 사람을 물때에는 와서 뒷다리를 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와서는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면서 배를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니까 이 놈이 따라오다가 물 속으로 들어 가드랍니다. 경험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얼른 향해서 가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돌아서 보니까 상어란 놈이 자기 앞에 와서 공중으로 입을 벌리고 헛 물고서는 옆으로 나가 자빠졌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얼른 가서 상어 옆을 붙잡았습니다. 상어를 잡아 탄 것입니다. 타고서는 이것을 놓으면 죽겠는데 놓겠습니까? 꼭 붙어 안고는 상어하고 싸웁니다. 이 것을 세 아이가 보다가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부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넷이 모두 상어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바다 가운데서 싸웁니다. 그런데 계속 그대로 싸웠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 큰 물결이 바다에서 밀려오면서 상어나 상어를 붙잡은 아이들이나 전부 물 얕은 곳으로 내 빌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물이 한 길 밖에 안 되는 곳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란 놈이 물이 얕은 곳에서는 옴짝달싹 못합니다.
네 아이가 그 옆에 있는 돌멩이를 들고 돌멩이로 때려잡았습니다. 그 이야기 제목은“자이언트 킬러스(Giant killers) 즉 거물을 죽이는 사람들이라고 붙였는데 그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니 이 아이들이 자기의 힘에 넘치는 악한 상어와 지금 싸우는 중입니다. 단단히 붙잡았기에 자기들이 죽지 않았지 놓았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단단히 붙잡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고 싸운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아마 이기지는 못했겠지요. 결국은 큰 물결이 와서 전부 얕은 곳으로 밀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작은아이들이 일곱 자나 되고 백 팔십 파운드나 되는 큰 상어를 잡았단 말입니다.

 

 
 



213.권능의 물결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어떤 때에는 악의 세력이 너무 커서 어린아이들이 상어를 붙잡고 싸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 우리 마음 가운데로 들어올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악의 세력을 붙잡고 싸울 때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잡고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을 온전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말합니다. 남한에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북한에 공산당이라고 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의 세력이 커 보이지마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아니하고 계속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인 역사의 파도가 반드시 우리를 도와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할 때에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尊貴)되게 하려 하오니…』「전에와 같이 이제도…」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우리 바울이 비록 나이 많았어도 시종 여일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서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214.주님의 약속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24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평강(平康)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여러분을 불러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인 까닭으로 여러분의 몸을 온전히 지켜서 우리 주님의 날까지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이 미쁘신 하나님께 우리의 전 생명을 바칩시다.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미쁘신, 전능하신, 사랑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또 이와 같이 미쁘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도 미쁘게 살아야 합니다. 또 미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미쁘게 살아야 합니다.

 

 
 



215.리빙스턴이 은혜 받은 말씀

아프리카에 제일 먼저 가서 일생토록 그 암흑 대륙을 탐험하며 처음으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턴
216.헌금의 바른 자세

전에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어떤 분규 난 교회의 어떤 직분 맡은이가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기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교인들이 환영하지 않아도 나가지 않고 그냥 있어서 이젠 부득이 경제전(經濟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합니다. 즉 연보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북에 있을 때에 들은 말이지만 이북의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갈 때에 한 편 주머니에는 돈 일원 자리를 넣고-그때 일 원 자리면 지금 천환 가치는 있습니다. 한 편 주머니에는 돈 십 전 자리를 넣고 갔다가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를 잘 하면 일 원 자리를 넣고 설교를 잘 못하면 이건 십 전 자리밖에 못되니 십 전 자리를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헌금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물질 자체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시간에 헌금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드리는 그 정신으로서 그 상징으로서 우리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질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정성이 따르지 아니하면 헌금의 의의를 잊어버립니다.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加合)이 되고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지 아니하느냐? 같은 헌금이지마는 그 배후에 정성이 따를 때에 그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됩니다. 그러기에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받칠 때에, 곡식을 바치면 첫 이삭을 바쳤습니다. 처음 거둔 것을 바쳤습니다. 나무의 열매이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자녀이면 맏아들을 바쳤습니다. 짐승의 새끼면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함부로 아무거나 바치지 않았습니다. 흠 없는 순결한 양을 택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정성으로 드립니다.

 

 
 



217.욕심 많은 농부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어떤 임금이 자기 이웃나라의 한 임금이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서 자기 사위를 축하 사절로 보냅니다. 그래서 사위에게 금과 은도 달아 좋은 말도 택해 주고 좋은 수레도 택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이웃 나라에 가서 어떻든지 축하 잘 하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물을 다 받은 사위가 껄껄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눈이 둥그래지면서“너 어찌하여 웃느냐? 이 예물이 변변치 않단 말이냐?”그러니까 그 사위가 하는 말이“페하! 황송하옵니다. 제가 예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늘 아침에 부름을 받아서 여기 오는 길에 길가에서 본 것이 생각나서 웃습니다”“길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길가에 오다가 어느 농사하는 집을 지나 왔는데 그 집안에 조그마한 신당이 하나 있었어요. 그 신당 앞에서 농부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우상 앞에다 되지 족발 하나를 갖다 놓고 그 다음에 술 한 잔을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복을 달라고 비는데「오! 신이여 그저 금년에 나에게 복을 주어서 금년에는 우리 소는 새끼를 꼭 쌍둥이를 낳게 해주시고 또 우리 되지는 새끼를 낳되 한 배에 열 놈씩 여러 배를 낳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또 곡식이 잘 되어서 우리의 뒤 곡간도 가득히 차게 해 주시고 우리 앞 곡간에도 곡식이 가득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축원을 합니다. 되지 족발 하나놓고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천하에 처음 보았기에 그럽니다”

 

 
 



218.성경은 구원의 우물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이지마는 지금도 기억하는 작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22년 동아이나 여러 가지 죄를 지음으로 감옥 생활을 하던 어떤 청년이 감옥에서 성경책을 만나게 되어 그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읽는 가운데『성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난 사람에게 쓸데 있는데 인자도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옷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는 이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갖은 죄악을 지은 이 청년이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세상에 자기 같은 죄인이 어디 있으랴, 예수 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 같은 죄인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냐?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서 작은 자서전을 쓴 것을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물론 율법도 있고, 예언도 있고, 여러 문학도 있고, 서신도 있지마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계신 이광혁 장로님께서 신약 성경을 한 장에 다 써서 그린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신약전서를 전부 썼지마는 실상 나타나는 그림은 두 팔을 벌리고 모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성경이야말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219.교회는 구원의 우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유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했습니다. 그 신령한 몸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 신령한 몸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이 땅위에 보이는 몸을 대신 세웠습니다. 그 몸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생명수를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수를 주는 구원의 우물이이 되는 것입니다.
일세기에도 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생명수를 마시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2세기에도 그러했고, 3세기도 그러했고, 오늘 날 20세기에 와서 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거스틴은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성실 되게 근실하게 밀라노 교회에 나가서 여러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때 로마 제국 일원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성 암부로스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더욱 깊은 자리에 들어갔고 풍성한 생명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 교회야말로 이 광야 같이 매 마른, 아니 사하라 사막 같이 쓸쓸한 세상에서 영적 오하시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대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220.이란에 온 선교사

제가 일찍이 어떤 잡지를 보니 옛 날에 바사라고 불렀던 저 이란 나라 유브라데강 근방에는 물론 물이 있어서 풍성하지마는 대체로 비가 적게 오는 지방이어서 어떤 지방에는 일년에 몇 번밖에는 비가 안 오고 전혀 우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은 비가 올 때와 소나기가 올 때에 그 물이 고인 엉덩이를 파서 거기에 받아 두었다가 여러 달 비가 안 올 때에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밥짓고, 그 물로 메마른 곡식에 주고, 이렇게 전부 그 웅덩이 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어떤 선교사가 선교하려 가서 보니 그 웅덩이 물이 오래되니까 더러워지고, 여러 가지 벌레도 생기고, 위생적으로도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마는데도 하도 물이 없으니까 그냥 그 물을 먹고삽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어떻게 하면 여기서도 생수를 먹고살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보니 몇 백 척 몇 천 척되는 깊은 곳을 뚫어서 그 땅 속에 있는 원유를 뽑아 휘발유를 공급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메마르고 몇 십 자 파서 물이 안 나지마는, 깊은 속에는 물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특별히 미국에 기계를 주문해서 여러 백 척을 뚫어 보았습니다. 뚫고 보니까 약 2백 척 이하에는 물이 풍성해서 그 다음에는 그 지대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첫 번으로 깊은 곳에서 생수를 얻어 그 다음부터 그 근방에서는 맑은 물을 마시게 되었고,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 또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해서, 그 일대의 쓸쓸한 광야가 변해서 문자 그대로 풍성한 꽃동산으로 변했다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돌아보건대 14년 전에 이곳에 큰 구원의 우물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우물을 통하여 고향을 떠나고 재산을 잃고 허둥지둥 38선을 넘어 온 모든 피난민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복잡한 시대에 시달려서 피곤하고 말 할 수 없이 곤비(困憊)한 심령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죄악에 물들어서 사망의 길을 걷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구원의 우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물론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정도 나타났습니다.
모리슨 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인간은 홀로 서 있지 않는다》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과학자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펴보고 우리 지구를 조사하여 보고 해와 지구와의 거리, 지구의경도, 기울어진 도수, 지구를 싸고 잇는 대기와 공기,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잇는 물, 또한 지구를 구성한 여러 가지 화학적 요소, 이런 모든 것을 살펴보고 맺어보는 결론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 우주와 이 세계를 지으실 때에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고, 인간이 살 수 있으리 만큼 모든 조건을 준비된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우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주에 질서가 유지되고 이 세계의 모든 인류와 금수와 만물이 그 생명을 얻었고 또한 유지하여 가는 것이 사실인 줄 압니다. <크리스마스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221.내일 일을 모르고 사는 인생

옛날 글에 있는 말과 같이 문자 그대로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 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 알 하나처럼 이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뿐 아니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기 상 29장 15절에 보면 인생을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안개와 같다고 했는데 안개도 거이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해일이 일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넘치고, 열병도 충만한 세상입니다. 그라나 그뿐입니까? 인생은 사실 내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너희가 내일 일을 모르는 도다』내일이 아니고 다음 시간의 일을 모르고 삽니다.

 

 
 



222. 45세에 결혼한지 8일만에 과부 된 여인

전에 제가 미국에서 잘 알던 어떤 미국 부인이 한 분이 게신데 대단히 어진 부인입니다. 이 부인이 45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지 9일만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이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아마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 줄로 압니다. 여기 독신으로 나오신 동포들 가운데 38선이 이렇게 오래 막힐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아마 가족을 동반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 곡식이 잘 되니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고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그럽디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갈 줄을 인생은 모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실 잠간이요, 또한 무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여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과 견해가 다르지마는 대체로 생각해 보면, 세 가지 지혜와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잇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 적 태도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의 견해와 그 태도입니다.

 

 
 



223.서도와 수심가

먼저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 적. 그런 태도를 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가 전성할 시대에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 있는데 그 학파 가운데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표어 가운데 하나가 성경에도 그 말 그대로 나타나지마는『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내일 죽을 터이니 살아 있을 때에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옛날 에피큐리안 학파에서만 가진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서도에서 오신 분도 많은데 서도에서 많이 부르는 수심가를 아마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 수심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마는 아이 때에 늘 부르는 소리를 좀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가 하면“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그러니 젊어서 잘 먹고 잘 쓰며 거드럭거리고 놀자 입니다. 그것이 수심가에 나타나는 인생 철학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잠깐 되니 그저 젊었을 때에 늙어지기 전에 잘 먹고 잘 쓰고 잘 놀자 인 것입니다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입니다.

 

 
 



224.중국인 양주의 주장

옛날 중국에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주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오래 산대야 백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백년을 사는 사람은 천명에 하나도 드물다”그런데 설사 어떤 사람이 있어서 백년을 산다고 하자. 그렇지마는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와 노년기가 그 절반을 차지한다. 또 밤에 잠자는 시간과 깨어 서도 헛되이 지나는 시간을 합해보면 그것이 또 나머지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 그 다음에 환난을 당하고, 질고(疾苦)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시간, 이것 다 모아 놓으면, 또 그 나머지와 절반을 더 차지해, 그러니 참으로 생을 즐길 수 잇는 햇수는 백년을 살아도 10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중의 결론은 그러므로 살았을 때에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사망이라는 것을 과히 생각지도 말고 잊어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 주장은 그저 귀로 듣고 싶은 말을 다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다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은 다 먹고, 또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육신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세속주의 적, 형세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생활의 철학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날 수가 없습니다.“향락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누려 보자 인생은 허무하다”그런데 이런 태도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탐구하게 되면 탐구한 그 즉시로 그 향락이 환멸과 고통으로 변합니다.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무상한 인생>에서

 

 
 



225.십자가의 사랑

어떤 순교자가 어떠한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순교도 얼마나 고귀한 죽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애국자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초개 같이 버릴 때, 이와 같이 순국자의 죽음도 얼마나 거룩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진리만을 위한 순교만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나라만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류 전체를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살피기 위해서, 죽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226.친구를 위하여 대신 죽은 병사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에 이런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 할 때에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서 다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나갈 사람을 먼저 뽑아서 내 보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동리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제비를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람이 제비에 뽑혔는고 하니,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한 친구 가운데에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도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다가 대신 지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 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 동래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었던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의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고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에 그가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5잔에 보면, 우리 인류의 형편을 몇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떼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건하지 않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227.어떤 마차부의 충성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아마 옛날 같습니다―깊은 산림 지대를 마차에 타고 가족과 동반해서 지나가던 중이였습니다. 마차부는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위해서 봉사한 충성된 분입니다. 또 이런 산림 지대는 여러 번 다녀 보아서 경험도 많은 그런 좋은 마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깊은 산림지대를 지나갈 때에, 말 네 필이 그 마차를 끌었는데 말 두 필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하니 다른 말들도 같이 네 굽을 안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에 짐승들이 여러 마리 따라 옵니다. 그 마차부는 거기에 이따금 나오는 이리떼인 것을 곧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동리가 과히 멀지 않으니까 동리로 달립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보니까 그 이리의 무리가 몇 마리가 아니고 여러 수 십 마리가 따라오는데 가만 보니까 그 이리한테 잡히면 말과 사람이 다 희생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부가 생각다 못해 말 가운데 두 필을 말 고비를 찍어서 채찍으로 때려서 다른 방향으로 다름 질 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이리들이 그 말을 쫓아서 그 방향으로 전부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두 말로 마차를 몰면서 그 마부는 이제는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면서 달려갈 길을 빨리 갑니다. 얼마쯤 있다보니까, 이 이리들이 벌서 그 말을 따라가서 다 잡아먹은 모양입니다. 그리고서 오히려 힘을 더 얻어서 더 빨리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면 어떤 동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두 말을 몰아서 빨리 가지마는 또 다시 이리가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보고 하는 말이“주인께서 이 말을 몰아서 빨리 동리에 들어가세요, 나는 필경 저 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 나서는 하나 밖에 없는 총을 메고 마차를 내렸습니다 내려서 마차는 빨리 보내고 이리를 향해서 그저 총알 잇는 대로 이 이리와 싸웁니다. 이 주인은 얼른 동리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에게 청병(請兵)해서 총을 많이 가지고 많은 사람이 빨리 구원하려 왔습니다.
왔지만 그만 불행히 그 마차부는 총탄이 다 없어지고 이리에게 희생된 뒤였습니다. 이렇게 이 마부는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마차부를 위해서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주어서 영원히 그 마차부의 충성을 표상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마차부가 자기 주인과 자기 주인의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한 것, 얼마나 고귀한 충성이요, 얼마나 고귀한 희생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이보다도 더 귀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마차부는 그래도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올시다. 이것이 십자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한경직목사 설교 예화 제1권 끝)

 

 
 



출간에 붙여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된다면

이 작은 책자를 저의 여서(女 ) 이영헌 목사로 하여금 엮어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 나라의 교역자들과 젊은이들의 원에 의해서 이 책을 펴내는 것이라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면 그 위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족하기만 한 이 사람이 지난날 나름대로 기도하며 준비했던 설교 가운데 보잘것없는 예화(例話)들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감동 주셔서 복음전도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1984. 7. 남한산성에서 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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