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주제별 편◑/이정익 목사 명설교(385편)

바라봄의 법칙

by 【고동엽】 2022. 2. 27.

바라봄의 법칙  

 

 

 

 

             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

 

 

 

 

 지금 일본과 중국이 작은 섬 센카쿠(조어도)열도 때문에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 작은 섬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금이나 석유가 매장되어 있으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는 옛날 마게도냐 지역입니다. 그곳에 빌립보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금광이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왕 필립 2세가 그 빌립보 땅을 탐해서 식민지로 편입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왕이 암살당해 죽자 아들 알렉산더대왕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큰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그곳에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러 전도하여 기원50년경에 그곳에 빌립보교회를 세웁니다. 바울에게 빌립보교회는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실라와 함께 점쟁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는 일로 고발당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 밤에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는 사건으로 간수가 자결하려고 할 때 그를 전도한 곳이 바로 빌립보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는 바울일행이 아시아로 전도하려고 갈 때 성령이 막았고 비두니아로 가려할 때도 막았고 배를 타고 에게해 항구인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에 이끌려 간 곳이 빌립보입니다(사도행전1611).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빌립보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자들의 분쟁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강조하여 복음을 희석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 안에 두 여걸 즉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었습니다. 이 두 여 집사의 경쟁이 심하여 교회는 두 파로 갈라져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외부의 핍박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옥중에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이 같은 여러 교회의 소식을 듣고 걱정하다가 에바브로디도라는 청년을 통해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교회에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 써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단을 경계하라

 

 

 

 

 

  빌립보서32절을 보면 “개들을 삼가하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이미 62년이나 경과하였고 지금은 예수부활 이후 은혜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들이 극성을 떨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개화기에 서양문물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고 신문화와 하이칼라가 들어오는데도 상투를 붙잡고 나라 망한다고 떠드는 격입니다. 이미 새 시대가 열린지 62년이나 지났습니다. 새 복음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이고 세례 받는 시대이며 이미 금욕주의나 율법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할례주의자들은 지금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분간을 못하고 헤매고 동요하고 우왕좌왕 합니다. 옥중에서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들을 삼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신자들만 찾아다니며 이간질을 하고 질서를 흐려놓고 신앙을 흔들어 놓습니다. 모 이단들이 우리 집까지 와서 “예수 믿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은 믿는 집이니 안 믿는 집에 가 보라”고 하자 “그러면 대화라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목회자인데 안 믿는 집에나 가보시라”고 하자 “그러면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겠네요”하고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쫓아버렸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그들이 오니까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타 가지고 와서 대화하기 전에 기도를 한번하자 하고 2시간을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가버렸더라고 합니다. 이단은 믿는 사람들만 찾아다니며 이간질하고 흔들리게 합니다. 그러니까 약한 일반 신자들은 그대로 무너지고 넘어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들을 삼가라”고 격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새 길이 주어지면 구태의연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 지금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대다수는 지금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동안 마음이 설렜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뒤에서 불평하고 매일 애굽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선동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만나를 매일 아침 먹었으면서도 불기둥과 구름기둥 밑에서 지내면서도 여전이 불평하고 옛날 구시대 생활을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배를 타고 탐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모두 새 시대 새 땅을 탐험한다는 부푼 마음을 가지고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사람은 근심어린 얼굴로 노를 젓고 있습니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가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는 후에 탐험대원들 이름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어느 사회나 어느 공동체나 이런 사람은 있습니다. 진리나 새 길이나 새 방법이 주어지면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습니다. 옛날 우리나라가 구습에 찌들어 살아갈 때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때 선뜻 받아들인 집안이 아주 소수였습니다. 그 소수가 오늘 이 나라의 복음화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선구자이고 그 시대에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향한 안목이 있고 사고가 전향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를 앞서 가면서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분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옥중에서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개들을 삼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화합

 

 

 

 

 

빌립보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내부의 문제였습니다. 빌립보서4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화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원래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강가에서 비단옷감을 팔던 자주장사 루디아를 전도한 후 세례를 주고 세례 준 강가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유럽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입니다. 그 후 빌립보교회에는 두 여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교회는 처음부터 여권이 강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때 두 여걸이 힘을 합쳐 교회를 섬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두 여걸이 서로 경쟁을 했고 그 경쟁은 과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두 편으로 갈라져 파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보면 교회마다 파벌이 있어서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오늘 가정마다 큰 문제는 경제문제가 아니고 사업실패도 아니고 불화와 갈등입니다. 이것이 오늘 가정을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암적 요소들입니다. 나의 가장 큰 문제도 직장문제가 아니고 내 안의 갈등문제입니다. 부부의 문제도 경제가 아니고 집이 없음이 아니고 갈등의 문제입니다. 오늘 교회들도 보면 이 갈등과 파벌이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장로를 세울 때 서로 자기파 사람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파벌을 더 강화해서 교회를 좌지우지 합니다. 교회의 근본사명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온 힘을 합쳐서 선교하는 일에 100% 소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화하고 갈라져 힘이 분산되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몸에 암이 발생하면 나머지 기관은 건강해야 강력한 암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온 가족이 일사분란하게 협조하고 치료에 힘써야 겨우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암이 발생했는데 이미 몸에 고혈압이 있고 당뇨병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님 치료비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싸움에서 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나 교계에도 보면 분열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좋지 않은 악습관입니다. 그런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회나 교계에 분열을 일삼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방안이 나오면 제일 먼저 나설 것입니다. 지난 2007년도 예성과 통합하려고 할 때 그 심정으로 문제를 제기했었습니다. 그때 끝까지 못하도록 고집을 부린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두려운 시간이 있는데 그것이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그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너는 왜 분열을 야기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분열을 야기한 사람들은 그때 분명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교회에서 뒤에서 수군수군하지 마십시오. 뒤에서 불평도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 없이 살다가다가도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습니다. 옥중에서 바울은 고민하고 걱정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편지를  보내면서 말씀하기를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너를 인정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44절을 보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 말고 모든 일에 기도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상황이 긴급함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 있습니다. 지금은 핍박시대입니다. 내일 어떤 상황이 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율법주의자들이 신자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싸움이 일어나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때 편지를 보내면서 성도들에게 당부하신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단의 위협도 정치적 핍박도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립니다. 우왕좌왕합니다. 그 소식을 옥중에서 듣고 바울은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격려하고 위로하는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목회자가 가장 애석하게 생각될 때가 신자들이 흔들릴 때입니다. 또 하나는 나를 본받으라는 당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빌립보서48~9절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빌립보서의 핵심 구절이고 결론일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쉽게 말하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본받으려 애썼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가려고 힘썼습니다. 또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애썼고 예수님처럼 죽으려고 순교를 늘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에 당부하신 말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이루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바라봄의 법칙이 나옵니다. 오랫동안 바라보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모습과 마음과 생각이 닮습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처럼 순교하리라 작정하고 마음에 순교를 그림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나 순교가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에 바울은 그대로 되었습니다. 오래 바라보면 닮게 되어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한 공간에서 오래 살면 닮아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같은 공간, 같은 공기, 같은 음식, 같은 대화로 30~40년 동안 매일 바라보며 살아가는데 닮지 않으면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30~40년 동안 예수님을 말하고 부르고 노래하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 닮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성전에 들어가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여러 시간을, 여러 날을, 여러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환상이 보이더니 순간 십자가 위에 달려있던 주님께서 자신을 내려다 보셨습니다. 그 모습은 신비하고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예수님의 영광이 내려오더니 자기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무엇을 보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만한 자질이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순결하도록 놓아두지를 않는 시대입니다. 매일 눈에 보이는 것들이 참되며 옳으며 경건함의 반대의 것들만 보입니다. 오늘은 보는 문화시대입니다. 매일 영화를 보고 잡지를 보고 신문을 보고 인터넷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보는 것은 TV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하루 평균 5시간씩 TV를 본다고 합니다. 오늘 TV가 온갖 것들을 다 보여줍니다. 선정적인 장면들이 예사로 나타납니다. 설교도 여러 편이 방송되어 신자들은 좋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섭렵해서 작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면 식성이 차지 않아 교회에 가서 불평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TV는 좋은 프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보려고 안하는데 그냥 보여줍니다. 그래서 보다 보니까 내 영성에 큰 손상을 입힙니다. 화면 속에서 보여주는 선정적인 장면들, 비속어들, 유치한 말들, 진한 농담들이 잔잔하던 내 영성의 바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맑은 생각에, 잔잔한 마음에, 고요한 영혼에, 깊은 영성에 얼마나 손상을 입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각 없이 보는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오늘 많은 범죄들은 생각 없이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내외가 선악과를 그냥 보았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것이 결국 그 열매 따먹게 되었습니다. 보지 말았어야 합니다. 다윗이 어느 날 낮잠을 잔 후 옥상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어느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다윗은 그냥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쳐다만 본 것 이 다윗은 후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다윗 집안에 끊임없이 칼이 난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생각이 만들어집니다. TV를 생각 없이 보는 것이 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오늘 TV가 사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TV는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죄짓게 만듭니다. 오늘 사탄은 TV를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넣어주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넣어주고 있습니다.  

 

 

 엊그제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보는 순간 왜 저런 영화를 만드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너무 끔찍하고 잔인하여 도중에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 몇 일간 내 영혼을 소란스럽게 하였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영화한편을 보았는데도 악영향을 받았는데 오늘 청소년들은 거의 매일같이 그런 매체들을 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의 영혼과 마음 밭과 정신의 공간이 얼마나 삭막하게 파괴되고 비틀어지고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청소년들이 아주 잔인한 사건들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은 TV를 통해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사탄이 쳐 놓은 그물에 포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처럼 되려고 애쓰고 힘쓰고 노력한 것처럼 너희도 주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48절에서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 높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 내안에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 받을만한 거룩함의 요소들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 주제별 편◑ > 이정익 목사 명설교(385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밖 삶의 아픔  (0) 2022.02.27
바울의 목표의 삶  (0) 2022.02.27
믿음의 든든한 기초  (0) 2022.02.27
다윗의 신앙고백  (0) 2022.02.27
단순의 삶 (5)  (0) 2022.02.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