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든든한 기초
골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
을 넘치게 하라.
샌프란시스코에 금문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다리의 높이만도 227m입니다. 다리의 길이가 1,280m입니다. 그 다리를 건설할 때 해마다 2,30명씩 다리 아래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리 밑에 그물망을 설치해서 떨어져도 죽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한사람도 낙하사고가 발생하지 않았고 공사 진척도 20%나 향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삶에 중요한 덕목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든든한 믿음의 기초가 요구됩니다. 인간관계에도 일상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기초에서 나오고 뿌리에서 나오고 중심에서 나옵니다. 건물은 기초와 뿌리가 생명입니다. 이것이 약하면 아무리 잘 지어놓아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지반이 흔들리면 곧 금이 가고 무너지게 됩니다. 신앙도 기초와 중심이 부실하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소리만 들으면 그대로 시험 들게 되고 넘어지게 되고 흔들리게 됩니다. 기분만 나빠도 신앙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단의 무슨 소리를 들으면 솔깃해 하고 그냥 따라갑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유괴자를 따라 가듯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기초와 중심이 부실해서 그렇습니다.
기초가 중요합니다. 집이 기초가 튼튼하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두바이에 새로 건축된 160층 고층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높이가 830 m나 됩니다. 만일 기초가 부실해 보십시오, 며칠이나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기초가 중요합니다. 학문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곧 바로 전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기초학문부터 공부시킵니다. 군대에 가면 다음날부터 총 쏘는 것부터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초훈련과 줄 서는 것부터 가르칩니다. 신앙의 삶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기초가 뭐냐 하면 “건강한 영성을 갖추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영성으로 살아가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힘과 능력과 교통이 이루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힘으로 그 시대를 살고 지도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 안에서 뿌리를 박으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가 복음을 전함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한참동안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헛된 철학을 숭배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가장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무력화 하였고 예수의 구속을 경시하였습니다. 천사와 정령을 숭배하고 극단의 금욕생활을 강조하는 신흥 율법주의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중재자로 예수가 아니고 우주의 정령이라고 말합니다. 선한 영으로부터 지혜와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신비는 예수를 아는 일입니다. 그 예수 안에 모든 능력과 구원의 힘과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신뢰하는 일 그 자체가 가장 큰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예수를 경시하고 부정하고 구속의 의미를 축소합니다. 이단의 공통점은 하나님이나 성령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예수를 건드립니다. 예수는 인간임을 말하고 신성을 축소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을 내놓아 혼란을 야기합니다. 이단들의 사명은 새로운 이론으로 신자들을 혼란시키고 흔들리게 하고 신앙을 혼동 시키는 것입니다. 기초가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솔깃해 합니다. 그리고 은밀히 쫒아갑니다. 이단들이 와서 속삭이는 소리를 잘 믿고 잘 따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유괴하는 사람을 따라가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기초가 약합니다. 그래서 자꾸 일을 저지르고 넘어집니다. 기초가 뭐냐 하면 올바른 분별력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능력입니다. 아이들은 이것이 약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사탕 하나만 사주면 그냥 따라갑니다. 기초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한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이단의 말을 듣고 그냥 따라나섭니다. 옆에서 조심하라고 하면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갑니다. 살다보면 이 기초가 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속습니다. 물건을 살 때 잘 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속습니다. 작년에도 속고 금년에도 또 속습니다. 기초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귀가 여리고 분별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이 어리숙했습니다. 이단들의 속삭임을 그대로 믿고 따라나섰습니다. 우왕좌왕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옥중에서 그 소식을 듣고 심각하게 염려를 합니다. 그래서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쓰며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몇 가지를 주문하고 있는데 이 주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이시기도 합니다.
“예수 안에서 굳게 서라”
지금 성도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심정은 예수님 심정입니다. 때로 신자들이 말을 안 들으면 “멋대로 한번 해 봐라”하고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말을 안 듣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네 마음대로 해 보라”하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강조하기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과 나 사이를 벌려 놓으려는 조건들이 참 많습니다. 평안한 생활이 그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평안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안은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을 풀리게 하고 졸게 하고 방심하게 하는 아주 무서운 요소입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속극, 재미, 놀이, 술도 다 주님과 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은 이단사설들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사설들이 많습니다. 이상한 책들도 이상한 신앙형태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많지만 믿고 찾아갈 건강한 교회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이단들의 공통점은 예수를 축소하고 구속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공통적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나의 구주가 되셨고 주님이 되셨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예수를 위해서 일생을 포기하고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의 진리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고 십자가를 위해서 평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그릇된 사설들이 들어와 신자들을 현혹하여 우왕좌왕하게 만들고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옥중에 있는 바울이 얼마나 분노하였겠습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서 살라”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그 언약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초가 든든한 믿음으로 굳게 설 수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새 말에 올라탔는데 갑자기 뛰는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 주변에 있던 장병들 누구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어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이 안도의 숨을 쉬며 내리면서 한마디를 하였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장교다.” 그러자 그 병사는 그 즉시 장교석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한 대위가 “너는 사병이니 사병석 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병이 “나는 장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너를 장교로 만들었느냐” “황제께서 방금 선포 하셨습니다” 이 사병의 믿음을 보십시오. 황제가 장교라고 했으면 나는 장교인 것입니다. 당시 황제면 절대주권자인데 누가 그 명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는 당신의 자녀라고 하셨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기초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뿌리박아 세움을 받으라”
“예수 안에 깊이 뿌리를 박으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깊이 뿌리를 박으라는 표현은 건축물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7장24절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집을 짓되 반석위에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3장17절에서는 “너희가 예수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하였습니다. 기초의 근본은 예수 안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기초석 즉 머릿돌에서 시작하여 기둥이 세워져 갑니다. 그 머릿돌이 그 집의 기초석입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석은 머릿돌 되시는 예수입니다. 우리의 신앙대상은 예수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뿌리는 예수 안에서 뿌리가 박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교인들에게 그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들어와 다른 이론으로 가르치며 예수를 부정하고 구속의 역사를 왜곡할 때 신자들이 솔깃해하고 우왕좌왕하고 따라갈 때 얼마나 염려되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자들을 우롱하는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분노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서 탄식하며 강조하기를 “예수 안에서 깊이 뿌리를 박아 세움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 안에서 뿌리를 박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이론에 기초를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자꾸만 힘없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변신학 사변신앙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in Christ)를 강조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이 있고 부활이 있고 구속이 있고 죄 사함이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꾸만 예수를 빼내고 지식이나 사변이 개입되고 있습니다.
사변신학의 시작은 철학자 칸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칸트의 어머니는 경건주의 자였습니다. 매일같이 집에서 지겹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칸트는 찬송소리를 지긋지긋 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술 중에 음악은 제일 밑바닥 예술”이라고 혹평하기도 하였습니다. 청년 때에는 교도소 옆에서 하숙을 하였습니다. 교도소에서는 죄는 마귀 때문에 짓게 되니 양심을 회복하려면 마귀를 좆아야 한다고 해서 그 쫒는 방법이 찬송뿐이라 하여 밤늦게까지 찬송을 불러댔습니다. 그때부터 칸트는 사변신학, 사변철학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사변적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연애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자신은 애인이 있었으면서도 마음으로만 연애하고 결혼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또 예수도 사변적으로 도덕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예수가 구주로, 부활의 주님으로, 구속주로, 내 영을 살리는 주님으로 다가왔겠습니까. 그런 신앙은 때마다 흔들리고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너무나 잘 아는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라”고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를 넘치게 하라”
왜 갑자기 하나님을 잊고 우왕좌왕 하는가 하면 은혜를 저버려서 그렇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배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은 큰 은혜입니다. 예수의 고난, 구속, 부활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주께서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고 구출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 은혜를 쉽게 잊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 구속의 진정성, 분명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내가 예수를 직접 만나기까지의 실감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주님이 되기까지의 몸부림과 수고와 고민을 가지는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고 어느 순간 쉽게 주님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거나 쉽게 신앙에 입문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쉬운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쉽게 얻은 물질은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쉽게 얻은 결과도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나무도 무풍지대에서 자란 나무는 좋은 재목이 되질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의 세계에 한파를 보내시고 비바람을 불게 하십니다. 그래야 좋은 재목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도 신앙의 삶에도 한파와 비바람을 보내십니다. 그래야 감사와 깨달음의 삶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촌에 고기잡이배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온 동네가 걱정하며 기다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밤늦게 집에 불이 났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정신없이 불을 끄느라 고생하였습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집은 불타고 가혹한 시련입니다. 한파와 비바람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배가 돌아왔습니다. 배가 풍랑으로 방향을 잃고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방황대고 있는데 육지에서 갑자기 큰 불빛이 나타나는 바람에 방향을 잡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집이 불난 것이 재앙입니까 구원의 불입니까. 인간의 삶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다져지고 하늘의 섭리를 깨달아 알게 되고 겸손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교회를 건축하고 있지만 교회도 너무 쉽게 지으면 감사도 감격도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눈물과 땀과 피와 헌금과 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사가 다 그렇습니다. 일본 하네다 공항 근처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이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도로정비를 하게 되어 그 교회가 헐리게 되어 엄청난 보상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논의하는 중에 어느 장로님이 “그 돈으로 우선 교회부터 짓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것은 가장 쉬운 발상입니다. 그때 어느 집사님이 “우리가 거저 받은 돈으로 교회를 지으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돈은 거저 받았으니 자선기관에 주고 우리교회는 우리의 땀과 정성과 헌금과 우리의 희생을 들여 교회를 짓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보상받은 돈은 자선기관에 주고 성도들이 헌금해서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주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고 주님이 분명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교인들은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예수의 구속을 축소하려는 영지주의에 너무 쉽게 빠졌습니다. 그들이 뼈저린 아픔과 고난과 은혜를 체험하였으면 그렇게 쉽게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옥중에서 사도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어리석음과 예수의 구속이 욕됨에 속이 상하였을 것이고 이단들의 행위가 분노스러워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영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유지는 하나님의 뜻에 지배당하고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 “플라시보 효과”를 얻게 됩니다. 플라시보는 “가짜 약”이라는 뜻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밀가루를 단호하게 신약이라고 먹이면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뉴욕 주립대 로버트 베커(Rovert O. Bercker) 교수가 한 말입니다. 의약품 중 1/3은 플라시보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에 지배당하여 살게 되면 삶에 이런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 갖게 됩니다.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과 영적 관계가 이루어지면 언제나 예수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 교훈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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