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상/김 원기 목사(매릴랜드 휄로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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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음을 전하고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사람
들이 발붙일 곳이 점점 더 없어지는 때라는 것을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절
감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말과 함께 뛰라"(Run with the
Horses)는 자신의 저서에서,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삶
의 목적도 없이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두고 씨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순간순간을 무
의미하지만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산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 교육을 받고 자라 온 사람들을 상
대로 우리는 앞으로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15분 혹은 30분짜리 TV 연속극과 자극적인 각종 프로그램을 보고 자
란 세대들에게 어떻게 설교를 통해 교육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상당히 큰 도전이자 고심거리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TV를 보다가 조금만 재미가 없어도 채널을 돌려 버
립니다. 교회에 와서도 설교를 들을 때 흥미가 느껴지지 않고 자기 마음
에 들지 않으면 앉아 있다 그냥 나갑니다.
과거 세대는 청각을 통해 교육을 받았지만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시각
을 통해 교육받습니다. 교회에서 그들에게 맞추어 드라마 같은 것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육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청각
을 통해 목회를 해야 합니다. 또 과거 세대는 책을 읽음으로써 지식을 전
달받았는데, 요즘 세대는 듣고 보면서 지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러니까 지
금까지 우리가 복음을 통해 교육하고 훈련시켰던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태에 있는 세대들을 지금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우리가 어
떻게 복음을 심고 또 교회에서 그들을 지도자들로 양성하면서 하나님 나
라를 건설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그
런데 그에 대한 해답을 그 누구도 간단하게 제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지도자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보다는 싫든 좋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 때문에 교회 지도자로 살아가면서 겪은 고통과 회
의와 갈등을 통해, 그리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
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지도자로서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가
깨달은 바들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저는 열여섯 살에 미국으로 유학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
어가서 4학년 때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다가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학교 갈 때까지만 해
도 저는 꿈이 굉장히 컸습니다. 무디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시대를 변화시키겠다, 내 세대에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
져야 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를 받고 27세에 목사
가 되어 지금 11년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목회에 뛰어들었을 때는 야심 만만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1년
이 못 갔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차원에서 저에게 회의가 찾아들었습니다.
첫째는 저의 자격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목사로 평생을 바칠 수 있겠는
가 ?"
제 자신을 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고민이 컸습니다. 말로 하기는
쉬운데 행동으로 보여 주기는 힘든 이 길을 내가 꼭 가야만 할 필요가 있
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두번째는 교회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 있게 뛰어들었는
데 생각만큼 교회나 사람들이 금방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씨름하다 보면 사람들이 깨닫고 나처럼 교회를 위해서라
면, 복음을 위해서라면, 특별히 주님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헌신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들을 때는 귀들이 번쩍번쩍하는 것
같은데 그 다음 주에 보면 별로 변화가 없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눈
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일 주일 후에 보면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3년쯤 되기 시작하니까
저에게 굉장한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 과연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입니까 ?"
저는 목회가 다른 어떤 일보다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목회가 힘들다고 얘기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
은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목회가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라고
위로를 합니다. 그때 저는 "사실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분들이 더 힘
들지 목회는 그렇게 힘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해 줍니다. 더군다나 사
명 받아서 목회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목회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
는 제가 돈을 받고 목회하는 것이 미안해서 돈을 주어 가면서 목회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목사님들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루 종일 성경을
읽어도 , 하루 종일 기도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
원 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해 보니까 점심 시간에 성경 보는 것도 눈치가
보여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때는 마음대로 성경 읽고 기도할 수 있는 목사님이 제일
부러웠습니다.
그렇게도 원하는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목회가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데서 회의가 느껴
졌습니다. 만약에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이고 사람들을 변화시키
는 일이고, 정말 내가 한 고생과 희생이 하나님 나라에서 값어치 있는 일
이 된다면 평생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
서 보니까 3년이 지나도록 변화가 별로 안 보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회
의가 엄습해 왔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도 변화가 없는데 30년이 지났을
때는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해 보니까, 나중에 제가 60,70세가 되
었을 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너는 어쩌자고
되지도 않을 일을 했는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일에 너는 30,40년
을 투자했는데, 보라 무슨 가치가 있었느냐" 하는 조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때가 서른이 조금 넘었을 때였는데 그런 회의에 빠져 갈등하며 괴로
워 몸부림쳤습니다.
"하나님,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분명히 보여 주
시면 30년이 아니라 평생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제
가 30년, 40년을 투자하고 난 다음에 돌아볼 때에 `너는 참 불쌍한 인간이
다. 불쌍한 일생을 살았다. 그것을 위해 네가 평생을 투자했는데 무슨 가
치가 있었느냐' 하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은 싫습니다."
하나님께 울면서 사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때 잠도 설쳐 가면서 아파
하고 갈등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고
생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고생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가서 제가 누릴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렇게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일은 가치 있는 일이
니 걱정 말고 하라"고 그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3
년, 4년, 세월이 가면서 제 마음 속에 "아, 내가 처음에 소명을 받고 신학
교를 졸업하고 나오면서 가지고 있었던 기대에는 어긋났지만 분명히 여기
에는 가치가 있다. 분명히 내 일생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일이다" 하는
확신이 서서히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고민했던 것에 대한 해답
을 찾기 시작하여 이제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충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목회에 대한 갈등과 회의를 느끼지만 않을 뿐입니
다. 제 아내가 잘 알지만 그때 저는 석달에 한번씩 목회를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목회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치고 그 과정을 안 거치는 사람은 없
는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볼 때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저를 훈련시키
셨던 기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가 하는 것은 이미 진부한 얘기가 되어 버
렸지만 앞으로 우리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기 위
해 오늘날의 세상 모습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십대들 중에 75%가 만 18세가
되기 전에 성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워싱턴 D.C.가 미국에서 제일 도덕적 문제가 심각한 곳 중에 하나인데
그 도시의 고등학교 여학생 중에 65%가 16살 미만에 성경험이 있었습니
다. 또 그 중에 반 이상이 3,4명의 상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더
욱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C.C.C.에서 사역하는 어떤 분
이 미국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복음주의 노선의 교회 10대들을 대상
으로 성경험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교회 안 다니는 학생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복음이 바로 전달되고 열심히 기도 생활하고 신앙 생활하고
제자 훈련을 시키는 교회들의 십대들이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도 보수적인 면에서나 제자 훈련 시키는 것에서나 열심으로
는 웬만한 교회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 십대들이나 이
십대 초반의 청년들은 제가 상담하고 쫓아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한 경험으
로 볼 때, 교회 밖의 젊은이들과 손톱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솔직히 저
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변화를
주었다고 믿고 싶고 학교 친구들은 전부 다 성적으로 타락해도 믿는 청년
들만은 그런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신앙 생활을 통해 생겼다고 믿
고 싶습니다.
그래야 회의를 느끼지 않고 목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
게 소리 높여 말씀을 선포해도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런 사실들을 언급하는 것은 올바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
기가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다고 해서 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서 따르는 사람이
있을 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이끌려면 따르는 그들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
해야 합니다.
"지도력"(Leadership)이라는 기독교 잡지사에서 미국의 복음주의 노선
의 목사님들을 상대로 1987년에 통계를 낸 자료에 따르면 보수적 경향이
다분한 목사님들 가운데 여덟 명 중에 한 명이 부인 외에 다른 여자와 성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교인이나 목사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도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하면서 굉장히 두렵습니다. 지금은 여덟 명 중에 한
명 꼴로 부정을 저지르지만 곧 여덟 명 중에 두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
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누구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가 앞으로 교회를 섬기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제 아내는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교역자들과 상담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다른 데 가서는 못 하는 얘기들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동료로
믿었던 사람들이 실수하고 찾아와서 얘기할 때 굉장한 배신감이 느껴졌습
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화도 났습니다.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다니…. 그럴 수가 있나. 이런 일은 TV 드라마
에 나오는, 윤리적으로 방종하는 목
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나 현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현실을 떠난 사람들입니
까 ? 거기에 영향을 안 받은 사람들입니까 ?
교인을 앉혀 놓고 최근에 본 영화가 뭐냐고 물어 보기가 두렵습니다.
저는 절대로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저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방종한다
고 할 정도로 율법에서 해방되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PG(parental guidance:부모의 지도를 요하는, 미성
년자 부적당 영화)에도 가지 말라고 합니다. TV 앞에 앉아서 늦은 밤에
하는 성인영화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성적(性的)인 자극을 주는 선전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일반
백화점 선전물만 보아도 십 년 전보다 점점 더 심하게 여자들의 육체를
노출시킵니다. 여자들이 그것을 볼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남자들은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남자들은 날마다 쳐다보고 삽니다. 그
런 것을 보면서 "나는 아무 것도 안 느낀다"고 얘기하는 남자는 뭔가 잘
못된 남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
적 타락과 유혹을 이기는 길은 영성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배우고 기도 생활하는 데 달려 있습
니다. 아무리 교회 지도자가 될 만한 훌륭한 인격과 자질과 능력을 소유
했다 해도 영성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순간적인 실수는 시간
문제입니다.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그 유혹은 더 심할 것이고, 그
에 대한 여파가 더 클 것입니다.
현재 미국 목사들에게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또다른 통계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 목사님들을 상대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일 주일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
그랬더니 일 주일에 기도하는 시간이 그분이라는 놀라운 통계 결과가
나왔습니다. 현재 목사들이 어디에
서부터 흔들리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목사님들이 일 주일
에 그분밖에 기도를 못 하는지 아십니까 ? 교회 일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상담할 사람들도 많고 설교 준비도 해야 하고 압력도 받고 이것저것 눈치
봐야 할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건물도 잘 짓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왜 교인들
이 사회에 나가서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아니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타락하는 대로 함께 타락하는지 이제 알았을 것입니다. 교
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들어가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취와 어두움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더럽혔
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교회 지도자로 서고자 하는 사람들과 다음의 세
가지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 지도자로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말씀
첫째/요한복음 15장
제가 제일 자주 읽고 제일 많이 상기하는 말씀은 요한복음 15장의 포
도나무와 가지 비유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아니, 자
기 자신을 속이고 삽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끼리 모였을 때 종종 하는 이야기인
데, 목회를 11년쯤 하다 보니까 설교에 약간 자신이 생깁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말입니다. 또 교인들이 귀가 솔깃해 하는 설교를 할 자신이 있습
니다. 집회를 다니면서 회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설교를 항상 몇 편씩
준비해 가지고 다닙니다. 다른 사람이 한 설교를 잘 정리해서 내 것으로
소화시켜 예화만 기가 막힌 것으로 몇 개 갖다가 붙이고 설교하면서 사람
들을 조금 웃겼다가 울렸다가 하고, 슬픈 얘기를 나중에 해서 다 울려 놓
고 끝내면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를 떠나
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 지도자들에게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
다.
포도나무 비유는 개념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쉬운데 실제로 인정하기는
힘듭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양치질도
할 수 없고 세수도 할 수 없고 운전도 할 수 없고 공부도 할 수없고 화장
실도 갈 수 없고 성경도 읽을 수 없고 기도도 할 수 없고 가정 생활도 할
수 없고 아내를 사랑할 수도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섬기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굉장히 여러 번 들려드렸습
니다.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나와서봉사하는 것도, 안내하는 것도, 하다못
해 의자를 나르는 것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마음에
들게, 하나님 나라에 가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10년 이상 목회하면서 자신이 생긴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 자신
이 점점 없어집니다.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할수록 점점 더 불
안해집니다. 저는 설교하기 전에 무엇을 먹지를 못합니다. 어떤 설교는 수
십 번 한 적도 있지만 아직도 설교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못 먹습니다.
처음에 목회를 시작했을 때는 `경험이 없으니까 그렇지 나중에 좀 경험이
쌓이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못 먹습니다. 속이 꽉 막혀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농구 선수 중에 빌 왓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
왓슨이라고 하면, 농구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줍니다. 그런데 한번은 신문
기자가 찾아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게임을 준비하는 과정에
대해서 물었더니 빌 왓슨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게임하러 들어가기 전에 꼭 토합니다."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꼭 무엇
을 먹어서 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
자가 농담으로 빌 왓슨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루에 세 게임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
세 번 토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빌 왓슨의 얘기를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프로 농구 선
수가, 그것도 한밤중에 일어나서도 농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시합에 임
하기 전에 구역질이 난다고 하는데, 하물며 질그릇보다도 못한 우리가 교
회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과연 얼마
나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신에게는 교회 일을 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에
도 쓸모없는 일인데' 하는 두려움 때문에 긴장이 되어 구역질이 나 본 적
이 있습니까 ? 돈을 벌기 위해 매일 게임을 하다시피 하는 프로 농구 선수
도 게임에 임할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는데, 평생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내가 헛수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내가 우리 교인들을 잘못 인도하
는 것은 아닌가 ?",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식의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
된 것입니다.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경험을 의지하고 자기 지식을 의지하고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니…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씨름하는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포
도나무에 거할 수 있습니까 ? 어떻게하면 내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
하는 것입니다.
둘째/디모데전서 4장 12-15절
미국 기준으로는 제가 그렇게 목사가 일찍 된 것이 아닌데, 제가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어린 종"이라는 말이었습니다.
27세에 목사가 되니까 가는 데마다 젊은 목사, 어린 종이라는 말을 무지
하게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목회를 했던 교회는 역사가 26년이나
된 굉장히 안정되어 있던 교회였습니다. 집사님들은 50대 후반, 60대 초반
등 거의 다가 제 아버님 나이였습니다. 그런 집사님 마흔댓 분을 앉혀 놓
고 집사 회의를 하는데 저는 인간적으로 기가 죽어서 할 말이 없었습니
다.
그래서 "하나님, 이 교회를 제가 어떻게 이끌어야 합니까 ?" 하면서 금
식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
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
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
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2-15).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이 말씀이 제게 참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 디모데의 나이는 39,40세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젊은 나이
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개척한 교회의 장로들 가운데 워낙 연로
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바울에 비하면 디모데가 너무 어려 보였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디모데의 리더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도 바
울이 디모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장로들이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본이 되라"(12절)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에서 제일 긴급하게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본이 되는 것
입니다.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말로만 듣는
것은 진저리가 났습니다.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교육 방법은 헬라 문화권에서 나온 교육 방법입니
다. 강의 위주, 지식 전달 위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신약 시대에 씌어졌
을 때 또다른 교육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식 교육 방법
입니다. 히브리식 교육 방법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교육 방법입니다. 제
자들도 그 방법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몇 년씩 데리고 다니
면서 실제 상황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며 지식 전달에서
끝나지 않고 구체적 상황이 나타날 때마다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가
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계속해서 대중 전달 매체를 통해 지
식 전달만 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다 머리는 큽니다. 아는 것은 굉장
히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것을 행할 줄을 모릅니다. 지도자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인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
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연소함을 업신여기게 하지 말고 믿는 자들에
게 본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도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 지도자를 세울 때 물망에 오른 사람들의 자녀들과 얘기하는 것
도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녀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지도자가 될 자
격이 없습니다.
저는 저의 삶을 24시간 개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상당히 많
은 부분들을 개방합니다. 교회 지도자라면 이원화된 생활을 할 수 없습니
다. 교회에 와서 교인들에게 보여 주는 삶과 집에 돌아가서, 직장에 돌아
가서 보여 주는 삶에 차이가 있는 사람은 교회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
니다. 자기가 교회에 와서 주장하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자기가 노력하
고 행하는 삶과 일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목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평신
도에 이르기까지 이원화된 삶, 이중적인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교회가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도리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간음하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강단에서만 외치고 밖
에 나와서는 자기들이 간음하고 강간하고 거짓말하니까 성도들에게 보여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를 비난했던 평신도 지도자들도 사회에
서 똑같이 행동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15절)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7세에 목사가 된 저에게
이 말씀을 주시면서 "너 나가서 네 삶을 통해 본을 보여 주어라. 내가 너
를 목회자로 세웠지만 네가 100% 완전하기 때문에 본을 보이라고 세운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보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 신앙의 성장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10
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도 도전받는 것이 없고 자기 생각에 변화가 없다
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진보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허물과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 약점을 노출하되 진보를 나타내라는 것입니
다.
교회에서 집사 생활할 때 보면 아주 얌전하고 말 한마디 없는데, 가정
에서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부인과 싸울 때는 제가 아연실색할 만큼 성질
을 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10년 동안 교회에서 그런 것이 전
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가린다고 해도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
입니다. 계속 가리면서 살다보면 본이 될 수도 없고 사람들을 이끌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는 모습도 보여 주고 웃는 모습
도 보여 주고 화내는 모습도 보여 주되 그것을 신앙 속에서 소화시켜 보
여 주어야 합니다.
셋째/사무엘하 23장 13-17절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
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그때
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
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
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이런 일을 행하였더
라."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베들레헴 외곽의 굴 속에 숨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두목들과 함께 얘기를 하다가 나지막하게
"베들레헴 저 쪽에 있는 우물 물이 시원한데 그 냉수를 마셨으면 좋겠다"
하고 지나가는 말로 했습니다. 사막의 굴 속에 숨어 있으니까 얼마나 시
원한 물이 그리웠겠습니까 ? 그랬더니 세 두목이 위험한 적진에 뛰어들어
가서 물을 가져왔습니다. 다윗이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국
에는 이런 엉뚱한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탈인데 그들도 그 정도
로 다윗에게 충성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둘은 칼
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한 명은 우물 물을 길어올려서 들고는 도망쳐
나와 다윗에게 갖다 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장
면입니다.
자기 두목이 원한다고 해서 목숨을 내놓고 적진에 뛰어들어가는 부하
들도 그 충성심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그런 훌륭한 부하를 둘 수 있었던
다윗의 지도력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하들이 물
을 떠 왔을 때 보여 준 다윗의 행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물을
고맙다고 하면서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부
하들이 보는 앞에서 물을 땅에다 부어 버렸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과 교
회의 지도자들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부하가 그런 충성을 보일 때 그것을 즐깁니다. 소
위 정치인들의 경우 정치계에서 한몫잡으려는 욕심에, 선거 같은 데 너무
나도 많은 돈을 투자하고 애쓰기 때문에 당선이 되고나면 뿌린 것을 거두
어 들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들은 국민을 섬기기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국민을 이용하고 단체를 이용하여 자
신의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어깨나
주물러 주고 팔 다리나 주물러 주면서 "당신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하면
그 칭찬에 도취되어 자기가 대단하다고 착각하면서 거들먹거리는 것이 바
로 세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우
리 교회 지도자들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럴 위험성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봉사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이 빛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착각합니다. 묵묵히 봉사
하는 사람들은 어떤 목사나 어떤 장로나 어떤 구역장이나 어떤 리더와 같
은 특정한 개인을 위해 그렇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자기를 향한 충성이라 생
각하고 그 만족감에 쉽게 도취합니다. 다윗은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갖다
준 물을 도저히 자기가 마실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쳤
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들의 피를 마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충성심을
하나님 앞에 향기나는 제물이 될 수 있도록 바쳤습니다.
나에게 영광이 찾아올 때 그 영광을 어떻게 적절하게 하나님 앞에 다
시 돌려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제 개인적으로는 제일 힘든 일입니다.
지도력도 사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꼭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책이고 직분이고 은사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
다.
목회를 하다 보면 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충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목회자에게 갈등 상황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교회
를 건축한다고 할 때 건축 헌금을 걷습니다. 그럴 때 교인들이 감동되어
무리를 해서라도 헌금을 내도록 설교하고, 휴가도 자가용 사는 것도 연기
하고 하나님께 먼저 드리라고 강조하면서 제직들 모아 놓고 압력을 가해
헌금을 걷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목회자
자신도 압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희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 목회자는 그 사람들의 희
생이 목회자 그 자신이 아닌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바쳐질 수 있도록 중
간에서 길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쓰시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인들이이런 바램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신앙 생활하기 원한다."
자신을 개방해서 보여 주십시오. "만약 저같이 되기를 원하면 이렇게
하고 이렇게 훈련받으세요"라고 할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성장하여 지도자로 커 갈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이 충성과 헌신
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인도하는 삶을 살야아 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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