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새 첫날 전도자의 기본신앙(1) 요1:12~13
전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행 1:8).
물론 전도가 인간에 의하여 성사된다고 해도 그것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그러나 전도자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기본 신앙이 있다.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하나님의 실재(實在) 신앙이다.전도자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할 수 없다면 전도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기독교의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가 주님을 영접해야(Receive) 한다는 점이다.성령의 역사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아직 전도는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직접 살아계신 분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고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12∼13)
기독교 전도에 있어서 영접(迎接)이라는 말은 아주 독보적인 뜻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인 불교나 유교, 회교 등에서는 영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위 타 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들이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가르침을 줄 수는 있고 훌륭한 인간으로서 인류의 스승은 될 수 있지만 영원히 살아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그들은 다 죽었기 때문이다.그들의 종교에 전도가 있다 해도 그들의 전하는 것은 이미 죽은 자들의 사상이나 가르침일 뿐이다.그 신앙의 대상을 영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도는 다르다.기독교의 복음은 어제도, 오늘도, 미래에도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사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그리고 믿는 자 속에 성령으로 오시어서 영원히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이 엄청난 진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요 14:16∼17)
전도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실재를 믿고 그 살아계신 분(He who lives)을 영접하여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전도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전도자들만이 능력 있는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지 않으신 분이요(딤전 6:16),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며(히 13:8),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계 1:8), 세세토록 살아 계시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계 1:18).
특새 두쨋날 전도자의 기본 신앙(2) 요14:6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정한 길이 되시는 분이 계신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마땅히 길을 물어야 할 것이다.그분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이고 축복이겠는가?
전도를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말 그대로 길을 전하는 것이다.문제는 진정한 인생의 길이 누구인가가 관건이다.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길이라고 증언한다.예수님이 직접 자신을 길이라고 증언하셨다.(요 14:6) 예수님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고 길이 되시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전도자는 이 믿음이 필요하다.이 믿음이 분명하지 못하면 구원도 없고 전도는 불가능하다.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믿음이 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기본 신앙이 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쳐가면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 두 가지를 하셨다.첫 번째는 ‘세상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럴 때 제자들은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라고 대답한다.
그때 주님은 그 대답에 코멘트를 하시지 않는다.만족한 대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을 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그때 베드로가 유명한 대답을 한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그 대답을 들으신 후 주님은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라고 베드로를 크게 축복하신다.“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전도자의 권세 있는 신앙임을 말씀하고 있다.예수님이 누구이며 어떻게 믿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라는 믿음이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기에 그를 구주로 믿고 전할 때 어둠의 죄악 세력인 마귀와 세상과 정욕을 이기고 천국의 하나님께 갈 수 있다(요 14:6).
왜냐하면 주님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마귀와 세상과 정욕을 이기고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요일 3:8).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임을 믿어야 전도자가 될 수 있다(고전 2:2).
특새 셋째날 전도자의 기본 신앙(3) 행1:8
전도가 성도의 가장 복된 사역이지만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은 전도자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데 있다.전도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그것을 실제 이루어 가시는 분은 성령이라는 철저한 믿음이 필요하다(행 1:8)그런데도 전도자가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는 신앙이 없이 전도를 자기의 열심이나 노력으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것이다.전도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여기서 성령이 전도자에게 역사할 때 임하는 ‘권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뒤나민’이다.이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질 때 나타나는 힘’을 말한다.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주변 장애물이 다 파괴되듯 성령이 역사하면 복음 전파에 나타나는 어떤 장애도 다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성령만 역사하면 전도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어서 전도가 되는 것이다(행 14:15).
우리는 쉽게 전도를 하려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오직 성령이 역사하여 성령의 권능(뒤나민)을 주셔야만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분명하게 이 진리가 드러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예수님을 거역하고 주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던 자였다.심지어 그는 주님을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스데반을 죽이는 데 증인까지 선 자였다.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철저하게 회심하여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다(행 9:17).더 놀라운 것은 얼마 전까지 철저한 예수의 핍박자였던 그가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행 9:20∼22)
주님의 증인된 삶은 누가 명령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성령에 의해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전도자는 성령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해야 한다.전도자는 성령이 나를 통해 전도를 이루어 가심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그럴 때 전도의 부담감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고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바른 신앙을 가진 바울은 최고의 전도자로 살았다.그는 평생 주님의 증인으로 살면서 어떤 전도 결과에도 매이지 않았다.다가오는 미래의 삶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성령께 의지했고 성령이 주장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최고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행 20:22∼24).
특새 넷째날 전도자의 기본 신앙(4) 엡1:4
능력 있고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면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구원하시고 신령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엡 1:4).예수를 믿어 구원받아 영생을 얻기로 된 자도 이미 작정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작정하셨다는 믿음의 확신이 전도자의 기본신앙이 되어야 한다.즉 전도는 단순히 인간의 뜻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뜻과 역사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한다(롬 11:25).
하나님의 작정을 근거로 한 전도에 대한 비판은 하나님이 이미 구원받을 자를 작정했다면 굳이 인간이 힘들여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이론은 인간의 논리에만 근거한 비판임을 알아야 한다.이런 사변적 논리에 집중하면 전도의 열정을 크게 훼손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영원한 작정(eternal decree)에서 구원의 예정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롬 9:20∼21).
사도 바울은 이런 진리를 실증적으로 체험한 전도자이다.
그는 아덴 지방에서 전도의 어려움을 받고 고린도 지방에 와서도 많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는다.전도를 포기하려는 상황에서 이 성에 선택된 내 백성이 많이 있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듣고 그는 다시 전도의 힘을 얻게 된다(행 18:8∼10).
전도자는 이런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계시의 말씀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택정으로 오히려 구원받을 자를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셨다는 전도의 확신을 가지고 인간은 작정을 알 수 없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누구나 전도가 가능하다는 긍정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정함 속에서 우리를 사용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롬 1:1).
특새 다섯째날 전도자의 기본신앙(5) 요3:16
전도자가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전도를 하는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전도의 뿌리인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여기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성육신(Incarnation)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현현이며 이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일 5:11∼12).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닫느냐가 전도자의 능력이다.그 사랑은 이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모든 부정적인 사망의 어둠을 긍정으로 바꿀 수 있는 생명의 빛이다.죄의 삯은 사망이다.그러나 주님의 보혈로 나타난 구속의 사랑은 죄악의 사망에서 살려내는 긍정적 생명의 힘이 있다(롬 6:23).
우리는 복음서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한다(요 8:1∼11).그 당시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잡히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다.그러나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여 그들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셨다.그리고 자신도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하셨다.여기서 주님은 너의 죗값을 내가 십자가에서 지고 갈 테니 너는 죄악의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이다.이것이 죄악의 어둠을 생명의 빛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이다(요일3:14∼16).누구든지 이 주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전도자는 하나님 사랑의 절대적 희생을 깨달아야 한다.즉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이다.이를 아가페(Agape) 사랑이라고 한다.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은 아무리 순수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상대적이고 조건적이다.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서 잘 나타내 주고 있다.그 사랑이 인간의 죄를 사하고 구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히 9:1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롬 5:7∼8)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또한 아무 공로 없어도 주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능력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을 인정하고 영접할 때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눅 23:43).
전도자는 또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함을 믿어야 한다.(요 16:32/요일 4:7∼8/히13:8/요 3:16/민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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