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명목주의
홍영기 박사(교회성장연구소 부소장)
이 글의 목적은 선교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한국 개신교의 명목주의의 현황을 고찰해 보고 개신교 미래의 성장 방향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명목주의의 본질과 한국 개신교의 성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명목주의의 정의, 원인들, 그리고 차원들
명목주의(Nominalism)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 명목주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문제(the problem of nominal Christians)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될 것이다. 명목주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명목주의의 정의와 현상에 대한 성경적 통찰력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명목주의의 문제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 가운데 계속적인 경계심이 요구된다고 말하면서 명목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고하게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기를 촉구하면서(사 1:18-19) 계속해서 사자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셨다(사 29:13; 렘 12:2). 현대 교회에서 이 백성은 주일 예배에는 출석하고 헌금을 드리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진실된 기독교적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지칭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방식대로 따르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올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 또한 초대 교회의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성적인 방종과 일하기를 싫어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을 꾸짖었으며 당파심을 가지고 있는 고린도의 교인들을 꾸짖었다. 또한 히브리서는 마음이 완악해져서 믿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지 모르는 교인들에 대하여 경고한다(히 3:12). 우리는 또한 사데 교회에서 명목주의의 문제를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책망하셨다(계 3:1-3). 예수님께서는 일깨워 그 남은 것을 굳게 하고, 받은 말씀을 순종하여 회개하라고 요구하셨다.
비록 명목주의가 성경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 구분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이지만 (고백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참된 헌신의 노력이 없는 사람을 명목상의 기독교인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 로잔 회의(1998)에서 나타난 명목주의에 대한 정의는 명목주의의 복수 요소들과 파악하기 어려운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 인물들에 대한 연구에서, 명목주의는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그 행위나 태도가 그러한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하는 사람들(눅 6:46; 딤후 3:5; 계 3:1)로 규정되고 있다.
현대 교회에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교인으로 등록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등록 교인들을 포함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교인들이나 교회 출석자들(비헌신자들)을 포함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nominal Christians)과 관념상의 기독교인들(notional Christians)을 구분한다. 피터 브릴리(Peter Brierley, 1998: 179-83)는 교인들도 아니고 정기적인 교회 출석자들로 아니면서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관념적인 기독교인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글에서, 우리는 이러한 관념적인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명목주의에 대한 광의의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왜 사람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되는가? 그 현상의 원인들은 무엇인가? 에디 깁스(Eddie Gibbs, 1993: 35-47)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타난 명목주의의 다양한 원인들에 대해 말한 바 있다: (1) 노예 상태의 안전함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2) 첫 번째 세대로부터 그 다음 세대로의 전이; (3) 자신들이 함께 살았던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굴복; (4) 낯선 환경에 직면해야 함으로써 느끼는 불안정감; (5) 물질적 풍요로 인해 야기된 잘못된 안전(보호) 의식의 발전; (6) 희생 제사를 의식 종교로 대체하는 것; 그리고 (7) 패배적이고 냉담한 태도에 굴종하는 것. 깁스의 제시는 명목주의의 문제가 교회 안에도 존재하며 그 문제를 야기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명목주의의 원인에 대한 현대적 이해는 명목주의에 기여하는 다양한 원인들을 제시한 1998년 로잔회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회의에서는 다음 중 한 가지 이상의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을 명목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인종, 종교적 정체성: 종교적 헌신이 인종적인 또는 국가적인 정체성과 밀 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2) 제 2세대: 부모의 신앙이나 부모교회의 신앙에서 자신을 멀리한 사람들
(3) 의식주의: 예배의 외적인 행위가 내적 믿음의 실체에 수반되지 않는 예배자들
(4) 혼합주의: 기독교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보유하지만 다른 종교나 세계관으 로부터 영성과 도덕적 가치의 양상들을 포용하는 사람들
(5) 실망형: 기독교 신앙에 별 매력을 못 느끼고 실망한 사람들.
(6) 녹초형: 개인적인 손해나 해가 되면서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여 교회를 나가거나 의무로 남아있기를 선택하는 사람들
(7) 이중성: 세상과 교회의 이중적인 삶을 살면서 믿음이 일상 생활에 통합되지 않는 사람들
(8) 타협형: 기독교 신앙보다는 지적인, 조직적인 가치 체계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
(9) 불순종형: 자신들의 특별한 기독교 전통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
(10) 세속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채 기독교적 가치나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11) 사회적인 거리형: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필요로 할 때 교회가 있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12) 소외성: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맞지 않다고 느 끼는 사람들
로잔회의의 중요성은 명목주의의 문제가 일차원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차원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슈들과 연관되어 있는 다차원적인 상태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위의 형태들 가운데 어떤 범위의 현상들이 한국개신교의 명목주의 뒤에 놓여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의 목적과 다른 추가 연구를 위해서도, 명목주의를 평가하는 차원들이 설정되어야 한다. 종교사회학자인 스타크와 글락( Stark and Glock, 1968)은 종교성이 발현되는 다섯 가지 영역에 대해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믿음, 실행(공적 예배와 개인적 헌신), 믿음의 기본 교리에 대한 지식, 주관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 그리고 일상 생활의 가치 기반적인 행위의 결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기독교 전통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료를 모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Gibbs, 1998: 13). 예를 들어, 규범적인 기준과 해석의 부족 때문에 주관적인 하나님의 경험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명목주의에 대한 가장 빈번한 평가 기준은 믿음과 교회출석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개신교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논의와 함께 믿음 체계와 기독교적 삶(경건 생활과 교회 출석)의 두 가지 차원에서 한국 개신교의 명목주의를 고려해 보고자 한다. 이 점을 고찰하기에 앞서 개신교 명목주의의 배경으로 한국 개신교의 성장 형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성장
한국 교회의 성장은 교회사에서 두드러진 성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림 1>에서 보는 것 처럼,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 인구는 1960년대 이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개신교 인구는 1960년에 623,072명이었으나 1995년에는 8,760,00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출처 : 1980년까지의 통계는 문화공보부와 기독교문사의 <기독교 연감>, 1995년 통계는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함. 1940년까지의 통계는 한국 전체에 해당하며 1960년 이후의 통계는 남한에만 해당됨.
1995년 정부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인구는 총 인구의 19.7 퍼센트를 차지한다(<표 1> 참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와 카톨릭을 포함하여 약 26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에는 개신교가 16.1 퍼센트, 카톨릭이 4.6 퍼센트, 그리고 불교가 19.9 퍼센트를 차지하였다. 95년 대비, 10년 사이에 개신교는 3.6 퍼센트, 카톨릭은 2 퍼센트, 그리고 불교는 3.2 퍼센트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개신교의 성장이 불교의 성장과 어느 정도 비례함을 보여 준다. 한국 사회의 이러한 종교적 상황은 기독교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함께 주요 종교가 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한국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성장 형태인가 라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게 된다. 1998년에 필자는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교회의 크기를 초대형 교회(장년 출석 10,000명 이상), 대형 교회(장년 출석 1,000명 이상), 그리고 중소형 교회(장년 출석 1,000명 이하)로 나누어 본 뒤에 그 교회를 다니기 전의 종교적 배경을 교인들에게 물어보았다(한국의 초대형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ong, 2000a). 이 조사 결과는 한국 개신교의 성장 형태가 어떠한가에 대해 보여 주었다. <표 2>는 한국 초대형 교회들이 더 적은 크기의 교회들보다 높은 비율의 회심 성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동 성장의 비율은 초대형 교회가 57.8 퍼센트, 대형 교회가 70.1 퍼센트, 그리고 중소형 교회가 58.8 퍼센트나 되었다.
이러한 자료에서 알 수 있는 밑그림은 어떤 교회도 기독교 공동체 밖에서 적극적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며 많은 한국 교회들이 주로 교인들의 이동(switching)을 통하여, 다음으로는 전도를 통하여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로부터 소외되거나 실망하여 더 만족스런 모습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형태의 유사개종(quasi-proselytism)을 행하고 있다고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성장의 현 모습은 기독교 복음의 대위임령(마 28:19-20)에 비추어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고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성장형태는 왜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 1990년대 이후 정체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신교의 성장 숫자(특히 <그림 1>에서 1980년까지의 숫자들)가 새로운 개종자의 멤버십과 이동 교인의 멤버십을 구분하지 않고 각 교단의 전체 등록 교인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출석 교인 수가 얼마나 되며 헌신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개신교의 성장은 많은 경우에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포기하는 불만족스러운 교인들에 기인할지 모른다. 한국 교회 성장에서 지금은 중요한 단계로 보인다. 왜 사람들은 불규칙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는가? 왜 교회에 그렇게 많은 이동 교인들이 있는가? 왜 더 이상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기독교 명목주의(Christian Nominalism)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본질과 현상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것은 한국 교회의 수적인 성장에 대해 성찰해 보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성장 모습을 향해 한국 교회를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명목주의의 실태
한국 개신교에서 명목주의의 현 실태는 1998년에 행해진 갤럽 조사에서 그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조사의 샘플 크기는 개신교인 1,000명과 비개신교인 1,000명을 포함하여 2,000명이었는데 조사 방식은 무작위 추출로 샘플을 뽑아 일대일 면접 방식을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는 개신교회 이탈자와 비출석자들, 개신교인의 믿음 체계, 그리고 그들의 기독교적 삶에 나타난 명목주의의 3가지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개신교회를 떠난 사람들과 교회 비출석자들 가운데의 명목주의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이동 행렬에 관한 한, 개신교가 가장 높은 이탈율을 나타내고 있다(<표 3>을 보라). 이 자료는 개신 교회에서 굉장한 이탈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개신 교회를 버린 46.1 퍼센트 가운데 9 퍼센트는 불교로 이동하였고 35.1 퍼센트는 어떤 종교에도 귀의하지 않았다. 약 3분의 1이 어떤 종교적 귀속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개신 교회가 그 교인들을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조사 결과로 왜 그 사람들이 개신 교회를 버렸는가를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불신(32%) 때문에 개신 교회를 떠났다. 이러한 불신은 교회 지도자의 본이 되지 못하는 행동, 교회의 사회적 책임성에 대한 소홀, 그리고 교인들의 나쁜 행동에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개신교 이탈의 두 번째 큰 이유는 시간의 부족(30%)이었다. 이것은 개신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와 구원의 깊은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확신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세 번째 큰 이유로는 교인들에 대한 실망(13%) 때문에 떠난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교인들이 단지 교회만 출석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cf. 약 1:22). 이탈의 네 번째 이유는 자라면서 기독교 교회에 실망감을 느꼈기 때문에(11%)였는데 이것은 개신 교회가 그들에게 별 매력을 주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다섯 번째 이유도 11 퍼센트의 사람들이 응답하였는데 그들은 가족(친척)이 반대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가족 중심의 가치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개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 동안이나 개신교인이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50 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4년도 채 안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4년까지는 새로운 교회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장 많은 퍼센트의 사람들이 1년이 채 안되었다고 응답하였다. 이것은 새신자들에 대한 환영과 동화 프로그램이 새신자들을 붙잡아 두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개신교회를 버린 사람들이 다녔던 첫 번째나 두 번째 교회는 그들이 계속해서 그 교회에 머무를 것인가 아닌가 뿐 아니라 그들이 계속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 나갈 것이냐 아니냐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cf. Brierley, 1998: 191-210).
한국 개신교에서 관념적인 기독교인들(notional Christians)은 어떠한가? 조사 결과는 11.7 퍼센트의 사람들이 개신교 기독교인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현재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이유들에 대해서는 첫째, 시간의 부족(41%), 둘째, 교인들의 이기심(12%), 셋째, 교회가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므로(7.7%), 그리고 넷째로,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6%) 때문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들은 개신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이 말한 이유들과 꽤 상통하고 있다. 그들의 비출석은 제도적인 교회와 교인들의 신실성(integrity)을 의심함으로써 정당화되고 있다. 소속감 없는 믿음(believing without belonging)은 기독교 교회가 아직도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구 사회에 팽배해 있다. 데이비(Davie, 1994)는 교회를 제대로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적 생활에서 점점 더 멀리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종류의 명목주의는 한국 교회에 하나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던 사람들과 또 개신교의 기독교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지금은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3가지 문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시간의 부족,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나쁜 행동, 그리고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명목주의는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실망한 사람들임을 나타내 준다.
2. 개신교인의 믿음 체계에 있어서 명목주의
우리는 4가지의 연관된 문제들(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영접, 구원의 확신, 신앙 생활의 가장 큰 이유, 그리고 혼합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한국 개신교인의 믿음 체계와 종교적 확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개신교인 1,000명 중 73.2퍼센트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하는 헌신을 하게 된 시간이 1년 이내였다고 대답한 사람은 24.9 퍼센트에 불과했다. 22 퍼센트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2년에서 5년 사이에 영접하였다고 말하였고 18.4 퍼센트의 사람들은 6년에서 10년 사이에 영접하였다고 말했으며, 놀랍게도 34.6 퍼센트의 사람들이 11년 이상이 걸렸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많은 수의 사람들(52%)이 교회를 6년 이상 출석하였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아마도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의 만족스럽지 못한 행동에 대한 인식 또는 개신 교회들의 비효과적인 복음의 전달 등이 오랜 동안 교회를 다니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67.9 퍼센트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또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는 가장 중요한 원인에 대해 질문을 했다. <표 4>에 보면 많은 퍼센트의 사람들이 구원과 영생을 위해를 제외한 다른 이유들(총 52.9%)로 대답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38.2%), 건강과 번영을 위해(6.5%), 가족의 권유로(6.3%),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위해(1.5%)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가치들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다른 많은 이유들은 개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경향(44.7%)과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의 제 2세대임(6.3%)을 시사하고 있다.
개신교인들의 혼합주의적인 성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기독교 외의 타 종교적 가치를 반영하는 질문들이 조사되었다. <표 5>에 보면,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혼합주의적인 사고 체계(a syncretistic mind-set)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구 조사는 유교적인 사고 체계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유교의 지대한 영향은 타 종교인들에게도 나타난다: 불교(96.3%), 카톨릭교(77.9%), 그리고 무종교인들(85.6%). 유교는 비록 소수가 종교로 믿고는 있지만 (0.5%), 아직도 한국인들의 도덕적인 원리를 지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사 결과는 또한 종교 다원주의와 뉴 에이지적 사고가 한국 개신교인들의 정신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명목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들과 문화를 반영하며 그래서 명목주의의 현상과 연구는 그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상황과 유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3. 개신교인들의 기독교적 생활에 있어서 명목주의
설문 조사는 교회 출석과 경건 생활(성경 읽기, 기도, 전도)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한국 개신교인들의 기독교적인 생활에 대해 알아보았다. 먼저, 사람들은 주일 예배 출석 빈도 수에 대해 질문을 받았는데 그 결과는 매주가 65.2 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다음 한 달에 두세 번이 18 퍼센트, 한 달에 한 번이 3.7 퍼센트, 한 달에 1번 미만이 1.4 퍼센트, 그리고 전혀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11.7 퍼센트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2>를 보라). 이러한 자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5분의 4 이상을 차지하며 출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출석 비율은 서구 교회의 출석율 보다는 높게 나타나지만,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강조해 온 주일 예배 출석의 중요성이라는 보수적인 신학적 전통을 고려해 볼 때 그렇게 만족스런 결과는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역 교회와의 연합이나 애착 정도의 견지에서 볼 때 명목주의가 어떤 정적인 조건(a static condition)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하던 사람들도 수동적인 출석자가 되거나 몇몇 개인적인 이유들 때문에 출석을 중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규칙적인 출석자와 불규칙적인 출석자들 사이의 틈새는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 읽기나 기도의 빈도 수에 대해서도 조사되었는데 51.9 퍼센트의 개신교인들이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34.8 퍼센트의 개신교인들이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기도 시간으로는 개신교인들이 하루에 19분, 카톨릭인들은 20분, 그리고 불교인들은 8분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도의 빈도 수에 대해서는, 개신교는 27.9 퍼센트, 카톨릭은 18.3 퍼센트, 그리고 불교는 8.7 퍼센트의 사람들이 전도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개신교가 가장 높은 전도 비율을 보이고 있지만, 72.1 퍼센트의 사람들이 거의 전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주목할 만 하다. 비록 개신교인의 83.2 퍼센트가 꽤 규칙적으로(매주 또는 한 달에 두세 번)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만, 반 수 이상의 개신교인들이 성경을 전혀 읽지 않으며 3분의 1 이상이 전혀 기도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명목주의가 의식적인 경향(a ritualistic orientation)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의 기독교적 신앙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헌신이 없이 교회를 출석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 활동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갤럽 조사(1998)는 또한 현재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미래에 신앙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불교(41.8%)를 가장 선호하고, 다음으로 카톨릭(36.7%), 그리고 개신교(21.4%)를 믿기 원한다고 보여 주었다. 이것은 개신교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이 적은 종교임을 보여 준다. 아직 전도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95년 정부의 인구 조사는 그러한 사람들의 인구학적인 프로파일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남자이며(54.2%), 특별히 대도시에 살고 있는(51%), 20대의 젊은 남자들이며(32.7%), 그리고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79.3%)이다. 전도를 필요로 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미래에 한국 사회를 이끌 능동적인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젊은 여자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교회가 약해지고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 때에 젊은 세대를 끌어당기는 기독교 복음을 생동화 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핵심 조사 결과 및 제안들
핵심적인 조사 결과는 무엇이며 그것이 한국 개신교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4가지의 핵심 결과가 파악되어 논의될 필요가 있다.
1. 이 조사는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회를 이탈하고 있으며 개신교회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선호되지 않는 종교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 개신 교회의 성장이 명목주의라는 문제로 인해 침식(훼손)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개신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다. 문제의 핵심(the nub of the problem)은 목회자들, 즉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다. 한국 개신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본을 보임으로써 더 나은 신뢰의 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와 양육은 영적인 재생산이다. 명목주의는 진실된 영적인 기독교적 삶의 상태를 크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개신교회의 이탈 현상은 사회적 공신력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전의 여러 연구들은 교회성장이 사회적 공신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강인철, 1996; Hong, 2000b: 191).
2. 이 조사는 교회 등록(출석)의 초기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개신 교회를 버린 반 수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4년 이내로 출석하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반 이상이 6년 이상 교회에 출석한 후에 영접하였다. 이것은 교회 출석의 초기 단계가 새신자들의 정착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환영 문화와 헌신을 격려하는 영성 및 프로그램의 개발이 교회 내에 필요한 것이다.
3. 한국 개신교의 명목주의에 대한 연구는 로잔회의(1998)에서 파악된 명목주의의 12개의 다양한 양상 중 실망형(disillusioned), 혼합주의(syncretistic), 그리고 의식주의(ritualistic)의 경향이 한국 개신교인들 가운데 편만함을 보여 주고 있다. 로잔 회의의 12개를 포함하여 이러한 특성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한국 개신 교회들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현 상황에 대해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소속이 없이 믿는 것(believing without belonging, 즉 관념적인 기독교인들), 믿지 않고 소속되는 것(belonging without believing), 출석하지 않고 소속되는 것(belonging without practicing),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지 않고 믿는 것(believing without practicing), 이 모든 것은 한국의 명목상의 개신교인들을 특징짓는다. 이것은 첫째로, 한국 개신 교회가 교인들을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들과 가르침으로 교육하는 양육 공동체를 건설해야 함을 제시한다. 교회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온전한 헌신의 이상을 희석 시켜서는 안되며 기독교의 진리는 공동체 내에서 기독교적 사랑과 함께 선포되어야 한다.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경험을 촉진시켜야 한다. 개신 교회의 영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비기독교적인 영적 경험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
4. 이 조사 결과는 명목주의의 본질적인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명목주의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제도적인, 개인적인 가치들을 반영하는 전이적인 상태이며 그 안에는 기독교적 행위의 다양한 패턴들과 혼합주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동기는 다양하며 또 다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건성은 계속적인 동기 부여가 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약화될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적극적인 참여의 부족은 냉담하고 지겨운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명목주의의 현상은 점진적인 것일지 모른다. 브릴리(Brierley, 1998: 179-84)는 영국 교회의 종교적 구조의 흐름에서 명목주의의 형태는 교회에 단지 소속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을 멈추는 것, 또는 적어도 교회에 가는 것을 멈추는 것, 그리고 나서 몇 년의 공백을 두고 다시 다니기 시작하는 것 등 수많은 양상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명목주의의 현상은 명목적인 기독교인들의 지식, 믿음, 교회에의 참여, 그리고 경건 생활과 행동 등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앙에 있어 다양한 요소들(예, 가르침, 예배, 교제)의 본질적인 통합이 한국 개신 교회에 요구된다.
신학적 시사점들
개신교회 명목주의의 현상이 신학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필자는 네 가지 문제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1. 교회성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 개신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질적 성장이 희생되었다. 슈바르츠(Schwarz, 1996)는 세계적으로 1,000개의 교회를 경험적으로 조사하여 교회의 질은 양(즉 양적 성장)을 가져다 주지만 양은 질을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한국 개신 교회는 교회를 버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 성장의 패턴과 새신자를 위한 구조, 그리고 교인들에 대한 가르침을 재평가해야한다. 교회는 등록 숫자보다 실제적인 출석 숫자, 단순한 출석보다 교인들의 헌신, 그리고 교인들의 교회활동보다는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2. 한국 개신 교회 자체가 선교 대상지이다. 개신교회의 전형적인 관점은 타종교를 믿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전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또 많은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조사 결과는 거의 반 수에 가까운 개신교인들(47.1%)이 믿음의 가장 큰 이유를 기독교 구원의 핵심 가치에 해당하지 않는 구원과 영생 이외의 요인들로 대답하였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번영과 건강 또는 마음의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개신 교회가 명목주의에 대한 하나의 배양기(an incubator)이며, 교인들을 단지 등록 교인이나 출석자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키워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명목주의는 국가 교회나 기독교가 다수인 나라에만 특별히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 개신 교회들 그 자체가 선교 대상지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멤버십과 세례는 참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회심을 필요로 한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홍영기(1995)가 말한 것처럼, 24시간 그리스도인들(즉 헌신된 기독교인들)로 만드는 사역 구조와 기독교적 영성의 개발이 한국 개신 교회 안에 필요하다. 에디 깁스(Eddie Gibbs, 1993: 231-238)는 명목주의를 양산하는 사역 구조의 원인으로써 가라보다 오라 위주로 되어 있는 사역 방향, 교회 내부에 초점을 둔 프로그램들,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은 전문 사역자에 대한 의존, 교회 밖의 선교 상황에 대한 이해의 부족, 공동체 건설보다 교인 수 증가에 대한 지나친 관심 등을 꼽고 있다.
3. 기독교적 성실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명목주의가 성경의 이야기와 기독 교회사에서 흔한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요구는 십자가의 메시지 그 자체 때문에 때때로 거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를 버리거나 또 기독교적 삶에 헌신이 부족한 것과 같은 현상 (즉 성공의 부족 현상)을 단지 십자가의 메시지 탓에만 돌리는 데 매우 주의하여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우리가 명목주의의 문제에 열심히 달려들 때 한국 교회에 있는 수많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변화될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로잔 회의(1998)가 천명한 것처럼, 명목주의에 대한 사역과 다른 모든 사역에 아주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의지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면서 문화적이고 기술적인 변화들에 보조를 맞추는 메시지(즉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들을 만들어 나가는 데 성실하여야 한다.
4. 명목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헌신하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한국 교회에서 명목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지속되어야 한다. 신학과 경험적 사회 조사는 명목주의의 연구에 있어 함께 가야 한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경험적 조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본훼퍼(Bonhoeffer, 1927)는 신학자들이 교회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을 취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은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교회는 경험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본훼퍼의 성육신적 관점의 교회론은 사회과학적 통찰력이 교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격려해 준다. 그러나 본훼퍼는 또한 교회의 유일한 구조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형되어지며 이것은 교회에 신학적으로 독특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신학은 경험적인 현상이나 증거를 중요하게 성찰해야 하고, 경험적 현상은 또한 건전한 신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필자는 교회에서의 사회 조사(social survey)가 두려움이나 걱정을 야기시키지 않고 교회의 사역을 지지하는 활동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 리더십의 중요성을 고려해 볼 때 목회자와 장로와 같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명목주의에 대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지도자들은 영적인, 기독교적 헌신보다는 전문적인 야심이 사역의 동기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명목주의의 원인들은 과학적 조사와 신학적 틀 속에서 더 명확화 될 필요가 있다. 이 글이 한국 교회에 전하고자 하는 명료한 메시지(unequivocal message)는 이것이다. 작금이야말로 한국의 개신교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기독교적 신앙대로 살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을 구하면서, 교회의 성장 형태를 성찰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또 한국 교회를 넘어서서 전 세계의 교회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 연구소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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