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3가지 의식/ 이한규목사
1. 소명의식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는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웁니다.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고 하나님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확고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위대한 하나님의 지도자는 소명의식이 분명합니다. 소명의식은 지도자의 확신, 열정, 목적을 분명하게 만들어주며 하나님의 뜻을 제일 우선순위에 두게 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는 항상 세상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국민의 지도자는 항상 국민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민주적인 지도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면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역사의 핵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지금 조그만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소명의식을 가지면 부러울 필요도 없고, 질투할 필요도 없고, 원망할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보내신 분을 알고 보내심을 받은 줄 아는 지도자는 시시한 것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과 생각이 다르며,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역사의 한 핵으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핵은 작지만 그 속에 불이 들어가면 폭탄이 됩니다. 그처럼 현재의 자기의 모습이 미약할지라도 그 속에 성령의 불이 들어가면 핵폭탄처럼 전 인류의 가슴을 깨뜨리는 놀라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 세운 지도자에게는 때가 되면 놀라운 지도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2. 섬김의식
영적 지도자는 섬김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섬기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기서 예수님은 위대한 지도자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가치관을 뒤흔들 위대한 혁명적 말씀입니다. 만약 지도자가 섬김의식을 상실하면 지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에는 지배적 소수와 창조적 소수가 있는데 지배적 소수가 있을 때 역사는 퇴보하였고 창조적 소수가 있을 때 역사는 발전되었다." 창조적 소수는 섬기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교단마다, 교계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싸우고, 분내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종의 자리는 항상 비어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은 섬기는 자만이 앉는 자리이다."
지도자 중에서도 위대한 지도자란 일반 지도자보다 섬김의 범위가 넓고, 높고, 길다. 섬김의 범위가 넒다는 것은 섬김의 대상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지역출신과 배경을 막론하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고향, 우리 교단... 우리 의식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배타성을 가지면 그 집단을 점점 진리와 멀어지게 됩니다.
섬김의 범위가 높다는 것은 사람들을 섬기되 하나님을 섬기듯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범위가 길다는 것은 변함없이 섬긴다는 것입니다. 목회와 양육 초년에는 섬김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귀찮아 소홀히 하거나, 교회가 커졌다고 섬김을 받으려 하면 안될 것입니다.
3. 순교의식
영적 지도자는 순교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것은 분명한 순교의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지도력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배자는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를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살리며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 만이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나 지도자는 죽어서 지배합니다.
청년 바울은 스데반을 쳐 죽일 때 동조하며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의 영성이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성을 받은 바울도 주님의 일을 죽기까지 순종하다가 순교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지도자로 삼기 위해서 예정된 사람을 죽입니다.
순교자는 분명한 신앙 철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따르는 자를 살리며 지도력은 따르는 자를 살려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지도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소명의식, 섬김의식, 순교자의식! 이 세 가지를 겸비해야 참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개 부흥사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성자는 섬김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는 "나는 이 역사를 위해서 죽으려고 택해졌다"는 순교자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부흥사보다 성자가 역사를 지배합니다. 부흥사는 한 세대의 소리로 끝납니다. 살아서 소리치고 크게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고난과 가난과 굶주림이 그에게 따르지만 역사는 그의 손에 있습니다. 2천년 교회사는 성자가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진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자는 순교자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항상 자신이 어느 길을 가는지,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는 이 세 가지를 다 겸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입니다. 동시에 섬기는 종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순교의 길을 가야 하는 자입니다. 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도자의 영성이다. 이 영성을 가진 사람은 세상도 감당할 수 없고 천사도 감당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냈다. 내가 너를 섬기는 자로 세웠다. 내가 너를 순교자로 세웠다." 이 말씀에 응답하는 자가 된다면 그를 통해서 하늘과 땅과 역사가 움직이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 자신이 그런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우리도 주님처럼 이런 길을 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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