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牧師)인 남편에게 매맞고 배척받는 고통
목사라고 천사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목사는 모두가 성인(聖人)으로 알고 있다가 어느 날 문제점이 노출되면 크게 실망을 하고 배척하는 일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여긴 사람들의 잘못이다.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하기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하였다(행10:24-26).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나도 사람이라"하는 대목인데 나도 사람이라 한 고넬료의 겸손한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고넬료가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하간 베드로는 주의 종으로서 고넬료보다 더 높거나 위대한 위치에 자기를 놓지 아니하고 자기도 보통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많은 성도들은 목회자들을 보통 사람의 이상으로 보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는데 이런 일들은 있어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목사도 가정에 돌아가면 가장이요 아이들의 아버지며 지어미의 어엿한 남편이며 가정을 이끌어갈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감독의 직분을 가질 자들의 자질에 대하여 논할 때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하였다 ( 딤전3:2-5).
특히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한 본 절에 괄호가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앞 절을 설명하는 삽입구임을 암시한다. 가정은 사회 집단의 최소단위이다. 이 최소 단위를 잘 다스릴 수 없는 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돌볼 수 없다.
한편 '교회'의 헬라어 '엑클레시아'는 '엑칼레오'('불러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래 '정규로 소집된 시민의 정치적 집회'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이스라엘의 종교적 집회에도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교회는 가정과 유사점이 많다. 복음의 사역자에 대한 권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비슷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인 형제와 자매가 있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큰 가정이라 할 수 있다(Barnes).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하였다 ( 딤전 5 : 8 )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하고 말한 '자기 친족'(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한 말을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져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이기 전에 가정에 가장으로서 가정을 화평하게 다스릴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목사가 가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는 교회 일만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모들에게 가정의 모든 책임을 다 떠맡기고 가정에 대하여서는 나 몰라라 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성도들 앞에 거룩한 것 같이 보이고 감히 어느 누구도 근접하기 힘들어 말도 잘 붙이지 못하는 근엄한 태도를 보이는데 가정에만 돌아가면 밖에서 교인들이 보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밖에서는 천사(天使)대접을 받던 목사가 집에서는 악마(惡魔)로 돌변하여 아내를 괴롭히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까지도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본이 되지 아니하여 아이들이 반항하는 참담한 일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모님은 솥을 강단으로 가지고 와서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는 영원히 이곳에서 삽시다, 왜 집에서 보는 남편상과 교회 강단에서 보는 남편 상이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집에서는 가장으로서는 영점처리 될 남편이 강단에만 서면 100점 만점 짜리 남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상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으려하지 않겠지만 예외로 아내를 구박하는 목사들이 많다는 것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데 특히 신령하다고 하는 분들이 더 그렇다는 데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모가 은혜 없다고 구박하고 영력(靈力) 없다고 구박하며 금식해라 산기도해라 그래가지고 사모역할 어떻게 하겠느냐 등등 괴롭히는 방법이 가지가지라 무엇으로 표현하기 힘든 거짓말 같은 참말이라 남들이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여 말하는 자신이 정신이상자로 몰릴 수밖에 없는 일들이 예화(例話)나 전설(傳說)속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고 현실 목사의 가정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사모는 그래도 목사의 위신을 생각해서 매를 맞으면서도 행복한 척 하는 수준급 연극배우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명 연출가가 되어야하는 한심한 일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나 알지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남들의 부러움을 사고 속으로는 골병드는 것이 사모가 가는 길이기에 다시 태어나도 사모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은 다시 태어나면 죽어도 사모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몇 번이고 해보면서 내가 어떻게 끝까지 이 역할을 해낼지 눈앞이 캄캄하여 때로는 자살을 할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말이다.
사모는 목회자가 아니기에 하는 일은 가정에서 남편의 아내로서 손색없이 하고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아이들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남편인 목사가 마음놓고 교회일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사 사모가 할 가장 큰 역할이라고 믿는다.
사모가 자기의 위치를 탈선하여 목사가 할 일까지 간섭하고 나서며 당회장 노릇까지 하고 나선다면 이는 목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똑똑한 사모 때회를 망칠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는 것 모르지는 아니할 줄로 안다.
사모가 목사에게 매맞는다는 말은 밖으로 노출된 것도 있지만 노출되지 아니한 것이 더 많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 중에 하나다.
어떤 목회자는 아내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고 하여 그를 친정으로 보내고는 얼마간 있다가 아내가 친정에서 죽었다는 사망전보를 접하고 그가 장례 치르려고 처가에 다녀왔다고 누구도 사모가 죽지 아니하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연극을 했는데 그 교회 어느 집사가 아무래도 석연치 아니한 구석이 있어서 자기 교회 목회자 사모의 친정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사망 여부를 확인해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목회자 몰래 가보니 죽어서 장례식까지 거행한 사모가 다시 부활한 것도 아닌데 엄연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집사가 자기 정신이 이상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서 확인한 결과 분명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문제를 삼고 일어나 결국 그 교회에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도 목회를 하고 있다는 후문이 들린다.
그런데 그 목회자는 그와 같은 완벽한 연극을 연출하고 그 다음 연출은 그 교회 처녀 선생에게 접근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느 선생을 나의 아내로 택하여준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 우리가 결혼하여 주의 일을 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는 가증하고 뻔뻔스러운 기도를 목회자가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인데 도대체 목회자의 양심이 있는지 아니면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 사단의 극단에 가입하여 대본을 받아 연극에 출연하고 있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되는 일들이 사실로 등장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사모들이 매맞는 사연을 들어보면 가지가지 사연들이 있는데 종이가 더렵혀질까 옮기고 싶지 아니하여 그만두기로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목회자들이 깨닫고 사모를 귀하게 여기고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은 듯이 살면서 목사인 남편을 돋고 있음을 알고 아내를 사랑하는 가정목회부터 시작하여 많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모도 목사의 아내라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성격대로 산다면 목회자는 아마 목회를 못할 것이 분명하고 해도 그것이 십자가가 되어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며 그 일로 인하여 기쁨을 모르고 항상 우울한 상태에서 목회를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모를 목회 일선으로 끌어내려고 하지도 말고 괴롭히지도 말고 가정의 부부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고 그가 아니면 나의 목회는 계속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귀하게 여겨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배려(配慮)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이여 사모가 목회에 지장을 주지 아니하거든 천사같이 대접하고 업어주는 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명심하고 사모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목회의 성공도 사모의 협조에 있고 목회를 망치는 것도 사모의 방해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모는 매를 맞고 그 목사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필자의 집에서 하루저녁 자고 간 일이 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모가 잘못해서인지 아니면 목사가 손버릇이 나빠서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든 간에 매를 때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설득력을 잃고 호응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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