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탈진(배영준 목사)
▣ 서 론
탈진(脫盡 : burnout)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자기 직업 이나 중요한 삶의 활동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지쳤으며 직업의 의미를 잃은 상태에 빠졌을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행동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어떤 상태의 뚜렷한 증상들을 탈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잠이 잘 안 온다든지, 체중 감소, 식욕부진, 그리고 우울 상
태가 계속되든지, 아니면 권태감 때문에 항상 괴롭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탈진"은 어떤 직업에서나 일어 날 수 있다. 의사들, 교사들, 가정 주부들, 그 어느 누구라도 그들의 삶의 중요한 활동에 지쳐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교회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전문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먼저, 나는 성직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탈진"이라는 말은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이 말을 설명하면서
세 가지의 특수한 예를 들고 있다. 첫째로, 이 말은 어떤 건물 같은 어떤 것의 내
부나 내용물이 타는 것을 지칭할 수 있다. 둘째로, 전기학 분야에서 볼 때, 이 말
은 고온으로 인한 발화로 기인한 회로의 고장을 가리킬 때 사용될 수 있다. 이 경
우에는 전도체가 전기가 흘러서 생긴 고온 때문에 타버린 것이다.
셋째로, 임학(林學)에서 이 말은 엄청난 산불이나서, 숲의 바닥 위에 있는 생명력 있는 부식토를 파괴하게 되어 결국 숲이 황폐하게 될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탈진"의 사전적인 정의를 인간에게 적용해 본다고하면, 우리는 불에 다 타 버린 집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격렬한 에너지로 인해 마음이 완전히 지쳐 버린 남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때 정신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달해 주기까지 했으나 지금은 타 버린 전도체처럼 더 이상 힘을 공급할 수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마치 뚝에 물이 가득차서 뚝이 더 이상 물의 압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 같은 상태이거나, 자동차가 달이고 있는 상태에서 기름이 떨어지면서 차는 길위에 있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기름은 공급되지 않아서 악세레이터를 밟아도 차는 점점 속력을 잃어가도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자동차를 악세레이터만 밟으면 가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좋은 조건을 유지 해야 하며 기름이 채워져 있어야 하며 운전자의 건강이 안전 운행을 하게 해준다.
이 책의 과제는 목회자를 탈진시키기 쉬운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또한 탈진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영적인 해결책으로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제 1 장 목회 탈진 : 특수한 문제점
나는 목회자가 목회를 통해 직면하는 아홉 가지의 특수한 문제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목회자의 일은 결코 끝이 없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각기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일을 완성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의 일은 결코 끝이 없다. 목회자는 마치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러 올려 미처 꼭대기에 닿기도 전에 다시 그것을 아래로 굴리고, 또 다시 그걸 산 위에 굴러 올려야 하는 운명을 지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와 같은 사람이다. 일의 끝이 없다는 것 즉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산꼭대기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이러한 느낌이 결국 목회자를 지쳐 버리게 한다. 목회는 언제 까지나 힘들고 어렵다 방심 할수 없는 것이 목회이다.
2. 목회자는 그의 일에 항상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를 말할 수 없다.
일이 완성되는 것을 보면서 만족해할 수 없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어떤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더욱 실망스러운 일이다. 목회자의 일이 사람들을 돌보고(pastoral care)영적으로 양육하는(spiritual nourishment)데에 우선적으로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의 목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그가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즉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무엇인가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참담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3. 목회자의 일은 반복적이다.
목회자의 일은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반복이 된다. 매년 성탄절이 돌아오면 예배를 드려야 하고, 목회자는 그 때마다 설교 준비를 해야 하고 전혀 새로운 성탄 메시지가 담긴 성탄편지를 교인들에게 보내야 하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성탄 헌금을 따로 드리도록 권면하기도 해야 한다.
4.목회자는 교인들이 기대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다루어야 한다.
성직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특히 어려운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사제나 목사가 위대한 교사이길 기대하며, 다른 이들은 그가 무엇보다도 성실한 목회자이길 바라는
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재정을 다루는 데 비상한 재능을 가진 목회자가 개인 상담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유명한 설교가이기를 바란다. 교인들의 기대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이렇게 많은 교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많은 은사를 가진 이도 없고, 또 그럴 만한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이도 없고 그만큼 다양한 관심을 가진이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목회자가 그들의 기대를 무시한다면 목회하는 데 힘이 들 것 이다. 반대로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한다. 하더라도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줌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만큼 사람들의 반대와 비판과 저항과 씨름하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5. 목회자는 매년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목회란 결혼과 같다. 즉 목회자가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목회자는 그의 교구 안에 골치 아픈 사람이 있더라도 와 부딪히는 문제를 다루지 않을 길이없다
6. 목회자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에너지의 소모를 알아채기란 참 어렵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하루에 목회자가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보아 주고자 할 때 생기는 문제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고자 할 때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 버리게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정성을 쏟았는데도 아무 소용없이 전에 말썽을 일으키고 까다롭던 사람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지치고 허탈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7.목회자는 딱딱한 "영적인 음식"(spiritual food)이 아닌 "어루만져 주는 것"(strokes)을 바라서 그에게 혹은 교회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다룬 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나 장소를 찾기위해, 혹은 자기들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혹은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숨기기 위해, 혹은 우쭐댈 수 있는 여지가 있나 보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네를 항상 돌봐 주길 바란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느낀다. 그들이 바라던 쓰다듬음(strokes)을 받지 못하면, 그들은 돌을 내거나 아니면 권리 주장을 할 수도 잇다. 그런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계속 쓰다듬다보면, 목회자는 지쳐 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거인들"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는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 목회자는 그의 "폐르조나"(persona)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다.
페르조나는 우리가 외부 세계, 특히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 만나고 또 그것과 관
계를 맺기 위해 나타내 보이는 겉모습이나가면(mask)이다. 페르조나는 이중 기능
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기능은 우리가 우리의 인격을 효과적으로 투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다른 기능은 우리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해 주거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 온 우리의 다른 측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 줌으로써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목사인데 지금 몹시 피곤하다. 결혼식 주례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당신은 바닷가에 가서 좀 쉬고 싶다. 그러나 당신은 결혼식을 준비해서 주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페르조나로 인해 너무나 오랫동안 원하지 않는 어떤 일(기능)을 해야 할 때나 페르조나가 진정한 인격과 관련을 맺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될 때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취하게 되면 에너지는 자연스롭게 우리 속에 흐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감정을 숨기거나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닌 전혀 엉뚱한 모습을 보이려고 할 때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제 2 장 끝없는 업무의 문제
목회자의 일은 결코 끝이 없다.
목회자의 일은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점은 목회자가 탈진할 정도로 에너지를 고갈시킬 수 있다. 그러한 끝이 없는 일에 직면하게 될 때,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거기에 대한 적절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태도를 계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목회자 자신밖에 없다.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원고를 끝내지 않고 팽개쳐 둘 때가 많다."
여기서 이 작가가 말하는 원고는 마치 교구와 같다. 즉 목사의 일에는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원고를 여러번 들여다봐도 손질해야 할 부분이 있고 다시 고쳐 써야 할 문장이 있는 법이다.
때때로 목회자는 자기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우쭐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계속 일만 하시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은 일상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거룩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날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쓰여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과 평상시의 업무로부터 당신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줌으로써 새로운 의식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주 중의 하루만이라도 자신들과 가족들을 위해 거룩히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 하루는 꼭 지켜야 한다. 그일은 결코 연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일하진 않을 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하는 것을 좋아할 때가 많다.
우리가 아주 열심히 일을 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일이 중효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일을 멈추자마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목회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고, 결국에는 그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일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로 인해,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혹은 올바로 살지 못한 삶으로 인해 후에 탈진(exhaustion)이라는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 3 장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목회자의 일
목회자는 그의 일에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 항상 말할 수 없다.
영적인 일은 마치 허공을 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현실적인 일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감각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노력한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우리 안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다른 사람을 손과 몸으로 일하는 육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심한 우울증에 걸린 음악가가 있었다. 그 당시 그에겐 심리학적인 치료나 기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데 타이어가 펑크 났다. 차에서 나와서 그는 타이어를 점검해 보고, 트렁크를 열고 자동차를 들어올리는 잭을 찾았다. 타이어를 바꾸느라 한 시간 넘게 애를 썼다. 그가 타이어를 다 갈아 끼웠을 때 그는 돌연 그의 우울증이 씻은듯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도무지 그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새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화육(Incarnation)의 종교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사실 우리의 영적인 측면은, 마치 우리의 육체적인 측면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의해 활기를 띄게 되었듯이, 육체적인 존재를 개발시킴으로써 강화되고 증진되었다. 사실 우리는 하나의 통전적인 유기체인 셈이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사신 분이셨다. 공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어느 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며 어느것이 초대 교회의 첨가인지를 아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의 현세적인 성격(earthiness)을 검토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현세적인 말씀이라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현세 적인 성격을 띄지 않은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쟁기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하신 말씀을 읽고 있다는 걸 의심할 수 없다.
또"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보아도 우리는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임을 확실히 알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초대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세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육체적인 인격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하기 때문인 것같다.
제 4 장 끝없는 반복
목회자의 일은 계속 반복된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구히 회전하는 수레바퀴에 묶인 익시온(Ixion)처럼 느끼게 한다. 이것은 특이한 문제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일은 창의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처음데 할 때는 신나게 할 수 있지만 자꾸 반복되면 결국에는 일의 창의력이 없어지고 만다. 비록 목회자가 일의 반복을 전적으로 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일정한 일의 양이 있는 법이다. 대체로 목회자는 자기의 시간과 정력을 어
디에 쏟을 것인지를 취사 선택 할 특권이 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얼마간 열심히 일하시고 나서, 홀로 있으시려고 광야로 물러가신 내용을 자주 읽는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하루를 단순히 쉬는 게 아니라 회전하는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물러나서, 자신의 활동과 만나는 사람들과 주거 환경을 완전히 변화시킴으로써 특별히 새롭게 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 교구에서 23년을 일하시고 목회에서 은퇴하셨다. 그분은 새로운 교구로 부름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때 우리 아버지는 교구 위원회의 동의를 얻는 데 신중을 기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일주에 나흘을 일하시고 나머지 사흘은 뉴 햄프셔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에 자유롭게 가시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회전하는 수레바퀴 같은 교구 내의 생활 때문에 지쳐 버릴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규적으로 일정한 기간 "광야로 물러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셨다.
"휴가"란 말과 "비우다"라는 말은 둘 다, 라틴어 vacare에서 왔는데 "비우게 하다"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휴가는 단순히 공허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휴가 대신에 순례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흥미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고, 어던 특별한 나라나 사람들을 보려고 여행을 하기도 하고, 어떤 특별한 연구를 하기 위해 출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순례를 하기 위한 노력이다.
반복되는 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창조적인 해결책만이 도움이 된다. 이 동화는 우리가 주시하고 있는 관심사 - 그 일이 기계적인 것이어서 한 때는 번창했으나 지금은 침체되어 버린 사람의 상황 - 를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기 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전의 기계적인 방식을 계속 유지하려고 자꾸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은 겉으로 보기에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이 보여도, 결국 그들은 그런 와중에서 그들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의 삶에서 창조력을 잃어 버렸을 때 우리는 과연 보다 나은 해답을 찾을 길은 없을까? 목회자의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 볼 때 그의 문제는 그가 하는 일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만인의 칭찬을 한 몸에 받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는 "인기 배우" 같은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불안한 나머지 우리의 힘을 유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려는 충동에 사로 잡혀 있진 않은가?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의 내적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창조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기 보다, 우리의 불확실한 가치 감각에 손상을 입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쇼를 하게 된다. 우리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게 매우 현명하게 보일지는 몰하도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우리 자신도 속이는 것이 된다.
제 5 장 사람들의 기대를 다루는 것
목회자는 사람들의 기대를 계속 다루어야 한다.
목회자는 사람들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수많은 기대에 직면하게 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기대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다가, 또는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지쳐 버릴 수 있다. 때로는 목회자가 그의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책이 있을 수 있다. 교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의 일 중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목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
한 업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 그 일치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교인들의 의견이 목사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있을 수 있는 긴장 관계를 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개방된 자세를 갖고 함께 논의해 보는 것이 낫다.
해결책은, 사람들이 우리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업무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가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목회자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려고 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요구들을 피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책<왕자 The Prince>에서 자칭 폭군들에 들려준 충고가 여기에 꼭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다"(누가 16:8). 역기서 마키아벨리가 한 말은, 권력을 얻으려고 하면 지독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뜻이다. 지독한 일을 저지르려면, 단번에 애초부터 저지르는 게 낫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지독한 일을 하려거든 질질 끌지 말라고 그는 경고했다.
우리가 담임 목사라면 우리에겐 우리를 가장 잘 도와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즉 보조하는 사람들이 유능하면 담임 목사의 평판을 떨어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평판을 높여 주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그들의 내면을 먼저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걱정하는 기대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도록 계속 촉구하며 모든 실패와 태만을 조심스럽게 추적하게 만드는, 우리 안에 있는 "기대의 목소리"(Voice of Expectation), 즉 "내면의 감독자"(Inner Monitor)또는 "내면의 비서"(Inner Secretary)가 있는 것 같다. 이런 내면의 목소리는 죄책감과 불안을 일으키는 일련의 자율적 사고 속에서 그 존재를 뚜렷이 느끼게 한다. 내면의 감독자는 외부인 들에게 투사되기 쉽다.
이것은 투사(投射)이다. 즉 부정적인 생각이 X씨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목사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내적 감독자의 목소리는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이 목소리와 대화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생각에 귀 기울일 수도 있고, 또 거기에 대답할 수도 있다. 감독자가 목회자에게 파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대부분의 종교 전문가들이 엄청난 죄책감을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적 감독자 때문에 그림자, 즉 충동과 욕구를 가진 어두운 측면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다음의 예를 볼 때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꾸미려해도 솔직함만큼 효과적인 치료는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목회자는 어떠한 죄책감으로 인해 남의 조종도 받기가 쉽다. 이는 곧 목회자들의 약점이며, 콘 아티스트들을 포함하여 머리를 쓰는 사람들은 목회자를 그들의 희생물로 만드는 데 이러한 약점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목회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외적인 삶의 변화와 관련된 실제적인 해결뿐민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안에 있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회자가 내적 성장을 이루게 되면 지쳐 버리지 않고 목회의 문제점을 처리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교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제 6 장 관계를 통한 도움
목회자는 매년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당신은 그들에게서 떠날 수 없다. 여행할 동안에 싫든 좋든 당신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신이 그배의 승객이 아니라 선장이라고 상상해 보라. 그 배의 모든 사람들은 선장인 당신의 능력 안에서 당신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어떤 성직자는 그가 성직 칼라(clerical collar)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인간으로서의 모습 그대로 보다는 우리의 직업에 의한 관계를 가질 때, 그 관계를 "전이"(transference)라고 말한다. 전이는 정신 치료의 실험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발전하는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생긴 용어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 관계를 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파서 의사에게 간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에게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갈 것이며 심지어는 그 의사를 구원자나 치료자의 원형적 이미지로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의사에게 전이를 가지고 있는 만큼 당신은 그의 순수한 인간적인 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사할 때 부정적인 전이도 있게 된다. 실제로 긍정적인 전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는 부정적인 전이가 자주 일어난다.
정신 치료자들과 성직자들과 의사들은 이런 위험성에 빠지기 쉽고 그들이 신 같은 존재이면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게 구세주 상(像)을 남기게 된다면, 이것은 잠깐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자신 안에서 믿음과 희망의 근원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강박적인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첫째로, 일반적인 인간 관계는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에로스, 즉 인격적인 따스함과 애정은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 관게에서만 만개(滿開)할 수 있는 희귀한 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일반적인 관계를 통해 성격이 "견고해 진다."(즉 튼튼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관계들을 필요로하는 다른 이유이다.
우리가 튼튼하고 견고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려면, 우리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해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 어두운 측면을 그림자(Shadow)라고 부른다. 이 민담에서, 이사람은 악마가 만약 그의 야망을 성취하도록 돕는다면 악마에게 그의 그림자를 팔겠다고 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후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땅취를 배회하게 되었다. 우리의 어두운 내적 인격과 연결이 없이 우리는 실제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 때 견고한 인겨(solid personality)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대로 보일 수도 없다. 목회자는 그림자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우리가 견고한 삼차원적 인격이 되도록 우리를 돕는 어두운 측면이 없이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제 7 장 영혼을 만족시키기
목회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앞에서 우리는 타인을 돕는 일을 수혈에 비유해서 말하였다.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목회자가 도움이 필요하거나 곤궁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면서, 심각한 에너지 고갈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때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쏟은 후에 그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그 때는 그가 당신이 쏟아준 에너지를 취하여 보다 효율적인 사용을 했을 경우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많은 에너지를 그들에게 쏟아 부었는데도 그들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때 그들은 언제나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경우엔 다른 사람을 돕는 걸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다. 당신은 에너지를 끝
없이, 무분별하게 그에게 부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그들의 에너지를 아무성과 없이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또는 위험한 목회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를 쏟는다 해도 효과가 나지 않는 사람과 우리의 도움을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유형으로 충분한 생명력을 결핍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프리츠 쿤켈이 "달라붙는 넝쿨"(Clinging Vine)이라고 불렀던 사람이다. "달라붙는 넝쿨"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특별한 자아중심적 방법을 가진 사람, 즉 자신의 두발로 서기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기관에 착 달라붙어 사는 의존적인 사람을 뜻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힘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그저 다른 사람의 힘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우리는 "달라붙는 넝쿨"의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지나고 있었다. 사람이 연못가에 38년간 있었지만 아직도 치료받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변명을 했다.
"선생님! 물이 동할 때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길에 있는 동안 다른 이가 나보다 먼저 그리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일어나 너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즉시 침상을 들고 걸어나갔다. 그는 "달라붙는 넝쿨"이 되기를 더 좋아했고, 그래서 가련하게도 연못가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가 그렇게 의존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정신 치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요소는 치료자의 인격과 내담자의 인격의 관계라고 말할 적이 있다. 이러한 두인격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더욱 의식화되과 통합되 치료자의 인격이 상대적으로 엉클어진 내담자의 인격에 영향을 미쳐서 후자의 인격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나아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목회자의 목회적인 관계와 상담 관계에서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인격이 반대로 목회자의 인격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내담자가 점점 나아지는 대신 목사가 점점 나빠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상담을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특별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남을 돕는 전문가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 때문에 고갈되는 에너지 문제를 최종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영양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해야 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영적인 요구가 음식과 식사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 많이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진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로 먹이셨으며 우리가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게 될 엘리아는 아합을 피하여 시내 산으로 여행할 때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얻었던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음식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예수님은 사탄에게 그의 능력을 사용하여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시험을 받았을 때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 4:4)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은 육신을 위해 양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을 위해서도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 기도문에서 가장 중심적인 간구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늘로부터 온 빵에 비유하셨다. 그분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늘의 양식이다. 많은 무리를 먹인 이야기는 물론 성찬 이야기의 예시(豫示)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헹서 성찬을 통해 매개(媒介)된 인류를 위한 양식이 되셨다. 오늘날 영국 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예배를 드리는 이에게 주어질 때 사제는 이렇게 권면한다.
"마음으로 믿고, 감사함으로, 주님의 몸을 받으십시오."
치료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치료가 그들 자신의 치유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충만해 지도록 도우려 할 때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정신 치료 전문가로서 일할 때 그들이 심리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강건해지기 위해 영혼의 양식을 발견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타인을 양육하고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목회자들도 자신의 영적 능력을 유지하고 에너지를 새롭게 배양하기 위해 자신을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제 8 장 자아 중심성의 문제
목회자는 딱짝한 영의 양식이 아닌, "어루만져 주는 것"(strokes)을 바라서 그에게 혹은 교회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다룬다. 우리는 어루만져 주는 것(strokes)이 참된 영혼의 양식이 아니고 사탕처럼 사람들을 다만 순간적으로 기분 좋게 하는 일시적인 완화제와 같은 것임을 살펴보았다. 목회자에게서 진정한 영혼의 양식 대신에 어루만져 주기를 원하는 것은 자아 중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목회자가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자아 중심적 욕구를 어디서 충족시킬수 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쓰다듬어 주려고 한다면 목회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점점더 자신을 채워주기를 원한다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풀어나가기 보다는 목사와 해결하려고 한다.
쿤켈은 자아 중심성의 근원과 성격을 깊이 탐구하되, 자아 중심적 태도가 하나님의 개개인의 인격 성장을 위해 갖고 계신 뜻과 어떻게 배치되는 가르 탐구하였다. 어린아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러한 본능적 신뢰감은 일차적으로 부모(또는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랑과 신뢰감이 부모의 성숙성, 사랑, 신실성과 만날 때 쿤켈이 "우리"라고 부른, 아이와 어른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의 성장과 인격을 배제하지 않는 비 자아중심적 연합(non-egocenitric association)이다.
바로 아이가 태어나게 될 이상적 상태적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적합한 영원한 우리 관계(We-relationship)를 제공해 줄 만큼 그렇게 지각 있고, 사랑이 충만하며, 신실한 어른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조만 간에 우리 관계는 부머의 자아 중심적인 태도 때문에 파괴되고 만다. 우리 관계가 파괴되면 아이의 자아 중심성을 촉진시키게 되며 중심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아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 자아 중심적 태도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아를 중심으로 한 사람이 되게 하며, 그 사람의 에너지를 자아를 지탱하고 방어하는 데 쏟게 만든다.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참된 삶을 발견하게 위해 세상 속으로 나가는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주로 성벽을 쌓고 방어하는 데 보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성(城)을 방어와 안전의 장소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감옥과 같은 것이다.
어떤 사림이 자신의 자아 중심성을 위해 에너지를 쓰면 쓸수록 그는 창조적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아(ego)가 아닌 진정한 자기(Real Self)를 실현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본래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인격 안에서 적절한 역할을 찾게 될 때 자아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자아 중심적 자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가 자아 중심적 태도로부터 해방되고 인생살이에서 자아의 적절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사는 것은 내(즉, 자아 중심적자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진정한 자기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아이의 자아 중심성과 어른이 된 후의 자아 중심성은 몇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를 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성격 유형이 생긴다.
1. 활기와 진취성이 모두 없는 아이, 활기와 진취성 중 하나가 없는 아이, 또는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지나치게 응석을 받아 주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응석받이가 된다.
2. 상당히 활달하고 진취적인 아이 그리고 몇 가지 재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아이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지나치게 응석을 받아 주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사람들이 감복할 만한 아이가 된다.
3. 활기와 진취성이 부족한 아이는 거칠고 형편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거절당하고 상처 입은 아이이다.
4. 활기와 진취성을 충분히 지닌 아이는 거칠고 형편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가 된다.
이 네 가지가 서로 결합하게 되면 네 가지 유형의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데, 쿤켈은 이런 유형을 각각 달라붙는 넝쿨, 스타(Star), 거북이, 네로(폭군)라고 불렀다. 우리는 달라붙은
1) 넝쿨에 대해서 이유형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아이는 무엇을 하려는 의욕이나 활기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런 아이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아이에게 무언가를 거듭 요구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준 부모를 가진 아이이다. 부모의 자아 중심성이 바로 아이에게 자아 중심성을 갖게 만들며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부모가되면 이번에는 자신의 자아 중심성을 자기 자식에게 전해 주게 된다. 후에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런 아이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사람들에게 의존적으로 짝 달라붙는 인생을 살아가는 달라붙는 넝쿨이 된다.
2) 스타(Star)는 관대한 환경에서 자라난 보다 활기 있는 아이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응석을 마땅히 받아 주고, 그들이 감탄해 마지않을 만큼 부모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자신을 개발하고 실현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자기네 아이를 자꾸 부추기기만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얻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기에, 자연히 그는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활동을 선택하게 된다. 칭찬 받고 싶은 나머지 이런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잘했다 칭찬 받는 일에 쏟아 붓게 된다.
3) 거북이는 거친 환경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활기나 공격성을 결여하고 있는 아이이며, 극단적으로 민감하여서 상처를 입기 쉬운 아이이기도 하다. 이런 아이는 부모가 야만적이고, 거부하기르 잘하고, 폭군과 같은, 거친 가정 환경이나(빈민가와 같은), 거친 사회적 환경 때문에 상처를 입기 쉽다. 거북이는 될 수 있으면 움츠리려 하고, 살아가면서 위험한 일을 당할까봐 심리적으로 물러나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거북이형의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내 등딱지에서 나와 위험을 무릅쓰거나 상처받게 하지 마세요. 그 좋은 예가 복음서의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땅에 그냥 묻어 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박해한, 잔인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네로가 있다. 거북이와 마찬 가지로 네로 혹은 폭군은 거친 환경에 접해서 생기는 유형이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공격적이 되고, 그 주변에 있는 포악한 사람들보다 더 야만적이고 무자비하게 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힘이 있을 때만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끼며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힘이 없어지면 그는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몰살시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중심성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라는 점에서 원죄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는 우리 부모들을 비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리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우리의 자아 중심적 일탈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대해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 드리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쿤켈이 자아 중심성을 분석한 것이 너무 단순하고 개략적인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각기 다른 개인이며 아무리 심리학적으로 잘 묘사해도, 이것으로 우리의 독특한 심리를 다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개념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범주 안에 있다.
** 목회자/「완벽한 인격」강박감 시달린다
「크리스찬상담개발원」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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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96.04.23 13면
인격적 부족함·교회성장 한계로 갈등/사모는 역할축소때 상대적 박 탈감느껴 한국교회 목회자는 「인격적으로 완벽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으로 인 해 갈등을 겪고 있다.또 사모는 결혼전 사모교육의 부재로 인해 목회자 사모로서 해야 할 뚜렷한 기준을 알지 못해 갈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크리스찬상담교육개발원(원장 공보길 박사)은 최근 90년부터 지난해까지 목회자 3백45명과 사모 3백13명을 대상으로 상담교육 과 상담을 실시,목회자와 사모가 겪는 갈등의 요인들을 발표했다. 목회자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완벽한 목회자의 인격을 요구하는 교인들과 사회적인 요구에 비추어 스스로 인 격적 부족을 느낄 때 갈등(34.1%)했다.성도와 사모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어느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24.1%).
또한 장로 권사 집사 등 평신도 중직자(중직자)와의 관계에서 지 나치게 객관성이 결여된 믿음을 주장하거나 교회행정을 세상일처럼 해 결하려고 할 때(18.5%),교회성장에 절대적 한계를 느낄 때(1 5.9%),목회자의 신분적 특성으로 인해 속마음을 아무에게나 털어 놓지 못하고 행동의 제약을 받을 때(10.1%) 갈등했다.
특히 교회성장에 절대적 한계를 느끼는 경우는 협소한 교회공간과 편의시설 등의 부족으로 대형교회로 옮겨가는 성도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게만 될 때 상당한 좌절감까지 맛보았다.
사모의 경우 개척교회때는 재정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사모의 역 할이 두드러졌으나 교회성장으로 인해 부교역자나 성도들에게 많은 부 분을 넘겨줌으로써 그 역할이 점점 축소될 때 존재의 상실감을 느낀 다(23.6%).이 경우 사모는 뒷전에 조용히 있는 것이 덕스럽다 는 성도들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또한 자녀교육문제에 있어서 교인들의 지나친 간섭을 받을 때(20 .1%) 갈등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녀교육을 제대로 뒷받침해주 지 못할 때 목회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에게서 목회자에 대한 불만의 소리를 듣게 될 때(16.9 %),목회자와 여신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교의식을 느낄 때(8.3%) 갈등했다.
공보길 박사는 『목회자와 사모도 성직자이기 이전에 사람인 이상 인간사회에서 갈등과 괴로움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하고 『전문적인 목회자·사모교육프로그램 개발과 지속적인 상담 및 심리치료가 절실하며 성도들도 이들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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