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시험(敎會試驗)들었을 때의 고통
성경에는 시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하였다(약1:12-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한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본 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1:1;32:1 잠8:32,34 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고(마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한 본 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 본 문은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5: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고전9:25 딤후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그리고 그 시험을 참으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하였다(약5:10-11).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한 본문은 마5:11의 산상 수훈을 반영한 것으로 약1:12의 반복인데 야고보는 인내의 분명한 결과인 축복을 언급함으로 인내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한다(단12:12 마5:10).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판단을 언급하려는 것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내로 말미암는 축복을 일반화시킨다(Manton, Tasker).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데 야고보는 이런 경우의 실례로 '욥'을 제시한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한 말 중에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은 보복하지 않는 자제의 인내를 의미하는 '마크로뒤미아'와는(7-10절) 달리 '환경 가운데서 변치 않는 인내'(골1:11)를 의미한다(Blue, Burdick).
욥은 순식간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의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한 인내의 본이다(욥1:21-22;2:10;12:2;13:4-5;16:2;19:25-27, Tasker, Adamson). 한편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인내의 가장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그래서 '결말'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해석한다(Augustine, Bede, Bassett). (2) 혹자는 주께서 욥을 통해 보여주신 결말, 곧 인내하는 욥에게 시련 전에 주었던 것보다 두 배로 크게 복 주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욥42:5-6, 12-17, Tasker, Burdick, Manton, Marti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야고보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한 욥을 예로 제시한 후 인내의 결과인 욥의 결말 즉 갑절의 복을 받은 사실을 언급함으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인내토록 권면한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한 말 중 '가장 자비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뤼스플랑크노스'는 '많다'는 의미를 가진 '폴뤼스'와 '가장 깊은 부분' 혹은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 '스프랑크논'의 합성어로 '온 마음 전체'를 나타낸다(빌 2:1). 이것은 타인의 고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동정'을 뜻한다. 또한 '긍휼'에 해당하는 '오이크티르몬'은 '자비'와 구별 없이 사용되나 그보다 더 특수한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눅6:33).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에서든지 인내하는 자를 온전히 이해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은 물론 예비 된 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고 하였다(Vincent, Lenski, Blue, Gibson, Martin).
아무리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시험을 받는 교회로서는 견디기 힘든 부분이 많아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 생활을 포기하는 일들이 더러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데 그와 같은 일도 성경에서 교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견딜 수는 있지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 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였다(신8:2-3).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믿음의 여부를 알려고 시험하시는 것은 필요한 줄로 알지만 시험을 받는 편에서는 많은 고난이 따르고 시험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험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또 주기도문에도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하였다(마6:13)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였는데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신약 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10:13 약1:2 ).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 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14:38 갈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시50:15).
그러므로 베드로서의 교훈을 기억해야 하는데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하였다(벧전5:8-9)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한 말 중에 '깨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사테'는 '깨어 있다'라는 의미인 '에게이로' 에서 유래된 단어로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영적인 경각심을 갖도록 할 때 또는 권고나 주목을 요청할 때 사용되었다(마26:40-41 막13:35-37, Lenski).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다니기 때문인데 여기서 '마귀'(디아블로스)는 '비난하는 자' 곧 '사단'을 가리키는데(대상21:1 욥1:6-12 슥3:1). 베드로는 '마귀'를 배고픈 사자로 비유하여 사단의 유혹이 강력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험에 들지 아니하도록 피차가 조심을 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어느 한 순간에 시험이 들면 교역자는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되는데 교회 시험은 두 종류로 볼 수 있는데 성도들 간에 드는 시험이 있고 또 성도들과 목회자와 든 시험이 있으며 어느 시험에 들든지 목사나 사모는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교인들끼리 시험에 들어 서로 싸우고 불목하고 그 일로 인하여 성도 중에 누가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버리면 목회자와 사모의 마음은 그렇게 괴로울 수 없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자와 시험이 들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사모로서는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무엇에 비할 수 없으리 만치 괴롭다.
교회는 시험들 만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 정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지 아니하면 매일 같이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 시험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큰 시험으로 발전하는데 한번 시험이 들면 반드시 상처는 남고 반면에 "소나기 지나가고 난 다음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과 같이 시험을 통하여 더욱 좋아질 수도 있다 .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고 큰 상처만 남게 되는데 목회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여하간 시험이 들었다면 목회자인 남편은 담대한척하지만 아내인 사모는 아무리 남편이 그렇게 말해도 측면에서 보기가 너무나도 딱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 가서 철야를 하고 돌아올 때가 많다.
교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목회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하였다(히13:17).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은혜롭게 발전하도록 피차가 노력을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여 항상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교회만 손해를 보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는데다가 목회자까지 시험에 빠지니 교회 전체가 시험에 휘말리어 교회발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더욱 고통을 당하는 분은 사모라는 분인데 그 이유는 교인(敎人)편에서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남편 편에서 교인들에게 무슨 말도 못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키자니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목사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여 보는 눈들이 곱지 않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데 그 고통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생각해보자 교인들은 시험 들어 속상하면 교회를 옮기면 그뿐이지만 목사나 사모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이 교회가 아니면 목회 할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으니 심적 고통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은 사모님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시험의 원인이 되는 욕심(慾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인데 야고보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하였다(약2: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한 본 절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 시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자기 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는 악한 뜻에 대한 열망이다(롬7:17-23;갈 5:16-21;엡 2:3;살전 4: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였는데 이는 '욕심이 행동으로 유발되지 않은 상태 즉 내적 상태로 머물러 있을 때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 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부사'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이나 여자의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눅1:24).
여기서는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혹자는 욕심을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Mayor). 그러나 인간의 죄란 욕심에게 굴복 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욕심이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Calvin). 욕심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죄를 유발하고 그 마음의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 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창 3:19; 롬 5:12). '낳다'에 해당하는 두 단어 '틱테이'와 '아포퀴에이'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의미하나 전자는 문학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opes). 또한 정상적으로나 비정상적으로나 출산하는 것 모두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을 나타내는 말이다(Robertson).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롬 6:23).
그러므로 교회 시험은 각자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목회자도 욕심을 비우고 성도들도 지나친 욕심을 버려서 시험의 원인을 제거함과 동시에 아울러 고통도 제거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는 지혜로운 삶을 살자는 것이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면 불편하게는 살지만 그 대신 마음의 평안은 누리고 살 수 있으니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다가 심령의 고통을 자초하는 일은 버려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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