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牧師)가 배척(排斥)받았을 때의 고통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하였다 .
배척한지라 한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 '그들이 적대시했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매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예수를 도무지 용납치 않을 태세였음을 알 수 있는데 실로 예수는 고향방문 때마다 모두 거절되고 배척 당하였다(눅4:29).
고향에서조차 배척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첫째, 장차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속 사건을 예고하고 둘째, 예수의 지혜와 권능이 저희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어 저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하며 셋째,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로부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loss)하게 되었다.
선지자가...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였는데 이는 유대 뿐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격언구이다(Logia of Jusus, Oxyrincus Papyri). 그런데 구약 선지자 중에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선지자는 바로 예레미야인데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렘1:1)이었던 그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은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11:21)고 하였다.
한편 평행구절인 막6:6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셨는데, 이는 6절 하반부에서 드러나는 대로 나사렛을 제외한 모든 촌에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일이 가능했으나 고향에서만큼은 그에 대한 불신과 시기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선지자의 자연적 속성을 익히 알고 있는 자는 그 선지자가 지닌 초자연적 속성(신적 권위에 의한)을 소극적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적극적으로는 배척한다(Bengel).
목사가 배척을 당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자기들의 마음에 맞지 아니한다고 사람을 갈아치우려는 속셈에서 배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을 당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나사렛에서 태어나시고 신분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과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은 그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관과는 너무나도 어긋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사들이 교회에서 배척을 받는 일들이 많은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어떤 목사는 자신이 잘못해서 배척을 받기도 하고 어떤 목사는 너무나도 억울한 이유로 배척을 받는데 교회는 말하기를 오늘의 교회의 분란과 분쟁은 모두 목사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와 같은 말은 받아드릴 수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전적으로 목사에게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될 것이 예를 들자면 교회 재정부장 장로가 교회재정을 가지고 자신이 사회에서 하는 고리대금업을 하는데 목사가 그와 같은 잘못됨을 알고 재정부장 직(職)을 그만두게 하니 그가 목사에게 반감을 가지고 목사 배척운동을 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有分數)지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는 그렇게 하다가 안되니까 목사의 뺨까지 때리는 행동은 극악무도(極惡無道)하여 그를 성도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인데 그래도 목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욕을 하며 목사 배척운동 할 때에 사모님은 자기 남편인 목사가 잘못도 없이 장로에게 뺨을 맞은 것을 알 때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가슴이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인데도 사모이기 때문에 참는 그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오늘의 교회가 진리에 분별력이 흐려서 잘못을 하는 사람에게 잘못한다고 따끔하게 충고는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옹호하고 나서는 일이 있는 것인데 속언(俗言)에 "도적놈도 패가 있다"는 말과 같이 잘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패가 있다는 말을 실감이나 하듯이 목사를 배척하는 수가 생기니 결국에는 그 교회에 있지 못하고 개척을 시작하고 말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고 최근에는 교회가 계획적으로 원로목사 추대문제로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 들리는데 이는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인데 헌법에 보면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始務)한 목사가 만년(晩年)에 이르러 노회에 시무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봉급을 작정하여 원로목사로 투표하여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정치4장 3조 4항)
옛날에는 원로목사 추대하는 것도 그리 문제가 없었고 사람들의 인심(人心)이 매우 좋아서 헌법을 잘 순수하였는데 요즘은 법은 있으나 그 법을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가려는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 같은 인상을 강력하게 심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한 교회에서 20년간 시무(始務)하면 원로목사로 추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이 있으니까 교회에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20년을 채우지 말고 그 안에 목사가 교회를 떠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인데 목사는 눈치 없이 버티고 있으니까 교회에서는 배척 운동이 일어나는데 정말 어중간(於中間)한 시기라서 목회자가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헌법대로 만 30세에 목사가 된 사람은 한 교회에서 20년을 목회 하면 만50세에 원로목사가 되는 자격이 있지만 원로 목사가 되기 전에 교회에서 싫어하여 47세쯤 교회를 사임하게 되면 다른 교회에 부임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법대로 된 목사들은 드물고 거의가 약 50세 정도에서 목사 된 분들이 많은데 이들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면 배척받는 시기가 약 50세 정도에서 목사 된 분들이 많은데 이들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면 배척받는 시기가 67세나 아니면 65세쯤 될 텐데 도시 큰 교회들을 빼놓고는 노후가 준비된 분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농촌에서 목회 하다가 그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때는 연령적으로도 교회를 맡아서 일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서 원로목사 부당성을 말하는 것도 일리는 있는데 "교역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든 위임목사제도도 바뀌어져야하고 퇴임 후(退任後)까지 생계를 교회에 떠 맞기는 원로목사제도(元老牧師制度)같은 것도 하루속히 폐지되어야 한다"(장로신보 제712호)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문제는 없지 않다.
평생에 목회자 양심으로 목회만 전념한 목사는 노후를 돌아보지 않고 돈에 욕심 없이 맡은 일에만 죽도록 충성한다는 일념 하에 아무 생각 없이 오직 교회 일에만 몸바쳐 일하다보니 모은 재산 하나 없어도 노후는 교회에서 최소한 생활비를 제공해줌으로 목회자가 평생 교회를 위하여 일했는데 양로원으로 간다고 해도 먹을 것은 교회에서 책임진다는 주의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원로목사 제도 이전에 그런 생각을 가짐이 옳을 줄로 아는데 교회서 보는 눈과 생각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한 잣대로 재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는데 "목사노릇 제대로 한 사람 처 놓고 부자가 없고 장로노릇 제대로 한 사람 치고 부자 못된 사람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목사는 받고 장로는 주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목사가 돈에 욕심 없고 노후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주는 생활비를 성도 위하여 목회활동비로 사용하는 분들은 저축이 되지 아니하고 항상 빠듯하다보니 부자가 없고 장로는 사업이라도 해서 교회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니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시니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목회자를 평할 때 똑같이 보면 곤란할 때가 있는데 정말 목사답게 일하신 분들은 평생에 모은 돈도 없지만 교회에서 정년으로 사임하고 나올 때 지급하는 노후 생활비도 다 털어 주의 일에 바치는 순수한 분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분들에게는 교회가 형편에 따라서 노후의 생활비쯤은 대드리는 것 하나님 앞에서 큰 문제가 없다고 보고 그리고 큰 교회에서 시무 하시다가 정년으로 퇴임하실 때에 집 한 칸과 생활비 될 정도로 대접하는 것은 잘한다고 보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하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국가 공무원이나 교육공무들은 정년까지 있다가 퇴임하면 퇴직금만 해도 노후에 생활하는데는 크게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도시 큰 교회 빼놓고는 아무리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을 있었다고 해도 제도적으로 원로목사 대우를 해야된다고 했어도 재정이 약한 교회에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20년 이상을 있었다고 해도 현상유지도 어려운 교회가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생활비를 대드리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원로목사 시비문제는 도시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교회들이 하는 쓸데없는 짓들이지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하는 농촌교회나 재정이 없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며 알면 사기 죽이는 짓들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원로목사는 그만두고 매월 목회자 생활비 10/1도 저축을 못하는데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목사를 배척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원로목사 대접해주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서 짜여진 각본대로 연출하는 연극이라면 그 연극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 웃으실 것이다.
그 연극 각본 때문에 목사가 배척을 받는다면 큰 교회 같으면 일시불로 노후 생활비를 주겠다고 목사에게 제시할 것이고 농촌교회 같으면 20년이 넘어도 대접할 형편이 못되니 아무문제가 없을 것이니 문제는 큰 교회와 원로목사 신경전(神經戰)내지 호화로운 전쟁(戰爭)이지 전체적인 교회와 목사들의 전쟁은 아니라는 점에서 큰 교회에 목회 하시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의 문제지 한국교회 전체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교회나 목사들이 반성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부르심을 받은 곳에서 열심히 목회 일선에서 생명 바쳐 일하는 목회자들의 사기 꺾는 일은 하루속히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목회자 내보내기 위하여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한 돈을 가지고 목사와 협상하여 합의되면 그 돈 지불하여 내보내고 목사가 범죄하고도 못나겠다고 버텨서 교회 성도들이 헌금한 돈을 갈취하여 나가는 일도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연극을 연출한 분들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추궁 당할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고 상응한 주의 징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연극이 시작되는 동안 죽어나는 것은 사모인데 그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어 한숨만 쉬고 마음의 고통을 하다가 남편인 목회자에게 그냥 떠납시다 하면 남편은 괘씸한 일이라 버릇을 고쳐야돼 하고 버티는데 그렇게되면 교회는 안면몰수하고 목회자로 보지 않고 삯군으로 보는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는 사모는 그 고통을 누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어 울기만 하고 있다.
이 모두가 한국경제가 부유하게 된데 원인이 있는데 경제가 어려워서 교회도 목회자 생활비나 빠듯하게 지불하고 현상유지나 한다면 대형건물이나 호화로운 치장 교인수송용이라고 하면서 대형버스가 가득하여 언뜻 보면 소규모로 버스 사업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는 안될 것이고 생활비 시비는 없을 것이며 퇴직금 문제로 교인들과 목회자간에 분쟁도 없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교회는 순리대로 사랑으로 시작을 했으니 순리대로 문제를 해결하면 될 텐데 믿지 아니하는 사회에서 쓰는 방법을 교회에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발생할 수박에 없는 것이다.
배척이라는 것은 순리가 아니고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고 경제적인 힘을 앞세워서 밀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을 당신 것은 잘못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이는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 제대로 알고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배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가 중요한데 예수는 시기를 받아서 배척을 당하였지만 지금의 목사들은 늙었다는 이유와 싫증난다는 이유로 교회가 손해볼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인데 이 모두가 주님의 뜻에는 맞지 아니하는 것들이라 주께서 어느 편을 들어주실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목회자가 잘못을 해서 문제가 된 것은 배척이 아니고 당연하게 거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잘못이 없이 배척을 당하는 것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심적 고통이 큰 것은 사실이다.
남편인 목사가 배척을 당하다 보니 사모는 마음 편할 수 없고 마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가슴 태우다보니 모진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마는 불행한 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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